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 관아
□ 관 덕 정
먼 옛날 고, 양, 부 삼신인이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나 탐라국의 시조가 되고 1,000년의 해상왕국을 이루었고 고려에 복속되어 100년동안 몽고의 탐라총관부가 있었다. 이후 조선의 탐라목 관아가 500여년 제주를 다스렸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대표적인 정자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1448년(세종30) 신숙청 목사가 창건하였다. 관덕정은 1963년 보물 제 322호로 지정 되었고 관덕이라는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 라고 『예기(禮記)』에 ‘활을 쏘는 것은 과녁에 있지 않고 덕을 고양하고 예약을 꾸미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관덕정 편액은 처음에 안평대군의 글씨로 적혀있다 화재로 소실되고, 후에 이산해의 글씨로 적혀 있다. 그동안 10여 차례 중수를 거쳐 2006년 복구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하였다.
내부에 탐라형승(耽羅形勝)은 관덕정 천정 동쪽을 향해 걸렸는데 1778년 방어사 김영수의 글씨이고,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은 방어사 박선양이 중수하며 쓴 글씨이다. 대들보 아래 창방 양면에는 작자 미상의 7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도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벽화로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 당나라 시성 두보가 술에 취하여 교자를 고 양주를 지나가는데 귤을 던지는 여인의 교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했다는 고사를 그림.
▲ 상산사호(商山四皓) - 난을 피해 바둑을 두는 선비들의 모습.
▲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오나라 손권과 제휴하여 위의 조조의 대군을 적벽강에서 화공으로 대승을 거두는 장면.
▲ 대수렵도(大狩獵圖) - 우거진 밀림 등의 야수들을 관원들이 사냥하는 모습.
▲ 공명탄금도(孔明彈琴圖) - 10만 대군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서 적군을 물리치는 제갈공명.
▲‘홍문연(鴻門宴) - 유방에게 연회를 베푼 뒤 역습하려다 후환을 얻은 항우.
▲십장생도(十長生圖) - 북쪽들보 바깥쪽 그림으로 산, 바다, 구름, 돌, 소나무, 대, 지초, 사슴, 학, 거북이를 그림.
관덕정 주변은 탐라시대부터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지였고 관덕정이 세워진 후에도 560년이 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항상 도민과 살아 숨쉬어온 역사의 현장이다. 군사들의 활쏘기 장소로 또는 과거시험, 임금님깨 진상을 위한 각종 봉진행사들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입춘에는 춘경이 치러져 문화 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1905년 제주에서 5일 장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말의 빈번했던 민란의 최종 종착지도 이곳이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300여명 천주교인들의 학살이 이루어진 피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 관덕정으로 모여들었다. 제주의 심장과 같은 공간이지만 번영의 역사 보다는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 입은 섬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더 많이 보아온 곳 바로 이곳 관덕정 광장이다. 제주의 역사를 알려면 관덕정을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보물 322호)로만 알 것이 아니라 제주의 고단했던 삶의 역사로 돌아보아야 하겠다.
관덕정은 이중기단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 겹처마 집이다. 양식은 이익공 집으로 처마가 특히 길고 아름다운 단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방은 창호 없이 개방한 정자 양식이다.
〈제주목, 600년의 이야기〉
제주목 관아내 회랑을 활용하여 濟州牧을
제 1 전시실에는 제주목 역사적 변천사와 발굴 및 복원
제 2 전시실에는 부임 목사의 생활상
제 3 전시실에는 제주 읍성내 주요건물 및 변천사 등을 각각의 그래픽 패널과 영상장비를 통하여 당시 제주목의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 되었다. 이곳에서 제주목 600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테마 1. 제주목 이야기
1. 제주목 관아 재구성 되다
탐라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 · 행정 ·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는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조선시대 내내 중, 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관아를 헐어 콘크리트 건물로 제주도청, 제주경찰서를 설치한 뒤 제주지방법원과 제주지방검찰청을 이곳에 배치함에 따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후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크게 세 번에 걸쳐 재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제주목 관아의 중심시설인 동헌지와 내아 건물시설은 물론 중대문에서 동헌지 마당으로 연결되는 중심도로가 밝혀졌다. 1998년도 4차 발굴 조사에서 외대문, 중대문지를 비롯하여 홍화각, 호고, 애매헌, 호적고, 우연당, 항리방, 영리장방, 성내 연못 , 우물 등의 시설물과 이를 둘러싼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제주목 관아는 위와 같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초석, 기단석 등과 『탐라순력도(1702)』, 『탐라방영총감(1760)』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홍화각(弘化閣)
제주목관아의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사직)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1435년(세종 17) 최해산 안무사가 창건한 뒤 1648년(인조 26) 김여수 목사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방어영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이 되었다. 그뒤 1772년(영조 48) 양세현 방어사가 중수하였고, 1829년(순조 29)에 이행교 방어사가 개건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
서 붙여진 것이다.
복원된 홍화각 전경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 건물 중에서 뛰어난 건물이었다. 기문으로는 고득종의 홍화각기, 김진용의 중수기, 이원조의 중수기 등이 전한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철되었으며,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와 편액은 삼성혈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홍화각의 현판은 탁본하여 붙여져 있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 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이다.
▲ 홍화각기(弘化閣記)와 홍화각(弘化閣) 편액
1434년에 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탄 뒤 1435(세종 17)에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홍화각 등 여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홍화각기’는 바로 그 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고득종이 쓴 글이다.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 내력과 홍화각이라 명명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또 ‘홍화각(弘化閣)’이라는 편액 역시 고득종(髙得宗) 자신이 직접 써서 게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홍화각기(263×67.5cm)
홍화각 편액(163×65.5cm)
홍화각 기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公: 崔海山)이 정사(政事)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하여지자, 관우(館宇)의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폐허가 되어버린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타는 당과 욕실, 부엌, 낭사(郎舍)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한 칸을 세워서 당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굉걸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간을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하여 모두 서 있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며, 집이 도합 206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하지 않는 것은 화재를 예방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정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지시와 규획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홍화각'이라 한 편액은,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자가 날마다 이 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방종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 백성의 사정을 상달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제주 백성들이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고 하여, ‘성군(聖君)의 덕을 온 누리에 널리 알리고 덕화(德化)로서 백성을 다스린다.’ 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화각기 :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5호. 1991년 6월 4일 지정
홍화각 편액 :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2호. 2013년 1월 15일 지정
▲ 조선 초기 제주가 낳은 문신 고득종(髙得宗)
고득종(髙得宗,1388~1452)은 조선 초기 제주가 낳은 문신이며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시호는 문충(文忠). 아버지는 상호군 고봉지(髙鳳智)[?~1411]이고,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났으며 제주시 오현단 귤림서원 옆(현 영곡로)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상경(上京)하여 수학(修學)하였다.
1413년(태종 13) 효행이 두터워서 직장(直長)에 천거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지냈다. 1427년(세종 9)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37년(세종 19)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년(세종 20) 호조참의 재임 중 종마(種馬) 진공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39년(세종 21) 통신사로 일본왕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예조참의, 중추원동지사,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고득종이 제주민을 위한 시책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 제주의 토지 등급을 내려주도록 요청하여 제주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주었다.
― 한라산 기슭 4면에 목장을 축조하여 소위 제주도 목장을 10소장으로 나뉘게 되는 시초를 열었다.
고득종 선생의 존영
― 참역(站驛) 폐단을 시정하였다.
― 서울로 올라가 종사하는 제주 출신 자제 를 위하여 직료(職料)를 설치하여 그들 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문장과 필법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제주목 건물의 하나인 홍화각 현판글씨와 홍화각기(弘化閣記)는 1435년(세종 17)에 지은 유명한 문장이며,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친필 「몽유도원도찬양칠언장편시(夢遊桃園圖讚揚七言長篇詩)」는 글씨가 예스럽고 아담하며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증되었다. 제주인들로부터 효행이 칭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여러 가지 좋은 시책을 행한 데 감동을 받아 제주민들은 그를 부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1792~1872)는 제주인들의 건의로 1843년(헌종 9) 영혜사(永惠祠) 동쪽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향현사 (鄕賢祠)
1843년(헌종 9)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조(李源祚)는 제주유림 대표와 판관 신상흠(愼尙歆), 진사(進士) 오태릉(吳泰稜) 등으로 하여금 귤림서원 곁에 영곡공(靈谷公) 고득종 선생(髙得宗先生) 위패를 모시는 향현사(鄕賢祠)를 건립케하고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모셨다. 그 후 1849년(헌종 15)에 영해사(永惠祠)로부터 명도암(明道庵) 김진용 선생(金晋鎔先生) 위패를 옮겨와 함께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각 지방 사우(祠宇)의 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되고, 제주 유생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이 터에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를 세웠는데 판관(判官) 고경준(髙景晙)이 글을 짓고 이기용(李基塎)이 글씨를 썼다.
2007년 김영훈 제주시장 당시 오현단 경내에 향현사를 복원하여 두분 향현의 위패를 봉안(奉安)하여 매년 10월 15일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 연희각
외신으로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하는 뜻이 넘치는 연희각(延曦閣)은 목사가 집무를 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 등으로 불렸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 목사의 겸직이었던 절제사와 방어사로 바뀌는 시기인 1642-1713년 사이나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여 진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제주목사는 행정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강조됨에 따라 군사적 직책이 겸임되어 절제사〔만호 · 안무사 · 방어사〕 등의 직함을 사용하였으며, 형벌, 소송의 처리, 세금의 징수, 군마관리, 왜구의 방어 등 제주도의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2차례 보고를 행하여야 했다.
1884년(고종 21) 홍규 목사가 중수하였으나 1924년 여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는데 연희각 앞의 넓은 공간은 조선시대 제주의 주요 진상품이었던 감귤을 점검하거나 경로잔치를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 귤림당
1743년(영조 19) 안경운 목사가 개건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다시 중수한 건물이 노후하여 이원조 목사가 1842년(헌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 귤림당은 제주 목사들의 휴식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로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와 산조를 즐기면서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 목사의 ‘귤림당 중수기’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으로 된 국과원이 모두 38곳인데 귤림당만이 연희각 가까이에 있다. 입추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리고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를 쳐다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 는 기록이 보인다.
1427년(세종 9)에 찰방 김위민이 감귤 봉진으로 인한 민폐를 조정에 보고한바 있으며 1528년(중종 21) 이수동 목사에 의하여 제주 성내의 6개의 과원을 포함하여 대정현, 정의현 등에 36개의 과원을 만들어 진상에 필요한 밀감을 재배하였다. 9월이 되면 감귤을 진상하기 시작했는데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황감제’라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원래 과일이라 함은 껍질이 3겹이 있어야 제대로운 과일 대접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밤, 은행, 비자 등과 같이 귤은 일반백성들의 제례상이면 모르되 국가나 황실에서 이루어지는 제례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과일이었다.
과원직은 제주의 목자, 잠녀, 포작인, 답한, 선격 등과 더불어 가장 힘든 노역 중 하나였다.
□ 영주협당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예전에 군관들이 영, 목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명 이었으나 효종 초기에 이경억 어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0명으로 줄였다. 군관들은 말이 지급되어 타고 다녔다.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1700년대 중면 군사의 수는 속오군(예비군, 노비군)3,700 명, 봉군 490명, 위병 990명, 선격군 300명, 차비군 100명, 성정군 2,800명, 기치군200 명 등 약 9,560명의 군사가 있었으며, 1832년(순조 32)에 한응호 목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공제당으로 이름이 개칭되었으나 군의 소집과 훈련을 관장하던 곳이다.
▲ 교방지: 관기(官妓)와 악공(樂工)을 가르치는 곳으로 악공은 관노 중에서 선발하였고, 기생은 관비 중에서 용모가 있는 자를 택하였다.
▲ 심약방: 심약(審藥)과 의생(醫生)들이 거처하는 방인데, 뒤에 검룰(檢律)도 함께 기거하였다. 심약은 조정에 바치는 약재를 심사 감독하는 종9품 관원이다. 이 방에는 심약과 의생의 복식과 각종 약재류, 생활용품이 진열되어 있다.
▲ 관비방: 관아에 소속된 계집종들이 거처하던 곳.
▲ 예고: 제주에 부과된 진상의 종류로는 물선 · 방물 · 천신 · 약제 등이 있었다, 이 때에 필요한 진상 물품을 보관하던 장소를 예고라 하였는데, 이 방에서는 진상품인 전복 · 표고 · 미역 · 감귤 등이 진열되어 있다.
□ 망경루
사방을 조망하기 위하여 지은 망경루는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혜와 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관아의 중요한 건물이다. 지금은 높은 건물들로 가려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누각에 서면 전면에 바다가 훤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사라봉 봉수가, 서쪽으로는 도두봉 봉수가 한눈에 보여 적의 침입을 알 수 있는 수문장 역할까지도 도맡은 건물이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이인 목사가 재건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수 목사가 중수하고 2002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 우련당
우련당은 1526년(중종 2) 삼성혈의 성역 사업을 추진하고 무속 제의를 유교식으로 바꾼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하기 어렵다하여 만들어진 연못 정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양대수 목사는 1592년(선조 25) 3월 임금으로부터 제주 목사에 제수를 받아 홀로 제주에 오게 된다. 목사 중에는 유배의 섬에 오기 싫어서 늦게 부임하거나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아 형벌을 받은 목사도 더러 있었다. 왜냐하면 절해고도의 외딴섬 제주는 변방의 최고 오지 였기 때문이다. 뱃길로 오는 도중 풍랑을 만나면 표류 되거나 좌초되기도 하여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양대수 목사도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외로이 부임하였지만, 고향 생각에 술로 시름을 달래야 했다. 경칩이 지나면서 연못에도 따스한 봄기운이 스며들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여 목사는 불면증에 걸리고 말았다. 잠을 청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떠드는 개구리가 미운 나머지 아전을 시켜 물을 다 퍼냈으나 개구리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예 연못을 메워 버리라고 명령을 내려 개구리들을 생매장 시켜 버렸다. 개구리도 없어져서 편히 잠을 잘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과 벗들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보낼 때가 많았다.
5월 중순 양대수 목사가 제주성을 순시할 때 남문성에 이르자 갑자기 개구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떼를 지어 울어 댔다. 개구리 울음소리에 놀란 목사는 매장 당한 개구리의 혼령이 나타나 자기를 원망하는 줄 알고 그만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그곳 계곡은 ‘가락천’이라고 불렀는데 평소에도 개구리들의 집단 서식지로 비가 온 후라 더 요란스럽게 울어댔을 것이다. 하여간에 큰 부상을 입고 관아로 돌아온 목사는 낙마의 후유증으로 제주에 온지 석 달 만에 눈을 감고 만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소문으로 번져 제주도 전역을 떠돌게 되었다. 더러 선정을 베풀다가 세상을 뜬 목사에겐 선정비를 세워 그 공을 기렸으나 이 경우는 이도 저도 아닌 죄 없는 개구리 씨를 말렸다는 매정함을 덧씌워 사람을 미워할 경우를 빗대어 ‘양대수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 라는 속담을 낳아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1694년(숙종 20)에 이익태 목사가 원래의 연못으로 복원 하였고 1735년(영조 11)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여 못 가운데 석대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이라 개명하여 공물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김정 목사의 ‘향의실기’는 공물을 정성들여 바치자는 독려의 글로 임금께 바치는 것을 ‘향’이라 하고 예를 갖추는 것은 ‘의’라 하니 그 집의 편액은 ‘향의’라 한다고 하였다.
2 여러가지 자료 전시되다.
▲ 탐라지 목판본
1653년(효종 4)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 : 목판본으로 당시 제주도에 있던 제주목 , 정의현, 대정현의 3개 군현 읍지가 수록되었다. 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이 편찬하고 제주도의 석학인 전적(典籍) 고홍진의 감교로 완성되었다.
제주 동쪽으로 정의현 경계까지 50리요, 서쪽으로 대정현 경계까지 81리요, 남쪽으로 바다까지 120리요,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 거리다.
해남(海南) 관두량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마을)까지 바닷길 970여리다.
▲ 관아를 세우고 존치한 건치 연혁
본래 구한(九韓)중에 하나이나 탁라(乇羅)라고 불렀다. 혹 탐라(耽羅)라 부르기도 하고 혹 ‘탐모라’ 라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남쪽바다 가운데 있는데 땅의 크기가 400여리가 된다.
처음에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삼신인이 그 땅을 나누어 살았다. 각기 사는 곳을 이름하여 ‘도(徒)’라 정하였다.
▲ 이형상 목사 간찰
숙종 때의 제주 목사로 재직한 이형상 목사(1683-1733)가 쓴 간찰이 있다.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으나 한 번도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영감의 가체 후 어떠하십니까? 아우는 오대감과 유황을 품질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오래지 않아 영양으로 돌아갈 터인데 그 후 소식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어려운 처지에 살고 있었는데 공가에서 쌀을 내는 일은 영감이 베푼 행정의 도움을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마침 최비장이 먼저 들어가게 되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바라옵건데 영감을 헤아려 주십시오.
안부의 글을 올립니다.
계미년 (1702년) 2월 4일
아우 형상이 인사합니다.
이형상은 숙종 28년 6월에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1703년 6월에 파직되어 제주를 떠났다. 파직 이유는 1702년 무고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된 유황을 방면하는 것이 옳다는 상소를 올렸더니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역적을 옹호한다는 파당적 행위라고 비판하여 1703년 3월 5일 파직을 결정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남인들이 세력을 잃어가는 시기였다. 이형상은 상소를 한 뒤에 파직되어 떠난 뒤에도 오시복과 유황에 대한 소식을 계속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며 안부를 전한 편지다.
▲ 『영해창수록』
『영해창수록(領海唱酬錄)』은 1540년(중종 35) 11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조사수와 1541년(중종 36) 9월 영월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 두 사람이 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시를 수창(酬唱)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수창한 기록이 총 66회(66회 x 2수 = 132수)나 달하는 진기한 기록을 갖는 시편(詩篇)인 셈이다. 여기에는 조사수가 먼저 각운을 정해 시를 읊어 보내면 뒤이어 박충원이 차운(次韻) 화답시(和答詩)로 응수하는 형식을 일관 되게 유지하고 있다.
1701년 9월 제주목사로 부임 받은 박성식은 160년전 선대조의 유고인 『영해창수록』을 숙종 28년 개간하였다. 당시 모든 물자가 부족한 제주에서 책자를 편찬 한다는 것은 상당힌 어려움이 있었으나 1702년 1월 드디어 출판한 것이다. 제주영에서 목판으로 발간한 『영해창수록』은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으며, 이곳에 전시된 작품은 1737년(영조 13)에 박충원의 후손 박영구의 필사본이다.
3. 제주목 설치되다
목(牧)이란 고려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단위로서 주요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고려 958년(성종 2)에는 12목, 1018년(현종 9)에는 8목을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기에 20목을 두어 각목에 정3품의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였다.
제주목과 함께 전라도에 소속된 목에는 광주목, 나주목, 능주목(화순)이 있었다. 이후 1416년(태종 16) 제주 목사겸 도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하여 제주의 지방 행정 구역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삼읍 체제로 개편되었다. 시기에 따라 삼읍의 경계 및 행정구역의 범위에 다소 변화가 있었으나 조선말까지 이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 제주목의 변천
시 기 연 혁
상고시대 ~ 삼국시대 탐라(탁라)국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1192년 ~ 1259년(고려 고종년대)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충렬왕 원년) 탐라국으로 회복, 총관부 설치
1294년(충열왕 20년) 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1397년(테조 6년) 제주목 설치
1416년(태종 16년) 제주목에 정의현, 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 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고종 32년)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광무 10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융회 4년) 정의, 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일제강점기) 군제 폐지, 도제로 개편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1시 2군)
2006년 7월 이후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행정시 7읍5면31개동)
테마 2. 제주 목사 이야기
1. 제주 목사 286명 제수 받다.
조선시대 제주 목사를 역임한 이는 총 286명에 달한다. 제주 목사의 임기는 2년 반(30개월)이다. 일신상의 이유와 문책 등의 사유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이가 허다하였고 부임을 명받았으나 오지 못했던 이도 12명이나 된다.
한편 조선시대의 관리 임용에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 출신이 제주 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으며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10개월 정도이다. 여기에는 제주 문화 창달에 공헌이 큰 제주목사 세 명의 초상화가 있고 터치스크린으로 그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1. 이익태 목사
이익태 목사는 2년간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관덕정, 운주당, 우련당, 향교 등을 중창하였으며 탐라에 관련 문헌 『지영록(知瀛錄)』을 편찬하였고, 제주목을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하여 제주 문화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특히 「고사유동배향상소문(告事由同配享上疏文)」을 임금께 올려 우암 송시열 선생을 귤림당 서원에 배향 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화공을 시켜 탐라십경도를 남겼고, 이에 대한 탐라십경도서를 썼다. 『지영록(知瀛錄)』 은 목민관 이익태가 수행한 원숙한 정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임금님께 숙배(肅拜)한 이후 제주에 도착하기까지의 기록, 제주도에서 자신이 집행했던 각종 정무와 관련된 기록들이다. 이 책에서 하멜이 표류한 곳이 용머리가 아닌 차귀진 대야수(고산리 일대)로 밝혀졌다.
2. 이형상 목사
이형상 목사는 효령대군의 10대손이다. 1702년(숙종 28) 3월 그의 나이 50세 때 제주 목사로 부임한 후 1703년 6월 유배인을 두둔했다는 탄핵을 받고, 1년 임기로 떠나갔으나, 그는 제주의 전통을 개혁하고 유교적으로 교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60여종 2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 중 제주 관련 저술로서 「탐라순력도」, 『남환박물』, 『탐라장계』, 『탐라록』 등이 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29)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하고 그 해 10월 28일부터 11월 19일까지 제주도 고을을 동, 남, 서, 북으로 순력한 내용과 여러 행사 장면 등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그리게 한 화첩으로서, 보물 제 653-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탐라순력도」에는 제주전도 1면, 순시 장면 40면, 그림에 관한 기록 2면을 포함하여 총 43면으로 구성되었으며 18세기 초 제주의 모습을 생생히 담고 있다.
3. 이원조 목사
이원조 목사는 1843년(현종 9)까지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폭풍우와 가뭄으로 시달리던 제주 기민을 구휼하고 화북 포구의 해신사를 중수했다. 또한 군기를 검열하고 봉호소를 고치는 등 제주 방어에 힘쓰며 시취(試取)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1842년 대전 현성 동문 밖에 있는 동계 정온(鄭蘊) 선생 적거지에 유허비를 세웠고, 1843년 그곳에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여 정온을 봉향하였다.
그 후 제주성 귤림서원 곁에 향현사를 짓고 영곡 고득종을 배향하기도 하였다. 이원조 목사는 문장에도 능통하여 박계곤 행적기, 한라산 유산가, 홍화각 중수기, 정온적려유허비, 송죽사상량문 등을 지었고 저술로는 『탐라지』, 『탐라지초본』, 『탐라관보록』, 『탐라계록』 등이 있다.
4. 제주 목사 선정을 베풀다
선정을 베푼 제주 목사 16명 (기건, 신숙청, 최해산, 이약동, 이종윤, 이수동, 심연원, 조사수, 노정, 이형상, 김정, 윤시동, 심낙수, 최명, 윤구동, 이원조)의 공적을 스크린 터치로 알아 볼 수 있게 설치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목사로 ‘기건’과 ‘이약동’이 있다.
▲ 기건 목사는 재임 중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구질막(救疾幕)을 운영하였다. 백 성들의 구휼에 힘쓴 조선시대 청백리 중 한명이다. 제주 백성들은 사람이 죽으면 산이나 바닷가에 버리고, 70세가 넘으면 고려장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를 교 화시켜 죽으면 매장 하도록 하였다. 그의 선정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권22, 세조 6년 12월29일 ‘신축조’에 나타나 있다.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고지식하여 세세한 행동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또 제주 목사였을 때 백성들이 전복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 이약동 목사도 조선시대 청백리이다. 성종 1~4년(1470-1473) 제주 목사로 있으 면서 이속(夷屬)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켰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감면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한라산 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여 제주 도민들의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하는 폐단을 시정했다. 제주도민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산천단 곰솔 공원에 사적비를 새겨 지금도 은공을 기리고 있다. 이긍익 「연려실 기술」에 의하면 ‘사냥할 때에 채찍 하나를 가졌었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그 채찍을 벽 위에 걸어두었다. 후에 제주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수하여 매양 목사가 도임하면 채찍을 내어 놓았다. 세월이 오래 되자 좀이 먹어 부서지니 화공을 시켜 그 채찍의 형상을 그려 걸어 놓았다’ 관직에 있거나 물러났거나 공물에 손을 대지 않은 청렴한 관리였다.
테마 3. 제주 읍성 이야기
1. 제주 읍성 축성되다
읍성은 행정적, 군사적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축조된 성으로 이곳에는 지방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관아시설 및 민가 등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 읍성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1105년(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당시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시대의 성곽을 일부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제주읍성은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을 자연 해자(垓字)로 삼고 그 안쪽에 성곽을 쌓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곽흘 목사는 성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겪는 불편함을 없애고,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쪽 성을 가락천 밖으로 넓혀 축성함으로써 이로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임진왜란후인 1592년(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성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등 제주성의 대수축공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남, 북수구에 무지개다리(홍예교)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를 건립하여 남수각, 북수각으로 불렀다. 하지만 겨울철 공사가 이루어져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고 사상자도 발생하여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2. 제주 읍성 사라지다
조선시대 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 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내려진 1910년 읍성 철폐령으로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 후반에는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 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골재로 사용되면서 제주 읍성은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현재 오현단 위쪽에 일부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은 제주도 기념물 제3호(1971. 8. 26)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3. 제주 읍성, 성곽 구조를 살펴보자
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허튼 층 쌓기(층을 이루지 않고 수평 줄눈을 흩뜨려 쌓는 일)의 축조 방법을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제주 읍성의 규모는 성둘레가 4394척, 높이가 11척으로 기록되며, 곽흘 목사가 확장한 후 성 둘레는 5489척 , 높이는 11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 읍성에는 동, 서, 남문 3문과 남 · 북 수구(水口)가 있었고 성곽 시설로 옹성(甕城)과 치성(雉城), 해자(垓字), 여장(女裝) 등이 있었다.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 성곽조에는 치성이 27개 타첩이 404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태종 때에 성을 수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 축성한 듯 하며 세종 때에 성의 부속 시설인 옹성(甕城), 치성(雉省), 해자(垓字) 설치가 전국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이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큰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을 뜻하며, 치성은 성벽으로 올라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 구간을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해자는 성벽 바깥을 둘러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시설이고 여장은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적병을 칠 수 있도록 성 뒤에 낮게 쌓은 담이다.
4. 제주 읍성, 고지도 속에 담겨지다
고지도에 나타난 제주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당시 제주의 행정구역 방어시설, 자연, 생활상을 상세하게 담고 있어 통치와 지역 방어 그리고 특산물 조달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8~19세기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 한라장촉
현존하는 독립된 가장 오래된 제주 지도로서 이형상 제주목사가 1702년 제주도 전역을 순시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린 탐라순력도의 41장중의 일부다 .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삼읍과 해안을 돌아가며 설치한 9개의 진(鎭)의 위치는 붉은색으로 표시하였다.
▲ 탐라지도병서
1709년 제작된 것으로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과 하단에는 제주도의 지리적 상황을 기록하였으며 중간에 제주도를 목판으로 새겼다. 맨 마지막 ‘강희기축(康熙己丑)’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 해는 1709년(숙종 35)에 해당한다. 간행자는 이등(李等)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제주 목사 이규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지도는 현재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 탐라순력도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을 출발하여 화북, 조천, 별방, 수산, 정의, 서귀, 대정, 모슬, 차귀, 명월, 애월을 돌아 귀환한 후 네 차례의 행사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제주, 정의, 대정 등지에서 경노잔치 광경(제주양노)을 그린 것이 3장면, 명승지를 그린 것이 5장면, 감귤봉진과 과거 등을 그린 것이 9장면이다.
『탐라순력도』는 의궤반차도식의 기록화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회화 사상 많은 기록화 가운데 『탐라순력도』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화는 드물다. 작자, 화공, 제작 동기, 연대가 확실하고 그림으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글로써 표현하고 글로써 부족한 부분은 그림으로 표현하여 18세기 초 제주의 실상과 문물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화북소 - 조천관 - 별방성 - 수산소 - 정의현 - 서귀진 - 대정현 - 모슬포 - 차귀소 - 명월진 - 애월진 등의 요새지와 그 주변의 명승 명소를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일주 하면서 시행했던 것으로, 제주목 성으로 돌아와 4차례의 행사를 더 치른 뒤 끝을 맺었다.
당시 제주의 지리, 풍속, 성곽, 군사 병력, 조점 제도, 공물 세제, 지방관 행차, 경제
생산, 비축 비곡, 건물 배치, 연례 행사, 군기 집물, 목장 규모, 병적 현황, 풍류 연락, 감귤 생산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도첩의 배접지로 이용된 것이 당시 제주목 병적부였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목의 건물과 고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건물의 복원과 각종 행사의 재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 제주 읍성, 옛기억과 마주하다.
과거 제주성내를 ‘대촌’이라 정하였고, 이래 대촌은 일도, 이도, 삼도 지역을 통틀었다. 이들 지역은 제주성안에 있었으므로 ‘성안’, 혹은 민간에서는 ‘목안’, ‘모관’으로 불렀다. 이에 지금의 삼도동인 제주목 관아지 일대를 성내의 중심으로 하여 제주사회의 구심 역할을 하는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에는 도청과 경찰서 등의 식민통치기구를 비릇 우체국, 금융조합, 일본인 상점 등 상업건축물들이 들어섬과 동시에 제주읍성이 철거되면서 제주성내의 전통경관이 비뀌어가게 되었다. 제주읍성내의 역사, 문화유산 그리고 그 흔적들과 마주하면서 잊혀져가는 제주읍성의 모습을 추억해 보자.
▲ 동문 (제중루, 연상루)
문루의 옛 이름은 제중루이나 이후 연상루로 고쳤다. 연상(延祥)이란 ‘상서로움을 널리 편다’ 의 뜻으로 연상은 통상 연상시(延祥詩) 또는 연상첩(延祥帖)등의 용례로도 쓰인다. 1808년(순조 8) 한정운 목사가 중수할 때 문루명을 제중루(濟衆樓)에서 연상루로 개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운주당(運籌當)
이곳은 유사시에 목사가 제주성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1565년(명종 21) 목사 곽흘이 동성을 확장하면서 높은 언덕에 장대를 축조하고 2년 뒤에 운주당을 건립하였다. 운주란 산가지를 늘려놓고 점을 친다는 뜻으로 천막 안에서 전략을 짠다는 뜻이다. 성안을 굽어 볼수 있는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용이 꿈틀거리는 형세라고 하였다.
▲ 남수각 하늘길 벽화 마을
남수각 하늘길 벽화 마을은 2015년 지역 주민과 작가들이 마을의 오르막길을 활용한 하늘길을 테마로 제작되었다. 총 거리는 220ⅿ로 과하게 길지도 가파르지도 않는 길을 오르다 보면 바다와 대지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풍농신 영등 할망을 비롯하여 제주의 풍경, 7080 추억의 거리 등 40여종의 다양한 벽화를 만날 수 있다.
막다른 골목에는 성터를 울타리로 이용한 가옥이 몇 채 있고 성 위에 집이 몇 채 있다. 6.25로 피난 온 사람들이 주인 없는 성 위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다보니 지금은 어엿한 가옥이 되었다. 제주 읍성 탐방에는 꼭 소개해 주고 싶은 곳이고 보존이 되어야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곳이다.
▲ 남수각(南水閣)터
제주성 남수문이 있었던 터이다. 남수각은 산지천 위에 만든 다리로 1599년(선조 32) 목사 성윤문이 북수구와 함께 이곳에 수구를 만들고 하상에는 홍예(무지개) 다리를 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홍수 때마다 파괴 유실되어 축조가 반복되다가 홍문만 축조하고 누정을 건립하지 않았다.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 뒤 복구 되지 않았다. 수구가 넓어서 쌍홍예로 만들어졌는데 이곳 풍경과 잘 어우러져 경치가 좋기로 소문이 났다. 이 주변은 국과원이 있었는데 영주십경에 나오는 귤림추색도 이곳의 풍경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제주시 도시 재생사업으로 이 일대를 제주성 모형을 만들어 공원화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 제이각(制夷閣)
제이각은 제주성의 남쪽 모퉁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남수구를 짖고는 성안의 형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누각으로 지었다. 이곳은 제주성안은 물론 산지천이 흘러 건입포에 이르는 물길 및 주변 언덕과 멀리 해안까지 조망 할 수 있다. 유사시 제주성으로 접근하는 외적의 침입을 파악하며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누각의 이름도 오랑캐를 제압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듯하다.
몇년전 이곳 치성과 같이 복원이 되어 위용을 자랑하며 제주성의 일부 복원된 오현단 위와 연결되어 치성 3곳과 같이 제주성을 연구하고 설명하는데 필수 코스다.
▲ 오현단
오현단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철훼된뒤 1892년(고종 29) 제주 유림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매년 배향하여 왔다.
기묘사회에 연루되어 유배된 뒤 사사된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1665년(현종 6) 판관 최진남이 그 묘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1682년 (숙종 8)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원 선생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그후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오현을 배향하였다. 귤림서원은 조선 후기 유학과 유교문화의 전당으로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했던 서원이다.
현재 경내에는 장수당과 향현사가 복원이 되었고 충암묘에 있었던 김정의 추모비를 비롯하여 송시열비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송시열의 글씨인 “증주 벽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가을이 되어 주위의 나무들과 조두석 (작은돌 다섯 개) 뒤에 서있는 검양옻나무와 어우러져 오현을 기리는 마음에 숙연해지며 운치가 있어 보인다.
▲ 남문(정원루)
제주 남성의 문으로 정원루(定遠樓)이다. 1512년(중종 7)에 목사 김석철이 지었다. 1705년(숙종 31) 목사 송정규가 중수하고 1780년(정조 4) 목사 김영수가 중수하였다. 정원이란 먼 곳까지 평정하다는 뜻으로 남문루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남쪽은 한라산, 동, 서, 북쪽 삼면은 바다여서 먼데까지 보여 이처럼 멀리까지 잘 다스리고 평정하겠다는 의미로 제액한 듯하다.
강점기인 1918년 문루가 훼철되면서 3문 중 가장 마지막에 헐렸다. 문루가 복원이 된다면 제 1 후보로 거론되는 곳이다.
▲ 한짓골
한짓골은 한길 〉 한질 〉 한짓 등의 큰 길의 방언형이다. 제주성 남문에서 북초등학교 입구까지 이어진 길로 가장 폭이 넓은 큰길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명칭이다. 한짓골은 각종 상공과 관련된 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이곳에는 1899년에 천주교 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이 들어서면서 포교의 거점이 되었고, 이후 신성여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양문화가 도입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한짓골은 제주 성안의 중심도로답게 여러 갈래의 골목길로 연결된다. 남문샛길과 이앗골, 병목골, 동불막골, 서불막골, 세병골, 두목골 등 옛길이 군데군데 끊길 듯이 이어져 있다. 해방 후에는 알 한짓골에는 남양방송, 소라다방, 사인자서점, 유일반점 등 문화 예술인들이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 몰항골 박씨 초가
남문에서 서쪽으로 난 좁은 골목이 중앙신협 사이로 이어진 길이다. 옆에 이아 찰미헌이 있고 지금의 재밋섬에는 조선시대 마구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길이 몰항골이라 했다고 한다. 이 골목은 성안의 세도가들이 살았던 골목이다. 이 골목 남문 가까이 200년 된 초가가 있다. 이문간, 안거리, 물팡, 쉼팡, 밧거리와 장독대, 우영밭 그리고 이문간 앞에는 하마석이 있다.
“멀구슬 나무아래 자리 깔아서 노인네들이 다 왔었어. 박종실, 박약국, 김약국네 등 어른들이 7, 8 모여 시조 부르면서 온종일 앉아 놀다갔다. 여기서는 바다에 배 들어오는 것도 다 보였어” (안할머니 증언)
전형적인 200년된 초가가 원도심 내에 남아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 집에는 안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몰항골’ ‘박판사댁’이다. 안할머니의 시아버지 박명효의 맏아들이 판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박명효는 1946년 초대 북제주 군수를 지냈고 부친은 조천진 조방장이였다. 박명효는 삼형제를 낳았는데 큰아들이 목포서 판사를 했고 둘째는 일찍 타계하고 셋째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큰 아들 판사의 아들이 법조계에서 유명한 000 특별 검사를 지낸분이다. 그야말로 명문 집안이다. 이 집이야말로 문화재로 보존이 되어야하고 원도심 문화유산 탐방의 핵심이다.
▲ 찰미헌 터
조선시대 이아동헌, 찰미헌은 판관이 정사를 맡아 보았던 관아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10년(순조 10) 손응호 판관이 중수하고 1897년(광무 10) 김희주 군수가 중수하였다.
察眉란 눈썹을 살핀다는 뜻으로 눈썹을 살펴서 백성의 마음을 잘 헤아려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1912년 자혜의원, 1946년 도립병원, 2001년 제주대병원 현재는 제주대 창업보육센타와 이아문화관이 개설되었다.
▲ 옛 제주극장 (현대극장)
1944년 공연장 시설이 전무하던 제주 지역에 무성영화와 유랑 극단의 공연장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정식 공연장으로 허가를 받아 공연과 영화 상영을 시작하였다. 1953년 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다시 개관하였다. 제주 최초의 영화관이다. 본래 이름은 조일 구락부였는데 이곳에서 각종 예술 단체의 쇼나 학생들의 예술발표회 군관민 행사 등이 치려졌는데 특히 4.3의 기폭제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좌익단체가 통합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가 2월 23일 치러져 이때 민전 위원장에는 남도당 제주도당위원장 안세훈, 관음사 주지 이일선, 제주중교장 현경호가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되어 3.1절 기념대회를 주도했다. 그런가하면 1947년 11월 2일 서북청년회(서청)결성식이 치러졌는데 위원장에 장동춘이 선출되어 4.3사건 기간동안 반공을 내세워 무소불위로 제주민들을 괴롭힌 악명 높은 단체로 기억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집회가 이곳에서 치러져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 성내교회 (성안교회)
개신교의 발상지로 1908년 2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소속 이기풍 목사가 내도하여 처음에는 칠성통에 임시 거처를 정하여 전도하다가 1910년 무예 출신들이 집무하던 출신청 관아를 철종의 사위 박영효(당시 유배인)의 주선으로 매입하여 1910년 성내교회를 세웠다. 이기풍 목사는 한국 최초 목사 8명중 한사람으로 1915년 조선총독부에 교회 설립 신고를 하였으며 교회 신도가 늘어남에 따라 제주 동부교회를 설립하면서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제주의 돌로 만들어진 건축으로 1974년 지어졌는데 옛 모습을 유지하여 유명한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 서문 (白虎루, 鎭西루)
제주 서성의 문으로 문루의 옛 이름은 백호루이다. 백호는 동서남북 네 방위중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따라서 문루 편액을 백호루로 정한 것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1773년(영조 49) 목사 박성협이 중수하여 鎭西라 편액을 고치고 친필로 제액을 썼다. 진서란 서쪽을 진압하는 요새지의 뜻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문루가 훼철되었다.
▲ 채수골 (추수골)
채수골 (추수골)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두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구한말까지 서문 밖에서 재배한 채소를 이 골목에서 행상들이 팔아서 생긴 이름으로 채수골은 숯과 땔감을 팔던 서문 샛길과 이어져 하나의 상권을 이루었다. 또 하나는 주사(고을의 행정을 맡아보는 관사)가 있어 이 주사의 명칭이 방언형으로 변하여 추수골 : 채수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일부 구간이지만 골목길 폭이 150cm 정도로 보존이 되어있다.
▲ 무근성
제주목관아지 서북쪽에 있는 옛 읍성으로 무근성이라는 지명은 탐라시대의 오래된 성(묵은성)이라는 의미로 조선시대의 제주읍성과 구별하기 위해 붙혀진 이름이다. 무슨성이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고적조에 “주성 서북쪽에 고성의 유지가 있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탐라고성(무근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사거리에서 북쪽의 해안가로 연결된 탑동로의 오른쪽에 있는 길로서 작은길(구린길) 사이를 무근성이라 한다.
▲ 서자복 (복신미륵)
서자복은 용담동 해륜사지 옛터에 보존되어 있는 석불 입상으로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옛 제주서의 서쪽에 성안을 수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서자복은 신장 273㎝, 얼굴 길이 135㎝, 신부 길이 138㎝, 신부 둘레 315㎝ 기단높이 66㎝, 기단 둘레 335㎝, 감투 둘레 135㎝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를 쓴 입상이다. 도포 같은 것을 입고 있는데 문양 표현이 없는 등 토속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고려때 해륜사,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8세기 중기 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경에 용화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서자복은 용화사 경내에 놓여 있다.
서자복 옆에는 높이 70㎝, 둘레 100㎝의 남근을 상징하는 석상이 있는데 여기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 온다
또한 서자복은 전염병과 같은 질병도 잘 막아주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서자복은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결합되어 길흉화복을 가져다주는 미륵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있다.
▲ 동자복
동자복은 서자복과 마주보는 동쪽에 세워져 있는데 동자복의 신장은 286㎝, 얼굴 길이 161㎝, 신부 길이 125㎝, 신부 둘레 662㎝로 규모가 크며 표정 역시 근엄한 느낌이다.
제주항 동쪽 동산에 고려시대 때 만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얼마전까지 주택이 있던 것을 철거하여 주변을 잘 정비하였다. 조선시대 무속 및 불교 타파정책에 의해 사찰이 파괴되어 원래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아 있다. 명절이나 제사 때 치성을 드리며 가끔 스님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기도 한다. 미륵에 치성을 드려 집안의 액운, 어린애의 질병, 근심거리를 해결하거나 득남한 사례가 많으며 한 집안의 조상신으로 숭배되기도 한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제주성의 수호신적 기능을 갖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동자복은 여성, 서자복은 남성으로 본다.
▲ 영주관터
제주목관아 안에 있는 조선시대 객사 대청이다. 창건 연대는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객사 대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고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여러차례 복원을 거듭했는데 일제강점기 출물당(인천문화당)에 1907년 설립한 제주공립보통학교(북초등학교전신)가 1908년 영주관 내 기와집 두 채에 교사를 마련하고 학교를 옮겼다. 그 후 영주관은 모두 헐리고 학교 건물이 들어섰다.
▲ 고씨 주택
일제강점기에 제주 전통건축과 일본의 양식을 결합해 지은 주택이다.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주택은 집을 지은 방식이 일본식이지만 제주의 전통적인 주택이 가진 안거리, 밖거리, 이문간의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우수해 당시 제주가옥의 변천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현재 제주도가 매입하여 각종 문화행사 및 전시공간으로 활용중이다.
▲ 북성 홍문 공신루
제주성 북수구에 있었다. 처음에는 죽서루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되고 목사 이원진이 1652년(효정 3)에 보수하면서 공신루를 세웠다. 공신루란 공북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처럼 사방의 백성들이 임금의 덕화에 귀의하여 복종한다는 뜻으로 「논어」 「위정」편에 “덕으로써 다스림은 마치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는데 뭇별들이 그에게 향하는 것과 같다”에서 유래되었다.
1908년 한정운 목사가 중건하면서 공신정으로 이름이 바꿨다. 그 후 홍수 때마다 무너지므로 목사 이예연이 1832년(순조 32) 누각을 삼천서당 동쪽 언덕으로 이전했다. 이때 문루를 없애고 홍문(무지개 다리모양의 문)만 세웠다.
이 홍문도 1927년의 대홍수로 무너져 내렸다. 당시 홍문은 제주성 동성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요소의 하나였다.
집필자 : 고 치 호, 박 명 순, 고 승 덕
▷ 참고 자료
제주목 관아 홈페이지(http://www.jeju.go.kr/mokkwana)
제주목 관아 전시실 자료
제주인물대사전, 김찬흡, 금성문화사 2016
탐라 성주 18호 고씨종문회 총 본부 2018
제주문화관광해설사 스토리텔링 모음집 1권(2011)
제주문화관광해설사 스토리텔링 모음집 2권(2014)
탐라순력도
〔홍랑의 200년 사랑 이야기〕
남원에 가민 이도령과 춘향의 이야기가 있주마는 그건 소설이고, 제주엔 그거보 다 더 절절ᄒᆞ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진짜로 이신디 이걸 ᄒᆞ끔 도시려 보쿠 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걸 반대 허는 집안이다 보난 , 반역죄로 귀양을 오게 된
스물일곱 살 조정철 선비와 자청 해영 뒷바라지를 했던 홍랑이엔 헌 처녀가
이서수다.
홍랑의 이름은 윤애이고 늙은 어멍이영 오라방이영 사는 몰락ᄒᆞᆫ 집안의 ᄄᆞᆯ인디,
적소를 들멍 나멍 젊은 선비를 보살피당 보난, 귀양다리엔 허주마는 인품도 좋고 학식 있고 뭐 하나 빠진게 어시난 오꼿 사랑 허게 된 거우다.
젊고 잘 생긴 청년광 얼굴이 곱닥ᄒᆞᆫ 처녀가 서로 좋아허는 건 당연ᄒᆞᆫ거 아니우꽈? 놈덜추륵 대놓고 ᄀᆞᇀ이 산 건 아니주마는 ᄄᆞᆯ도 낳고 행복 허고 좋아신디
불행은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오멍 시작이 되어수다.
하필이민 조정철네 집안이영 원수지간인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올게 뭐우꽈.
김시구는 부임ᄒᆞ자마자 조정철을 역적으로 몰앙 죽여불젠 염탐 허는디,
홍윤애가 놈이 몰르게 이 밤광 저 밤새에 적소를 요부륵 ᄉᆞ부륵 댕기멍
세답도 해주곡, 바당에 강 보말도 잡아당 안네곡 ᄎᆞᆯ래도 멘드랑
주는 걸 알게 되어 십주 마씀..
경ᄒᆞ난 홍윤애를 잡아당 문초를 ᄒᆞ는디, 조정철이 일곱 가지 죄를 지었젠허멍 시인 허게 해보젠 이실 직고 허라고 아맹 협박ᄒᆞ고 달래도, ᄆᆞᆫ딱 아니우다 모르쿠다만 ᄒᆞ멍 버티난 , ᄒᆞ당버천 곤장을 70대나 쳤덴ᄒᆞ난 살아질 거꽈?
경해도 홍윤애는 거짓 자백을 안ᄒᆞ고
‘죽이커들랑 죽이라. 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키어.’
그추륵 ᄆᆞ슴먹언 끝꺼지 조정철 펜을 들단, 아맹 해도 살지못햄직ᄒᆞ난
“공의 삶은 나의 죽음에 있수다.” ᄒᆞ멍 야게ᄃᆞ라전 죽어분거라예.
조정철이 옥중에서 홍윤애의 상여가 나갈 때, 해로성을 들으멍 피눈물로 쓴 시가 ‘정헌영 해처감록’ 이라는 시집에 일기 추룩 기록되어 이수다.
죄어신 백성 잡아당 고문핸 죽였젠, 입돋은 사름은 다 원성을 ᄒᆞ난.
이 사건이 조정에꺼지 알려졌주 마씀.
경허난 암행어사가 내려왕 제주 목사 판관 현감 다 갈리고 조정철은 목숨을 건졌 젠 헙디다. 그루 후제 쉰다섯꺼지 귀양 살던 조정철이 관직에 복귀 해연 7년만에 제주 목사로 부임을 해시난, 정말로 이도령 춘향이는 저래가라 ᄒᆞᆯ일 아니우꽈?
조정철은 홍윤애의 무덤에 엎더정 통곡 허멍 묘를 단장ᄒᆞ고 이녁냥으로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완 원혼을 달래주었젠 헙디다. 홍윤애가 죽기 석 달 전에 태어난 ᄄᆞᆯ도 그때사 만나시난 그 심정이 어떵해시쿠과? 그 ᄄᆞᆯ은 벌써 서른 한 살된 청상 과부였젠허난 또 그 설움이 얼마나 복받쳤을거우꽈?
그 때 홍랑의 무덤은 지금의 전농로 불교회관이 있는 자리에 이서났젠 헙데다.
몬저 죽은 언니도 서방이 죽으난 따라 죽은 열녀 라부난 같이 묻었젠 마씸.
나중에 제주공립 농업학교가 들어서멍 애월읍 유수암리로 천리를 해신디,
후세 사름덜은 홍랑의 넋을 기린다고 묘터 근처를 홍랑로엔 이름도 지었고,
유수암리에는 무덤이영 홍의녀지묘라는 비석이 이제 꺼장 남아이신디,
비문에는 이런 시가 있수다.
옥같던 그대 얼굴 묻힌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이 추모시는 ‘유배문학의 꽃’으로 알려지고 국문학과 역사를 연구ᄒᆞ는 사름덜이
지금도 홍랑의 묘를 찾아온댄 햄수다.
그루 후제, 조정철은 홍랑의 은혜를 갚으젠 좋은 일도 하영 허멍 애쓰단, 일년 만에 동래부사가 되연 떠났주마는, 옛날 정을 생각허멍 제주 사름덜을 여러모로 도왔젠 ᄒᆞᆸ데다.
경헌디 두 사름의 사연은 이디서 끝난 것이 아니고 또 이수다.
1978년 신문에 이런 사연이 멫 ᄎᆞ례 소개가 되난, 조정철 집안인 양주 조씨 종친회에까지 알려전 종친회장 등이 홍랑의 묘를 직접 ᄎᆞᆽ아온 일도 있고, 나중에 종친회의 결의로 경북 상주시 함창에 있는 함녕재 사당에 홍랑을 모셔서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을 하고 배향을 했젠 헙디다.
홍윤애가 비명에 죽은 지 216년 만에 양주 조씨 집안 사름으로 첫 시께를 지내게 됐젠 말이우다.
또 해마다 의녀 홍윤애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다간 사랑에 대한 가치와 문학이 주는 감동을 함께 나누멍 추모제도 열고 있젠 ᄒᆞ난 게나 저나 홍윤애가 제주 바당을 넘엉 세계인이 사랑하는 여성으로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해 보쿠다
집필자 : 고 승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