------------------------------------------------------------------- 신평이씨를 구한 걸출한 인물 문안공 쌍매당 이첨의 가족사측면에서 본 생애(약사) ------------------------------------------------------------------- 다음은 신평인 이란 본관을 가진 모든이들은 물론 학계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제 사실을 학문적 측면과 보사적 측면을 함께 고려하여 2년전에 쓴글로 지면상 요약한 글입니다. 차후 시문과함께 자료에 올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주>부문등 세밀한 부분은 편집상 생략하였니 이메일로 요청하는 분에 한하여 추가 내용을 파일로 송부하겠습니다. 쌍매당 이첨 생애(生涯: 略史) 李栽春(韓國金石學會 事務局長, 新平李氏世譜編纂委員長) 쌍매당문집의 원 명칭은 쌍매당협장문집(雙梅堂 藏文集)이다. 이는 태종 세종 연간에 아들 통정대부 지청도군사 겸 권농병마단련사인 소축(小畜)에 의하여 편집된 목판(본)으로 25권과 연보가 간행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권22-25에 필사본 권 1-2가 추가되었고 문집의 제일 앞에는 선생의 연보가 실려 있다. 이 원문 자료는 한국문집 총간 6책에 뒤늦게 추가로 실려 학계(연세대 도서관 학예실장 김상기- 안동교육원 학예실장 박동섭등)에 1990년대 초에야 뒤늦게 공개되었다. 이 문집의 목차에 의하면 시 2,670수와 辭 6편, 賦 4편, 假傳 2편, 그리고 산문 409편 도합 3,091편이 실려 있다. 문집이 모두 현전(現傳)하지 않고 한국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 발간한 한국문집총간 제6집에 수록된 쌍매당협장집에서 530편(시 354편, 문류176편)이 전하고, 동문선에서 총152편이 수록되여 문집에서 구할 수 없는 100편(시 19수, 文 81편)을 새로이 더 얻을 수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수록된 기사 70편중에서 문집에 없는 42篇(詩 32수. 文類 10편)을 새로이 찿아 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얻은 상소문1편, 조선왕조실록에서 상소 문2편, 청구풍아에서 시1편, 국조시산에서 시1편을 얻었으며 이밖에 신평이씨족보 문헌록편에 에서 새로 발견된 詩5首, 권근의 <應制詩集註> 序文 1편등 9편이 새로이 발견하여 현재까지 모두 683편의 글을 모아지게 되어 이번에 모두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이밖에 당시 여말 선초 당대 문객들의 문집류에서 쌍매당의 은문.동료, 내지 후학들과 교류한 글들이 현재 약70여 편이 전하여그 생애의 일부를 옅볼 수 있는 글로 뒤편에 수록하였다. 가:이첨의 생애와 정치사상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1405)은 고려말 충목왕 원년(1345) 12월 12일 신유(辛酉)일에 홍주목(洪州牧) 결성현(結成縣)태어나서 국내외 정치가 복잡다단하였던 시기인 태종 5년 서기 1405년3월30일까지 살았던 대학자요, 고급 관료 이였다. 즉 중국에서는 원 나라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나라가 건국되어 친명 외교와 친원 외교를 둘러싼 정쟁이 있었고, 전국이 왜구의 침입하여 해안가를 노략하고 분탕질함으로서 이를 막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으며, 우왕14년의 요동정벌의 단행과 이성계의 쿠데타로 급기야는 고려가 이성계 세력에 의하여 왕조가 탈취되는 소위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치적 변혁기에 그의 관직생활이 순탄할 리가 없었으니 그는 네 차례의 귀향을 갔고, 조선초기 태조 7년간 칩거생활을 경기도 서원군 동산(童山)과 장포구 조신정(潮信亭)등지에서 우거(寓居)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곳도 임진강가의 장포구 조신정으로 추정된다. 장지는 충청도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 숭학산(崇學山) 17번지 시조 李德明이 묻힌 선산 10보(步)위에 장례(葬禮)하였다. 이첨(李詹)의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소숙(少叔) 또는 중숙(中叔), 호(號)는 눌헌(訥軒), 쌍송(雙松), 쌍자(雙子), 쌍송자(雙松子),쌍매자(雙梅子) 쌍매(雙梅),쌍매당(雙梅堂), 조신정(潮信亭), 조신당(潮信堂) 이자(李子)이었는데 주로 쌍매당(雙梅堂)으로 알려졌다. 이첨(李詹)은 신평이씨 시조 이덕명(李德明:생졸년 미상)의 7세손이다, 시조는 고려 성종(成宗)때(지:960-997 재위981-997)에 설치한 문하성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乃 門下侍郞平章事)을 지낸 분으로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2세 환(桓:생졸년 미상)은 전라도 영광군사(靈光軍事)로 환(桓)은 임(稔)과 비(秘)두 아들을 두었으며, 차남 비(秘)가 바로 이첨의 고조부로 신평이씨족보에는 3세로 기록되었다. 고조부 비(秘)의 생몰년 미상이며 전리정랑(典理正郞,一云 吏曹正郞)으로 이 시기는 원(元)의 지배(支配)시기인 충렬왕(忠烈王:1236-1308, 재위1275-1308)초년에 설치한 관직명에서 충렬왕 시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신평이씨가 고려말에 호서 지방호족으로 현달하게 된 것은 이첨의 고조부(秘)가 아들 3형제를 두어 장남 즉 이첨의 증조부인 윤경(允卿:생몰미상? 일운 元卿)이 비서성 승랑(承郞)의 직에, 차남 순경(筍卿)이 삼사좌윤(三司左尹)의 직에, 삼자(三子) 숙경(淑卿)은 00정랑(正郞)의 직에 각각 오름으로써 현달(顯達)하여 비로서 신평이씨 가문이 홍주목 즉 호서지방호족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승건(承楗)은 홍복도감(弘福都監)의 직에, 아버지 희상(熙祥?- 1357.3.1)은 당초에는 영동정(令同正)의 산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개성과 홍주를 오르내리는 호족출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첨이 비로서 크게 현달하므로서 1390년3월에 아버지 희상은 비로서 증봉익대부 밀직부사(贈奉翊大夫 密直副使)로 증직 되었고, 그가 2품 재상직에 오름으로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使)직에 증직 되었다. 이는 이첨(李詹)이 사망한 1405년 3월30일 태종실록 졸기편의 기사에서 확인된다. 아버지(熙祥)은 그가 13세 때, 두 살 위 누이가 열다섯 살 때 즉 정유년(丁酉:1357)3월1 朔 병인일(丙寅日)돌아가셨다. 아버지 (熙祥: ?-1357.3.1졸)과 도관공(都官公)인 할아버지 승건(承楗:생?미상 졸년은 1357년으로 추정)는 첨설직인 동정직(同正職)을 받은 신분 이였고, 할아버지(李承楗)의 막내 동생되는 종조부 이충진(忠進)도 가정을 꾸미고 첫아들 덕재(德載)를 드고 20대에 조졸(早卒)하였다는 슬픔이 가득 찬 제문의 글에서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이첨의 가계도가 그려진다. 종조부(忠進)의 외아들(德載)되는 당계부가 이후 성장하여 일찍이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내면서 이분이 비로서 가게를 이르커 이첨(李詹)에게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어 이후 쌍매당이 크게 현달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분도 이첨이 중앙정계에 크게 활동하기 전인 1370년대 초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집안에서 가장 가차운 어른인 단 한분의 숙부(李日祥)마져도 양계(兩界:함경도 평안도를 칭함)의 군영에서 중랑장(정5품:犀序:武官職)으로 종사하다가 1377년경(?)에 왜구에게 살해당한 순직의 사실로 매우 안타까워하는 이첨의 제문의 글도 처음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1370년대부터 1384년 재(再)등용(登用)하기 전까지는 매우 우울한 생활을 한 단출한 가계도임을 살필 수 있다. 어머니의 성씨와 가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다만 어머니 고향 영산현(靈山縣)의 토성(土姓)인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추정된다. 즉 이첨이 지은 [성소윤을 대신해서 지은 그 외숙(外叔)을 천도하는 소(代成少尹薦舅疏]문에서 (창녕?)성씨(成氏)로 추정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5-6년 후 즉 누이가 16살에 시집간(1364년경)지 3년 후인 至正 末年인 1360년 미상일에 돌아가셨다. 그의 선대는 고려조에 신평현 호장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이첨의 고향은 지금까지 홍주목 결성현이다. 이첨이 태어나서 4살 때부터 글을 읽혀 10여살 때까지 결성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 희상(熙祥)으로부터 당송인의 절구시를 배웠으며 그 이후에는 송경(개성)에서 행촌(杏村) 이암(李 )의 문인이었던 백부(伯父)원상(元祥)으로부터 시를 배워 익혔다 또한 조선개국과 동시에 전조의 고명대신들 중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을 유배할 시에 대부분이 고향 지역으로 유배하였으며 이첨 역시 결성현으로 유배된 것으로 보아서 그의 출생지 내지 고향은 관적인 신평현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결성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백부 원상(元祥)은 이첨의 동년 친우인 안경공(安景恭)의 아버지인 문간공 안종원(安宗源:1324-1394, 고려 조선 문신으로 호 쌍청당. 본관 순흥, 시호 문강, 친우 안경공, 안경량의 부)과는 동년우(同年友)로 우정승을 지낸 철성부원군 행촌(杏村) 이암(李 :1297-1364, 초명은 君 , 자는 古雲, 翼之, 본관은 固城, 시호는 文貞, 저서로 農桑集說 )의 문하(門下)에서 함께 공무한 문인(門人)이였음이 이번에 새로이 밝혀졌다. 또한 10여세 이후에는 율재(栗齋)학당에서 3년 간 글을 배웠다 그는 두 살 더 먹은 누님 한 분이 있는 남매였다. 누님은 16살에 전라도 영광에 사는 정(鄭)씨에게 출가하여 외아들 광주(光周)를 낳고 살다가 1384년 전라도 광주(光山)인근 창평(昌平縣)으로 이사한 후 동생이 전라도 관찰사로 오기를 기다리다가 1401년 9월24일경 사망하였으며 일찍이 부모를 여윈 남매 간에는 우의가 돈독하였고, 이첨(李詹)은 두 살 위 누님(1343-1401년)을 마치 어머니 같이 여기었다. 그러나 누님이 시집을 간 후 멀리 떨어져 있고, 관직 생활에 얽매여 여섯 차례를 내왕하였을 뿐이다. 아버지 희상(熙祥)은 여러 해 동안 풍질(風疾)로 고생하시다가 丁酉년 3월 병인 삭일(朔日) 즉 1357년3월1일 이첨의 나이 13세 때에 작고하였고 집안의 어른으로 어린 조카인 이첨에게 글과 시를 가르쳐 주시던 백부(伯父:元祥)와 할머니(성씨는 미상임)도 아버지 사망 직전에 갑자기 당시 유행병으로 함께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신평현 인근 아주현(牙州縣) 바닷가에 있는 선산에서 장사를 지내드리고 난 뒤 얼마 후 어머니의 고향(친정으로 추정됨)인 남쪽지방 경상도 창녕군 영산현(폐현된 계성현 서마고리)로 이거(移居:寓居)하였다. 그 이후는 당숙 즉 종조부 이충진(李忠進,從祖母는 李氏임)의 아들인 이덕재(李德載)가 당시 개성부 소윤으로 있었는데 그는 이첨에게 많은 비용을 대주어 개성의 성균관 (九齋)에 입학하게하고 공부에 진력하게 하였다. 이첨의 누님은 그가 18세 되던 해에 전라도 전라도 영광(靈光)의 정(鄭: 성명 및 본관 미상)씨에게 출가하였고, 3년 뒤 이첨(李詹)을 보살피던 어머니(昌寧成氏로 추정)마져 계묘년(1363년 공민왕12년)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첨의 결혼은 누이가 시집간 2년 뒤에 개성의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16세때에 안동(安東)권씨(權氏) 광찬(光贊)의 딸 권씨와 결혼하였다. 이후 안동권씨와의 결혼기간은 2기(24년간)이었으며 그가 40살 되던 해에 상처하자 다시 재혼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순흥(順興)안씨(安氏)로 추정된다. 이상의 가계도를 도표(家乘譜)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0.初祖(度祖)? :李仁壽(백제 호장) :碩德:신라(新羅)아찬(阿 ) :珠 : 백제공신 봉 신평공 ...................................................... 0.시조(1세:중시조)? :德明: O.門下侍郞平章事, 시호(諡號) 문간(文簡)? O묘: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 숭학산 산17번지 酉坐원 단분유갈) O.:2世:桓(靈光軍事, 都事)→2자(1자:稔 2자:秘 형제) 配:밀양박씨(父:侍中 大和)--전거? ↓ :3세:→從高祖父:稔 →4세(長卿)→5세(承植)→6세(輿)→7세(桂)→8세(弼)→9세(上垣)→10세(士彦)→괴당공파파 ↓ →10세(可種)→문정공파 3세:→高祖父:秘 (典理正郞 一譜云 吏曹正郞 :정5품, (전리정랑 좌복야 형부시랑:정2품 -2간보?) ↓ →자:3형제( 元卿 또는 允卿, 筍卿, 淑卿) :4세;曾祖父:允卿(一作 元卿)(文宗時人?)→2자(承楗, 忠進) ↓ o.秘書省 丞(정5품), 秘書省 郞(정6품) ? o.配: 溫陽方氏 (4간보 참조) :5세:祖父:承楗(생졸 묘 미상)→자(子):3형제 이상(추정) (1자:元祥. 2자:熙祥, 3자:日祥. 4자:00미상?) ↓ 1.令同正 (고려사) 2.弘福都監 判官 3.贈參贊議政府事 (?) :6세:元祥(伯父)(兒名.字:超)→1子(7세)-----安-----사인공 파조 0,우정승 李 의 문인: 0 中書舍人--------------------------→사인공 파조 0.생졸묘소: 황해도 신천군 용문면 반정리 0.7세↓:安(令同正)→8세:之莖-9세;順孫-10세:幹 :6세:熙祥(親父)(兒名, 字:趣)(생?졸:1357년3월1일) 묘소(미상?-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뒷산 입암산으로 추정)→1자:詹 1녀:鄭(영광인)敬周 初名(兒名):趣. 一云:允 0 1.令同正 2.贈奉翊大夫密直副使 3,贈議政府參贊 0. 母(配):昌寧成氏 (생?-졸:계묘(癸卯)년 1363년 월일 미상) o.묘소:계성현 영취산 보당암 남쪽 내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바닷가 앞동산 -밀두리 소재 영인산 嫡孫 李昶의 묘소 인근으로 추정 ↓ :7세:李詹(1345.12.12.-1405.3.30)자:少叔,號:雙梅堂→文安公 ↓0.자:2명(1자:大畜; 早卒 (2자 :小畜 ;1녀:鄭(영광인)敬周 0.묘소: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 산17 시조 상10보) 0.成均館大司成.藝文館大提學. 知議政府事 0.初配:安東權氏光贊女(안동권씨 성화보 와 문화유씨 가정보참조) 0.생:? 0.졸:1360년 병자년1월14일, 0.묘소:미상(2간보 및 성화보) 0.配:順興安氏?(현 비문의 순흥안씨는 제3간보의 이첨조 만장글에서 성씨를 안동을 순흥으로 고친것은 잘못된기록으로 추정됨) 0생? 0.졸::병자(1396년1월14일망 0.묘소:? 坐 合墳? 0.女:정경주(鄭敬周)(靈光鄭氏) o생:? o졸:1401년8월,24일 o자:정광주(鄭光周) ↓ :8세:子:小畜(생졸년 미상) (司憲府 持平.淸道郡事:典) 0.配:密陽朴氏(父:密陽糾正公 判典儀寺事 朴枕 女) ↓ :9세:孫:昶(생졸년 미상:) o海州牧使 o묘소:아산시 영인면 밀두리-공세리 영인산) o.配:水源金氏(생졸미상) :6세>叔父:日祥(생졸미상)→자:3형제(실명미상)--금번 문집에서 발견된 새로은 인물임 (中郞將:정5품) 0배:00최씨(崔氏) →從弟:*李惠(생졸년 미상) ↓ :*李炬.(생졸년 미상) :*李0 (미상) :4세:→允卿((曾祖父) :5세:→*忠進(從祖父)→1자(德載) 0.생졸년 미상 (묘소;미상) 0配:李氏(從祖母) (생졸년 및 묘소 미상) ↓ :6세:→堂季父(堂叔):德載(5촌) 0:생: ? 0.졸:丁巳:1377년 월 일미상)→자(00미상) 0직: 開城少尹 (정4품) 0.배:미상 ↓ :7세:→堂弟(6촌)1) 백숙(伯叔) 2) 계숙(季叔) 3) 신잉숙(臣잉叔) ↓ :8세:→再堂姪(7촌):李蘇 부 미상? 3편). :6세: ↑00(伯叔父?)미확인 :7세:→종제(從弟):? 미상인 ↓ :8세:→堂姪:李蘇 (祭亡姉文 참조) ↓ :9세:→從孫: 미상? *00성명:추가 수보할 대상자 표시임 配: 현 순흥안씨를 안동권씨 氏로 修補등 기록변경요구됨 (망:1396년병자년1월14일망) --------------------------------------------------------------------------------------------- 21세 때인 1365년에 시험관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인 서재(恕齋) 한천(韓 )에 의하여 國子監試에 99명중 2등 진사로 합격하여 평생동안 서재를 은문(恩門)으로 섬기었다. 이듬해 1366년 3월에 그의 당숙(개성(開城)소윤(小尹) 이덕재(李德載)가 재상 황공(黃公濬)(생졸미상인)이 중국으로 사신갈 때 같이 갔다오면서 정승이 되면 달려고 갓끈에 다는 옥정자(玉頂子)를 사왔는데, 이를 과거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이첨에게 준 점에서 가문의 큰 기대를 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4세 때(공민왕 17년:1368) 4월에 고려말 정치적 기둥이고 학문의 대종장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독권관으로 참여하였으며 공민왕은 송산 자하동에 있는 9재에 친히 임석한 친시(親試:禮部試)에 7인중 장원으로 이첨을 발탁되었다. 그 해 윤7월 사관직인 예문관(藝文館) 예문검열(藝文檢閱:정9품)직을 첫 벼슬로 시작하여 다음해 정월에 예문수찬(藝文修撰:정8품), 같은 해 7월에 예문공봉(禮文供奉:정7품)에 승진하니 이 세자는 보통 사관(史官, 사한(史翰)이라하며 인품과 학식 문장이 뛰어난 과거급제자만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림들이 선망하는 청요직을 1년만에 모두 섭렵하였다. 이 무렵에 공민왕은 자신이 직접 뽑은 이첨에게 명작"리어도(鯉漁圖)"한 폭을 그려 하사하니 이첨도"어필이어도찬(御筆鯉漁圖贊)"을 지어 답례한 글이 동문선에도 전해진다 그는 그 다음해(1369 공민왕18년) 12월에 간관직인 조청랑(朝請郞), 우정언(右正言:정6품),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므로써 과거 급제 후 1년6개월만에 4계단을 승진하였다. 이후 그의 관직생활은 가장 명예로운 임금 교서를 짓는 지제교(知製敎)의 직을 오랜 동안 맡았다. 공민왕 20년(1371) 국왕의 신임을 받고 국정을 천단하던 신돈이 추천하는 사람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가 미움을 사서 강원도 통천군수인 지통주사(知通州事)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상평창(常平倉)의 기금을 마련하여 흉년을 당한 농민을 구제하였다. 공민왕 23년(1374년) 12월에 당시 중앙 정부에 올라와 정언(正言)직을 맡았다. 다음 해인 우왕 1년(1375) 권신 수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심왕파와 결탁하여 친명책을 버리고 친원책을 씀으로써 당시 유신들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간관직에 있었던 이첨은 같은 직에 근무하던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그들을 탄핵하여 그들을 목벨 것 주장하였다. 이에 이첨은 재상을 탄핵하였다는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원도 춘천군수인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여 약1년 간 근무를 하던 중에 정국은 다시 바뀌어 1375년경에 소환되여 국문을 당하고 하동(河東)에서 3년 간을 유배되었다가 우왕 3년(1377) 유배에서 풀려나 편의에 따라從便되었으나 11년간을 재야생활로 보냈다. 1382년경에는 당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합포의 해도원수로 있던 정지(鄭地:1347-1391)장군 막하의 관리가 되여 왜구토벌에도 참가하였으며 이 무렵 그가 살던 곳은 경상도 계성현 서마고리(桂城縣 西麻姑里)였다. 그는 이 시기에 1000여편에 달하는 시를 지어 울분을 조용히 시에 담았다. 우왕7년(1381) 강릉에서 판각한 소미(少微)의 통감절요의 발문을 쓴 점에서 이 판각을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인임 일당이 우왕 10년(1384) 최영에 의하여 숙청되자 이첨은 중앙 정계에 불러져 다시 등용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후 그는 예문관 응교, 성균관 직강, 의정부 문하사인, 전리총랑, 사헌부 집의, 성균관 대사성, 경연강독관, 예조판서로 승진하면서도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4대의 교서와 조칙을 짓는 지제교직과 춘추관 편수관직을 겸임하였고, 공양왕2년(1390) 12월부터 왕조가 망하는 시기에는 왕의 최측근 비서직인 밀직사 좌부대언, 지신사(현 비서실장 역)를 맡았다. 그는 공양왕에게 군주로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규범을 제시하여 고려왕조의 중흥책을 제시하였고, 정치적 교훈서인 당태종의 貞觀政要를 강독하기도 하였고 군주의 모범행동에 대한 글을 모아 제범(帝範)을 편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는 태도를 김진양과 함께 정몽주의 뜻에 찬동, 동조하였다. 공양왕 2년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정치적 음모로 조작된 윤이 이초의 사건에 연루된 목은 이색과 도은 이숭인을 유배에서 구해내고, 공양왕 4년 고려왕조의 멸망되기 직전 이성계 추대파인 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유배 보내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 일당에 의하여 피살됨으로 정국은 급전직하하여 조선 건국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48세 때 조선 건국으로 인하여 조선 태조 원년 1392년 10월에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갔다. 이 무렵 그는 한달 동안 가까이에 살고 있던 누님의 음식 의복 등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후 곧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신라의 西火현, 경덕왕때 尙樂으로고쳐서 밀성군의 영현이 되고, 고려 때 영산으로 고침, 고려 원종15년 1274 감무를 두었고, 조선초에 현감으로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郡이 되었다가 1914년 창녕군에 병합됨)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곧 종편(從便)되었다. 영산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내지 장마면으로 그는 계성현(태종3년 영산군에 편입) 懸治 서쪽 마고(麻姑)리(현 창녕군 장마면 강리로 추정)에 우거(寓居)하면서 집에 매화나무 두 그루를 심어 호를 쌍매당이라 하였다. 태조 3년에는 일찍이 (소경)점장이 李興茂에게 元子와 世子의 운명에 대한 점괘를 물었던 것이 죄명이 되어 합포로 유배를 갔으나 곧 풀려 난 듯하다. 태조 5년에는 목은이 여주의 강상에서 죽자 태조의 명에 의하여 목은에게 내리는 제문 교서를 지은 바 있다. 그러나 그는 태조가 즉위하자 종편하도록 하는 사면을 하여주자 그는 도승지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을 변명하는 진정전(陳情箋)을 태조에게 올렸다. 이 무렵 이태조는 이첨의 생일날에 옥항아리에 담은 아황주와 보배상자에 담은 호백구(여우의 겨드랑이에 있는 흰털만을 오아 만든 갓 옷)를 선물로 보내주어 그를 회유하여 재 등용하게된다. 태조 7년(1398) 7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전서(吏曹典書)로 개국7년만에 재 등용되었다. 그 후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 지제교, 겸성균대사성(兼成均大司成),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에 임명된 후 춘추관직, 예문관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 등 문한(文翰)직의 장(長)을 맡았고, 명나라에는 사신으로 두 번 다녀왔다. 한번은 정종2년(1400) 11월에 본국의 왕위교체를 알리기 위한 계품사(啓稟使)로 가서 다음 해 3월에 돌아왔고, 또 한번은 태종2년(1402) 11월 하등극 부사(副使)로 하륜과 함께 명에 가서 이듬해 4월에 태종의 고명과 인장을 받아옴으로서 태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에 태종은 하륜(1347-1416)과 이첨(1345-1405), 조박(號 雨亭:1356-1408)우정에게 각각 포상하였는데 이첨에게는 공을 칭찬하는 교서를 내리고 전토 60결과 노비 6구를 상으로 내렸다. (이때 받은 사패지지가 지금은 문정광파가 소유한 토지 즉 충남 당진군 신평면 도성리 망객산하의 수십만평토지로 추정된다---사패지지등 조선 전기 토지제도사측면에서 좀더 연구 조사할 대상이다) 이후 자헌대부(資憲大夫),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고 같은해. 9월에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판예조사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겸하고, 지경연, 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영락(永樂) 원년인 계미년(태종 3, 1403)에는 왕명을 받들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과 함께〈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하였으며 같은해 4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판공조사(判工曹事),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가 7월에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에 사헌부대사헌을 겸하고,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는 등 정승의 지위에 올라 있다가 태종 5년(1405) 3월 30일에 61세로 돌아가시니 왕은 시호를 문안(文安)을 내려 주었다. 묘소는 현재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梧谷里)숭학산 산17번지에 덕모제 상 100본 위에 있다. 사관은 그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타고난 기품이 중후하고, 학문에 힘써 글을 잘 하였으며,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관료생활을 사관(史官)직으로 시작하여 오랜 동안 사관직을 겸하였고, 사관의 확충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춘추관직을 겸임하였음은 그의 연보(별첨 참조)에서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정종에게는 [사서절요(四書節要)]를 편하여 바쳤고, 태종 3년 하륜, 권근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붙이는 지도는 그가 작성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에 썼던 사론 여러 편이 문집에서 찾아지고 있다. 그의 시는 당풍(唐風)을 띤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조선 초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주옥같은 글로 고려와 조선 두 나라 일곱 왕의 교서를 지어 국가의 詞章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문집은 많은 역사적 내용과 사실을 담고 있으며, 그의 시는 인간의 정서와 자연의 합일을 조화롭게 이룬 작품이 많았다. 그는 불교의 재를 올리는 천도의 소를 많이 남기고 있으나, 불교를 독실히 신앙하지는 않은듯 하다. 천당과 지옥의 설이 있으나 이를 직접 가 본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이 그의 신앙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쌍매당문집의 자료적 가치: 이 문집 자료가 활용될 수 있는 분야별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그의 학문성향을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첫째, 그의 개인에 대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 문집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집형태를 띠어 연보가 문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연보는 그의 경력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지만 그의 계보에 대한 정보는 전하고 있지 않다. 불행히도 그의 조부에 대한 선계 및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의 묘지명이나 행장 등의 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눌헌명기와 쌍매당명기 등은 그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가족에 대한 글로는 [죽은 누이에게 올린 제문:祭亡姉文],[빈소(殯所)에 올린 제문:殯所祭文], [선고(先考)의 묘소에 올린 제문;先考墳祭文],[선고(先考)께 드린 제문:祭先考文], [죽은 딸에 대한 제문:祭亡女文], [고(故) 중랑장(中郞將) 이일상(李日祥) 숙부에 드린 애사:故中郞將李日祥叔哀辭], [당계부(堂季父)인 고(故) 개성소윤(開城少尹) 이군(李君:李 公)에게 드린 애사:堂季父故開城少尹李君哀辭]등이 이용될 수 있다. 제문이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선조의 영혼과 산 사람과의 대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 제문은 물론 자신의 제문만이 아니라 남을 대신하여 지어준 제문도 많이 남아 있다. 둘째, 그의 시와 문학에 관한 연구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이미 학계의 연구성과가 있듯이 그의 시는 당풍의 사조를 띠었고 조선 초기의 제1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문집 권1-14 까지가 시를 실었으나 현재는 권1-2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에 대하여는 문집 전체의 내용이 대상이 될 것이다. 동문선과 동국여지승람에서 보충한 자료는 이에 소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셋째, 그의 역사관을 연구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당대의 사관직을 수행한 경력, 그리고 삼국사략을 편찬하면서 남긴 글, 그리고 영사시([讀史感遇])는 사학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특히 그의 영사시는 그가 우왕 대에 유배지에서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서는 漢·唐의 시기에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주로 우러러 칭찬하고 있다. 자신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이라고 이해된다. 또한 고려사의 열전기록과 조선초기의 실록 기사를 통하여 당시의 역사 기록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수도 있고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역사관을 찾아볼 수도 있다. 넷째, 그의 신앙관을 연구할 수 있다. 그는 국왕을 위하여 많은 기도문을 지었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제문과 애사 등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들 자료는 그의 신앙관,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요컨대 이 문집은 개인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당시 고려말, 조선 초기의 여러 가지 역사적 현실과 문화의식, 사상 등을 보여주는 충실한 자료로서 주목되어야 한다. 그에 관한 문헌자료를 발췌하여 부록으로 실었다. 그의 문집 전체(전체25권 중 殘 19권)가 발견되어 학계와 문중에 알려지기를 학수고대한다 다음은 쌍매당선생문집(雙梅堂先生文集)에서본 쌍매당선생연보(雙梅堂先生年譜)이다 지정(至正) 5년인 을유년(고려 충목왕 1, 1345) 12월 신유일에 공이 탄생하였다. 지정 25년인 을사년(고려 공민왕 14, 1365) 윤(閏) 12월에 서재(恕齋) 한천(韓藏)이 시관(試官)을 맡은 감시(監試)에서 진사(進士) 제 2인으로 합격하였다. 지정 28년인 무신년(공민왕 17, 1368) 4월에 임금이 몸소 나와서 시험을 지켜보고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시관을 맡은 문과(文科)에서 제 1인으로 합격하고, 윤 7월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지정 29년인 기유년(공민왕 18, 1369) 정월에 예문수찬(藝文修撰)에 임명되었다. 7월에 예문봉공(藝文奉供)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조청랑(朝請郞),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홍무(洪武) 4년인 신해년(공민왕 20, 1371) 6월에 조청랑, 지통주사(知通州事)에 임명되고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홍무 7년인 갑인년(공민왕 23, 1374) 12월에 승봉랑(承奉郞), 좌정언(左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홍무 8년인 을묘년(고려 우왕 1, 1375) -가을에 무슨 일을 말한 죄로 하동(河東)에 유배되었다가 홍무 10년인 정사년(우왕 3, 1377) 유배에서 풀려나 편의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4월에 봉직랑(奉直郞), 우헌납에 임명되고 이전대로 지제교를 맡았다. 6월에 좌헌납(左獻納), 지제교에 임명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가 하사되었다. 홍무 17년인 갑자년(우왕 10, 1384) 7월에 봉선대부(奉善大夫), 시전교부령(試典敎副令)에 임명되었다. 홍무 21년인 무진년(우왕 14, 1388) 정월에 봉상대부(奉常大夫), 내부부령(內府副令),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임명되었다. 2월에 예문응교에 임명되었으며, 이전대로 지제교를 맡고 성균직강(成均直講)을 겸하였다. 8월에 봉상대부(奉常大夫), 문하사인(門下舍人), 지제교에 임명되고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였다. 12월에 봉상대부, 전리총랑(典理摠郞),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임명되고 성균직강을 겸하였다. 또 봉상대부, 전리총랑, 지제교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홍무 22년인 기사년(공양왕 1, 1389) 6월에 중현대부(中顯大夫), 시사헌집의(試司憲執義),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임명되었다. 12월에 봉순대부(奉順大夫),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진현관직제학,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또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상시(右常侍),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지제교에 임명되고 춘추관편수관,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을 겸하였다. 홍무 23년인 경오년(공양왕 2, 1390) -4월에 문신(文臣)인 독곡(獨谷) 성석린(成石 ) 송당(松堂) 조준(趙浚)이 예위전시(禮 殿試)의 시관을 함께 맡고 공은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이조(李 ) 등 33인을 뽑았다.-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연강독관, 보문각직제학,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또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인(左副代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를 겸하고,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充春秋館編修官), 지예조사(知禮曹事)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정순대부, 밀직사, 좌부대언, 경연참찬관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겸하고, 상서윤(尙瑞尹),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充春秋館), 지병조사(知兵曹事)에 임명되었다. 홍무 24년인 신미년(공양왕 3, 1391) 12월에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경연참찬관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겸하고, 우문관직제학(右文館直提學),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에 임명되었다. 홍무 25년인 임신년(조선 태조 1, 1392) -감시(監試)의 시관을 맡아서 이맹준(李孟畯) 등 99인을 뽑았다.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여름에 무슨 일을 말한 죄로 영산(靈山)에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풀려나 편의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홍무 31년인 무인년(태조 7, 1398) 7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전서(吏曹典書),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 지제교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에 임명되었다. 10월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예문춘추관, 경연사(知藝文春秋館經筵事)에 임명되고 성균대사성을 겸하였다. 건문(建文) 2년인 경진년(정종 2, 1400) -11월에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가서 칙서를 받아 가지고 이듬해 신사년 3월에 돌아왔다.- 4월에 가정대부, 예문춘추관학사, 동지경연사에 임명되고 성균대사성을 겸하였다. 7월에 가정대부, 첨서의흥삼군부사(簽書義興三軍府事), 동지의정부사(同知議政府事), 집현전학사, 동지경연사에 임명되고 성균대사성을 겸하였다. 건문 3년인 신사년(태종 1, 1401) 7월에 가정대부, 예문관학사, 동지경연사에 임명되었다. 건문 4년인 임오년(태종 2, 1402)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신효(申曉) 등 33인을 뽑았다. 11월에 하등극부사(賀登極副使)로 호정(浩亭) 하륜(河崙)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인장(印章)과 고명(誥命)을 받아가지고 다음 해 4월에 돌아왔다.- 7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9월에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판예조사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겸하고, 지경연, 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영락(永樂) 원년인 계미년(태종 3, 1403) -왕명을 받들어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과 함께〈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하였다.- 4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판공조사(判工曹事),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6월에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7월에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에 사헌부대사헌을 겸하고, 보문각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영락 2년인 갑신년(태종 4, 1404) -가을에 원평(原平:지금의 파주시 임진강가로 추정)으로 유배되었다가 12월에 풀려나 편의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3월에 정헌대부,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 춘추, 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영락 3년인 을유년(태종 5, 1405) 3월 30일(을축)에 졸(卒)하니 '문안(文安)'이란 시호가 주어졌다. 첨언* 이상의 글은 당초에 쌍매당선생문집의 국역(발간)에 참여한 1999. 8. 2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 교수 鄭求福 교수가 청계산 자락 운중동 樂庵書室에서 서문으로 쓴 글을 新平後人 音庵 李栽春(한국금석문학회 및 동 연구소 사무국장)이 2년에 걸처 관련 문인들의 문집등 제 자료를 조사한 결과에 따라 2002년 4월에 수정, 가필한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