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金用磯. 1903,7-1956,10.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공은 추당 김기환의 차남으로 다산리 차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 법정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강진군의 초대군수(1948,3-1950,5)를 역임하고 이어 여천군수와 전라남도 교육청 학무과장을 역임하였다.
김용길(金用吉. 1866 ∼ ?. 몽탄면 다산리. 나주인.)
공은 어려서부터 의기남아로 힘이 장사였다. 1909년 기유년에 이 지방의 장사 수백 명을 모집하여 헌병대와 일로읍 부흥정에 설치된 일본헌병 병참소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당시 부흥정에 파견되었던 일본 헌병대장이 김용길의 의병에게 주살되고 병참소를 불 지르니 불빛이 하늘을 찌르고 조선독립을 외치던 함성은 온천지를 진동하였다. 이 거사를 통하여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군자금과 지원병도 확보할 수 있어 일본헌병대는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 김용길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몽탄면 사창리에 헌병대가 파견되고 경술국치 후로 일본경찰이 주둔하게 되었다. 그때 거사에 참여했던 해제면 신정리의 김익수는 사창에서 체포되고 김용길은 피했었다. 다산리 김우근씨에 의하면 공은 의병봉기 이전부터 총을 갖고 있어 그 총으로 물고기 잡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헌병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할 때는 백립을 눌러 쓰고 포위망을 빠져나가 그의 담대함에 놀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에는 끈질기게 추격하는 헌병의 눈길을 피해 상해로 갔으며 들리는 말로는 임시정부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다.
김용무(金用茂. 1891 - 1957.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공은 한학자인 김기환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고, 1915년 보성 법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제8회)하였다. 이어 일본 주오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주오대학 법과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후 1922년 일본 고등고시(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에서 판·검사로의 진출을 거부하고 1923년에 귀국하여 서울 인사동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활동하였다. 김병로, 이인, 허헌 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하였으며, 의열단 김상옥 사건, 신간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및 광주학생의거 사건 등의 변호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외에 대민무료변론도 열심히 하여 성망이 높았다. 특히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 신간회사건, 1926년 광주학생운동 등 민족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던 애국지사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무료 변론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또한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백관수 등과도 교분이 두터워 조선의 5인이라고 불리우며 일제도 함부로 못할 정도였으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장(1933 - 1935)을 역임하고 중앙학원, 동아일보 취체역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창립30주년기념사업회 실행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김성수·송진우·김병로·이승우·최두선 등 9인위원의 1인으로 선출되고, 1939년 보전학회(普專學會) 회원으로 사학진흥에 큰 몫을 하였다.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문교부장에 선임되었다. 당시 문교부원 양원모, 양주동, 현제명, 신도성 등과 정부수립에 즈음하여 대한민국 교육기본정책의 입안에 기여하였다. 미군정하에서 대법원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장직을 맡아 우리나라 민주헌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재임기간 중 법원조직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등기와 호적사무 등이 법원 소관으로 정해지고, 대법원에 법원행정처를 두며, 대법원장이 사법행정에 관하여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는 등의 대한민국 사법체제 골격이 이때 거의 다 정해졌다. 당시 대법원 판사는 서광설, 심상직, 이인, 이종성 등이었다. 대법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6년 1월 이른바 '김계조 사건'으로 젊은 판사들과 충돌하였다. 김용무 대법원장이 '김계조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서울 지역의 현직 판검사들 여러 명이 대법원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군정청 법무국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1946년 4월 2일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표하였고 1946년 5월 19일 조용순이 대법원장직을 이어받았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일제하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김성수, 백관수 등과 한민당을 창당하고 무안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0여일 후 6.25전쟁의 발발로 국회에서 수도사수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피신을 하지 못하고 북으로 강제납북 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1958년 5월 18일 병사하였으며 평양 용성구역 재북인사의 묘역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생으로 제헌의원을 지낸 김용현은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용옥(金用沃. 생몰년 미상. 일로읍 죽산리 572. 나주인)
공은 일로읍 죽산리 중농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일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동경시 품천구 사립 고륜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중퇴했다. 이어 1936년 동경시 신전구 사립 준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공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진보적인 사상에 물들어 고향 주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펼치고자 하였다. 1937년 공의 집에서 동지인 전종진과 뜻을 모으고 “서로 제휴하여 고향 농민을 계몽, 지도하여 차제에 의식 앙양을 도모하고 동지를 획득하여 조직체를 결성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의 실행을 위하여 야학을 개설하여 의식화 시키려고 하였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김용현(金用鉉. 1914,5 - 1950,6.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한학자인 김기환의 둘째 아들이며 군정시 대법원장이었던 김용무의 동생이다. 어려서 서울로 올라 가 서울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중앙중학교를 거쳐 형과 같이 일본중앙대학교 법과(일본 우에노 미술대학 졸업이라는 주장도 있다)를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 정치인이 되어 한국민주당 무안군당 위원장을 맡았으며 무안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시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대체로 형과 같이 강제로 납북되었다고 전해진다.
김우명(金禹明. 자-효원, 호-해강. 1894-1944. 몽탄면 다산리. 나주인)
공은 성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품성이 방정하고 매사에 공명하고 정대하여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제2대 몽탄면장을 역임했다.
김우백(金禹栢. 1875 - 1904, 11, 19)
동학농민군으로 고막원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방면된 후 후유증을 앓다 1904년 사망하였다.
김우복(金禹福. 자-병후, 호-해은. 1899-1972. 몽탄면 사창리 사창. 나주인)
공은 무안향교의 전교와 유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몽탄면장을 역임하였는데 면장 재임시 최우수 면장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공이 주민들에게 봉사했던 사항이 송덕비에 새겨져 있는데 사창리 사동마을 입구에 있다.
김우신(金禹信. 자 - 汝正. 1867 - 1894. 12. 8.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김우신은 김여정으로 더 알려졌으며 동학접주인 김창구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창구와 삼촌인 덕구 영구와 함께 고막원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고막원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잠시 몸을 피하려고 집에 들렀다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토벌대에 붙잡혔다. 그는 12월 8일 아버지와 삼촌인 덕구와 함께 무안관아에서 처형을 당했다.
김원(金遠. 자-희구. ? -1586. 무안읍 성동리 대사동. 나주인)
나주김씨 무안입향조인 김수남의 둘째 아들이며 취암 김적의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되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언적의 문하로 후일 봉직랑 성균 직강에 승진하였으며 당시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 수은 강항등과 교류하며 문명을 떨쳤다. 공명을 이루려는 마음을 즐기지 않았으며 경사를 즐겨 읽었다. 유일로 천거되어 영암과 무장의 교수를 지냈다. 선현들의 덕을 본받아 선정을 베푸니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왕이 이를 알고 성균관 직강을 제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조에 야인 나탕개가 육진에 침입해 나라에 우환이 일자 오랑캐를 막을 다석가지 계책을 올렸으나 당론으로 배척되어 채택되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율곡과 우계 등 뛰아닌 학자들이 계속 물러나게 되자 후일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고 무안으로 돌아왔다. 후일 고경명 장군이 근왕길에 “예전에 친구의 어융책 시행이 지금까지 쓰이지 않더니 외구가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 이에 이르렀도다.” 라고 탄식하였다. 공에게는 인수·의수·예수·지수·신수 다섯 아들과 4녀가 있었는데 그중 첫째 딸의 사위가 진주싸움의 영웅 최경회이다. 김예수, 김지수, 최경회 세 사람이 공신록에 올랐으며 일휴당 최경회와 김예수가 임진왜란시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했다. 논개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진 충의공 최경회는 화순 출신이다. 36세에 과거 급제, 46세 장수현감을 지냈으며, 58세에 16세의 논개를 부실(첩)로 들였다.
김재해(金在海. 자-성여, 호-낙헌.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취암 적의 후손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다. 맛있는 것을 보면 먼저 어버이께 드리고 좋은 일이 있으면 먼저 어버이께 말씀 드려 기쁘게 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여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가 끝나자 비로소 죽을 먹고 물을 마셨다. 여막은 쑥밭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공의 효성이 널리 알려져 임금이 ‘정려복호’를 내렸다. 수자통정에 제수되었다.
김적(金適. 호 - 취암. 1507 - 1579.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공은 문충공 대경의 칠대 손으로 나주김씨 무안입향조인 김수남의 장남이다. 몽탄면 사창리에 터를 잡으면서 취암공파를 열었다. 서기 1545년(인종 원년 을사)에 이른바 사화가 일어나자 영달의 뜻을 버리고 권귀의 문을 멀리 하였다. 청현으로써 공을 유혹하였지만 일체 사절하고 무안에 숨어 오로지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명종 초 홍문관전한을 배하고 나아가 김제를 다스리게 되었다. 서기 1555년(명종 10년 을묘) 5월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왜적 육천여명이 70여척의 병선으로 해남의 달량진(達梁津:지금의 북평면 남창)과 진포(梨津浦:북평면 이진)에 상륙해 노략질 한 사건이다. 당시 왜군들이 절도사 원적, 장흥 부사 한온, 영암군수 이덕견 등을 살해하고 가리진 장흥 강진 등 도읍을 공파하여 영암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전주부윤 이윤경을 전라도순찰사에 임명하고 이를 토벌케 하였다. 이에 공은 순찰사의 중군이 되어 분전 끝에 적을 대파하여 대공을 세웠다. 을묘왜변의 공신이 되어 광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진 교육에 여생을 마치니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582년 호남유림들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취암서원을 세워 향내 유림 향사로 거행한다. 취암은 마을 뒷산인 우명산 정상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김적의 다섯 아들 중 장남인 23세 김충수(1538 - 1597)가 선무원종공신 1등, 셋째인 김덕수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돼 우산사에 배향됐다. 정유재란 때 아들 김충수와 함께 순절한 며느리 금성나씨에게도 정려가 내려졌다.
효자김제은(金濟殷. 초명-한옥, 자-군즙, 호-학고. 1778-1830. 몽탄면 사창리 사창)
공은 효자인 지암 김약화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특히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는데 노사 선생이 공을 보고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공은 살아생전 잘 모시지 못했다 하여 시묘살이를 했는데 비린 것은 입에 대지 않음은 물론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 하여 정성을 드리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 하였다. 이러한 공의 지극한 효성에 호랑이도 감동하여 저녁이 되면 산에서 내려와 여막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부모에 대한 정성이나 생활하면서 하는 행동 등이 마치 공자가 살아서 행하는 듯한 생각을 갖게 해 주민들은 ‘무안의 공자’라고 불렀다. 공의 효행이 나라에도 알려져 증 사헌부 감찰과 정려를 받았다. 1993년에는 무안삼강록 효자편에 공의 효행이 실려 있다.
김주방(金柱邦. 자-경보, 무안읍 성동리. 나주인)
공은 직강 원의 현손이다. 기개가 빼어나 의리를 좋아하고 영명을 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자 문득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을 수 있을 때 내가 벼슬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찍부터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연구하며 북벌에 몸을 바치려고 했다. 하지만 북벌의 계책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음을 알고 마침내 산림에 은거하였다. 공은 주변에 항상 말하기를 “선비로서 장수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활을 조여주기만 하고 늦추어 주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손자고이’ 한편을 저술했다.
김지수(金智秀. 자-이간, 호-죽헌.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蔭仕로 군기시 봉사를 거쳐 군자감 직장이 되었고 만력 계묘년(1603년)에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에 이이첨의 폐모론에 반대하고 임해군 영창대군이 피살됨을 보고 벼슬을 놓고 귀향하였다. 인조 2년(1624년) 평안병사인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초야에서 분연히 궐기하여 웅진에 이르러서 몽진하는 임금을 호종하였다. 금남공 정충신이 안주방어사로 개성에 이르러 공과 함께 이괄의 반란군을 안주에서 대파하였다. 이 전공으로 인하여 진무원종 2등훈에 책록되었다. 우산사에 배향되었다.
김창구(金昌九. 자-應文. 1849- 1894.12.08. 몽탄면 다산리 차뫼. 나주인)
김창구는 김응문으로 더 알려진 동학접주이다. 공은 몽탄면 접주로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사람답게 사는 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삼례집회와 보은집회에 참여하면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해서 최찬모 김성권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동생인 영구와 덕구 그리고 아들인 우신과 더불어 고막원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몽탄면 사창리와 다산리 주변에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무안동학희생자의 상당수가 김창구접주의 주변에서 나왔다. 하지만 고막원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잠시 몸을 피하려고 집에 들렀다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토벌대에 붙잡혔다. 이어 12월 8일 동생 덕구와 아들 우신과 함께 무안관아에서 처형을 당했다. 세 형제와 父子가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여 죽음을 당한 것이다. 같은 마을 주민인 金成權은 접주 김창구의 휘하에서 고막포 전투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풀려났으나 귀가 도중 노상에서 죽었다 한다. 부자 형제가 다 함께 농민전쟁에 참여하여 희생을 당한 경우도 족보와 관변문서에 나타난 것도 드문 일이다. 1894년 12월 8일 집안사람들이 창구의 효수된 머리를 모셔와 남몰래 선영이 있는 몽탄면 봉산리 앞산인 월구정(月鉤頂)이라 부르는 둔덕에 애기무덤 같은 작은 무덤을 만들어 투장(偸葬, 몰래 쓰는 장례)하였다. 동생 덕구도 이런 방식으로 장사지냈다 한다. 지금도 덕구 묘는 선영 아래 애기무덤처럼 봉분이 아주 작아 전후 사정을 듣지 않고는 무덤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후 후손들과 동학기념사업회에서 묘지를 발굴하여 유전자 확인을 통하여 창구의 잘린 머리임을 확인한 후 2022년 5월 4일 고향인 차뫼 마을 앞에다 ‘김응문일가 현창비’를 세웠다. 마을주민들은 이러한 김응문 일가의 정신을 살려 오래 전부터 매년 6월 6일을 동학참여자의 현창일로 정하고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창구는 나주김씨 무안군 입향조인 김수남의 후손으로 몽탄면 다산리 차뫼 마을 태생이다. 나주 김씨는 몽탄면 사창리와 다산리 차뫼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주변의 산들은 거의 나주 김씨의 선산으로 그 규모가 아주 넓다. 일제강점기에도 김씨 일문이 3백여 호 가량 살았다. 1915년에 간행된 나주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창구의 아버지는 光綬인데 호가 茶隱으로 1827년(순조 27)에 태어나 1870년(고종 7)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茶隱"은 마을 이름인 차뫼[茶山]에서 보듯이 이곳에 차를 많이 재배하는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창구는 광수의 맏아들로 1849년(헌종 15)에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차뫼 마을 어구에 있다. 차뫼 마을은 무안의 명산인 연징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생가 터와 돌담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대지가 2천 평 정도 되었으며 뒤켠의 대밭은 1천 평쯤 되었다. 원래 본채는 10칸이 넘는 대가였으나 지금은 5칸짜리 집으로 줄어들었다. 후일 그의 집터에서는 엽전과 화살촉 창 칼 탄환 등 동학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각종 무기와 자금 등이 발견되어 동학혁명에서 그의 위상과 활약상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의 넷째 아들 禹業이, 사후 43년 뒤인 1937년에 쓴 가장(家狀)에 "感患으로 여러 자식을 버렸다"고 짤막하게 기재하였다. 그리고 끝에 "일찍이 뭇 명망을 지고 당세에 쓰였더라면 크게 사업을 베풀었겠으나 운명이 소조하여 오래 사시지 못해 경륜과 포부를 백가지 중에 하나도 펴지 못하셨다. 또 시문도 잘 간수하지 못해 그 가언 탁행을 인몰해 전하지 못하였다"고도 썼다. 또 무안향교에서 1946년 김창구의 부인 노씨의 효행을 기리는 통문에서는 노씨의 처지를 말하면서 김창구의 죽음을 두고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도 붕성(崩城, 성이 무너지듯함)의 통한을 겪었다"고만 썼다. 이처럼 그의 죽음을 두고 추상적인 문구로 표현하면서 비명횡사하였다고 암시하였다.
김철서(金喆瑞. 자-명여, 호-관포. 나주인)
성균직강 원의 후손이다. 문장이 법도에 맞고 아담하고 경술은 순수하고 발랐다. 일찍이 한양으로 가서 이름난 인사를 반가이 따라다니며 배웠다. 향시에 6등으로 합격하고 문과 초시에 12등을 했으나 끝내 문과 합격은 하지 못했다. 이때 공은 천명을 억지로 할 수 없음을 알고 과거보기를 그만 두고 한양에서 영재를 키웠다. 어진 재상과 공경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제자와 주변사람들이 공을 충신과 재덕으로 소장을 올려 천거하자 왕실에서는 초계군수를 제수했다. 하지만 공은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내가 본시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았는데 관직을 제수함은 어찌 그릇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며 끝내 사양하고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김충수(金忠秀. 자-중심, 호-귀암. 1538∼1597. 몽탄면 사창리. 나주인)
공은 나주김씨 무안입향조인 수남의 손자요 사창마을 입향조인 適의 아들이다. 김충수는 21세 때인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이후 경서에 통달하여 미암 유희춘과도 친교가 두터웠던 사실이 [미암일기]에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남 나덕원, 나대용, 임선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아우인 진사 덕수와 함께 수백 석의 군량과 다량의 군수물을 모아들여 의병진의 전력증강에 크게 공헌 하였다. 당시의 군공으로 온양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머지않아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자에게 내린 공신 칭호)일등으로 록훈되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적들은 전라도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몰살시키려다 오히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했다. 왜적들은 명량해전 참패 분풀이를 전라도 해안지역 조선백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다. 진도·해남지역에 상륙해 조선의 백성들을 무차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했다. 코를 베어 전공으로 삼고 여자들은 겁간한 뒤 죽이거나 끌고 갔다. 왜적들은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암·무안·함평·남평 일대를 노략질했다. 왜적들이 들어와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고 있었던 김충수 선생은 왜적들을 물리치는데 한 몸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향민 1천여 명을 모았다.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호미와 낫을 들고 의병이 됐다. 김충수 선생 역시 무인이 아니었지만 칼을 차고 의병들을 지휘했다. 호남의병 활동 중 대굴포 전투에 관한 김충수 선생의 행장과 보평산 전쟁기록에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집안에서 심부름하는 사람과 마을 사람은 물론 인근의 뜻있는 장사 천여 명을 규합하여 관군을 돕자 길을 떠나려던 차에 적의 배가 몽탄강을 거슬러 올라오니 공의 부인 나씨와 두 어린 아들을 몽탄강 사포나루 위 대곡산에 은신케 하고 병졸을 사포나루에 모이게 하여 준비된 배에 올라 적을 맞아 교전하는 잠간 사이에 수많은 적의 배와 군사가 강을 덮어버려 할 수 없이 대곡산으로 후퇴하여 진을 치고 싸웠으나 사로잡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왜적의 전선이 영산강 하류인 몽탄강 하류 쪽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가족들을 대곡산(大曲山)에 머물게 한 뒤 상류에서 배를 몰고 가 왜적들과 싸웠다. 오랫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수도 많고 싸움에 능한 왜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대곡산으로 후퇴해 싸웠으나 결국 김충수 의병장과 아내는 그곳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1천여 명의 의병들 역시 모두 그곳에서 살육을 당하거나 왜적들에게 포로가 됐다. 정유재란 당시 몽탄강 유역은 목포에서 무안, 함평, 나주, 광주로 진입하려는 왜적과 이를 저지하려는 호남의병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왜적들에 맞서 김충수와 김덕수 형제, 정기수, 송박, 박종룡이 의병을 일으켜 조선과 이 땅의 백성들을 지키려 했다. 몽탄강 유역은 호남의병사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곳이다. 함평군은 지난 2016년 6월 21일에 김충수 의병장이 순절한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함평군 학교면에서 나주시 동강면으로 건너가는 동강교 못미처 도로변에 있다. 『나주김씨대동보』와 나주김씨세거향비에 의하면 김충수 의병장의 두 아들 천성(나주 김씨 24世)과 만성은 왜적에게 끌려가다 직산전투에서 패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공주 부근에 정착하였다. 나이도 어리고 고향인 무안까지는 길이 멀어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정착한 것이다. 그 뒤 장남 김천성은 공주 견산촌의 전주 최씨와 결혼해 탄천면에 정착했고 만성 역시 충남 보령과 홍성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무안김씨로서의 가계를 이어왔다. 나주 김씨 문중은 김충수 의병장 두 아들의 생사여부를 몰라 김충수 의병장의 대가 끊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족보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충청도 공주와 보령 일대에서 나주 김씨 중 상당수가 천성과 만성의 후손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내 금성나씨는 松齋 羅世纘의 손녀인데, 공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몸으로 감싸다가 함께 적의 칼에 죽음을 당했다. 아내 羅氏는 旌閭를 받았다. 1582년에 창건한 취암서원에 配享되었으며 고종 조에 민영목이 시장(諡狀)을 찬술하였다.
김통해(金通海. 자-도능, 호-천와. 나주인)
취암 적의 후손으로 호암처사 경삼의 아들이다. 학문은 넓었으며 경사를 두루 갖추어 문장을 지으매 그 책이 시렁에 가득 찼다. 특히 맹자와 한유의 문장에 더 뛰어나 독특한 변론을 얻었으며 경학의 이치에도 넉넉함이 있어 깊은 경지에 들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문장으로 도의를 깨우쳤다.’라고 칭찬했다. 향약연의와 의례경전의 뜻을 해석한 ‘천와집’이 있다.
김형구(자 - 자칠, 호 - 성사. 1847 - ?. 몽탄면 다산리 용뫼. 나주인)
공은 자질이 뛰어나고 문장과 덕행이 우수해 당시 사우의 추앙을 받았다. 공의 나이 52세 때부터 71세 때까지 충청도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 서재에서 있었다. 후일 스승인 의병대장 최익현이 구국의 깃발을 올리자 지기인 김명구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거의를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해 공과 김명구는 다리가 부러지고 최익현 선생은 순창 거의시 붙잡혀 대마도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순절하였다. 공은 다시 향리인 몽탄면 용뫼 마을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다가 타계하니 문인들이 유적비를 세웠고 성사유고 1권을 발간하여 후세에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