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어대사전은 "일제 강점기"라는 말을 쓰고 있다[1]. 일본에서는 일본통치시대의 조선(일본어: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문화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우파적 사학자들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사회과학 전공자들은 일제 강점기 전반기에는 일본이 한반도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에 의거, 이러한 근대화 정책이 개항 이전 및 이후 자생적으로 성장했던 한반도 내의 민족 자본을 말살한 바탕 위에서 일본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 제국의 영속적인 한반도 지배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조선이 급속히 근대화한 것도 사실이다. 평균 수명은 20 대부터 40 대까지이 늘어나고 인구는 1910 년 추정 1300 만 ~ 1700 만명에서 1942 년까지 32 년간 2500 만명되었다. 조선인의 식자 율은 1910 년 10 %에서 1936 년에는 65 %까지 상승했다. 1912 년부터 1937 년의 연평균 GDP 성장이었다.[2]
1905년, 대한 제국 내무부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조선의 인구는 5,793,976명이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의 인구 조사는 부정확했다.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한일 협약에 의해 그 이후부터 조선의 인구 조사는 일본이 실행하였다. 일본 통치가 시작된 1910년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13,128,780명이었다. 일반적으로 이것도 상당수가 누락된 숫자로 보고 있다.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3]일본 통치가 끝나기 전의 해(1944년)에는 25,120,174명이었다.
1926년]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왕으로 즉위
1926년 12월 25일, 히로히토(裕仁) 제124대 일본 왕이 25세 나이로 즉위했다. 원호(元號)는 ‘쇼와(昭和)’.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 대전 3대 전범으로 꼽히는 히로히토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군국주의적 교육과 환경 속에서 뼈가 굵었다. 어린시절 다닌 귀족학교 교장부터 골수 천황파이자 군국주의자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였다. 히로히토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노기를 거리낌 없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국주의자 히로히토의 얼굴은 종전후 극적으로 바뀐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총지휘한 현인신(現人神)이던 그가 ‘군부의 희생양’ ‘해양생물학자’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미화됐다. 이런 변신은 맥아더의 정치욕과 미소냉전 개막, 히로히토의 비굴한 생존전략에서 비롯됐다.
히로히토가 총애한 도조 히데키조차 전범재판에서 “일본 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증언했지만, 맥아더와 재판관들은 귀를 막았다. 그러나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은 히로히토에 대해 “인간의 노예화·고문·살인·인종차별 등 인도(人道)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사후에나마 단죄했다. /조선
1918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출생
사다트 [Sādāt, Muhammad Anwar el-, 1918.12.25~1981.10.6]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G.A.나세르와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1952년 이집트혁명 때에는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51∼1957년에 국무장관, 1957∼1961년 국민연합(아랍사회주의자연합)의 서기장, 1961년에 국민의회 의장을 거쳐 1962∼1964년 대통령평의회의원을 지낸 후 1964년 부통령 겸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70년 9월 대통령 나세르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뒤를 이어 10월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분쟁 때에는 직접 이집트군을 지휘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온건노선을 취하여,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평화의 길을 열었다. 이로 인하여 1978년 이스라엘의 수상 베긴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이어 1979년 3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렇듯 중동평화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1981년 10월 6일 카이로 근교 나스루에서 대(對) 이스라엘 10월전쟁 8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저서에 《나일의 반란 Révolte sur le Nil》(1957)이 있다. /naver
1914 - 크리스마스 휴전
영국·독일 군인들 자발적 행동
[어제의 오늘]191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휴전ㆍ영국·독일 군인들 자발적 행동
한국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남과 북의 경계를 지키는 군인들이 체제와 이념을 뛰어넘어 우정을 다지는 모습이 묘사된다. 남북의 군인들은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군 복무기간에 대한 농담을 건네며 우정을 쌓는다.
첨예해지는 남북 대치 상황을 보면 이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 당시 교전 중이던 영국과 독일의 군인들 사이에는 영화보다 극적인 일시 휴전이 성립됐다. 1914년 12월25일의 ‘크리스마스 휴전’이다.
1차대전은 1914년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발발했으니, 개전 후 맞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이 해 새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임시 정전을 요구했지만, 갓 전쟁을 벌인 영국과 독일 정부의 고위층에겐 ‘쇠귀에 경 읽기’였다.
평화의 움직임은 최전방의 병사들로부터 일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자 독일군의 흉벽 위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 독일군 병사들은 총을 버리고 참호를 빠져나와 캐럴을 부르며 적진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브라스 밴드의 반주 소리도 들렸다. 연합군 병사들은 처음엔 이 캐럴을 계략이라 생각하고 긴장했으나, 적군이 비무장임을 파악하고 역시 참호에서 나와 손을 흔들었다. 독일과 영국 병사들은 함께 캐럴을 부르고 담배와 음식을 공유했다. 25일 오후에는 양국 군인 사이의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이 자발적인 휴전에는 호전적인 프로이센보다는 쾌활한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출신 병사들이 더 많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전은 26일까지 계속됐으며, 일부 전선에서는 신년까지 이어졌다. ‘크리스마스 휴전’은 대치 중인 적까지도 존경하는 서양의 오랜 기사도 정신이 마지막으로 발현된 사례였다. 뒤늦게 ‘크리스마스 휴전’ 사실을 보고받은 군 고위 지휘관들은 기강 해이를 우려해 이 같은 행동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지휘관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신사적이고 감동적인 ‘크리스마스 휴전’의 재현은 이후의 현대전에선 기대하기 어려웠을 터다. 현대의 전쟁은 각종 신무기를 이용해 상대를 절멸시키기 위한 전면전의 양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2-24 17:34:43
깊은 밤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그랬다. 이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지만 이곳은 서로 죽이고 죽는 살육의 전쟁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벨기에 이프르의 벌판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노래였다.
독일군 진영에서 나지막이 시작된 노래는 여러 목소리가 합쳐져 전장으로 길게 퍼져나갔다. 100m 떨어져 있던 영국군 참호 쪽 병사들은 처음에 노래가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독일군의 술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커져가는 노랫소리에 동화되어 함께 따라불렀고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독일군 병사들은 이렇게 외치고는 참호 위에 촛불을 세워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양 진영 사이로 밤새 캐럴이 오고갔다.
동이 틀 무렵 독일군 장교가 작은 트리를 들고 참호 밖으로 나오자 영국군 측도 참호에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곧 양쪽 병사 모두가 중간지대에 모여 성탄절을 축하하고 휴전을 맺었다. 양측은 방치된 시신을 수습하고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담배와 술·선물을 나누고 주소를 교환하며 사진도 함께 찍었다. 축구시합도 벌였다. 결과는 3-2 독일군 승.
유사한 휴전이 서부전선의 다른 몇몇 전장에서도 벌어져 일시적인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나 군수뇌부에게 휴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적군과의 접촉을 금지했고 전투명령을 하달했다. 병사들은 서로 공격신호를 알려주고 머리 위로 총을 쏘는 등 반발했지만 강압적인 명령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위정자들은 국익이란 명분으로 전쟁을 명하지만 희생되는 이들은 이름 없는 민초들 뿐. 전장은 다시 피로 물들어 4년간 900만명이 죽는 대전으로 이어졌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9-12-21 [10:42:00]
1899년] 미국 배우 보가트(Bogart, Humphrey) 출생 ← 〈Sahara〉에 출연한 보가트(1943)
"현명한 남자는 결코 여자와 맞서 욱박지르지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할 때까지 기다린다." - 험프리 보가트
본명은 Humphrey DeForest Bogart.
1899. 12. 25 미국 뉴욕 시~1957. 1. 14 할리우드.
1940, 1950년대 영화에서 거친 남성의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햇볕에 탄 무표정한 얼굴 뒤에 이상을 숨기고 있는 듯한 독립심 강한 모험가의 전형을 창조해냈다. 사생활에서는 할리우드의 관습을 거의 따르지 않는 냉소적인 독불장군으로 보였으나 미국 영화계의 우상이 되었다.
유명한 외과의사와 삽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다. 우연히 나무가시에 찔려 뻣뻣해진 윗입술은 훗날 영화배우가 되었을 때 그를 상징하는 신체적인 특징이 되었다. 〈응접실 희극 drawing-room comedy〉(가벼운 풍자극)에서 소년 역을 맡으면서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는 저렇게 Broadway's Like That〉(1930)로 영화에 데뷔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화석의 숲 The Petrified Forest〉(1935)과 이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1936)에서 살인자 만티 공작 역을 맡으면서 배우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에드워드 G.로빈슨, 제임스 캐그니 등이 출연하는 범죄영화에서 악당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1941년 〈하이 시에라 High Sierra〉에서 매드 도그 로이 얼 역과, 〈몰타의 매 The Maltese Falcon〉(1941)에서 매정한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 역을 맡으면서 스타로 부상했다. 그밖에 유명한 배역에는 〈카사블랑카 Casablanca〉(1942)의 추방당한 카바레 주인 릭, 〈시에라마드레 산맥의 보물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1948)에서 욕심 많은 탐광자(探鑛者) 프레드 C. 도브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1951)에서 술고래 뱃사공, 〈케인호(號)의 반란 The Caine Mutiny〉(1954)에서 신경증 환자 퀴그 선장, 〈그들이 더 타락할수록 The Harder They Fall〉(1956)의 지친 신문기자 등이 있다. 4번째 부인 로렌 바콜(1945 결혼)과 영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1944)·〈깊은 잠 The Big Sleep〉(1946)·〈어두운 통로 Dark Passage〉(1947)·〈키 라르고 Key Largo〉(1948)에 함께 출연하여 선풍을 일으켰다./브리태니커
1899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발행한 월리스 부인(Lila Bell Acheson) 출생
1889. 11. 12 미국 미네소타 세인트폴~1981. 3. 30 뉴욕 마운트키스코(D. 월리스)
1889. 12. 25 캐나다 매니토바 버던~1984. 5. 8 마운트키스코(L. B. A. 월리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배포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Reader's Digest〉를 창간·발행했다. 월리스(Wallace, DeWitt)는 세인트폴에 있는 장로교파 매칼레스터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년 동안 매칼레스터대학에서 수학하다가 은행에서 일하려고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무렵부터 그는 최신 정기간행물에서 마음에 드는 기사의 색인을 카드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뒤 그는 버클리대학교에 입학했고,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친구와 워싱턴 주 타코마에 머무는 동안에 릴라 벨 애치슨을 만났다. 월리스는 약간의 정부 팜플렛을 농업에 관한 소책자로 요약하여 판매해 성공을 거두고 나서 그는 일반적인 흥미거리 기사로 확대하여 요약 소책자로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무렵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월리스는 미육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전쟁에서 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에 그는 다이제스트 잡지에 대한 계획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상했다. 그는 이미 인쇄했던 견본호를 1920년에 정성스럽게 모아 정리한 뒤 한번에 1부씩 복사하여 여러 출판업자에게 발송했으나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그의 다이제스트 계획을 믿어주는 릴라 애치슨을 다시 만났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장로교 목사의 딸인 애치슨은 타코마로 이사가기 전에는 중서부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자랐다. 월리스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그녀는 동부의 여러 주에서 군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근로자들을 위해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센터를 조직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계속 동부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1921년에 두 사람은 뉴욕 주 플레전트빌에서 결혼했다. 월리스 부부는 그들의 힘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그리니치 마을의 주류밀매점 아래의 지하실로부터 직접 가정으로 배달·판매했다. 1922년 2월 제1호가 출판되었다. 발행부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1922년의 1,500부에서 1929년에는 20만 부로 증가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전세계적으로 17개 국어로 번역되어 41판 3,000만 여 부를 발행했다. 드윗은 1921~65년에 편집자로, 그리고 1921~73년에 회장으로 일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1년 동안 다른 잡지들로부터 요약한 기사나 발췌한 기사들만을 실었으나, 1933년부터는 이따금 독자적인 고유 기사들을 싣기 시작했으며, 1934년에는 시사서적의 요약판을 싣기도 했다. 1940년 외국어판이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증가되는 유통비용으로 인한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해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비록 비평가들로부터는 진부하고 보수적인 발행자라고 평가받았으나 월리스 부부는 긍정적인 논조를 추구하려고 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실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 이 잡지의 성공으로 그들은 크나큰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부부는 특히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저택과 토지의 복구, 이집트에 있는 아부 심벨 사원의 보존 등과 같은 많은 자선적인 공공문화사업을 적극 후원했다. 1972년에 월리스 부부는 자유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미국 영예전당의 사업가 부문에 선출되었다./브리태니커
1898년] 독립협회 강제 해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25일 고종의 만민공동회 금지령과 함께 사실상 해산됐다. 독립협회가 출범 초기와는 달리 점차 급진적 정치단체로 선회하자 고종이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1년 만에 귀국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으로 민중을 지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든다는 취지로 1896년 7월 2일 창립됐다. 초기엔 개혁인사와 고급관료들의 사교모임 수준이었으나, 점차 개혁파 관료와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변모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 개최를 시작으로 민권투쟁기로 접어들자, 보수세력은 이상재·남궁억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체포했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 활동을 반체제운동으로 단정, 칙어와 함께 민회금압령을 내려 협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조선
독립협회 활동을 한 지도자들 /조선
독립협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들의 모습 /브리태니커
독립협회 강제 해산
1898년 12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개혁을 요구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반역죄가 사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주권독립,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설립 목표로 삼았으며, 초기에는 고급관료들도 대거 참여했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부터 국가정책에 민의를 반영하도록 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그후 거의 날마다 열린 대중집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갔다. 1898년 10월에는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는 헌의6조를 결의하는 등 활동이 절정에 달했다. 분출하는 민중의 개혁 요구를 감당하지 못했던 집권 세력은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오늘의 역사]독립협회 강제해산
1898년 오늘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됐다.
1896년 7월 설립된 독립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했다.
‘독립신문’을 발간해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했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 안경수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했다.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했다.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했지만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아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다.
그해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해산을 명했다.
협회는 해산됐지만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9년 초 다시 해산했고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12.24 18:00
1898 - 서울에 처음으로 전차 선로 공사 준공 (서대문-청량리간)
광무 2년(1898년), 서울 거리에는 자전거와 인력거가 달리고 있었고 한대의 마차도 없었던 시대였다.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2월에 공사를 시작, 같은 해 12월 25일에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까지 이르는 5마일 단선궤도 및 架線공사를 준공하였고 1899년 5월 17일을 기하여 전차개통식을 마쳤다. 부산에는 전차가 1915년, 평양에는 1923년에 개통되었다.
요금제도: 상 하등으로 나눠 예컨대 동로~동대문 문간은 상등이 3전 5분, 하등이 1전 5분 이었고, 정거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승객이 요구하면 정거했다. 1900년 4년 4월에는 오픈카(open car)로 된 객차 6대와 화차 5~6대를 새로 도입했다.
운영주체는 한성전기회사로, 1902년 이후 시설확장을 계속한 탓으로 자금난에 빠져 미국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와 합자해 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의 일한가스주식회사가 이를 또 흡수해 전차사업권은 일본으로 이양된다.
[서울 전차 연표]
대한제국기
1898년2월 19일 -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대한제국으로부터 전기사업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 설립.
1898년12월 25일 - 서대문~청량리 간 단선 신설.
1899년 일자불명 - 종로~남대문 간 단선 신설.
1899년5월 17일 - 전차 개통식.
1901년1월 - 남대문~구용산 간 단선 신설.
1901년7월 - 서대문~남대문 간 단선 신설. 그러나, 수 년 후 폐지됨.
1909년6월 23일 - 한일가스주식회사에 매각.
/위키백과
1888 국어학자 환산 이윤재 태어남
호 환산(桓山)·한뫼. 경남 김해 출생. 대구 계성(啓聖)학교에서 수업하고 평북 영변(寧邊)의 숭덕(崇德)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에 가담,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중국 베이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 귀국, 오산(五山)·배재(培材) 등 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잡지 《한글》을 편집하였다. 1927년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편찬위원이 되고 1934년 설립된 진단학회(震檀學會)에 가입, 국사연구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에 관련, 이듬해 11월까지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연희전문학교·감리교신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국어학자들과 한글맞춤법을 제정하는 한편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피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주요저서로 《성웅 이순신》《문예독본》 등이 있다.
본문
1887년] 미국의 호텔왕 힐턴(Hilton, Conrad) 출생
힐턴 [Hilton, Conrad (Nicholson), 1887.12.25~1979.1.3]
"아주 가난한 그리스 사람이 아테네 은행의 수위에 응모했다.
시험관이 글씨를 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밖에 쓸 줄 모른다고 하여 퇴짜를 맞았다.
그 사람은 돈을 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 년 뒤 그리스 태생의 한 실업가가 뉴욕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한 기자가 회고록을 쓰라고 하자 실업가는 웃으면서
'나는 글씨를 못씁니다.
내가 글씨를 알았다면 아직도 은행 수위로 있을 겁니다.'고 대답했다."
- 힐턴의 자서전에서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설립한 미국의 실업가.
뉴멕시코 주 샌앤토니오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힐턴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도와 가족 소유의 커다란 벽돌집을 여관으로 개조했다. 1915년 A.H. 힐턴 앤드 선 잡화점의 동업자이자 사장이 되었다. 주의회에서 활동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위로 임관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1918년 아버지가 죽은 후 힐턴은 가족사업을 계속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은행매입 협상차 텍사스 주 시스코에 갔다가 모블리 호텔을 매입했다. 호텔 운영이 수지맞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댈러스·포트워스·웨이코·텍사스의 다른 도시 호텔들도 매입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타격은 받았지만 힐턴 호텔 체인은 사업운영을 계속해나갔다. 1939년경에는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와 그밖의 지역에서 호텔을 건축·임대·매매했다. 1946년 힐턴호텔사가 설립되었다. 해외로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1948년에는 힐턴인터내셔널사가 설립되었다. 1954년에는 스태틀러 호텔 체인을 매입했고, 그후 경영다각화의 일환으로 신용 카드업과 자동차 임대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60년대 힐턴사는 외국회사 및 정부와 공동경영하는 형태로 해외사업부를 재조직했다. 많은 힐턴 호텔이 프랜차이즈화되거나 힐턴 체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유되었다. 콘래드 힐턴은 1966년 아들 배런에게 사장직을 물려 주었다. /브리태니커
1881 -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태인 대학살 광풍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는 1859년 12월 15일 유럽 리투아니아의 비얄리스토그(당시 폴란드령)의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안과 의사가 되었다. 그 곳은 당시 러시아가 점령한 폴란드의 일부였는데 산업 혁명 무렵 직물업의 중심지였다. 1861년 당시 러시아의 농노 제도가 폐지당할 때 러시아 제국주의가 폴란드 말을 금지시키고,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들이 혼합해 거주하는 도시들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어나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매일처럼 보고 자란 자멘호프가 여러 민족의 공통어가 있으면 이와 같은 싸움이 없어진다고 느꼈고, 그 자신이 유태인이어서 유랑민이란 편견과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188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11세 암살 사건의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전국에 유태인 대학살 바람이 불어 하루에 만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했다.
1881년 12월 25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불어닥친 대학살에 자멘호프 일가는 지하실에 숨어서 공포의 밤을 지냈었다.
1878년 이미 국제어
1887년 7월 14일에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의 창안을 발표하고 톨스토이 등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제어의 사상인, 민족간의 우애와 정의를 추구하는 동호인들이 확산되어 1905년에 프랑스의 브로뉴 수메르에서 제1회 에스페란토 세계 대회를 열었는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 만으로 사이좋게 교류하는 현실을 보면서 결의가 점점 확고해졌다. 중립언어만으로 각 종교간의 중계 역할인 <히레르주의>를 완전히 수행할수 없다고 판단되어 <민족주의>를 그냥 두고 자멘호프는 1906년 <인류인주의>를 부르짖었다. 자기는 인류의 일원이고, 타민족의 어떤 편견이나 차별도 하지 말자는 사상이다. 세계 평화를 바라며 모든 민족의 편견과 차별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언어와 종교의 면에 전력을 기울여 투쟁한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로 된 방대한 저작을 남기고 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4월 14일에 바르샤바에서 58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관련자료 :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교과서 '생활의 길잡이'
1878 독일 소설가 시인 한스 카로사[Carossa, Hans, 1878.12.25∼1956.9.12] 출생,
*바이에른주(州)의 온천도시 츠 출생. 결핵전문의(結核專門醫)의 아들로 태어나 바이에른주(州)의 파사우 근방에 있는 리트슈타이크에서 77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전거(轉居)하는 대로 피르스팅으로 옮기고, 이어 카딩으로 이사하였다. 에피소드집 《유년시대 Eine Kindheit》(1922)는 이 시절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랑츠푸트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여기서 《청춘변전(靑春變轉) Verwandlungen einer Jugend》(1928)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꿈많은 학창생활을 보냈다. 이어 뮌헨 ·뷔르츠부르크 ·라이프치히의 각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뮌헨대학에서 배우던 최초의 1년간을 추상(追想)하여 자서전적인 중편소설 《아름다운 미혹의 해 Das Jahr der schnen Tuschungen》(1941)를 썼다. 그는 이 작품에서 19세기 말의 독일 문예사조를 섞어가면서,시골에서 뛰쳐나온 한 청년이 처음으로 겪는 여성체험과 대학의 학문적 분위기, 여러 가지 체험과 방황을 거쳐 내면적인 발전을 이루고 차차 시인으로서의 천직(天職)에 눈을 뜨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1903년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파사우의 부모에게로 돌아가 아버지의 대리가 되어 의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시작 창작에도 힘써 최초의 소설 《뷔르거 박사의 최후》(1913)를 발표하고, 이 작품을 《의사 뷔르거의 운명 Die Schicksale Doktor Brgers》으로 개작하여 1930년에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발발하였을 때 소집영장을 기다리지 않고 군의(軍醫)로 종군하여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년의 《루마니아 일기(日記) Rumnisches Tagebuch》(1924)를 완성하였다. 대전 후는 잠시 동안 뮌헨에서 개업했다가 다뉴브강변의 제슈테텐으로 옮겨 창작에 전념하고 전후의 뮌헨을 무대로 한 《의사 기온 Der Arzt Gion》(1931)과 소년시절 이후 전선에서 돌아올 때까지의 각종 체험을 엮어낸 문학적 회상록 《지도(指導)와 신종(信從) Fhrung und Geleit》(1933) 및 《의사 기온》에 계속되는 본격적 소설로 신비한 인간의 생활을 상징적 ·암시적으로 묘사한 《성년의 비밀―앙게르만의 수기(手記)에서 Geheimnisse des reifen Lebens》(1936)를 출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전 해에 그는 바이마르에서 ‘현대에서의 괴테의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여,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고 폭력과 전쟁의 포기를 역설하였다.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와 빈으로 간단한 여행을 시도해 본 것 외에는 독일 국내에만 머물렀다. 패전 직전에는 나치스에 의하여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나치스 치하 독일의 혼란과 그 동안의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변덕스러운 세계 Ungleiche Welten》(1951)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탈리아를 찬미한 《이탈리아 기행(紀行) Aufzeichnungen aus Italien》(1947)과 《시집(詩集)》(1948) 등을 발표하였다. 최후의 작품 《젊은 의사의 날》(1955)은 《아름다운 미혹의 해》에 이어 개업의사 시절을 그린 것으로 창작과 의업의 분열이라는 갈등과 고뇌를 거쳐서 마침내 의사의 길을 걸어가자고 결의하는 데까지의 과정을 수식 없는 겸허한 태도로 술회하였다. 소년시절부터 괴테를 스승으로 숭앙하면서 평생을 시(詩)와 함께 한 시인이었다. (출처: 두산백과)
1818 최초의 성탄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Silent night holy night ] ' 오스트리아에서 등장,
*구교, 신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애창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크리스마스캐럴로 1818년 오스트리아의 교회음악가 프란츠 그루버가 신부(神父) J.모르의 독일어 가사에 곡을 붙였다. 현재는 각국어로 번역되어 온 세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1950년경부터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으며, 그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대표적인 캐럴이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1717년] 로마 교황 비오 6세(Pius Ⅵ) 출생
비오 6세 [Pius Ⅵ, 1717.12.25~1799.8.29]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마르코 아우렐리오와 안나 데레사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운영하는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35년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페라라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이곳의 교황 대사인 T.루포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740년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가 선출되면서 루포가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의 교구를 대신 관리하였다.
로마나 나폴리 왕국 사이의 관할권 분쟁을 조정함으로써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753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175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66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의 신임을 얻어 교황청 회계 책임자가 되었고, 1773년 4월 26일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수회의 폐지에 관한 가톨릭 국가들과 교황청 사이의 논쟁에 가담하였으며, 1774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사망하자 이듬해 2월 15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6세는 가톨릭 교회가 매우 위태로웠던 혼란기를 보내면서 조카들의 중용으로 내적으로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외적으로는 계몽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1789∼1799)에 의해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유배·처형되었으며, 1793년 11월에는 그리스도교가 폐지되는 등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이에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하였다.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침공하여 볼로냐·페라라·모데나·로마냐 등의 교황령을 잃었으며, 1798년에는 로마가 점령되고 로마공화국이 선언되자 교황청은 로마에서 쫓겨났고 남아 있던 다른 교황령마저 잃고 말았다. 프랑스 군대에 의해 1799년 3월 28일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로 끌려간 교황은 그곳에서 같은 해 8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1802년 2월에 그의 유해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naver
1642년] 만유인력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 뉴턴(Newton, Sir lsaac) 출생 ← 뉴턴
1642. 12. 25(신력 1643. 1. 4) 링컨셔 울스토르프~1727. 3. 20(신력 3. 31) 런던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역학·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근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 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그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가 다룬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그는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트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모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Hermetic tradition:자연현상을 연금술과 마술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éometrie〉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i Terminorum Infinitas〉를 펴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流率)의 방법에 관하여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수고(手稿)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 Of Colours〉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inverse square law: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 Opticks〉의 제1권이 되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가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1665~66년에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는 것을 밝혔고, 색깔은 이질적인 혼합광이 개개의 요소로 분해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광선이 일정한 각도로 굴절되는 성질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빛의 이질성은 물리광학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렌즈의 색수차(色收差)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그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그를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1675년 런던을 방문한 뉴턴은 훅이 자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ether)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을 도입했다. 인력과 척력은 원래 화학적 친화력,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열, 액체의 표면장력, 모세관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허미티시즘의 동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기계적 철학의 한 변형으로 보았다. 사실 인력은 정량적으로 규정될 수 있었고 17세기 과학의 두 주요 조류인 기계적 전통과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후에 훅의 편지에서 타원궤도가 한 초점을 중심으로 역제곱의 인력관계를 수반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또 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행성의 궤도이탈을 방지한다는 훅의 생각은 힘을 천체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지만 아직 중력(gravitation)이라는 개념에는 못미쳤다.
1684년 8월 궤도역학의 문제로 곤란을 겪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뉴턴을 방문했다. 3개월 후 핼리는 뉴턴으로부터 〈운동에 관하여 De Motu〉라는 짧은 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2년 반 후에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로 확장된다. 〈프린키피아〉에서는 기계적 철학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에 관한 설명이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물체의 운동을 엄밀한 계량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었다. 그결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곧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 칼리지와 같은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나갔다.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그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통해 폭넓은 교제를 하게 되고 철학자 존 로크와도 친교를 맺었다. 런던 생활을 즐기게 된 그는 친구인 수학자 파티오와 찰스 몬티규(후에 핼리팩스 경이 됨)의 도움으로 1696년 조폐국 이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해 매년 2,000파운드의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는 화폐의 재주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화폐의 위조를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당시 런던의 위조범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위조범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뉴턴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을 했다.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이자 왕실천문가였던 존 플램스티드는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관측자료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먼저 미적분학을 개발했고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뉴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694년에 나온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는 점이다. 처음에 추종자들의 부추김에 못이겨서 시작한 우선권 논쟁은 뉴턴이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화를 내면서부터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고,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뉴턴의 죽음으로 하여 싸움은 끝을 맺었다. 그는 말년을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수정·보완·번역하는 데 바쳤다. 최후까지 왕립학회를 주관했는데, 회의 도중 조는 때가 많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S. Westfall 글 | 金東源 참조집필 /브리태니커
1000 - 헝가리 왕국이 성립되다.
헝가리 왕국(헝가리어: Magyar Királyság 머저르 키라이샤그)은 1000년부터 1918년까지 지금의 헝가리와 그 주변 지역에 있었던 군주제 국가이다(국호는 1946년까지 이어졌다).
역사
1000년 - 헝가리 왕국의 성립.
16세기초 -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정복당해서 반독립 왕국됨,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싸워 승리, 카를로비츠 조약이 맺어져 헝가리를 빼앗음.
1526년 - 헝가리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에 가다.
1867년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립.
1919년에서 1946년까지 독재자 호르티가 헝가리를 통치하다.
1920년 - 트리아농 조약에 의하여 패전국 취급을 받고 막대한 영토를 잃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추축국으로 참전하여 역시 패전국 취급을 받았다.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헝가리 왕국이 무너진뒤 1946년에 세워짐.
/위키백과
800 - 카롤링거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다.
카롤루스 대제(742년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 라틴어: Carolus Magnus,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마뉴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대제, 영어: Charles the Great, 찰스 대제)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 시켰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로마제국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카롤루스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재임연표에서는 찰스 1세로 알려져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하였으나 후에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의 위기가 닥쳐왔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 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카롤루스 대제는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의 뒤를 이어 ‘카를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를이라는 이름은 라틴어인 ‘카롤루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늘 날 영어로 왕을 뜻하는 킹(King)이란 단어는 카를(Charles)에서 유래한 것이다. (폴란드:Król, 리투아니아:Karalius, 헝가리:Király, 세르비아:Kralj, 러시아:король, 터키:Kral)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요청했다. 카롤루스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교황에게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카롤루스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하였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는 카롤루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 즉위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대내외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분명히 하고,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이상적인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위키백과
336년] 크리스마스 행사 시작
336년 12월 25일부터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거행되었다고 로마 역서(曆書)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12월 25일은 원래 동지를 기념하는 로마의 축제일로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는 날이다.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원래 1월 6일을 그리스도 탄생 축하일로 지켰으나, 4세기부터 12월 25일로 바꾸어 기념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사 및 태양 의식과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념이 합쳐져서 생겨났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대중적인 공휴일이 되었다. 음식과 교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난로에 때는 장작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푸른 젓나무, 선물과 인사 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상징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BC 4 - 예수 그리스도 태어남
[오늘의 역사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 태어남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 그리스도가 기원 전 4년 오늘 이스라엘 베들레헴 마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말을 널리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졌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 부르며 높이 공경하고 섬긴다. 성탄절이 오늘날 세계적 명절이 된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소년한국일보 2009/12/24 15:01:22
예수는 그리스어로 "구세주(救世主)"란 뜻으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자"란 뜻이다.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로 기독교 세계 전체가 예배하는 구세주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의 제2의 위격(位格 : persona)이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일반의 지식은 신약 성서 중 마태ㆍ마가ㆍ루가ㆍ요한의 4복음서 중 특히 처음의 3서(書) 즉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에서 유래한다. 예수의 생몰년(生沒年)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학자는 대개 그 탄생을 B.C. 4년으로 보고 죽은 해는 기원 후 29년으로 본다. 따라서 33년간 살았던 셈이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며 유소년기(幼少年期)는 나사렛에서 지내고 그의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였다. 아버지 요셉이 사망하였을 때 예수는 아직 어렸고 어머니 마리아는 반대로 장수(長壽)하였다. 신약 성서의 기록에 따른다면 예수는 몇 명의 동생과 누이가 있었다. 예수는 나이 30세 또는 그 이상 되었을 때 전도를 시작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패 이래 마카베야 시대에 일시 독립의 자유를 얻었지만 얼마 후에 외국의 지배를 받고 헤롯왕의 전제하에 들어갔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은 로마 총독의 관할을 받았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적 위치에 있던 바리새파의 학자와 사두새파는 서로 대립하고 무력한 민중에게 완전히 유리되어 그들의 곤경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配慮)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은 세계의 구제자 메시아를 대망하게 됐다. 이 때에 "황야에 외치는 소리"의 주인 요한이 나타나서 신의 심판의 날이 가까웠음을 예고하고 민중에게 회개의 세례를 인도한다. 예수의 공(公) 생활은 세례(洗禮) 요한한테 요단 강에서 세례받는데서 부터 시작했다. 세례를 받은 후 잠시 유다의 황야에 은서(隱棲)하여 악마의 여러 유혹을 극복하고 갈릴리 가버나움 등의 여러 거리로 갔다. 그의 주변에 소수의 제자가 모였지만 그들은 거의 다 일하는 계급에 속했다. 그들은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열두 제자다(마태 10 : 2). 예수는 3년 간(일설에는 일년) 전도에 힘쓰고 민중에 설교를 했다. 산상(山上)의 수훈(垂訓)은 그 유명한 예의 하나다. 하늘 나라의 교의(敎義)를 간단히 비유로 설명하면서 제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심신양면(心身兩面)의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소생시키고 초자연적인 기적적 능력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또 다가오는 현세의 황혼(黃昏)과 하늘 나라의 여명(黎明)을 예언했다. 그러나 천국(天國)의 뜻은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되어 논쟁을 일으키고 오해를 샀다. 어쨌든 당시의 종교 당국자들은 예수가 일으킨 운동에 위험을 느끼어(바리새ㆍ사두개 두 파는 예수를 여러 번 모함하고 비난하였다) 신의 모독(冒讀)과 소요 선동(騒擾煽動)을 이유로 고발을 획책하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 예수를 끌어내어 총독으로 하여금 이 '선동자'를 치욕과 잔학(殘虐)의 극형 즉 책형(磔刑)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복음서는 예수의 말로를 간결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루(高樓)에서의 최후의 만찬ㆍ재판ㆍ정죄(定罪)ㆍ태형(笞刑)ㆍ가시 면류관ㆍ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 좌우(左右) 양쪽의 두 도둑 사이에서의 책형(磔刑), 죽기 전의 마지막 고통ㆍ죽음, 이러한 결과를 밟았다. 십자가 밑에서 사도와 성녀(聖女)들은 이것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유월제(踰越祭)의 이른 아침, 예수를 묻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가 죽음의 사슬을 끊고 무덤에서 나와 영광의 부활(復活)을 한 것을 확신했다. 그리스도는 여러 번 제자들 앞에 차례로 나타나고 40일 후에 승천(昇天)했다. 기독교의 정통교리(正統敎理)에 의하면 신이 정한 시기에 생자(生者)와 사자(死者)를 심판하기 위하여(최후의 심판) 또 세계와 재생(再生)의 인류를 지배하기 위하여 재림(再臨)하기로 되어있다. 역사상의 인물로서 예수처럼 오랫동안 복잡다기한 격론(激論)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없다.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해서 근세 이후 많은 의견들이 백출하였다.
~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