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솔문학 게재> 추억의 재래시장 정 금 자 세월 속에 지나간 재래시장의 풍경은 향기로운 추억이다. 재래시장은 돈이 돌고 곡식이 돌고, 인심도 돌아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조용하던 장터에 장이 열리면 물건값 깎는 에누리, 손에 잡히는 대로 더 넣어주는 덤은 마트를 애용하는 도시인에게는 낯선 단어이다. 그러나 시골 오일장에 가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말이다. 지금도 오일장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에누리와 덤 같은 전통 오일장의 정겨운 풍경을 경험할 수 있다. 오일장은 닷새마다 열리는 장으로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우리나라의 독특한 상거래 문화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상설매장과 인터넷 쇼핑이 늘면서 오일장의 매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 시골엔 오일장이 건재하다. 나는 장날이 되면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장터로 달려갔다. 읍내 외할머니 댁에 들려 어머니를 찾았지만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는 제삿날이 다가와 제물이 필요하거나 가족들 생일이 가까워 미역을 준비하려고 장 나들이를 하셨다. 잡곡을 머리에 이고 십 리나 되는 장터를 찾으셨다. 아버지가 주시는 돈이 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것들을 마련하기에 부족했나 보다. 잘 다니시던 포목점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듯 어머니의 허리를 보듬어 앉고는 반가워 웃는다. 어머니는 과년한 여식이 있으니 옷감 파는 포목상회나 한복집에 자주 들리셨다. 필요한 옷감을 하나씩 장만해 장롱 속에 차곡차곡 모으며 혼수 준비를 하신다. 어머니가 과자를 사 주시면 그때는 과자 한 봉지에도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아직 볼일이 많이 남았는지 장 구경을 하고 오라 하셨다. 장날은 관습이자 무언의 약속으로 여기저기서 모여든 장사꾼들은 땅 위에 난전을 펼친다. 할머니들은 농사지은 채소를 가지고 나와 팔기도 한다. 장터만큼 계절을 그대로 품고 있는 장소가 또 있을까? 그 계절에 생산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이 장터는 속임수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소풍 나오듯이 자리 잡고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앉아있다. 앞에 놓인 것이라고는 돈 될 것도 없는 그야말로 푸성귀뿐이다. 파 몇 단, 물 뿌린 보자기를 덮은 싱싱한 열무, 시금치, 호박, 버섯, 도라지 등 잉여농산물을 팔아 용돈도 벌고 시간을 보내고 계신듯하다. 물건값을 에누리해 달라는 손님에게 웃으면서 덤을 넣어주는 할머니들이 보인다. 정이 오가는 이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네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곳에는 삶의 갖가지 사연들이 있어 이야기가 풍성하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흥을 돋아 준다. 튀밥 틔우는 “뻥이요”하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소리,옛날 삶의 흔적과 시끌시끌한 소리,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이 전통시장의 꽃처럼 피어난다. 구경꾼이 많이 둘러선 곳에는 영락없이 원숭이가 재주를 부린다. 먹을 것을 던져주면 잽싸게 받아먹으며 고맙다는 인사도 한다. 원숭이가 부리는 재주를 보며 구경꾼들은 폭소를 터트린다. 우 시장 근처에는 팔려 간 송아지를 찾는 어미 소의 애끓는 음매 소리,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장마당의 흥미 거리며 상징이 아니었을까? 옆에는 새끼염소 한 마리가 나무에 매여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아름답고 투명한 눈과 마주쳤다. 총명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시장에 모여 음식을 즐기고 담화를 나눴다. 장마당에는 빈대떡 부치는 냄새, 해장국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지만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근소한 생활비를 얻기에 골몰하는 할머니들이 해장국을 먹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장날 중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해 넘어갈 때 파장에 하는 떨이다. 팔다 남은 생선을 갈무리하던 장사꾼이 생선을 들고 싸다며 큰 소리로 “떨이요 떨이”하고 외쳐 대는 시간이 되면, 온종일 버티다 죽어간 생선들이 급속도로 팔려 나간다. 흥미롭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왁자지껄한 시장 구경은 재미있었다. 옛날 재래시장은 사람들이 숨 쉬는 공간이기도 했다. 버스가 잘다니지 않던 시절이다. 하늘에는 성근 별들이 알 수 없는 모래성으로 모여 든다. 어머니는 장짐을 머리에 이고 나는 책가방을 메고 길을 걷는다.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미있었던 일, 필요한 것을 사 달라며 어리광도 부린다. 어머니와 이야기는 즐겁고 끝이 없는데 어느새 집이 가까워진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장날을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곤 했던 일을추억하며... 몇십 년 만에 추억의 오일장을 찾아갔다, 장날인데 한산해 웬일인가 했다. 시장을 다른 장소로 이전했다고 한다. 새로운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날 시장은 자동차와 사람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는데 새로운 시장은 잘 정돈되고 질서가 있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코로나로 가려진 어두운 표정이 있는 듯하다.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온 동네를 뒤덮은 탓일까. 새로운 시장의 싱그러움이 보이지 않고 쓸쓸한 느낌이다. 시장 안에는 골동품부터 약재, 잡화 옷가게, 생선가게를 비롯해 없는 것 없는 만물상처럼 느껴진다. 재래시장에는 마트에서 살 수 없는 물건들이 있어 사람들이 재래시장을 찾게 된다. 시장에서는 현금만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신용카드도 받는다.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좋은 변화가 있었다. 시장을 돌다 보니 줄을 서고 있다. 우리 콩으로 만든 따끈한 손 두부를 살 수 있어 반가웠다. 두부를 사고 돌아서는데 “채소도 사 가세요”한다. 아기를 업고 빙긋이 웃고 있는 이주여성이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사면서 밝은 미소로 삶의 텃밭을 일구어가는 아기엄마 모습이 정겹고 대견하다. 그들이 이국땅에서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시장을 돌면서 양말 몇 켤레, 털신, 고무장갑 등을 샀다. 꼭 필요해서 라기보다 그냥 사주고 싶어서다.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돌아다 보니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잘생긴 아저씨가 아귀찜 먹기 딱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오늘을 놓치면 후회한다며 열변을 토한다. 자녀들과 같이 먹고 싶은 생각에 큰 것으로 한 마리 달라고 했다. 꽁꽁 언 아귀를 기계로 먹기 좋게 잘라서 포장도 두 겹으로 잘해 주어서 고마웠다. 시장은 그 시절 삶의 물결을 반영하는 듯하다, 영세 인들의 거친 숨결을 통해 삶의 현장을 배울 수 있기에 살아있는 삶의 배움터이기도 하다. 요즘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재래시장이다. 고향의 재래시장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재래시장 류 근 홍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먼발치에서 얼핏 보아도 오늘이 장날이다. 계절 속 깊이 무르익은 가을 5일장인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롭다. 무질서 한 듯 붐비고 다소의 소란스러움과 불편함이 오히려 재래시장만의 특유한 멋이며 맛이다. 재래시장 5일장은 물건을 사고팔기 이전에 역시 사람구경 사람냄새가 으뜸이다. 시장사람들 모두는 푸근한 인심과 인정으로 맺어진 훈훈하고 정겨운 한 가족이다. 긴 천막의 시장 통 양옆으로 한여름의 푸르름을 잘 견딘 붉은 과일들이 한자리에서 서로가 고운 가을빛을 자랑한다. 윤기가 흐르는 짙 노란 크고 작은 늙은 호박들을 보니 옛날 어린시절에 어머니가 영양(營養)별미라며 자주해 주시던 콩을 넣은 호박범벅이 생각난다. 오늘 괴산5일장에는 역시 괴산의 특산물인 청결고추가 단연 인기이다. 시기적으로 김장철을 앞둔 터라 외지에서 온 사람들과 자동차로 읍내 전체가 붐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괴산하면 민물매운탕과 올갱이 해장국이 유명했다. 이제는 중국산 올갱이와 변해가는 세월의 입맛에 밀려 빛바랜 간판과 썰렁한 식당만이 옛 명성이라도 유지해 보려는 듯 힘겨워 보인다. 복잡한 시장사람들 틈새로 조그만 손수레를 앉아서 밀고 다니며 생필품잡화를 파는 앉은뱅이 장애인아저씨가 지나가자 모두가 길을 내어준다. 이곳 장터의 오랜 터줏대감인 듯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상인들과 다정하고 친숙하게 눈인사 손인사를 한다. 장애인이면서도 붐비고 복잡한 인파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아저씨의 배려적 노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많은 상인들 틈에 노란 모자를 쓴 키 작은 젊은 여자 상인이 내 눈에 크게 뜨이기에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캄보디아에서 시집왔다는 결혼이주여성이 시어머니와 함께 채소 노점상을 한다. 겉으로는 낯설고 어설퍼 보이지만, 장사 속 대화에는 이미 영락없는 우리의 농촌아낙이며 야무진 장사꾼이다. 결혼 7년차라는데 잘 웃고 애교 있으며 우리말도 상냥하게 잘하는 두 아이의 엄마란다. 가을날씨에도 목도리까지 하고는 날씨가 춥다며 엄살이다. 이제는 손님 목소리만 들어도 채소를 살지 안 살지를 알 정도라고 하니 장사수완(手腕) 또한 보통이 아닌 듯하다. 그는 장날이 즐거운 소풍 같고 재미있어 기다려진단다. 캄보디아의 재래시장보다도 더 좋단다.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색의 반장화 같은 신발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니 2년 전에 친정 캄보디아에서 친정엄마가 사준 거라며 자랑이다. 옆에서 말없이 콩을 까고 있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바라보면서“아이구 어른한테 또 까부네”라고 핀잔 같은 칭찬을 한다. 그런 외국인 며느리가 대견하고 사랑스러운지 나를 쳐다보며 찡그리는 눈웃음을 짓는다. 다문화 고부간이지만, 딸 같고 친구 같이 스스럼없이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에 보는 나도 흐뭇하다. 시어머니는 가느다란 고구마 줄기와 속이 미끄러운 울타리강낭콩을 흘리지도 않고 잘 깐다. 잘 보이시냐고 묻자, 이제는 눈이 아니라 손끝이 알아서 깐단다. 세월 경험으로 쌓은 노련한 솜씨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깐 콩 한바가지를 5천원에 사고는 며느리 칭찬을 하자 옆에 있던 며느리가 내 칭찬에 어깨춤을 추면서 양손으로 엄지 척을 하며 크게 웃는다. 누가 뭐라 해도 이제 그는 어엿한 우리의 시골 수다쟁이 아낙이다. 장날의 특식인 포장마차 국밥집에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노란 양재기로 한잔에 천원하는 막걸리와 순대 국밥 그리고 돼지 뒷 고기와 묵은지 김치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맛까지 붙잡는다. 생선좌판 노점상 앞을 지날 때는 옛날 초등학교시절 겨울방학 때 충주 공설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외갓집에 갔던 겨울추억이 생각났다. 꽁꽁 언 시장의 맨땅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거적때기 같은 것을 깔았고 가장자리에는 연탄재를 뿌려 놓았다. 장터 중간 중간에 커다란 노천 연탄불을 피워 여러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동으로 불을 쬐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를 하던 열악하고 춥고 힘들었던 그때의 공설시장 모습이 생각난다.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시던 외삼촌은 40대 후반 탄금대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사고로 돌아 가셨다. 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짧고 긴 호루라기 소리에 그쪽을 쳐다보려는 순간‘뻥’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뻥튀기 장수의 튀밥 튀기는 소리이다. 놀래지 말라고 미리 호루라기로 친절히 예고를 하니 애 엄마가 알았다는 듯 얼른 아이 귀를 막아준다. 예전에는 아저씨가 큰 소리로‘뻥이요 뻥’했었다. 오늘 보니 요즘 뻥튀기 기계는 손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동으로 시간에 맞춰 혼자 잘 돌아간다. 큰길 건너편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는 오래된 골동품과 놋그릇, 대나무와 짚 등으로 만든 토속수제품을 판다. 농기계와 연장들도 보이고 화로와 인두, 숯다리미 등 추억의 옛날 물건들을 옛 추억들과 함께 판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모르는 물건이 많다. 구경하는 사람도 없고 주인은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무심(無心)하게 간이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졸고 있다.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여전히 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 북적이고 혼잡하다. 나는 괴산 전통 5일장을 둘러보면서 먼 훗날의 또 다른 추억을 위해 오늘의 시장 속 가을풍경을 짙은 가을색깔로 풍성하게 담아본다.<끝> 청주시내 재래시장 김 시 경 재래시장에 가면 혼잡한 거리에서 할머니들이 집에서 기른 채소와 밤, 도라지, 무우 등 옹기종기 앉아서 노점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21세기인가 ?하는 생각으로 안됐다는 마음이 앞선다. 나이가 먹지 않았을 때엔 내가 늙어도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했다가 세월이 가서 내 나이 50중반이 넘어가니 어르신들이 왜 시장에 나와 계셔야 되는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먹고 살기위한 어쩔 수 없이 나와 계시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오고가는 사람들 보는 재미와 푼돈벌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일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점과 상가가 같이 어우러진 곳이 시장이다. 일반상가에서는 볼 수 없는 노점이 시장의 풍경을 더욱 시장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터미널시장 반찬가계에 들려 이것저것 오빠에게 가져다 줄 저 염식 반찬을 한보따리 사가지고 나온다. 우리 동네 시장의 반찬가게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젊은 청년이 장사를 잘한다. 내가 반찬을 다른 걸로 바꿔 달라 했더니 그냥 가져가시고 비용은 담에 주란다. 젊은 청년이 준 덤이가 계속 날 잡아 끓어 당긴다. 그 집에서 반찬을 안사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고단수라 할까? ‘젊은 청년이 머리도 좋아 계속 날 잡아끄니’ 난 혼잣말을 하였다. 나는 직장이나 집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장이나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하던 습관이 있었는데 머리가 복잡하거나 상념이 많아 질 때 시장에 나와서 시장통 바람을 쏘이면 머릿속에 상염들이 모두 사라지고 머릿속이 단순해지는 걸 느낀다. 30년 전 신혼일 때 살던 아파트가 시장 옆에 있어 큰아이를 갖고 퇴근 후 배가고파 질 때에는 가경복대시장에 들려 과일 한 바구니를 사서 집에 와서 실컷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딸기가 제철이었던 같다. 4월부터 8월까지 과일이 넘쳐나는 복대시장이다. 가경동H아파트에 살 때에는 정말로 과일 먹는 재미에 푹 빠졌던 것 같다. 남편이 늦는 날이 많아 거의 매일혼자식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복대시장에 들러 고기와 과일 잔뜩 사서 저녁으로 혼자 고기 구어 먹고 딸기와 과일을 한바구니 씩 먹었다. 그래서 그런가? 과일을 많이 먹고 태어난 큰딸은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다. 둘째를 가져서는 직장과 살림에 치여서 재대로 시장에도 못가고 커피만 먹었더니 나처럼 황색피부를 가진 딸이 태어났다. 복대시장가서 과일 좀 많이 사먹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재래시장이 주는 풍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육거리시장 뚝방 길 끄트머리에 있는 순대집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 가끔 가서 먹던 맞 집이었는데 지금은 그 순대 집은 없어지고 알 수 없는 상가가 몇 개 있는 정도이다. 청주시에서는 재래시장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매월 중 하루는 우리농산물 팔아주기 운동을 한다. 매월마다 시장 바닦을 샅샅이 누비며 직원들과 돌아다니던 날이 있었다. 2년 전 어느 날 인가 우리농산물 팔아주기 날이 되어 직원들과 육거리시장에 갔다. 거기서 과장님 동생분을 만났는데 생선을 팔고 계셨다. 직원들과 앞 다투어 생선가게에서 고등어, 코다리, 이면수 등을 샀다. 과장님이 직장에서 목에 힘을 주고 계셨던 분이라 장사를 하는 동생분이 있다고 해서 약간 의야 해 했다. 형이 직원들을 많이 데리고 왔다고 형이 산생선 값을 안 받으려고 하고 형은 열심히 동생주머니에 돈을 챙겨 넣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생선가게를 하는 동생 분은 약간 수줍어 하길래 직원들 모두 많이 파시라고 인사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직원들이 그런다. 육거리 시장은 코로나에도 끝 덕 없는 시장이라고 육거리시장 상인들은 모두 경기를 거의 타지 않고 영업도 잘되고 물건회전율이 좋아 청주에 있는 시민들이 가장 많이 가는 시장이라면서 상가1개만 갖고 있어도 일 년이면 몇 십 억대수입을 내는 곳이라 했다. 난 속으로 다행이다. 라고 했다. 육거리시장이 활성화 돼야 우리 모두 좋아지니까? 시장을 다 보고나면 직원들과 맨 마지막 가는 곳이 있는데 순대집에서 회식을 하는 거다. 1달에 1번씩 순대집 팔아주기 운동을 이렇게 잘할까? 순대 모듬이 나온다 염통 순대 허파 간 등 난 돼지고기는 싫어하지만 모듬으로 나오니 먹을 만해서 저녁식사 대신 열심히 순대를 먹는다. 사무실에서 일에 치여서 제대로 자신의 속말을 못하는 직원들이 순대 집에서 이러 쿵 저러 쿵 자신의 마음속얘기를 하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사건을 막걸리 한잔에 모두 날려버린다. 서민들이 애용하고 민생이 직결된 곳 우리는 이곳을 시장이라 부른다. 오늘도 직원들은 순대국밥과 모듬 순대를 다 먹고 “맛있게 먹었어! 다음 달에 또 오자구 우리들은”저마다, 풋풋한 마음으로 시장통 순대 집을 뒤로 한 채 귀가를 한다. |
재래시장 오명옥 "아이구 콩나물 아주머니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머니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말이다. 여고 때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합숙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았다. 토요일엔 어머니를 모셔다 다과상을 대접해 드리며 배운 것을 실습으로 보여드리는 날이었다. 그날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어머니가 하신 말이었다. 콩나물이나 팔고 시장에서 열무나 파는 아주머니가 어쩐 일이냐고 의아해서 물었을 게다. 재래시장하면 제일 먼저 수많은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셨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은 시장 거리만 남아있는 남주동 시장, 그곳에서 좌판도 없이 열무 몇 단을 길거리에 펼쳐놓고 파셨던 어머니, 집에서는 옹기 시루에 콩나물을 직접 길러서 파셨고, 새벽에는 밤새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오래전 어느 해 빚잔치를 하고 청주로 이사를 나온 후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리신 것은 어머니였다. 열 명이 넘는 학생들 하숙을 치르면서도 밤을 새워 힘들게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팔았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노랗고 통통한 콩나물과 야들야들한 두부는 아는 사람만 사서 먹는 안전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라 금방 팔려나갔다. 그것만으로는 하숙생을 위한 반찬값도 부족한 터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앞마당에서 열무를 길러 틈틈이 시장으로 들고 나가셨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만 했던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열무를 판다는 것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내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서 필요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자식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냈고 결코 창피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쉽게 빨리 팔고 돌아오려고 열무 단을 다른 사림들보다 조금 크게 만들라치면 아버지는 손해 본다고 화를 내셨단다. 아버지는 열무를 팔기는커녕 시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분이셨다. 할 수 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열무 단을 만들어 이고 나가신 곳이 남주동 시장 채소전이었다. 얼른 팔고 돌아와야, 학생들과 가족을 위해 저녁을 할텐데 때론 늦게까지 팔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늘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으로 해서 왔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시장 어귀에 열무 몇 단을 놓고 계실 것 같아서였다. 낮이 점점 길어지는 어느 봄날 흙 묻은 고무 다라를 머리에 이고 걸음을 재촉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왜소한 체구에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하얀 교복에 갈래 머리를 땋은 나는 쫓아가서 어머니 머리 위에 얹힌 다라를 번쩍 들어 이고 책가방을 한 손에 들고 앞서 갔다. 어머니는 어서 내려놓으라고 뒤따라오며 만류하셨다. 추래한 옷과 울퉁불퉁한 손마디에 흙 묻은 어머니가 부끄럽지 않았다. 교복이 더러워진다고 내려놓으라고 핑계를 대며 쫓아오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맴돌아 가슴이 찡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착한 학생으로만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길에서 만나면 모른척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행여 딸이 친구들에게 창피 당할까봐 어머니가 먼저 모른척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자식을 위하여 양반집 막내딸의 체면까지 버리신 어머니께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가 흙 묻은 다라를 이고 가시는데 내가 왜 부끄럽고 그 일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어머니께 힘만 될 수 있다면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 옛날 남주동 시장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있으나 옛날 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 열무 단을 늘어놓고 부끄럽게 앉아계신 내 어머니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늘 어머니가 열무 단을 펼쳐 놓았던 곳은 떡집 앞이었는데 그 떡집도 없어지고 새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곳에 줄지어 앉아 갖가지 반찬거리를 팔던 할머니들의 환한 미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있으려니 얼굴만 차례차례 파노라마 되어 허공으로 스쳐지나갔다. 그 때의 곤궁했던 삶은 보이지 않고 그저 하얀 추억일 뿐이었다. "골라 골라 두 장에 만원 두 장에 만원." 귀에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드니 육거리시장이었다. 언제나 삶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시장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할머니들이 자리를 편 난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콩나물도 한 줌 사고 향이 진한 냉이도 샀다. 애써 캐온 냉이를 덤으로 더 주신단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선뜻 받아오질 못했다. 어머니가 시장에 계셨던 탓에 지금까지 시장에서 한 번도 깎아 달라고 조금만 더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늘 주는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샀다. 고생하시던 내 어머니 생각에 서러워서다. 재래시장에는 내 어머니가 계셨던 곳이라 정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은 아닐까. 돈은 없었어도 정도 사랑도 행복도 부자였던 시장거리에 앉아 계시던 그 때의 내 어머니가 눈물겹게 보고 싶다. |
재 래 시 장
가 세 현
’재래시장’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정감이 가고 미소를 짓게 한다. 또한 무언가 허전했던 향수의 텅빈 가슴을 달래주기도 한다. 어릴적 부모님과 함께 했던 고단했던 삶도 함께 녹아 있다. 오늘은 내수 장날이다. 이른 아침 복잡을 피해서 집에 차를 세워두고 구경삼아 걸어갔다. 옛날 물건을 파는 좌판坐板에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나 사용했던 방문이 눈에 들어온다.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직 물건을 펼치고 있는 상인에게 “저울은 얼마죠?” “저기 화로가 멋진데 얼맙니까?” “이건 방문이네요 이건 얼마예요?” “이 만원 입니다.” 방문 가격을 먼저 물으면 비싸게 달랄까봐 그랬는데 예상외로 싸다. 얼른 돈을 지불하고 손에 들고는 ‘오늘 횡재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실書室에 들어섰다.
지난해 청주 예술의 전당 전시실에서 연묵회 회원전을 가졌었다. 그런데 회장님이 낡아 볼품없는 방문房門에 그림을 예쁘게 그려 붙였는데 고풍스런 멋진 작품이었다. 나도 방문을 구해서 멋지게 사군자四君子 매란국죽을 그려보아야겠다고 막연히 생각 해왔던 참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그린 사군자를 방문에 붙여 서실 입구에 걸어 놓으니 오가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하고 서예 사랑방의 품격이 느껴지는 듯하다.
내수 읍내의 오일장은 유별나다. 조그만 소도시라서 큰 상점商店이 없어서 일까, 장날만 되면 평소의 몇 배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거리는 활기를 찿는다. 굳이 필요한 물건이 없어도 시장을 돌아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재래시장에는 물건을 고르면서 흥정하고 조금이라도 물건값을 깎는 재미와 덤을 얻어주는 훈훈한 인정과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좋다. 평소에는 마트에서 잘 포장되고 정찰제인 물건을 사지만 장날이 되면 으레 천 가방을 호주머니에 넣고 시장을 두어 번 돌아보고 눈이 호사 한후 싱싱하고 값이 저렴한 식재료 들을 사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회원들과 오일장을 한바퀴 돌고 있는데 “종자를 심어놓고 달반은 기다려야 싹을 띄우는 울금하고 생강 팔어유, 궁금증이 심한 사람은 사지 마셔유”라고 큰 소리로 호객을 하고 있다. 회원들은 울금과 생강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재배 방법도 모른다고 몹시 궁금해 하신다. 울금과 생강을 한 보따리 사서 “배수가 잘되고 햇볕이 잘드는 곳에 심되 텃밭이 없으면 커다란 화분에 심으면 됩니다” 하고 나누어 드렸다. 여름부터 가을 까지 울금과 생강 이야기가 장날만 되면 웃음꽃을 피운다.
한 달전 일이다. 시장을 돌다 보니 베를 짜는 베틀이 눈에 들어온다. 실이 들어가는 구멍을 세어보니 19개다. 어릴적 할머니께서 베를 짜시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그런데 두 개이어야 하는데 하나만 있다. 짝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으니 농弄으로 ”바람나서 멀리 갔나봐유“ 한다. 가격을 깎아볼 심산으로 ” 짝이면 사고 싶은데“ 하며 망설이니 “싸게 줄테니 얼른 가져가요. 말만 잘하면 꽁짜요 꽁짜” 오늘도 횡재를 했다. 서실벽에 걸어놓고 붓걸이를 하면 이 또한 멋스럽지 않겠는가. 내킨 김에 석유등잔도 하나 구입 했다. 옛 스러움에 잘 어울린다. 이 모든 것이 재래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움이 아니겠는가.
장날이 아니어도 봄, 여름, 가을 직접 농사지은 채소나 곡식 그리고 산나물들을 시장골목 나무 그늘에 좌판을 펼쳐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이 서너명 계신다. 까맣게 탄 얼굴에 손은 온통 주름이지고 허리는 꾸부정한 채 오가는 손님들을 기다리신다. 무료함을 달랠 겸 가끔은 콩도 까고 마늘도 까면서 고단한 삶을 사신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머니와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우리들의 학자금을 마련하시기 위해 할머니는 도토리를 모아 묵을 만드시고 어머님은 시장에 내다 파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산‘을 ’뫼‘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산나물을 뜯어 오셔서 나물의 이름과 맛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셨었다.
가끔은 속임수를 써서 속이 상할 때가 있다. 물건을 살 때는 분명 팔천원에 샀다. 세명이서 흥정하고 두분이 샀는데 한분이 몸에 맞지 않아 다음 장날 반품하려니 육천원에 팔았다고 해서 한동안 서운함과 재래시장에 대한 불신이 오래 가더란다. 원산지를 속이고, 무게를 속이고, 가격을 속이고, 지금은 많이 신뢰를 쌓았으리라 믿었었다.
상인들과 소비자 모두 정직하게 서로 믿고 거래를 한다면 재래시장에서의 정겨움과 즐거움은 웃음꽃으로 피어나고 재래시장의 활성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