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거창군협의회 안보문화탐방기-2014터키편-
평통자문위원 이태헌
민주평통거창군협의회(회장 신현기) 소속 32명의 평통자문위원과 행정직원 등 모두 34명은 통일기반구축 안보의식 고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월 6일부터 13일까지 5박 8일 일정으로 안보문화탐방에 나섰다.
매년 연례적으로 한 차례 씩 실시해오고 있는 국외 안보문화탐방은 그동안 사회주의국가를 중심으로 탐방해온 탓에 중복탐방을 피하고, UN 연합군 참전군이자 한국전쟁 당시 1만5천명의 지상군을 파병해 우리나라를 구해준 ‘형제의 나라’ 터키를 방문해 참전기념 한국공원 등을 탐방하면서 고마움을 되새겨 보는 안보탐방의 계기로 삼아 여정에 올랐다.
위도 상으로는 북위 36~45도 사이에 위치해 우리 거창지역에서 백두산사이와 비슷한 위도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아 우리 일행은 대부분이 두툼한 솜털패딩 차림으로 탐방 길에 올랐다.
6일 오후 2시에 탐방단은 스포츠파크주차장에 집결해 전세버스를 이용, 인천공항에서 도착한 뒤 밤 11시55분발 터키항공에 몸을 싣고 11시간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이어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곧 바로 중간 경우지인 이즈미르로 향하는 국내선 항공기에 환승한 뒤 다시 1시간여 비행 끝에 이즈미르에서 전세버스를 이용해 ‘쿠사다시’에 도착 ‘에게해’의 석양을 바라보며 터키에서의 첫 날밤을 맞았다.
한국과 7시간의 시차와 항공기와 버스 등으로 이어지는 무려 15시간가량의 강행군은 일행들 모두 파김치상태로 빠뜨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우리일행은 탐방 최종목적지인 터키의 행정수도 ‘앙카라’로 향하는 중간 도시인 ‘데니즐리’ ‘이스파르타’ ‘코니아’ ‘카이세르’를 거치는 또 다시 장장 버스로 15시간이 넘는 대평원의 길을 지평선만 보고 주구장창 달려야 했다.
중간에 ‘보드룸’과 ‘파묵칼레’ ‘카파도키아’의 휴양지를 잠깐씩 들러 터키의 이국적인 절경으로 눈요기를 하며 여독을 풀어보려 했으나 쉽사리 풀리지를 않아 일행 대부분은 버스만 오르면 잠에 빠져 들었다.
터키현지인 가이드를 반드시 동승시켜야 하는 터키 현지 규정에 따라 현지인과 한국인 가이드 2명이 탑승해 우리 일행의 안내를 도맡았다.
탐방단 일행들에게 터키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것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인 전경보다는 가이드의 안내 멘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라면, 터키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하여 서로 8천 Km나 떨어져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나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UN군’ 하면 ‘미국인’만을 떠올리지만, 터키는 미국 영국에 이어 1만5천명의 많은 지상전투병을 이 땅에 파견해 10년여 동안 주둔하면서 참전 16개국 중 3번째로 많은 721명의 전사자와 175명의 실종자를 내면서 피로서 우리를 도와준 나라이다.
터키는 지금도 한국전쟁에 대한 자부심을 대단히 많이 가지면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멘트를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차창가로 내다보이는 터키의 지방 시골도시 거리 상가 간판에서도 ‘KORELI(한국인)’라는 큼지막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간판의 내용과는 달리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 아니라 터키어로 한국전 참전용사를 칭하는 뜻으로, ‘코레 가지’의 애칭이 ‘코렐리’가 되었으며, 한국전 참전용사들이나 그의 자손 또는 일가친척들이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이러한 표시를 간판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코레 가지’ ‘코렐리’들은 자기 형제 부모들이 피로서 지켜낸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한다.
전쟁 이후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자기 조국이 발전한 만큼이나 기뻐하고 한국을 ‘바탄(조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이들로 인하여 터키 국민들도 덩달아 한국에 대한 애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깊다는 것이다.
터키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한국전쟁 참전에만 의의를 두고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예맥족’이라고 보는데, 이 예맥족은 만주 몽골계, 투르크계 등을 포함하는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종족으로 우리 한민족의 무리는 동쪽으로, 투르크족의 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 터키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투르크계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흉노’ 또는 ‘돌궐’이라고 칭하였는데,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흉노는 고조선과 동맹을 맺었었고, 돌궐은 수나라의 침입 때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함께 싸웠다고 하여 우리와 터키는 먼 옛날부터 같은 조상을 지닌 형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대조영’ 등의 TV드라마에서 일부 사극으로 접했지만, 터키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같은 민족으로 기술되어져 있어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인을 자기들의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탐방일정기간 내내 우리 일행과 함께 했던 편안한 인상의 40대 초반 ‘탄주(Tanju)'라는 남성 현지인 가이드에게 필자가 농담조로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터키와 대한민국이 형제의 나라라면 그 중에서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 고, 터키사람들은 ‘터키’가 형이고 ‘한국’이 동생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현재는 우리나라가 훨씬 잘살고 있어도 아마도 터키는 땅이 넓고(한반도 전체의 3.5배)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라 제국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이러한 인식을 가져왔지 않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반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라 상대적으로 인식이 터키에 비해 좁다고 할 수 있겠으며, 형만 한 아우 없고 그래도 동생 생각해 주는 건 형뿐이고, 내리사랑은 있어도 오르사랑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999년 8월 터키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는 고작 7만 달러를 재난 복구 지원금 조로 보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도 10만 달러를 보냈고, 한국전쟁의 배후로서 우리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러시아에게는 되돌려 받을 보장도 없이 우리나라가 제공한 차관이 20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분통터지는 처사였다.
하지만 당시 터키는 형의 심정으로서 동생의 나라가 IMF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한국이 보여준 성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형제의 나라’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터키는 엄청난 기대를 걸고 참가했다.
당시 터키축구팀은 우리나라 국내 프로축구팀 감독을 이후에 맡기도 했던 귀네슈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데다 실력도 전 유럽클럽선수권(UEFA)을 제패한 정예멤버로 구성된 데다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은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을 한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대회가 열리고 1차전에서 브라질과 터키팀이 맞붙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한국 관중들은 유명스타들이 즐비한 브라질 국기를 흔들고 브라질 팀을 응원하는데다, 하필이면 한국인 주심조차도 터무니없는 오심으로 PK를 선언하고 히바우도의 오버액션에 레드카드를 내밀면서 패하게 되자 이를 생중계로 지켜본 터키인들은 “어찌 형제국이 이럴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일부 네티즌들이 터키와 우리나라와의 역사적 관계와 한국전쟁 참전 사실 등을 인터넷을 통해 조명하면서 일본과의 8강전에서부터 붉은악마 응원단이 대형 터키국기를 등장시켜 펼침막 응원으로 터키를 응원하면서부터 서운함은 덜어졌다는 것이다.
터키사람들은 한국인을 피를 나눈 형제를 의미하는 ‘칸 카르데쉬(Kan Kardes) 코렐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 언어의 유사성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이 더욱 그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갖게 한 촉매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터키 중서부지역의 크고 작은 여러 도시들을 탐방하는 동안 간판에 코렐리라고 적힌 것들을 흔하게 눈에 띠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인들은 지금은 상당수가 생존하지 않거나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그들의 자손들은 스스로를 ‘코렐리’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조그마한 구멍가게 간판에도 이를 대문짝만하게 상호처럼 써 붙여 사용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터키와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는구나 싶었다.
국제회의에서도 우리나라를 가장 많이 지지한 국가가 터키로, 미국보다도 한국을 더 많이 지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50년이 넘도록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해 보질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즈미르’ ‘데니즐리’ ‘이스파르타’ ‘코니아’ ‘카이세리’를 경유해 5일째 일정 늦은 밤에 앙카라에 도착한 우리 탐방단 일행은 6일째 ‘한국공원’ 참배를 위해 아침부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버스에 올라 앙카라 도심으로 향했다.
한국공원으로 향하는 중간 차안에서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의 영묘를 조망하며 지나 쳤다.
‘케말 파샤’는 박정희 대통령이 롤 모델로 삼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터키 근대사의 영웅이다.
호텔에서 30여분 버스로 달려 도착한 비교적 한적한 도심에 ‘한국공원’이 위치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원 한복판에 위치한 석가탑과 같은 조형물과 국기 게양대의 태극기였다.
이 탑은 한국참전터키기념탑으로 박정희 대통령시절인 1973년 서울시에서 재정지원을 해서 서울대학교의 자문을 받아 건립했다고 하나 균형비례가 맞지 않고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등 예술성이 없어 보인다.
‘한국참전토이기기념탑’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는데 이는 70년대 당시 터키를 ‘토이기’라 발음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되어졌다라고 한다.
탑 하단 기단부에는 돌아가면서 대리석으로 참전자의 성명과 함께 그들의 부친 성함도 함께 표기되어져 있으며 생년월일, 사망연월일이 있는데 전사자들의 나이는 꽃다운 20세 전후인 1928~31년생 사이가 대부분이었고 사망연도는 1950~53년이었다.
우리 탐방단 일행은 탑 앞에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동 묵념을 올리고 일부는 헌화를 하면서 공원을 참배했다.
터키 참전 기념탑은 한국과 터키와의 우호협력의 관계를 보다 심화시키고자 양국 간 상호 상대방 명칭을 부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당시 서울시의 지원으로 앙카라 시내 ‘코레 파르크(한국공원)’ 내에 건립되어 졌으며, 한국에도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에 ‘앙카라공원’이 조성됐다.
터키군은 매년 1월 25일 이곳 한국공원 참전 기념탑 앞에서 ‘금양장리’ 전승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터키군은 그들이 치른 ‘군우리전투’ ‘금양장리전투’ ‘장승천전투’ ‘네바다전초전’ 중에서 용맹성을 세계에 과시한 ‘금양장리전투’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금양장리전투’는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금양장리) 일대에서 터키군 600여명이 M1소총에 대검을 꽂고 “Allahu ekber(알라후 에크베르/하나님은 위대하시다)”를 외치면서 중공군의 참호진지로 뛰어들면서 가진 백병전으로 1대 40명의 적을 무찔러 대승을 이룬 전투이다.
이곳 ‘한국공원’은 2005년 노무현대통령 방문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나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고는 하나 공원의 조성취지나 우리나라의 국격 위상에 비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국제사회에서 친구를 갖는다는 것과 국가 간의 치열한 이해다툼 틈바구니에서 ‘형제의 나라’를 갖는다는 것이 우리 국익에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이 되는 글로벌 현실을 감안해 우리나라와 국민들이 국익외교차원에서 터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 터키 현지 언론에서는 “전쟁이 또 나면 우리는 한국을 위해 또 다시 피를 흘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장문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터키 국민들도 인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공산품을 터키에 수출하고 5천만 달러도 채 안 되는 농산품을 터키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
터키의 행정수도 앙카라에서의 일정은 한국공원 방문과 참배가 전부였지만 탐방의 최종 목적지였던 만큼 향후 터키와의 우호증진과 우리의 국익을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여정이었다.
처음 터키 땅을 밟은 이스탄불로 되돌아가는 교통편은 지금까지의 버스 일정과는 달리 국내선 항공기편으로 앙카라 공항에서 이륙해 이스탄불 ‘아타투르크공항’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1시간여의 비행 끝에 터키의 경제수도 라고 할 수 있는 이스탄불에 도착해 6일째 오후와 7일째 터키에서의 마지막일정을 보내게 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함께 공존하는 도시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해협을 끼고 위치한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유명한 도시이다.
과거 세계를 지배한 3대 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 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정 위치 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지중해와 에게해를 거쳐 카스피해(흑해)로 이어지는 보스포러스의 좁은 해협은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길목이다.
귀국하는 한국행 비행기 편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우리 탐방단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보스포러스 해협 해안 변에 위치한 ‘돌마바흐체궁전’으로 ‘가득찬 정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해벽을 흙으로 메우고 세운 곳으로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금화 50만(현재 돈 5억불 상당)으로 건립된 이 궁은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어려웠던 왕실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어 세계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으로 4천여 개의 점포가 밀집한 ‘바자르시장’에 들렀을 때 터키시민들은 우리 일행을 보자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을 흉내 내면서 반가움을 표시해 한류의 유명세를 직접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어떤 터키인 청년은 우리를 향해 “노스코리아 으르렁! 사우스코리아 프렌드!”라고 익살스럽게 말해 한바탕 웃으면서 의외로 터키인들이 우리 한반도의 사정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이스탄불 야경을 구경하는 일정으로 이스탄불의 밤을 맞았다.
7시간의 시차에다 장시간 비행과 버스탑승 등으로 여독이 누적된 일행 대부분은 탐방 7일차 모두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인 것 같은 눈치였다.
하루 한차례 운항하는 터키항공의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탐방단 일행은 남은 시간을 시내관광을 계속하기로 하고 보스포러스해협 선상관광과 6세기 동안 3개 대륙을 통치했던 오스만 제국의 행정 궁전이었던 ‘톱카프궁전’과 세계의 중심이라는 ‘히포드럼광장’, 17세기 이슬람 건축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원인 ‘블루모스크’와 비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성소피아성당’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특히, 블루모스크와 마주 보고 있는 성소피아 성당은 우리에게는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공식적으로 ‘성소피아박물관’으로 지칭되고 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성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1934년부터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는 것과 그리스 정교의 성당을 이슬람이 이곳을 수백 년 동안 지배하면서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성당 벽화와 모자이크 위에 회 덧칠을 했던 것들이 부분적으로 복원되면서 그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도 국력을 바탕으로 계승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누나’ 터키편에서 성소피아박물관 ‘소원의 기둥’에 난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360도 단번에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탐방단에 참여한 일행 모두는 한 번씩 기둥을 찾아 필자와 같은 생각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우리 민족의 번영을 소원기둥에 손가락을 넣고 빌면서 이스탄불 아타 투르크공항을 향해 귀국길에 올랐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