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 방정식
abc∈R |
교사: 이 이차 방정식은 대수학의 기본으로서 이번 시간만 하면 고등학교 때 해야 할 것은 거의 다하는 셈이야. ----이차 방정식의 해를 구해야 하는데 먼저 뭐를 해야 한다고?
학생들:(대답없음)
교사: 인수분해죠. 그리고 두번째는 근의 공식이죠. 40번 근의 공식 이야기해 봐.
이러한 수업방법은 입시위주 수업이라고 흔히 규정되곤 한다. 입시위주 수업이 갖는 단편적 지식 주입이라는 특징을 부각시켜 "암주(암기주입)식 수업"이라고 규정하기도 하고(이종각, 1988), 입시위주 수업들이 무조건적 주입이 아니라, 복잡한 것은 간단명료하게 도식화하여 설명함으로써 이해하기 쉽게 하여 암기하도록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암죽식 수업”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이인효, 1990).
그러나 한 일반계 고등학교의 수업을 관찰해 보면 수업의 외형은 모두 비슷하지만 수업의 내용은 교사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라면 그 누구도 입시를 강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업은 교사가 주로 설명하는 형식이라는 점만 공통적일 뿐, 교사마다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과 그 내용을 제시하는 방식이 다르다.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교사는 교과서 내용을 차례차례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다. 교과서 외의 보충 자료는 거의 수업에 활용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교과서와 다양한 색상의 필기구를 가지고 교과서 여백에 교사가 설명하는 것을 적거나 교과서 내용에 밑줄을 긋거나 한다. 어떠한 교사는 매 시간마다 프린트 물을 준비한다. 그리고 교과서와 프린트 물을 동시에 수업에 활용한다. 교사마다 프린트 물을 준비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교사는 여러 문제집에서 문제들을 추출하여 편집하여 프린트 물을 만들고, 어떤 교사는 인터넷에서 교과학습자료를 다운 받아 그것을 그대로 수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자료를 사용하여 수업 내용을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교사 개인의 특성에 좌우된다. 같은 교과를 가르쳐도 어떤 교사는, 교과서 내용이 너무 가르칠 것이 많아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과서 내용을 집중적으로 정리,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교사는 이 학교 학생들의 일반적인 학습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교과서가 “가르칠 게 크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같은 수학 교사들 중에도 어떤 교사는 수능 기 출제 문제나 수학 “정석”에서의 난이도가 높은 문제 중심으로 수업을 이끌어 가고, 어떤 교사는 교과서 내용 중심으로 수업을 이끌어 간다. 교사마다의 차이에 대해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지나치게 문제집 위주로 하시는 선생님도 있고, 너무 너무 폭이 좁게 교과서 위주로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선생님들도 있고, 아니면 너무 너무 어렵게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고, 하여튼 너무 각양 각색이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대부분의 수업에서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여러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사가 “이해되지?”, “알겠니?”, “그랬지?” 하고 물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 차시의 수업은 한 두명의 아이들이 교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교사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학생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교과서나 프린트에 있는 내용을 교사가 그대로 설명하는 경우에 학생들은 “딴짓”을 하면서도 듣고는 있다. 그러나 교사의 질문이나 그 외의 반응 요청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한두명이 반응한다. 너무 “지겹기” 때문에 “딴 짓”을 하지 않으면 “졸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한 학생은 호두를 까먹으면서 교사의 설명을 듣다가 교사의 설명 중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교과서에 쓰기도 한다.
학생들의 자세로 그들이 수업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 중에는 책이나 프린트 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 다른 숙제(학원 숙제 포함)를 하는 학생, 노우트에 뭘 쓰는(판타지 소설 쓰기, 동아리 일기 쓰기, 등등) 학생, 거울을 보는 학생 등 다양하다. 물론 소수이지만 드러나게 엎드려 자거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학생들도 있다. 주로 교사에게 지적 받는 학생들은 “떠드는” 학생들이다.
고개를 숙이고 책이나 프린트 물을 들여다 보고 있는 학생 중에도 거의 수업 내용을 듣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그러한데 학생들은 들어도 이해 되지 않는 내용을 듣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스스로 문제 풀이 등을 시도하던가, 아니면 “딴짓”을 하던가 한다.
<1학년 학생>
학생: 아무리 정석 사랑, 나라 사랑 했어도 저 번 선생님이 낫지 이 번 선생님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해요.
연구자: 정석 사랑, 나랑 사랑?
학생: 예 정석을 되게 좋아하세요. 맨날 정석책, 수학책 두 가지책만 가지고 오셔 가지고 정석 되게 많이 풀어 주시고, 그래도 저는 4반 가기 전까지는 나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감사 드려요. ---- 지금은 해도 해도 너무 해요. ---- 방정식 하다가 파스칼의 삼각형인가 그거 하다 온 거 있죠?
연구자: 파스칼의 삼각형이 왜?
학생: 진짜 아무 필요도 없는 건데 인수분해할 때 전개하는 거 배우다가 그게 나와 가지고 한 번 해 준 거예요. 지금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연구자: 필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는 너무 쉽다는 거야? 아니면?
학생: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3학년 때 가서 배우는 거, 어느 때는 갑자기 2학년 때 배우는 수열이 나와요. 그냥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뭔지. 해도 해도 너무 해요.
<1학년 학생>
연구자: 과학, 수학 수업 시간에 잘 이해 안되는 게 많다 이거지?
학생: 예. 정말 어려워요. 스트레스 되게 쌓여요. 집에 가서도 걱정 되가지고.
연구자: 그런데도 애들이 문제는 풀고 있더라고. 그래서 정말 모르는 건가 했지?
학생: 그게 어떤 거냐면요. 선생님 방식으로 하면 이해가 안가요. 그래서 제 방식대로 다시 한 번 풀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안되면 난 이걸 못 푸는 거고. 내 방식대로 해서 답이 맞으면 내 방식대로 해도 되는 거고. 선생님 방식대로 해도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한 번 도전해 보는 거죠. 선생님 하는 거 이해 안가면 이왕 그 시간에 내꺼나 한 번 해 보자 해서 풀어 본 거예요. 그래서 안 풀리면 안되는 거고.
학생들은 “교과서에 다 나와 있는 얘기”만을 하는 교사의 수업에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고, 프린트 물을 차례대로 설명하는 형식의 수업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설명하는” 교사의 수업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할 수가 없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수업과는 달리 교사의 질문에 반응을 좀 더 하는 수업이 있다. 이 수업 역시 교사의 설명 수준은 다른 수업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교사의 질문에 좀 더 많은 반응을 하는 것은 교사가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그들과 인격적인 교류를 갖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예시로 제시한 수업들에서 교사가 “이해되지?”, “알겠지?”하는 질문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던 학생들이 다른 수업에서는 반응을 보인다.
<1학년 국어 수업>
교사: 꽃하면 뭐가 떠 올라?
학생: flower
교사: 꽃하면 뭐가 떠 올라. 국화, 할미꽃, 무궁화 ---- 이런 게 떠오르죠? 또 무궁화에는 ---- 단심 무궁화도 있죠. 단심 무궁화도 꽃잎이 있고, ---- 여기서 꽃에 비해서 무궁화는 하위 개념이죠. 그리고 꽃은 상위개념이조, 그런데 단심 무궁화에 비해 무궁화는 상위 개념이죠. 그러니까 하위개념, 상위개념은 상대적이죠. ----
자, 기선이 일어나 봐. 내가 김기선이 누구냐고 한다면 니가 어떻게 할 거야?
(기선이는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그건 기선이 가슴이지, 그런데 몸통, 가슴, 머리, 이런 것이 추상화되어 “나”라는 것으로 추상화되잖아? 집에서 애들 데리고 이런 놀이 해 보면 아주 재밌어. “너 어딨니?”하고 물어 보면 “나” 하고 가리키잖아? 그러면 “그건 네 가슴이지” 이렇게 추상화 과정에 대해서 얘기해 볼 수 있지.
학생: 그러면 애들 다 도망가지.
이러한 수업에서 학생들이 수업내용에 강하게 집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학생들은 되도록 수업이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교사의 질문에 반응을 좀 더 한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내용 있고 재미있는 수업”]
그 비중은 적지만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수업도 있다. 학생들은 그것을 “내용이 있고, 재미있는 수업”으로 분류한다. “수업에 내용이 있다”는 것은 교과서나 참고서 그대로가 아니라 그 수업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이 있는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의 결정적인 차이는 학생들이 교과서나 참고서를 혼자서 읽는 것과는 다르게 풍부한 자료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 설명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데에 있다. 준비된 학습자료를 따라 설명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업이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수업은 “내용이 없는 수업”에 속한다.
“재미있다”는 것은 내용 자체가 학생들에게 흥미 있는 것인 경우와 교사의 분위기가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분위기인 경우로 나뉘어진다. “내용 있고 재미있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교사가 하는 설명이나 질문, 혹은 지시 등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거나 교사의 설명에 교사를 직접 바라보면서 집중한다.
다음은 “내용 있고 재미있는 수업”으로 분류되는 한 윤리 교사 수업의 한 장면이다. 이 때의 “재미”는 내용 자체에 대한 “재미”이기보다는 교사가 만들어 내는 학생들과 교감하는 분위기에 의한 “재미”이다.
<윤리 수업1>
교사: 이제는 초점을 옮겨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다. 이제 내 얘기를 하는 거야.
2. 자아 실현과 인격 형성 (1) 삶의 의미와 목적 1. 삶의 의미와 목적 설정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노란색 글씨) ․인간만의 특권 ․자신이 했던 가장 큰 선택은?(그 이유는?) |
교사: 서태지 시나위 4집에 “나를 위한 여행”이라는 것이 있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아내가 없어졌어요. 밥도 안해 놓고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안나타나요. 사흘 째 되는 날 전화가 왔어요. “여보 나 여행 왔어요”, “갑자기 왜?”,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 ----
교사: 자신이 했던 가장 큰 선택이 무엇이 있었는지 꺼내 봐요. ----그 선택을 할 때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구인지도 써 보고. 아주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고민한 적이 있어? 밤낮 가리지 않고.
학생: 너무 어려워요.
교사: 뭐가 어려워. 니 얘기 쓰라는데.
학생: 선생님 머리 빠개져야 해요?
교사: 누구 때문에 여지껏 이렇게 사느냐, 아니면 자기만을 위해서만 사느냐? 어떤 사람들은 ----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사가 요구한 것을 공책에 쓴다,)
<윤리 수업2>
3) 국가 윤리적 과제 ①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 확립 |
교사: 우리 자체도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죠. 사물놀이를 하는 남학생보다 머리를 휘날리며 드럼을 치는 남학생이 더 멋있게 보일지 몰라요. --- 한국이 물에 잠겼다가 다시 발견되었다고 할 때 아마도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미국 문화로 분류하게 되지는 않을까?
“내용은 있으나 재미가 없는 수업”3)도 있고, “내용은 별론데 재미는 있는 수업”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친밀한 교감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내용이 강하게 흥미를 끄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의 설명을 통해 “배울 것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수업이다. 이러한 수업에 학생들은 인내를 발휘하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경우는, 그냥 선생님이 말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별로 졸립지는 않지만 수업이 끝나면 무얼 배웠는지는 잘 모르는 수업이다.
학생들과 교감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아 “내용은 있으나 재미가 없는 수업”으로 분류되는 경우에도 간혹 내용 자체가 재미있어 학생들이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용 자체가 “재미있다”고 할 때의 이 “재미” 역시 교과 내용으로서의 “재미”라기보다는 교과 학습 이외의 문제와 관련된 “재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4)
그러나 이 때 교과 내용과 관계없어도 “수업 내용”이 “재미있다”고 표현할 때에 그 “재미있는 내용”은 흔히 “생각을 끄고 있다"(김혜련, 1999: 34-36)고 표현되는 “요즘 아이들의 관심”과 관련된 것들은 아니다. 깊이 있는 분석이 아니라도 시사 관련 문제, 정치 사회적 문제에 학생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다. 이 점은 비평준화 지역의 학력 상급 학생들이 모인 교실이라는 점에 의한 특징인지도 모른다.
<1학년 학생>
공상5) 시간이나 국어 시간에 한 번 씩 얘기해 주시는 것 들으면----. 저번에 공상 시간에 60년대, 70년대 박정희 정권 있고 나서 어지러운 그 때 얘기를 해 주셨거든요. 그 때 얘기 들으면서 되게 감명 깊었어요. 그건 시험 문제도 안나오는 건데 선생님이 그냥 얘기해 주신 거였거든요. 그러면서 이거 시험 문제 절대 안나오는 데 이건 니네가 알고 있으면 좋은 것이다 해 가지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해 가지고 노태우 정권 그 때까지 다 얘기해 주신 거예요. 들으면서 애들이 되게 놀라고 재밌고 그러니까----
연구자: 그런 얘기 들을 때 교과서 진도 나가요. 이런 소리 안하니? 애들이?
학생: 안해요. 그런 말을 누가. 극단적 이기주의 모범생들 그런 애들은 우리 학교에 별로 없어요
연구대상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수업6)은 교사가 설명과 질문을 반복하면서 교과서와 그 외 참고자료의 내용을 해설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수업들에서 학생들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그래도 학생들이 반응을 조금 하는 수업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쓰는 수업이다. 질문을 하더라도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 개별 학생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질문에 반응을 보다 많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업에서도 학생들의 분위기는 아주 침체되어 있다.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는 수업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혼자 공부하는 것과 달리 배울 것이 있고(“내용이 있고”) 교사와 정서적 교감을 하는(“재미있는”) 수업이다.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내용 있고 재미있는 수업” 중에는 발표 수업, 토론 수업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토론이나 발표 수업의 형식 자체가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주로 수행평가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토론․발표 수업들 중에서도 자료 조사 과정을 비롯하여 토론하는 방법, 자료 정리와 발표 방법 등에 대한 교사의 지도가 있는 수업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렇지 않고 수업 시간에 주어지는 토론 주제와 관련하여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토론 수업은 몇몇 학생들만 참여하는 수업이 되곤 한다.
전자와 같은 토론․발표 수업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부러워한다. 예를 들어 영어과에서는 수준별 수업을 위해 상, 중, 하급반을 나누어 수업하는데 이 중에서 중급반에서만 영어 연극이나 특정 주제 관련 발표 수업을 간혹 한다. 발표 준비를 위해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에 정신없이 자료를 만들고 있는 중급반 학생들을 보면서 같은 학급의 상급반 학생들이 “쟤들은 진짜 영어 늘겠다”고 부러워한다. 사회과에서도 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별 토론 자료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다른 학급의 학생들이 부러워한다.
이 연구대상 학교에서 관찰되는 수업의 모습은 “학교붕괴론”에서 제기하는 ‘위기’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학교붕괴론”에서는 학교교육에 대해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 학생들의 의식 구조 변화에 의한 학교의 기본 질서 파괴를 지적한다. 그러나 비평준화 지역의 학력 상급 학생들이 모인 본 연구 대상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교육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는 학생들이 아니다. 학교 수업에 이탈하는 학생수는 극히 미미하며 수업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이 학교에도 존재한다. 학생들은 대부분의 수업에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교과 학습 자체를 의미없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참고서를 혼자 읽는 것과 다르지 않는 수업, 이해할 수 없는 수업, 단지 “진도 나가는 수업”에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배울 만한 “내용이 있는 수업”을 원한다. 또한 그 수업이 “재미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용 있고 재미있는 수업”은 그리 많지 않다.
2)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교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교사와 학생은 서로 부딪치고 있다. 심지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도 교사와 학생들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은 학교의 여러 장면에서 상호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학생들이 반응하지 않는 수업에서의 상호 긴장 관계]
학교에서의 수업은 외면적으로 보면 교사가 학생에 대해 일방적으로 내용을 제시하고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태이다. 그 외형적인 모습만으로 보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존재로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수업의 과정을 들여다 보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항상 의식하고 있고, 학생들은 교사를 항상 평가하고 있다.
특히 수업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끌어 내지 못하는 교사들은 이 학생들이 “공부를 하려는 집단”인 것을 의식한다. 학생들은 수업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교과서나 프린트물을 그대로 해설하는 수업이 너무 “지겹기” 때문에 수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 가운데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은 간혹 수업 시간에 표출되기도 한다.
<과학 수업 시간>
(교사 혼자 계속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면서 수업 내용을 설명하다가)
교사: 등가속도와 관련된 식을 세 개를 해 보려고 해요. 이거 외워서 되는게 아니야. p. 92를 봐. -----세번째는 시간을 빼 버리고 식을 만들 수 있어 그걸 외울 필요는 없는데 이걸 알면 문제를 빨리 풀 수 있게 되니까 필요할 수도 있지. 자 봐라. 평균 속도를 이용해서 -----00! 선생님이 말한 것 설명해 봐. 저 뒤에 뒤에서 두 번째. 앞으로 나와. 끝나고 교무실에 와. 여기서 하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이 해결해.
학생들: (큰 소리로 수업이 끝난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듯) 예.
교사: 너희들이 똑똑하고 잘난 줄 알지?
학생들의 반응을 끌어 내지 못하는 교사에게는 최근의 수행평가제도가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태도 점수를 반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점수에 민감한 학생들로 하여금 수업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도록 강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교사에게 직접 반감을 표현하지 않지만 수행평가와 교사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을 드러낸다.
학생1: 수행 평가는 안해야 해요. 우리가 대통령 한테 편지 쓸 거예요.
학생2: 전00(영어 교사 이름) 있잖아요. “너희들 점수에 노예가 되면 안돼” 그러면서 졸면요. “너 마이너스 0.5점이야” 이러는 거 있죠. 말이 안돼요. 우리 더러 점수에 노예가 돼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말하든지, 어차피 수능으로 결판이 날텐데 무슨 수행평가 한다고 그래요? 00(이웃 고등학교)은 평균이 90점이래요.
학생3: 아니 87점이래든데.
교사도 이러한 학생들의 반응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수행평가가 학생들에 대한 통제기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는 학생들을 의식한다.
<영어과 교사>
애들이 처음에 너무 발표를 안하는 거예요. 그래서 니네들 10점 만점에 6, 7점 맞을려면 그렇게들 해라. 몇 번 말했더니 달라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점수 얘기하면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 애들이 신경쓰여요, 사실.
이로 인해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상호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학생들은 교사의 교과 내용을 설명하는 실력, 학생들과 호흡할 수 있는 기질, 그 밖의 일관된 행동 방식 등과 같은 것을 평가하고 있다. 교사 역시 학생들이 그러한 능력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 긴장 관계는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사 혼자 강의하고 학생들은 반응하지 않고 침묵하는 여러 수업의 저변에 보이지 않게 깔려 있는 교사-학생 사이의 관계의 특징이다.
[신뢰/불신 관계 공존]
교사는 교육활동을 위해 학생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존재인 동시에 학교라는 조직의 일원이다. 교사는, 매일 학생들과 부딪치면서 교과 수업을 하고 학급을 운영하고, 공문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종류의 활동을 한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생에 대한 교육적 관심에서 교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과 괴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교사에게 학생에 대한 교육적 관심을 일차적으로 요구한다. 이에 비해 학교장을 비롯한 학교 행정가는 조직에 대한 관심을 일차적으로 요구한다. 교사는 이 사이에서 항상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 갈등 상황을 얼마나 예민하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어떠한 행위 양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교사의 유형이 달라진다. 서로 다른 유형의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에서는 연구대상 학교에서 수행평가제도가 시행되고 변형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포착되는 교사-학생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수행평가만이 아니라 평가라는 것 자체가 이 학교에서는 매번 중대 사안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특히 평가와 관련하여 이 학교 학부모의 목소리는 대단히 높다. 이 학교 학부모 중, 부의 경우, 70% 이상이 4년 제 대학 이상 졸업자이고, 이 중 12% 이상이 대학원 졸업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으로도 경제력으로도 학부모 집단에 비해 교사들이 갖는 위치가 상대적으로 무척 낮다고 인식되는 가운데 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입김”이 교사들의 “교육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교사들은 인식하고 있다. 특히 시험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하다.
<사회과 교사>
학급에 따라 시험 범위를 다르게 가르쳐 줘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본 학급이 있었다고, 어느 참고서 문제와 비슷하다고, 시험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참 끝이 없다. 그러니 교사의 주관이 개입된 문제는 절대로 낼 수 없다. 문제가 생길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험 범위를 다른 반보다 넓게 알려 줘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학부모의 항의에는 결국 학교가 재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교사는 “교사들이 평가권도 잃었다”고 표현한다.
학부모들이 갖가지로 제기하는 문제에 의해 학교 행정가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여러 전략을 개발한다. 이에 교사들이 시험이 치러지기까지 만들어야 할 서류가 다섯 가지이다. 평가문항 제작, 고사 감독 및 관리, 그리고 고사 업무에 따른 처리 기일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포함하여 “( )과 목표 이원 분류표”, “중간․기말 선다형 문항 검토 사항”, “주관식 채점 기준표”, “출제 계획서” 등이 그것이다. 시험이 치러지고 나면 채점도 3명의 교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직원조회시의 교감의 말과 이와 관련한 한 교사의 말은 학교 행정가의 관심과 교사들의 관심의 차이를 드러낸다.
<직원조회시의 교감 발언>
중간고사, 기말고사 업무는 수능고사업무와 같은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권을 수호한다는 차원에서 꼭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 학부모가 시험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어디를 찔러도 문제가 없을 수 있도록 준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채점교사, 1검자, 2검자가 누군지 반드시 나타나도록 해 주시고, 또 중간, 기말 선다형 문항 검토사항을 봐 주십시오. 여기 13개 문항에 대해서 다 검토하고 그래도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유서를 받을 겁니다.
---시험지도 이것은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걸 위해 여기 있는 거 아닙니까?
<사회과 교사>
(교사들이 수업 방법과 같은 것을 연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제일 큰 문제는 교사의 노력이겠지만 외적인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오늘 아침에도 직원조회가 굉장히 길었죠. 거기서 지시되는 그런 사항들, 하다 못해 평가하는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아요? 평가라는 건 중요한데 그 평가 문항 내는 그 자체보다 평가지를 내기 위해서 써야 되는 것들, 문제를 다 내고 나서 주관식 채점 기준표, 그리고 출제계획서 그런 걸 써야 하는 것이 더 힘들게 해요. 또 채점하고 나서 도장 찍는 과정이 더 시간이 걸려요. 채점하는 시간보다. 1검장, 2검장, 이기 확인, 최종점검, 도장이 너무 많아요. ----물론 정확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런 스트레스가 아이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신경질 나고 스트레스 많이 받게 해요.
학교장은 한 번의 시험에서도 “문제”없이 넘어간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교사들의 자질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 이에 비해 교사들은 “문제”를 발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 억압적인 분위기가 교사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게끔 만든다고 말한다. 이것이 조직을 문제없이 관리해야만 하는 학교 행정가의 관심과 일반 교사의 관심의 차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행평가는 학교 내 구성원들간의 갈등을 더욱 첨예화시키는 사안이다. 심지어 교사들 내부에서도 이와 관련하여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 한다. 교사들은 모두 수행평가가 갖는 기본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을 한다. 그러나 학교가 지닌 현실적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것이 제대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는 교사들이 많다. 이에 비해 수행평가를 교실수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계기로 바라보는 교사들도 있다. 이들은 기존의 강의식 수업과 같은 정형화된 수업의 틀을 벗어나 보려는 교사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주요한 기반을 수행평가에서 찾는다. 이 학교에는 몇 년간의 지속적인 시도를 통해 수행평가체계를 아주 구체적인 수준에서 개발한 예체능 담당 교사도 있고, 일반교과 중에서는 수행평가와 관련한 연수를 받고 이제 수행평가체계를 만들고 있는 교사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들에게 수행평가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수년간의 노하우를 쌓아 왔고, 해당 지역 교육청에서 수행평가기준안을 만드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왔던 예체능 계열의 한 교사의 경우에는 학교 “관리자”7)의 결재 하에 수행평가가 실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 만들기 시작하는 한 영어 담당 교사의 수행평가 기준안은 결재를 받지 못하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일개 교사가 만든 것”을 가지고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교 관리자”가 결재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이 교과에서 학기 초부터 실시해 왔던 “수행평가” 결과를 공식적 평가인 중간고사에 실제 반영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해당 교과의 한 교사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한다.
000선생님이 지난 겨울 방학 때 수행평가 연수를 받고 왔었거든요. 그래서 의욕적으로 시도해 보려고 했어요. 우리 나름으로 평가기준 다 만들고 사실 그 취지는 좋잖아요? 근데 이제 완전히 무산됐어요. 교감 선생님이 “일개 교사가 만든 것이 혹시 문제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에요. 그런데 시작이잖아요. 000선생님,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게 완전히 꽝인 거에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 줄 수도 있잖아요? 그냥 “안돼” 이거에요. 제발 교사들 기를 꺾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완벽하지 못하고 문제가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1학기말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해당 도교육청에서는 학교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해 수행평가를 실시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지필고사에 서술식 문제 30%를 포함시키는 등의 수준에서 수행평가를 “해도 된다”는 것이 도교육청의 지침이었다. 이에 학교에서는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하라”는 것으로 이 지침의 암묵적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학기 초에 여러 교과에서 수행평가과제를 주다가 학기 말 경에는 많은 교과에서 수행평가를 지필고사에의 서술형 문제로 대체하는 형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전체적으로 학생들은 수행평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부정적인 견해는, 수행평가 과제로 어울리지 않는 과제를 내 주고 그것을 평가하여 수행평가라고 한다든지, 혹은 수업과는 상관없이 과제를 내 주고 과제만을 평가하여 수행평가라고 하는 등, 수행평가의 본래 취지와 맞지 않은 각종 평가에 대한 비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학기초에 거의 전 교과에서 수행평가와 관련한 과제를 내 주었는데 그 중 수학 교과에서 주어진 수행평가 과제는 매일 “깜지” 두 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깜지”란 연습장에 수학문제를 풀어서 까맣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다음과 같은 학생의 비판은 수업과는 상관없는 과제를 내 주고 그것에 대해 수행평가라는 이름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1학년 학생>
기술시간에 환경 보호에 관한 보고서를 내는 숙제가 있었어요. 여기 애들은 모두 인터넷 할 줄 아니까 모두들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그대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내 보고서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백과 사전 보고 정리하고 딴에는 열심히 했어요. 컴퓨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그대로 낸 애들은 A를 받고, 난 못받았어요. 선생님한테 항의를 했더니 점수를 올려 주시기는 했어요. 사실 수행평가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 와서 수업만 하고 나가고 우리는 숙제를 어떻게든 해 내면 그걸 어떻게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요?
수행평가가 의무사항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각종 과제를 내 주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으로 “수행평가”를 하던 교사들은 도교육청과 학교의 방침이 거의 정해지자 더 이상 과제를 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수행평가가 현재의 학교 현실상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업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수행평가를 하고자 했던 교사들은 여전히 수행평가를 하고 있다. 이러한 교사들 중 수행평가기준안이 “관리자”의 결재를 받지 못한 교과의 교사들은 학교의 공식적 성적에 수행평가 결과를 반영하지 못해서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라는 점을 자책하고 있다.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수업의 질과 형식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교사들을 학생들은 존중하고 신뢰한다. 그러한 교사를 다른 교사들과 구분하여 “공부하는 선생님”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들 교사는 소수이다.
많은 수업이 그 형식과 내용에서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수업과 관련없는 과제를 제시하여 평가하고, 수업에서의 태도를 중심으로 수행평가를 해 나갈 때 학생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한 학생 통제 기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행평가는 “재미없고 내용도 없는” 수업에서 잠을 자거나 침묵할 수도 없게 하며, 과제의 성격이 어떠하든 주어지는 과제를 무조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0.1점에 목숨을 거는” 이 학교 학생들의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8).
학교 내부의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이 서로 다른 가운데 수행평가를 수업 방식의 변화, 수업의 질 제고를 위해 활용하려는 개인 교사들의 노력은 쉽게 부각되지 않는다. 학부모는 자기 자녀가 상대적인 불이익을 절대 가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장은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있게, 그리고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게 하는 방향에서 일을 처리해 나간다. 이에 대해 갖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처리해 나가는 교사들도 있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를 수업과 평가의 장면에서 시도해 보려는 교사들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들의 노력은 개인적인 노력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학교 내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이 학교에서 “특기․적성 교육”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또한 교사들 사이의 행위양식의 차이를 드러내 주며 그 차이에 의해 교사와 학생들은 서로 다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학교의 방과 후 활동으로 “특기․적성 교육”을 시행하도록 하는 지침이 상부 기관으로부터 시달되자, 학교는 이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조건에 처하게 된다. 이에 이 학교에서는 수요조사 과정을 거쳐 NIE, TOEIC 등을 비롯한 6개 특기․적성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하면서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특기․적성 교육”을 받도록 한다. 첫 번째 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TOEIC 등의 영어 프로그램들은 “너무 어렵다”, 컴퓨터 반 활동은 “게임을 하는 PC방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등의 비판을 하면서 기회가 있으면 “튄다”. 그 가운데 첫 번째 텀이 끝나자 학교에서는 두 번째 텀도 첫 번째 텀의 희망자를 기본으로 하여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운영하겠다고 담임 교사들에게 공고한다. TOEFL반 폐지, 한문반, 미술반 신설, 컴퓨터 반 확대 운영 등, 운영 내용을 조금 변화시켰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특기․적성 교육”에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는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의 방침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가 있었고, 이에 학급 담임 교사와 학급 학생들의 갈등이 나타났다. 전자의 교사들은 모든 학생들이 “특기․적성 교육”에 반드시 참여해야 함을 강조했고, 학급 학생들로 하여금 첫 번째 텀에서 이수했던 과정을 그대로 재신청하도록 했다. 이에 비해 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특기․적성 교육”을 시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되도록 참여하도록 하되 원한다면 컴퓨터 반 등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학생들에게 이수 과정 변경 여부를 묻는 조사를 다시 하지 않은 학급의 학생들은 “특기․적성” 반 편성이 다 끝난 후에 과정을 변경할 수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변경 요청을 뒤늦게 하는 사태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 시책 그대로 학생들에게 알려 무조건 첫 번째 텀의 과정을 재 이수하도록 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다시 조사하지도 않은 학급의 학생들과 담임교사와는 불신관계가 형성된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직원 회의에서는 “6교시 후에 교문을 나가는 학생이 절대 없도록 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학급 종례를 반드시 “특기․적성교육”활동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감독하는 일로 인해 담임 교사들의 업무는 더욱 늘어난 가운데 교사들은 학생들이 논리적으로 이 일을 받아 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와는 상관없이 학생들을 감독하는 역할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이 외에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교사가 취하는 행동 방향에 따라 교사-학생 사이의 관계는 서로 다르게 형성된다. 특기․적성 교육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행동을 이해하면서 학교 시책의 교육적 효과를 고려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로 갈등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합리적으로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교사와 그렇지 않고 학교 조직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학교 “관리자”의 관심에서 일을 처리하는 교사는 학생들과 서로 다른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수행평가를 수업의 질적 변화와 연결시켜 보고자 애를 쓰는 교사와 수행평가를 또 하나의 잡무로 받아들이고 문제없이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관심을 갖는 교사 사이의 차이와도 같다.
전자의 교사들을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그러한 교사들이 학교 “관리자”의 신뢰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이들 교사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조직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데 필요한 신속함, 정확함, 문제없는 일처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수행평가 방안은 수행평가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고 한 것인 반면 “문제제기”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의 학급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의견을 쉽게 드러내기 때문에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이 항상 필요하다. 이에 교사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후자의 교사는 학생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는 항상 명령하는 위치에 있다. 학생들은 그 명령에 표면적으로는 항상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하지 않는 특기․적성 교육을 받으라고 하면 불만을 토하지만 그에 따른다. 수업에서 졸면 0.5점 깎는다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인다. 비록 뒤에서는 불만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다음은 이들 교사와 학생들과의 관계를 시사해 주는 장면이다.
<1학년 종례 시간>
교사: 누구까지 급식 당번했어?---이번 주에는 46번, 000부터 000까지 세 명 봉사해 주고---
그 다음, 텝스(TEPS:특기․적성 교육 중 한 강좌) 일어나!
학생1: 또 해요?
학생2: 딴 반은 안 해도 된대요.
교사: 해야 돼.
학생3: 우리 집 기둥뿌리 뽑혀요.
학생4: 우리 담당 선생님이 하기 싫은 사람 빠져도 된다 그랬어요.
교사:(교사는 여기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TOEIC 일어나!(수를 세고는) 문예 창작 일어나!(수를 센다)
학생: 선생님, 이거 돈 안내고 안해도 돼죠?
(이 말에도 교사는 반응이 없다. 교사는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수를 다 세고는)
교사: 그러면 모두 앉아 보세요. 고지서 나눠줬는데 ----그것에 3개월치 해서 내면 돼! 됐어 집에 가!
이러한 교사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을 언제나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조직에서 신뢰받는 교사는 이들이다. 적어도 연구대상 학교에서는 조직의 효율성보다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효과에 대해 더욱 고민하는 교사가 존중받지 못한다.
학교 “관리자”의 영향력은 교사들에게 아주 크다. 갈등 상황 속에 있는 개별 교사의 위치가 얼마나 왜소한지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조직의 효율성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교사들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교직에 처음 발을 딛는 교사들은 조직 속에서 자신의 교육적 노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없고 “관리자”와의 관계에서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교직에 회의를 갖게 된다는 점을 토로한다.
<교직 2년차 영어과 교사>
전 아마 평가에서 제일 밑일 거예요. 작년까지만 해도 전 관리자 말 잘 듣는 사람이었어요. 시키는 일 다했거든요. ----교장, 교감 선생님은 교사들을 같은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 직원 조회에서도 보세요. 평가하겠다 너희들 뭐 하는 거냐? 이건 아니에요. 저희는 같은 교사로서 능력을, 인격을 존중받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심부름꾼은 아니잖아요. 나이 드신 선생님들이 그런 대접을 받을 때 기분이 어떻겠어요. ----물론 다른 선생님은 이 학교가 예외적이라고 말씀하세요.
전 교직에 들어 올 때, 학생과 나, 학부모 이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예요. 제일 중요한 게 관리자와의 관계예요. 그런데 전 거기에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요. 너무 굴욕적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 학교라는 조직이 학교 “관리자”의 관심에 의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일반 교사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학교 “관리자”의 관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효과를 가지고 고민하는 교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상황에서 교사들은 어떤 일의 교육적 효과보다는 그것이 교사 개인에게 “일”을 얼마나 주느냐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교 “관리자”의 입장에서도 학교는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힘든 곳이며,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열의를 지닌 교사에게도 이 학교는 희망을 주는 곳이 아니다.
<사회과 교사>
일이 많은 사람은 계속 많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아니에요. 그리고 관리자하고 사이에서 관계가 뭐가 나빠질 이유가 있다든지, 시키는 일 자체가 문제가 있다든지,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뭐가 문제가 있다든지 그러면 일을 안해요. 그러면 그 불똥은 다 만만한 사람에게 가지요. 000선생님(신임교사)이 바쁜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에요. 업무 분장을 불문하고 여기 저기서 채여서 떨어져 나온 일이 ----. 정작 본인은 이게 어디서 어떻게 온 건지도 모르고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거에요. 나중에야 ‘응, 이게 이래서 내게 온 일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죠.----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잡무’를 구분하는 것은 참 모호한 거에요. 예를 들어 오늘과 같이 논술 경시대회 보고 애들 글 쓴 거를 읽고 5명을 뽑아야 하는데 그건 교육적인 일이냐, 아니냐 따지면 결코 아닌게 아니죠. 그런데 그게 ‘내 일’이냐를 따지게 되면 다른 문제에요. 논술은 분명 국어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데도 국어과에만 맡겨져 있어요.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학생들에게 미칠 교육적 효과를 생각해서 담임 업무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업무를 수행하려는 교사들의 의지는 쉽게 힘을 얻지 못하고 좌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과 학생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나 학생들이 보내는 신뢰에 맞는 행위양식을 항상 선택하는 데에는 그 한계가 너무 분명하다.
[친밀한 관계/ 공식적 관계의 원망 교차]
학교라는 조직 속에서의 교사 위치는 학생들에게 미칠 교육적 효과를 항상 생각하면서 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많은 교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학생들에게 교사로서의 권위를 항상 인정받기를 원한다. 또한 자신의 지시와 명령의 종류가 어떠하든 잘 따라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서로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고, 정을 나눌 수 있는 교사이다. 이 양자 사이의 괴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가운데 양 집단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원망을 포기하고, 그것들은 양 집단의 좌절감으로 쌓여 간다.
교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들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그러한 학생이 있을 경우, 학생이 자신의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강경 조처를 취한다.
<사례 1>
(쉬는 시간에 수업을 끝내고 나온 한 영어 교사는 숨을 몰아 쉬며 연구자에게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글쎄, 영어 듣기 평가 끝내고 수업 준비 하라고 했더니 그 틈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 거예요. 가지고 나오라고 했죠. 방과 후에 찾아 가라고 했더니 글쎄 “6교시(본 수업 시간) 끝나고 주세요” 이러는 거예요. “안돼, 수업 다 끝나고 찾으러 와!” 그랬더니 “그럼 맞을께요. 지금 주세요” 나 원 참 그러는 거예요. 참을 수가 없어서 학생과에 넘겼어요. 부모님께도 알리도록 하고요. 학생과에 가서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거 있죠? (이 학생은 잠시 후 이 교사에게 다시 와서 잘못했다고 빈 후에 용서를 받고,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사례2>
(쉬는 시간에 사회과 교사가 한 학생을 데리고 교무실로 들어오더니 책상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게 한다. 연구자가 이유를 물어 보자 선생님 이름을 친구 이름처럼 함부로 불렀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 시간 수업이 시작되자 교사는 수업에 들어가고 그 학생은 여전히 무릎 꿇고 앉아 있다. 연구자를 같은 학교 교사로 안 그 학생은 “저, 반성문 써 놓고 수업 들어가면 안될까요? 수업 안들어 가면 결관데---”라며 걱정한다. 결과 3번이면 결석 1번으로 처리된다고 한다. 이 학생은 반성문을 써 놓고 수업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반성문을 쓴다. 그러나 연구자나 옆에 있던 다른 교사가 교실에 갔다가 다시 오라는 말을 하지 않자 이 학생은 반성문을 쓰고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옆에 있던 교사)
교사: 그래 너희들은 의례 그러지, 친구 이름처럼 선생님 이름 부르지. 참 문제야.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요즘 애들은 참 말을 안들어.
이 교사나 마찬가지로 “요즘 애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교사들을 “권위자”로 존중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중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지리과 교사>
여기 애들은 부모들이 너무 다 해주고 키우니까 인내심이 없어요. 참을성이 없고----. 또 애들이 어려운 게 없어요. 아까 점심 시간에도 우리 반 반장이 유리를 깼어요. 어째 안 다쳤느냐고 하니까 기술이 좋아서 안 다쳤대요. 유리 값 변상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선생님이 내 주세요”, 그래요. 옛날에는 어려워서 그런 말 못 했잖아요? 요즘은 애들이 여선생님은 엄마처럼 생각하고 젊은 여선생은 누나처럼, (남선생은) 아빠처럼, 형처럼 대해요. 그걸 받아 주는 선생님이 있구요. 그게 문제에요.
<영어과 교사>
사실 애들이 많이 달리지긴 했어요. 복도에서 만나서 애들한테 “너 이것 좀 해 줄래” 하면 “저 지금 바빠요”하고 말하기도 하거든요. 우리 같으면 못 그러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러더니 이제 제가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 같아요.
<수학과 교사>
학생들이 너무 이기적이지요. 생활지도하기 너무 어려워요. 학생들하고 부딪칠 때에는 정말 이 직업을 관두고 싶어요. 시골 학생들은 참 순진하거든요.
그러나 학생들은 교사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한다. 연구자 옆자리의 한 영어 교사가 소풍 때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을 교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었다. 그 교사가 없는 사이에 볼일이 있어 찾아 왔던 다른 반 학생들이 이 사진을 보았다. 이 중 한 학생이 “진짜 캡이야! 내가 이런 선생님 원했는데--”라고 한다. 다른 학생들도 그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편애가 두려워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지만 이러한 학생 역시 기본적으로는 교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
<1학년 학생>
학생: 고등학교는 선생님과 제자간의 정 교류가 별로 없는 것 같애요. 여기 와서 느낀 게 그거에요. 선생님이 아이들을 약간 멀리 하시는 것도 있는 것 같고, 왜냐하면 편애한다는 얘기 들을까 봐 그게 되게 무서우신가봐요. 좀 멀리 하시는 것 같은 느낌.
연구자: 다 잘 해 주면 안될까?
학생: 그것은 불가능해요. 50명이니까 그건 진짜 불가능해요. 학생으로서는 물론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지만 선생님한테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고, ---50명을 모두 잘 해 준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차라리 관계를 딱 끊어 버리잖아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만 되는 거에요. 3학년 같은 경우는 다 같이 힘든 걸 하니까 정들지 몰라도 ---담임 선생님이 제일 나은데 다른 학과목 선생님들은 거의 그런 게 없어요. 진짜 수업만 하고 나가시는 거에요. 웃으시는 분도 별로 없으신 거 같애요. 윤리 선생님 같은 경우는 애들한테 정도 되게 많이 주고 이러는데 ----. 교사 생활 오래 하신 분들은 주로 도가 트셨는지 어찌 되셨는지 애들하고 친해지고 이런 거 되게 싫어하시는 거 같애요. 전 그것 때문에 처음엔 놀랐는데 지금은 그게 되게 좋아요. 왜냐면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공부를 잘하는 애들을 좋아할 거 아니에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연구자: 윤리 선생님은 편애한다는 소리 듣니?
학생: 아니, 안들으세요. 되게 요령껏 잘하시나봐요.
학생들은 교사가 자신들을 개인 인격체로서 인정해 주기를 원한다. 수업이 “재미없어도” 교사가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 주면 수업에 참여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은 학급에서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남학생과의 면담 내용이다.
연구자: 수업 시간은 재미있니?
학생: 재미없어요.
연구자: 한 시간도 재미있는 시간 없어?
학생: 재미없어요. 근데 영어 시간은 하려고 해요. 선생님이 절 이뻐 하니까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해요. 윤리 선생님은 짱 좋아요.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영어과 교사>
별로 아이들이 저만 생각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안들어요. 이런 경우는 있어요. 아이들 발표를 듣고 저(교사) 혼자 잘했다고 생각해서 점수를 주기 보다는 아이들의 평가도 듣고 점수를 주려고 “자, 이 발표는 이런 이런 점에서 잘했지? 몇점 줘도 될까?”그렇게 물었더니 저는 사실 당연히 잘했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요, 점수 잘 주지 말아요” 그러더라구요. 아마 합반 수업이니까(영어는 수준별 이동 수업이므로 3개 학급에서 온 학생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런가 봐요. 다른 반 애들 점수 잘 받는 건 싫다 이거죠.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그렇지 않아요.
<윤리과 교사>
대부분 참 예의가 바르고 참 바르게 자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수업 시간에 비뚤게 앉아 있거나 눈빛에 불량기가 있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런 애들도 알고 보면 참 착해요. 요즘 애들은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다 이뻐요.
권위자로 학생들에게 부각되기를 원하는 교사들은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사들을 무조건 권위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생님의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선생님과 하고 싶은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이 점이 많은 교사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고,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권위에 도전을 받는다는 느낌을 쌓아 가면서 교직에 대해 회의를 갖기도 한다.
[신뢰 관계/ 친밀한 관계의 확대 불능(상호소통 부재 구조)]
학교 내 구성원들, 학교 행정가, 교사, 학생, 학부모 등은 서로의 위치가 다름으로 해서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같은 학교 “관리자”라고 해도 학교장과 교감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교사들 사이의 차이도 크다.
그러나 이 학교에는 집단들 내의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상호 교환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 물론 다양한 종류의 의사소통기구가 존재한다. 직원회의가 일주일에 두 번 있고, 부장회의가 일주일에 한번 있으며, 학급에는 H․R이 매주 한 차시씩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결같이 극히 형식적으로 진행된다.
이 지역 학교의 특수성이 보다 반영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교사들이 인식하는 학교장이 갖는 인사권의 영향력은 굉장히 큰 것이다. 외형적으로나마 교장, 교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며, 각종 회의가 지시․전달로 일관되고 있다. 학교장, 교감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교장이나 교감의 지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학교의 제반 사항들은 일방적으로 결정되어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영어과 교사>
직원회의는 회의 그 자체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전달이잖아요. 직원회의에서 뭘 건의를 하려고 일어서면 그건 개인적으로 얘기하라고 잘라 버리거든요. 근데 전체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자 할 때에는 제가 학교 주인이 아니더라도 일어나서 말할 수 있는 건데. 그 자체를 잘라 버리면-----.
교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되는 사항은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거부감부터 갖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일이 업무부담을 얼마나 가중시키느냐와 상관없이, 일이 결정되는 과정에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일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임하느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많은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는 그러한 절차를 밟는 과정이 거의 없다는 점이 교사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적극적일 수 없게 한다고 한다. 다음은 한 부장 교사의 말이다.
<부장 교사>
지금 교문 지도하는 것도 (그렇다). 학생부에서 하다가 후문(지도)은 (모든) 선생님 스케줄이 다 잡혔어요. 그것도 일방적으로 지시에 의해서 하는 거예요. 선생님들한테 의견을 물어 보고 (하면) 잘 통과 안 되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필요성을 느끼면 선생님들은 반대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교문지도, 후문을 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생님들이 느끼면 물론 내가 귀찮지만 이걸 하면 본인이 나와서 해야 되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여러 명 있기는 있겠지만 그렇게 해야 된다고 느끼면 그렇게 한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절차) 조차가 사실상 학교에 거의 없어요.
그러나 학교 “관리자”의 입장은 그와 다르게 표현된다. 물론 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일을 결정하는 것이 옳지만 학교 조직이라는 게 그렇게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교감>
가장 이상적으로 하려면 서로 의견교환이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서로 공통 분모를 찾아서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그렇게 하려니까 나름대로 시간이 많이 걸려요.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은 물론 걸려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얘기해서 언제 하긴 하는데 급한 게 없어요. 상당히 급한데. 직원조회 때 오늘도 선생님들 아침조회 때도 얘기했습니다만은 인사하는 학생이 됩시다. 그런 정도로 (얘기)했으면 오늘은 그런 소리가 안 나와야 하는데 그 소리는 계속 나오는 거지. 종 나면은 그냥 와르르, 퉁탕거리는 거지, 인사 안 받고 온다는 얘기지. 그 얘기 했더니 아이들 인사는 잘한다고 (그런다).
이와 같이 학교 “관리자”와 교사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입장을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갖지 못하는 가운데 표면적으로는 항상 학교 “관리자”의 입장이 강조된다.
교사들 사이의 인식의 차이 역시 교사와 “관리자”의 차이 못지 않게 크다. 그러나 교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을 좁힐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교과 협의회를 매주 할 수 있도록 같은 교과협의회 소속 교사들의 시간표를 조정해 놓았지만 교과 협의회 역시 대체로 업무 분담을 위한 회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0)
공식적인 협의회의 기구보다는 비공식적인 모임들에서 이루어지는 논의가 더욱 더 많다. 비슷한 종류의 취미나 관심을 지닌 교사들끼리 자주 모이는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학교 “관리자”와 비공식적인 친밀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집단들도 있다.11)
학교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관계 속에서 해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학교의 공적인 문제가 개인들 사이의 사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곤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사안과 관련하여 공적인 논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교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게 상호 견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교사들은 서로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하는 가운데 학생들에게는 계속 비교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한다. 이 점이 교사들의 행동방식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학급운영이나 수업에서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난 방법을 취하는 교사들의 존재는 그렇지 않은 교사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제까지 고수해 온 학급 운영 방식이나 수업 방식이 다른 방식을 택하는 교사들 때문에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하는 권위자로서의 위치를 고수하기 원하는 교사들은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교사들을 비판한다. 따라서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원하는 교사들이 어떠한 일을 해 나갈 때 다른 교사들을 예민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장 교사>
요즈음 아이들이 여 선생님은 엄마처럼 생각하고 젊은 여선생은 누나처럼, 아빠처럼 형처럼 대해요. 뭐 사달라고 하고, 난 절대로 안사주지만. 근데 뭐 사달라고 하면 사 주는 선생님도 있어요. 보충 수업 끝나고 할 때, 근데 그게 학원에서 애들 떨어지지 말라고 단원 끝나면 뭐 사주고, 그러나 봐요.
<국어과 교사>
학급 담임 하면서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지만 어려워요. 애들하고 떡볶기 집에도 같이 가고. 그냥 같이 갈 뿐이지 애들은 지들끼리 떠들어요. 내가 있는지 없는지 상관도 않고----. 애들하고 그러는 것도 다른 반 선생님 눈치 되게 보여요. 체육하고 들어 온 애들 종례하려다 너무 더워 보여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들고 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반 애가 그걸 사 들고 들어 오는데 옆 반 선생님이 지나가시는 걸 보고 괜히 움찔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 반 애들이랑 토요일 오후에 하루 날 잡아서 운동장에서 장기자랑 하고, 음식 만들어 먹고 하면서 같이 놀아도 보았어요. 내가 몰랐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걸 하면서도 다른 반 선생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교사들은 서로의 차이를 의식하는 가운데 각각의 인식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단지 서로 암묵적으로 견제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가 실질적으로 타인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면서도 상호 견제하는 분위기는 학생들과 신뢰롭고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자 하는 교사들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고 있다.
연구 대상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갖는 특징을 하나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상호 견제 관계, 신뢰 관계, 불신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공존한다. 이 가운데 학생들은 교사들과 격의없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지만 많은 교사들은 교사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공식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어떠한 교사가 학생들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는 것은 학교라는 조직 내에서 처하는 여러 가지 갈등 상황 속에서 어떠한 행위양식을 선택하는가 하는 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교사들이 선택하는 행위양식을 지배하는 것은 조직의 요구이다. 조직이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복잡한 논의보다는 관례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는, 어떠한 문제와 관련한 구성원들의 다양한 인식 차이들을 활발하게 교류하기보다는 관례대로 문제없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익숙한 조직이다. 이 속에는 다양한 학생들만큼이나 다양한 교사들이 존재하지만 교사들은 서로의 차이를 암묵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에게 미칠 교육적 효과와 관련한 고민은 개별 교사 수준에 맡겨져 있다. 이것을 고민하는 교사는 많은 제약 조건 속에서 홀로 버티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
3) 학교 규율
학생들의 일상 생활을 규제하는 학교 규율에는 등 하교 시간을 비롯하여 금주․금연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규칙들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는 주로 수업에서의 질서와 학생들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인 복장 규율과 관련하여 이 학교의 특징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경쟁 속에 유지되는 학교 질서(“팔방미인” 지향)]
이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에서 상위권이었던 학생들이므로 성적과 관련하여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 교사, 학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아이들이 시험을 보고 나면 학급에서 30, 40등, 전교에서 몇 백 등을 하게 될 때 느끼는 충격은 대단하다고 한다. 학생들은 점수 1, 2점에 굉장히 민감하다. 이 학교의 학생들이 느끼는 성적과 관련한 긴장을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 잘하는 것처럼 보여 가지고 열등감에 빠져 가지고 잘못하면, 여기서 까딱하면 안되겠구나 싶을 정도로 너무 위험하고 외나무다리 타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 막 와요. 열등감, 슬럼프 빠지면 안 되는데 이 생각 때문에 맨 날 고민하고 있고.
점수를 더 얻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할지라도 학생들은 서로의 관계에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학생들은 서로 거리낌없이 숙제를 빌려주며, 학급 동료가 무엇을 물어 오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아침시간에는 남녀학급을 불문하고 많은 학생들이 숙제를 베끼고 있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12)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모르는 것을 교사에게 묻기보다는 친구에게 묻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물을 만한 동료가 없는 아주 뛰어난 학생들만 모르는 것을 교사에게 질문한다.
학생들은 “성격 좋고”, “공부 잘하고”, “잘 노는” 팔방미인을 선호한다. 학생들은 점수만을 너무 따지고 “공부만 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부만 하는 아이”가 실제 시험을 보면 예상한 것보다 성적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 “놀 줄도 아는 아이”가 성적도 좋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친구가 숙제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선뜻 빌려주고 숙제를 도와 달라는 친구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는 “성격 좋은 아이”가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거기에다가 “운동13) 같은 것도 잘하고”, “공부까지 잘하면”(1, 2등) 그 학생은 동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즉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지만 경쟁 그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다던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한다던가 그러한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동료가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를 “공부 안하는 아이”, “노는 아이”로 규정하는 한 학생14)은 이 학교 학생집단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는요, 애들이 다 얌전해요. 노는 애들이 없어요. 따도 없구요. 다른 데는요, 힘쓰는 애들 노는 애들이 애들 따 시키쟎아요. 공부 못하는 그런 애들요. 여기는 그런 것 하나도 없어요. 이 번처럼 농구팀 뽑는데도 봐요. 다른 데 같으면 힘 센 애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애들 쫙 뽑아요. 다른 애들이 뭐라 그럴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그런 거 없잖아요.
학생들의 이러한 특성은 전체적으로 이 학교가 커다란 규제를 하지 않아도 질서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자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거나 너무 재미없어 반응하기 싫어 하지만” 수업이 진행되기 어렵게 질서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반응하지 않는 학생들이지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아니다.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 숙제할 시간이 없어 학교에 와서 숙제를 하거나 친구 것을 베끼거나 하고, 너무 피곤해서 수업 시간에 자고, 수업 내용이 이해되지 않으면 혼자서 문제를 풀어 보거나 하는 것이 이 학교 학생들이다.
[질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하는 전선]
기본적으로 이 학교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학생들이므로 “내신 성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점은 학생들의 수업 내외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부여한다. 학생들은 수행평가를 위한 과제에서 서로간의 점수 차이가 1, 2점 밖에 나지 않지만 그것을 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생활지도에서 아홉 번 걸리면 학교에서 시상하는 각종 상을 수상할 수 없으며, 결과 세 번이면 결석 한 번이라는 등의 규정을 여러 학생들은 무시하지 못한다. 이는 교사가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1학년 체육대회가 있었던 날의 종례 시간>
교사: 오늘, 체육복 안 입은 사람 일어 나!
학생1: 체육복 입었다가 갈아 입었는데요.
교사: 어쨌던 다 일어나. 아까 체육복 입고 있었던 애들은 앉아! 니네들은 사복 입은 거잖아?(윗도리만 일반 티셔츠를 입고 밑에는 체육복 바지를 입은 학생들에게)
학생2: 여름 체육복 안 사서 이걸 입고 왔는데요. 긴 거는 너무 덥잖아요?
교사: 안돼! 그건 사복이잖아. 체육복 사던지, 겨울걸 입던지. 자 번호 불러 몇 번이야?
또 어제 봉투(성적표 발송용 봉투) 안낸 사람도 일어서! 번호 불러.
그러나 이러한 방법 때문에 이 학교 학생들이 학교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이 학교 학생들의 성향 자체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이 적은 것으로 교사들은 판단하고 있다. 외적인 통제는 일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학생들의 현재 사고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통제를 계속하는 것은 현재 수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활동으로 교사들에게는 인식되고 있다. 학교 규율은 질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하는 전선인 셈이다.
<학생부 교사>
요즘 애들은 야단을 치면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문제는, 야단을 치면 애들 사고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안바뀐다는 거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단정하다. 몸가짐도 그렇고, 개중에 몇 명 그래서 그렇지 생활 단정하고 말도 잘 듣는 편이다. ----교문지도도 사실상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서 가지고 애들을 볼 필요는 없는데 그냥 놔두면 애들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지켜야 될 것도 단속을 안했기 때문에 안 지킬 수도 있고. 그러니까 느긋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자꾸 옆에서 환경적인 조성을 해 주는 거다.
[학생들에 의해 계속 밀리는 전선]
학교 규율 체계는 학생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학교 규율 중 학생들에게 가장 예민하게 의식되는 것은 복장 규정이다. 공식적인 학교 복장 규정은 등교시 뿐만 아니라 외출시에도 반드시 교복을 착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실외화, 실내화, 가방, 양말, 겨울철 안복장이나 오버 코트의 색상, 종류 등을 지정해 놓고 있다. 이 밖에도 반지, 팔지,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신구 사용 금지, 두발 규정 등이 복장 규정에 포함되어 있다. 이 복장 규정은 비닐 코팅이 되어 각 학급 뒤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다.
이 복장 규정들이 모든 학생들에게 갖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학생들에게는 이 복장 규정이 거의 ‘규칙’으로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들이다. 정해진 교복에 정해진 색상과 모양의 양말과 신발, 가방을 착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더욱 많은 학생들이 정해져 있는 색상 이외의 다양한 색상의 양말을 신고, 다양한 색상의 머리띠를 하고 싶어한다. 더욱 많은 학생들이 정해져 있는 기준 이상으로 머리를 기르고 싶어하고 무스를 바르고 싶어한다. 이들에게 학교의 복장 규정은 자신의 삶을 제약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감시체계’이다.
학교 규율 그 자체가 학생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합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복장 규정에 대해 갖는 교사들의 생각은 다양하다. 생각이 다르니 만큼 지도하는 수준도 다르다. 한 학급에서 관찰한 H․R 시간에 이루어지는 복장지도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H․R 시간, 이 학급 담임교사는 “명찰, 교표 없는 사람, 머리 안 묶은 사람, 귀거리 한 사람” 등을 스스로 일어나게 하여 그 학생의 번호를 기록한다. 담임교사는 일어나지 않은 학생에 대해 일일이 다시 점검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서 번호를 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명찰이나 교표가 없는 학생들이다. 쉬는 시간에 많은 여학생들이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복장지도가 시작되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머리를 묶는다. 머리를 풀고 있는 여학생들은 대부분 손목에 머리띠를 두르고 있어 하시라도 머리를 묶을 수 있다.
그러나 뒤이어 그 학급에 들어 온 학생부 교사들의 지도는 보다 엄격하다. 그들은 학급 학생들 하나 하나를 살피며 머리 염색한 아이를 찾아내고, 자로 머리 길이를 재어 규정보다 긴 아이들의 번호를 기록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지적을 받을 때 자신의 번호를 순순히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간혹 노골적으로 그 불만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는 학생도 있다. 그러나 교사가 복장지도를 하는 순간에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분위기는 일반적인 것이다. 복장지도가 끝나고 교사들이 교실 밖을 나가자 복장지도가 있기 직전에 머리를 묶었던 학생들이 거의 모두 머리를 다시 풀었으며, 어떤 여학생은 “콤펙트(화장분)”를 꺼내어 얼굴에 바른다. 그 “콤펙트”는 여러 여학생의 손을 거쳐갔다.15)
학생들의 복장지도에서 교사들이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관심의 차이,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부를 맡은 교사와 그 밖의 교사 사이에는 위치의 차이에서 오는 관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부 교사는 업무의 성격 때문에 학생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가 모두 눈에 들어오는데” 일반 교사들은 학생들을 볼 때 그러한 것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의 복장지도와 관련한 관점이 교사마다 다를 수 있다. 한 교사 안에서도 관점의 일관성이 없을 수 있다. 머리를 20㎝로 하든 10㎝로 하든 학생들의 인격과 하등 관계가 없고, 명찰을 달라고 하는 규정과 같은 것도 전혀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진 교사가 있다. 반면에 성적이 좋은 애들이 대체적으로 보면 몸가짐이 단정하고 성적이 낮은 애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에 단정한 복장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책임감 있는 성격, 성실한 성격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진 교사들도 있다.
학생들은, 이 학교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을 규제할 수 있는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규율이 지나치게 규제 중심이라는 점을 불만으로 제기한다. 이 학교 학생들이 갖고 있는 학교에 대한 대외적 자부심은 강하다. 선발집단이 모인 학교라는 대외적 인식으로 인해 이 학교의 일원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한다. 이 점으로 인해 학생들에 대해 지나치게 규제를 하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자신을 규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이 학교 학생들의 의견이다. 흐트러진 복장을 하고 학교 밖을 다니게 되면 일반인들이 자신을 상대적으로 더욱 낮은 수준의 학교 학생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이 점이 학생들 스스로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는 복장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교사들에게 “풀고 있는 머리 단속해 줄 것” 등을 계속 요구한다.
교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학교 규율과 관련한 관심이나 관점의 차이가 활발하게 소통될 수 있는 통로가 없을뿐더러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도 서로의 관심의 차이를 교환할 수 있는 통로 역시 없다. 교직원 회의가 지시, 전달 중심으로 이루어지듯이 학생들의 학급회의도 극히 형식적으로 진행되거나 아예 자율학습 시간 등으로 활용되거나 한다.
학교 내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관심이 상호 소통되지 못하는 가운데 학교 규율과 관련하여 보다 힘을 지닌 집단에 의해 학교의 규율은 강조되고 있다. 학교장이나 교감, 학생부 교사 등은 일반 교사들에 비해 학생 생활지도와 관련해서 힘을 갖는다. 일반 교사들은 자신의 담임 학급이 아닌 학생들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질 수 없을 때 학생부를 이용한다. 또한 한 학급의 담임교사도 자신의 학급 학생들에 대한 지도를 자신의 기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기준, 학생부의 기준에서 해야만 한다. 교사들은 무엇을 어떠한 기준에 의해 지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도록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학교의 기준을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중간다리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다. 학생들도 스스로를 통제하는 규칙 제정에 어떠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조건에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 있게 되면 해당 규율은 암묵적으로 무시되거나 변화된다. 예를 들어 이 학교의 공식적인 복장규정 중에는 없지만 학생부에서 계속 강조해 온 “단정한 용의복장”을 위한 사항 중에 많은 학생들이 지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춘추복을 착용할 때에는 반드시 조끼를 입어야 한다던가(날씨가 더울 때라도), 남학생의 경우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날씨가 더워지자 많은 학생들이 조끼를 입지 않았는데 춘추복 착용 초기에 강조되던 사항은 얼마 후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에도 학생부에서 계속 강조하다가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바지 밖으로 상의를 내 놓고 다니자 학교에서는 그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게 된다.16)
공식적인 복장 규정에 정해져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묵인해주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학교복장규정에는 장신구를 착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나 주로 집중 단속대상이 되는 것은 가장 눈에 잘 띄는 귀걸이이며, 목걸이의 경우 교복 밖으로 목걸이가 드러나 보이는 경우에도 거의 단속되지 않는다. 학생부 교사에게도 반지나 목걸이는 단속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교문지도에서, 그리고 하나의 월례 행사처럼 치러지는 학생부에 의한 복장 지도에서 무스를 바른 학생이나 머리를 풀고 있는 학생들을 단속하고 이에 학생들은 단속이 있을 때에는 무스를 지우고 풀었던 머리를 묶거나 하지만 단속의 시간이 지나면 묶었던 머리를 풀고 무스를 다시 바른다. 일상적인 학교 생활에서 긴 머리를 풀고 있는 여학생들을 교사들이 규제하는 것은 아니며, 무스를 바르고 있는 남학생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학생부의 복장지도에서 그 항목도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다.
결국 교사들은 현재의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학생들이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학생들의 집단적, 일상적 저항으로 그 전선은 계속 밀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규율의 특정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집단적 저항이 일상화되면서 그것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학교의 규율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하면 학교 규율의 존재 자체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머리 염색을 하고, 필요하면 화장을 하고, 필요하면 무스를 바르고, 긴 머리를 풀고 다닌다.
학교의 규율을 어떠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지키는가 하는 것은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선택 행위이다. 학교의 규율을 지키거나 어기는 것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선택’이다. 누구는 긴 머리를 좋아하고 누구는 커트 머리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차이이다.
학생들은 서로 간의 차이에 대해 별로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학생답지 못하다던가 하는 기준으로 상대 학생을 비난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 중에도 머리에 무스를 바르거나 머리를 풀고 다니는 학생들이 있다. 남학생들과 함께 하는 클럽활동이 있기 전에 거울 앞에서 모여서 정신없이 분을 바르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부러워 “복장이 터질” 지언정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교사들도 이러한 학생들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학생부장 교사>
예전에는 공부를 잘하면 진짜 행실도 바르고 지각 같은 것도 안하고 그랬었는데 내가 00에서 한 3년 있다가 여기 00에서 지금 5년째에요. 아파트 지역 애들이 성향이 바뀌었어요. 잘하는 애들이 아주 말 안듣는 애들이 많아요.
학생들에게 학교 규율의 준수가 선택사항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이전과는 다른 점이다. 학교 규율을 준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 학생으로 규정짓는 주요 기준이었던 이전 세대에 비해 현재의 학생들에게는 학교 규율의 준수 여부가 개별 학생들의 기호의 차이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이 학교의 학생 어느 누구나 대학으로의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학생이 없다는 사실이 이 학교의 질서가 기본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업에도 교실을 이탈하지 않고 앉아 있으며, 그 시간에 잠으로 피곤을 덜어 보거나 혼자서 공부를 하려 한다. 학생들은 따르고 싶지 않고, 실제 따르지 않고 있는 학교 규율도 교사가 강제하면 따르는 시늉을 한다. 그것은 규율 자체의 가치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4) 논의: 학교교육 위기의 실체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는, ‘학교붕괴론’에서처럼 학교교육의 위기를 수업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든지 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는다든지 하는 징표들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에서라면 이 학교에서 위기의 징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학교를 결석하거나 수업에 빠지는 학생이 극소수이고, 학급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드문 이 학교에도 그 내부를 들어다 보면 ‘위기’의 국면이 다양하게 포착된다.
학생들은 많은 수업에서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학생들은 학교 규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수용할 수 없는 규율은 지키지 않는다. 몇몇 교사를 제외하고 학생들이 교사들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의 강도는 높다. 교사들 역시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에 대한 불만이 높다.
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변화는 흔히 “요즘 아이들”의 성향으로 지적되는 ‘참을성 없고, 자기 중심적이고, 가벼운 재미만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집단으로서의 학생이 아닌 개별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들은 세대가 다른 교사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용 있는” 수업이고 교사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들이 말하는 “재미있는 수업”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수업이 아니라 “내용이 있으면서” 교사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수업을 말한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격적 유대감이 느껴지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수업에 더욱 집중하고 교사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선택적으로 학교 규율을 받아들인다.
연구대상 학교에서 포착되는 학교교육의 위기는, ‘배움’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향으로 원활하게 움직이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학교체제 자체의 위기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학교에서 ‘학교붕괴’ 현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은 이미 깊숙이 존재한다. 학교 이외의 다양한 국면에서 ‘학습기회’를 얻는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 오는 학교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할 때 그것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방법으로 저항한다. 그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 자체의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 교실의 수업에 대한 저항을 ‘무반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가 집단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규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지킨다.
수업의 질서가 심각하게 파괴되거나 학교 규율의 통제력이 심각하게 상실되고 있는 현상이 일반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행연구들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교 교사와 학생이 학교붕괴가 실재한다고 응답하고 있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제시된 것이, 일반적인 학교 사례가 아닌 아주 특별한 학교에 대한 참여관찰 결과에 기반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수업하는 교실에 빈자리가 속출하고 2교시에 학교에 오는 학생, 5교시에 학교에 오는 학생들로 인해 몇 교시까지 오면 출석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실업계 고등학교의 현실(2000. 4. 28. 교사 면담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이 연구에서의 사례는 ‘배부른 고민’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연구의 사례와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나타나는 사례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특히 심각하게 나타나는 학교질서의 붕괴는 한글도 모르는 고등학생, 중학교 교육과정도 이수하기 어려운 현재의 많은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중학교에서 하위 80-90%에 속해 있던 학생들)에게 현 수준의 고등학교 국가교육과정을 여전히 들이대는 것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가와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는 교육과정을 가르치려 하면서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학생들의 무질서는 그들과 호흡할 수 없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학교는 여러 수준에서 나타나는 학생들의 저항을 포착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융통성 있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교육내용을 찾고, 학생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고민하고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조직이다. 학교 내에서 교사들은 ‘교육적인 것’과 ‘조직에서 요구되는 것’ 사이에서 매일 갈등한다. 교직 경험이 오래될수록 그것은 서서히 해결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교직은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고 여러 교사들은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 혼자서 싸워야 한다는 것, 종종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는 것 등등이 교사들을 힘들게 한다.
그 가운데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익숙해진 교사들도 있고, 아예 문제 자체를 접하지 않도록 “일”을 기피하는 전략에 익숙해진 교사들도 있다. 그와 함께 계속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찾기 위해 애쓰는 교사들도 있다. 학교조직은 후자의 교사들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체제가 아니다.
많은 교사들이 교직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유들은 모두 다르다. 전혀 학생들이 반응하지 않는 수업을 하면서 수업을 “때우는” 기분으로 하고 있는 교사 개인에게, 그리고 머리 염색했다고 야단치면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학생들을 대하는 교사 개인에게 교직은 언제고 떠나고 싶은 직업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학생들의 무반응, 교사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교직이 갖는 사회적 지위, 특히 경제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나타나는 교직 자체에 대한 무시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교육을 위한 고민이 수용되지 않는, 학교라는 조직 체계 자체에서 더욱 절망감을 느껴 교직을 떠나고 싶어하는 교사들도 있다. 이들은 수업과 여타의 장면에서 학생들과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교사들이다.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움’의 기회를 풍부하게 얻을 수 없으며, 교육적인 효과를 고민하는 교사가 교직에 회의를 품는다는 점, 그것이 현재의 학교를 위기 상황으로 규정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교육체제 내부에 처음부터 잠재해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볼 경우 최근의 ‘학교붕괴’ 논의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30년 전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던 위기적 요소가 왜 하필 최근에 와서야 현재화되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위기적 요소가 잠복한 상태에서 그런 대로 학교가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면, 이제는 위기가 밖으로 표출되면서 종래의 역할 수행에 이상(異狀)이 생긴 것이다.17)
그렇게 만든 요인은 뒤에서 보듯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어떻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이제 지금의 학교체제가 획기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미 학교가 학습이나 사회체제의 존속 기능에서 그 독점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 같은 수준의 고객들을 계속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나. 학교교육의 현실에 관한 인식
앞의 서술이 어느 고등학교의 일상에 대한 소묘를 통하여 학교교육 위기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그러한 학교교육의 현실― 즉, 수업, 학교 규율, 교사와 학생의 관계 ―에 대하여 교사, 학생, 학부모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는 연구자 시야에 들어온 객관적인 현실과, 비록 동일 집단은 아니지만, 그 현실 속에 있는 당사자들의 인식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1) 교과 수업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교육활동인 수업에 대하여,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들의 인식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생이 수업에 집중하는 정도”에 대하여 교사들의 18.3%는 대부분의 학생이 집중한다고, 48.2%는 대략 반정도의 학생이 집중한다고 대답하였다.18) 이에 비하여 학생들은 8.3%만이 대부분의 학생이 집중한다고 대답하였으며, 26.6%만이 2/3정도의 학생이 집중한다고 대답하였다. 교사들의 66.5%는 대략 반 이상의 학생이 수업에 집중한다고 대답한 셈이며, 학생의 65.1%는 1/3 정도 혹은 거의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셈이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집중 정도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곳은 실업계 고등학교이다.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의 49%는 소수의 학생만 수업에 집중한다고 답하였으며, 4%의 교사는 학생들이 거의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중학교 교사들 중 75%는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한다고 여긴다.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는 69%가 그렇게 여긴다. 교사들은 연령이 많을수록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학교의 수준에 따른 학생들의 대답 양상도 다르다. 일반계 고등학생의 55.3%는 1/3 정도의 학생만이 수업에 집중한다고 하였으며, 거의 집중하지 않는다고 답한 학생도 15.6%라고 답하였다. 실업계 고등학생은 더욱 심각하다. 44.9%가 1/3 정도 학생만이 수업에 집중한다고 답하였으며, 28.9%는 거의 집중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부록 표3-1참조).
<표3-1> 학생들의 수업 집중 정도
교 사 |
대부분의 학생집중 |
대략반 정도집중 |
소수학생만 집중 |
거의아무도 집중않음 |
계 (%) |
유의도 (χ2) |
122 (18.3) |
321 (48.2) |
213 (32.0) |
10 (1.5) |
666 (100.0) |
218.584*** | |
학 생 |
대부분 |
2/3정도 |
1/3정도 |
거의없다 |
| |
97 (8.3) |
313 (26.6) |
537 (45.7) |
228 (19.4) |
1175 (100.0) |
***p<.001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주된 이유”에 대한 교사와 학생들의 인식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교사들의 28.6%는 학생들이 “학교 밖(학원, 과외)에서 배울 수 있어서”라고 답하였다. 그 다음으로 “다른 학생들이 산만해서”(22.6%),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서”(21.8%), “과목 자체를 싫어해서”(18.6%), “교실 환경이 나빠서”(8.3%) 등을 꼽고 있다. 학교 밖 사교육의 영향은 중학교 교사(43.4%)가 가장 심각하게 느끼며,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7.9%)는 상대적으로 적게 느낀다. 또한 도시지역의 교사가 읍면지역의 교사들에 비하여 사교육의 영향을 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교사들의 진단은 정작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로 꼽은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꼽고 있는 이유는 “과목 자체를 싫어해서”(39.3%)이다. 이 이유는 실업계 고등학생의 절반 이상(53%)이 제기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선생님이 알아 듣게 가르치지 못해서”(21%), “다른 학생들이 너무 산만해서(16%)”를 들고 있다. 교사가 가장 중요하게 든 이유인 “학교 밖에서 배운 것”에 대하여는 학생들의 14.2%만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이 알아듣게 가르치지 못해서”라는 이유는 일반계 고등학생들이 가장 크게 느끼고 있다(부록 표3-2 참조).
<표3-2>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
교 사 |
학교밖에서 배움 |
학생이 못알아들음 |
과목자체를싫어해 |
다른학생이 산만 |
교실환경 이 나빠 |
계 (%) |
유의도 (χ2) |
178 (28.6) |
136 (21.8) |
116 (18.6) |
141 (22.6) |
52 (8.3) |
623 (100.0) |
108.426*** | |
학 생 |
학교밖에서 배움 |
교사가알아 듣게못가르침 |
과목자체가싫어 |
다른학생 이 산만 |
교실환경이 나빠 |
계 | |
164 (14.2) |
243 (21.0) |
456 (39.3) |
186 (16.0) |
110 (9.5) |
1159 (100.0) |
***p<.001
교사들은 학교 밖 사교육의 영향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데 비하여 학생들은 과목 자체가 싫다는 이유를 가장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학생들이 “과목 자체가 싫은 것”을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로 지목한 것은 교육과정의 현실 적합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적합성의 문제에는 모든 학생이 똑 같은 교과를 배워야 하는 것, 학생들의 수준이 고려되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교사들은 학생들이 수업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교사가 알아듣게 가르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여야 할 대목이다.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불만 요인은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정도로 나타났다. 그 연구에 따르면 중고등학생들은 대체로 교사의 교과 지도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나 중학생의 19%, 고등학생의 29%는 교사의 교과 지도 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홍생표, 1998: 62-3). 학생들의 불만에 대하여 더 심층적인 조사가 요구되나 학생들이 교육 내용의 수준과 교수 방법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업 집중에 대한 교사와 학생의 인식 차이는 수업의 이해도에 대한 인식차이와 연결된다. 교사들의 9.7%는 “대부분”의 학생이, 61.1%는 “대략 반정도”의 학생이 이해한다고 하였다. “소수의 학생만 이해”한다고 답한 비율은 28.1%이며 “거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한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학교 수준별로 보면 중학교 교사가 고등학교 교사들에 비하여 학생들의 이해 정도를 높이 인식하고 있다. 학생들의 수업 이해 정도를 가장 낮게 진단하고 있는 교사들은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이다. 이들의 절반 이상(51.6%)이 소수의 학생만 이해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학생 스스로가 진단한 수업 시간의 이해 정도는 교사들에 비하여 낮다. “대부분의 학생이 이해한다”고 답한 비율은 6.1%, 2/3정도가 이해한다고 답한 비율은 26.6%이다. 절반이 넘는 50.4%가 1/3정도의 학생들이 이해한다고 답하였다. 거의 아무도 없다고 답한 비율은 교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16.9%에 이른다. 수업의 이해 정도는 중학생에 비하여 고등학생들이 낮다고 답하였다. 일반계 고등학생의 71.9%, 실업계 고등학생의 79.9%가 1/3정도 혹은 거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있는 셈이다(부록 표3-3참조).
<표3-3> 학생들의 수업 이해 정도
교 사 |
대부분의 학생이 이해한다 |
대략 반 정도는 이해한다 |
소수의 학생만 이해한다 |
거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
계 (%) |
65 (9.7) |
408 (61.1) |
188 (28.1) |
7 (1.0) |
668 (100.0) | |
학 생 |
대부분 |
2/3정도 |
1/3 정도 |
거의 없음 |
|
72 (6.1) |
314 (26.6) |
595 (50.4) |
199 (16.9) |
1180 (100.0) |
이러한 조사 결과는 다른 연구의 조사 결과(윤철경 외, 1999; 홍생표 외, 1998: 41)와도 일관된다. 윤철경 외(1999: 73)의 조사에 따르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진술에 대하여 42.5%의 학생이 긍정적으로 답하였으며, 56.9%의 학생이 부정적으로 답하였다. 수업 시간에 교사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은 중학생(47.4%)에 비하여 고등학생이, 고등학생 중에서도 일반계 학생(56.3%)보다 실업계 학생(공고생의 67.8%, 상고생의 75.2%)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교사나 학생 모두 수업의 이해 정도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할 때,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수업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장애가 되는 요인”을 질문하였고, 학생들에게는 “수업시간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기 어렵게 하는 요인”을 질문하였다.
교사들이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가장 많이 지목하고 있는 것은 “학습 자체에 무관심한 학생들”(40.3%)이다. 다음으로 “학급당 학생수 과다” 요인(31.9%), “학생의 특성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과정”(19.9%), “업무과다로 인한 수업 준비 부족”(6.4%)을 들고 있다.
“학습 자체에 무관심한 학생” 요인은 중학교 교사들에 비하여 고등학교 교사들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의 47.3%,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의 49.7%가 이 요인을 꼽고 있다. “학급당 학생수 과다” 요인은 학급당 학생수가 많이 감소한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은 상대적으로 덜 하나 중학교(37%)와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32%)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끼고 있다.
이에 비하여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흥미와 재미를 가지기 어려운 이유로 가장 많이 지목한 “학생의 특성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과정(교과서)” (42.4%)이다. 특히 일반계 고등학생들의 56%는 이 요인을 들고 있다. 그 다음으로 학생들이 많이 지목한 요인은(31.8%)는 “재미없는 수업 방법”이다. 교사들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학습 자체에 무관심한 학생” 요인에 대하여서는 학생들의 17.4%가 지목하였다. “학급당 학생수 과다” 요인에 대하여서는 8. 4%만이 동의를 하였다(부록 표3-4 참조).
교사들이 가장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요인, 즉 “학습 자체에 무관심한 학생”에 관하여서는 다각도로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다. 교사들이 지목한 이 요인을 학생들이 제기한 요인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특성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과정”과 “재미없는 수업 방법”이다, 이러한 요인이 오랜 학교 생활 속에서 누적되어 오면 학생들은 학습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게 될 수 있다. 교사들과 학생들의 진단은 교육과정의 현실 적합성과 교수 방법의 개선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표3-4> 흥미 있는 수업의 방해 요소
교 사 |
학급당 학생수 과다 |
학생특성 수준무시 교육과정 |
학습자체 에무심한 학생 |
업무과다 수업준비 부족 |
기타 |
계 (%) |
유의도 (χ2) |
213 (31.9) |
133 (19.9) |
269 (40.3) |
43 (6.4) |
10 (1.5) |
668 (100.0) |
425.501*** | |
학 생 |
학급당 학생수과다 |
학생특성 수준무시 교육내용 |
학습자체 에무심한 학생 |
재미없는수업방법 |
기타 |
1160 (100.0) | |
97 (8.4) |
492 (42.4) |
202 (17.4) |
369 (31.8) |
0 (0) |
***p<.001
한편 학생들이 수업 중에 교사의 지시를 잘 따른다고 생각하는지를 교사와 학생에게 질문한 결과는 <표3-5>와 같다. 교사들은 대체로 학생들이 수업 중에 교사의 지시를 따른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매우 그렇다”고 응답한 교사가 11.7%, “다소 그렇다”고 응답한 교사가 60%에 이른다. 교사들의 71.7%가 학생들이 교사에 순응적이라고 응답한 셈이다. 교사들 가운데에는 중학교 교사들이 고등학교 교사들에 비하여 학생들이 지시에 잘 따른다고 여기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 중에는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이 순응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낮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최근 교사들이 학생들에 대하여 제기하는 여러 불만을 고려하여 보면 이러한 응답은 다소 과장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학생들이 교사의 지시에 잘 따른다고 응답한 교사들과는 달리, 정작 학생들은 교사들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고 답하고 있다. 학생들의 44.4%가 “별로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으며, 8.1%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학생들의 과반수가 스스로 교사의 지시에 순응적이지 않다고 답하고 있다. 학교 수준별로 보면 실업계 고등학생들이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다. 일반계 고등학생들은 오히려 중학생들에 비하여 교사의 지시에 더 잘 따른다고 응답하고 있다.
<표3-5> 수업 중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 정도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78 (11.7) |
401 (60.0) |
176 (26.3) |
13 (1.9) |
668 (100.0) |
129.971*** |
학 생 |
41 (3.5) |
520 (44.1) |
523 (44.4) |
95 (8.1) |
1179 (100.0) |
***p<.001
2) 학교 규율
학교에서 학생들이 지켜야 할 여러 규칙, 규율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에 관하여 교사, 학생, 학부모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학교 규칙 중, 1) 교복, 두발에 관한 규칙, 2) 결석, 지각, 조퇴, 결과, 외출에 관한 규칙, 3) 음주, 흡연 금지 규칙, 4) 폭력, 기물 파손 금지 규칙 등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네 종류의 규칙에 대하여 교사나 학생 모두 “잘 지키는 편이다”와 “어느 정도 지키는 편이다”라는 응답이 70~80% 정도로 나타났다. 단지 교사들에 비하여 학생들이 학교 규칙을 지키는 것에 약간 더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학교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학부모들의 80% 정도가 “잘 지키고 있는 편”이라고 답하였으며, “어느 정도 지키는 편”이라는 응답까지 합하면 90%를 훨씬 넘는다.
네 종류의 규칙 중 학생 스스로 가장 지키지 않는 규칙은 음주와 흡연에 관한 규칙이다. 학생들의 38.2%가 “별로 지키지 않는다” 혹은 “거의 지키지 않는다”고 응답하였다. 최근 학생부 교사들이 흡연 금지 규칙을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 적용하였다가는 너무 많은 학생을 처벌하여야 될 사태에 직면하게 될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김혜련,1999: 59). 그만큼 청소년 사이에 흡연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중학생의 24.4%, 일반계 고등학생의 13.5%, 실업계 고등학생의 40.6%가 음주, 흡연 금지 규칙이 별로, 혹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 응답이 다소 축소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현실은 그보다 더 많은 학생이 음주와 흡연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부록 표3-6-1부터 부록 표 3-6-4까지 참조).
<표3-6> 학생들의 학교 규칙 준수 정도
|
구 분 |
잘 지키는 편이다 |
어느 정도 지키는 편이다 |
별로 지키지 않는다 |
거의 지키지 않는다 |
계 (%) |
유의도 (χ2) |
교복 두발 규칙 |
교 사 |
118 (17.7) |
423 (63.3) |
117 (17.5) |
10 (1.5) |
668 (100.0) |
599.331*** |
학 생 |
233 (19.8) |
650 (55.2) |
254 (21.6) |
41 (3.5) |
1178 (100.0) | ||
학부모 |
651 (63.0) |
316 (30.6) |
52 (5.0) |
14 (1.4) |
1033 (100.0) | ||
결석 지각 조퇴 결과 외출 관련 규칙 |
교 사 |
198 (29.6) |
359 (53.7) |
102 (15.3) |
9 (1.3) |
668 (100.0) |
573.988*** |
학 생 |
302 (25.7) |
574 (48.9) |
253 (21.5) |
46 (3.9) |
1175 (100.0) | ||
학부모 |
741 (71.8) |
231 (22.4) |
50 (4.8) |
10 (1.0) |
1032 (100.0) | ||
음주 흡연 금지 규칙 |
교 사 |
148 (22.2) |
323 (48.4) |
158 (23.7) |
38 (5.7) |
667 (100.0) |
794.691*** |
학 생 |
371 (31.6) |
355 (30.2) |
327 (27.9) |
121 (10.3) |
1174 (100.0) | ||
학부모 |
823 (80.0) |
132 (12.8) |
61 (5.9) |
13 (1.3) |
1029 (100.0) | ||
폭력 기물 파손 금지 규칙 |
교 사 |
220 (33.0) |
309 (46.3) |
129 (19.3) |
9 (1.3) |
667 (100.0) |
655.899*** |
학 생 |
385 (32.8) |
496 (42.3) |
220 (18.8) |
72 (6.1) |
1173 (100.0) | ||
학부모 |
836 (81.3) |
145 (14.1) |
34 (3.3) |
13 (1.3) |
1028 (100.0) |
***p<.001
“학생들이 학교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 가장 많이 응답한 것이 “규율이 학생들의 문화나 정서와 동떨어져서”이다. 교사의 60.2%, 학부모의 45.9%, 학생의 46.5%가 그 이유를 꼽고 있다. 대다수가 이 이유를 가장 크게 꼽고 있으나 학생에 비하여 교사들이 그 이유를 더 많이 꼽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교사들은 학교 규율이 “너무 엄격하고 까다롭다”(4.8%)는 데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으나, 학생들의 26.3%는 그 이유로 인해 학교 규율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교사들이 엄격하게 지도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는 교사와 학부모의 17% 정도가 동의하고 있으나, 학생들은 7%만이 동의하고 있다. “학교 규칙 적용이 일관되지 않은” 것은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 20%안팎이 동의하고 있다.
<표3-7> 학생들이 학교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이유
구 분 |
①학생문화, 정서와 괴리 |
②적용의 일관성 결여 |
③너무 엄격 까다로와 |
④엄한 지도부족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390 (60.2) |
120 (18.5) |
31 (4.8) |
107 (16.5) |
648 (100.0) |
195.557*** |
학 생 |
540 (46.5) |
237 (20.4) |
304 (26.2) |
81 (7.0) |
1162 (100.0) | |
학부모 |
461 (45.9) |
220 (21.9) |
145 (14.4) |
178 (17.7) |
1004 (100.0) |
***p<.001
이러한 응답 결과는 학생들이 학교 규칙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워 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른 연구에서 조사한 바(홍생표 외, 1998: 77)에 따르면 중학생의 47.9%, 인문계 고등학생의 58.6%, 실업계 고등학생의 54.2%가 학교 규칙에 불만을 품고 있다.
“생활지도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행동을 나무라거나 지적할 때 학생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교사, 학부모, 학생들의 반응은 다소 엇갈린다. 학부모들의 경우에는 47.3%가 “고분고분 따른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교사의 13.9%, 학생의 10.9%만이 고분고분 따른다고 응답하였을 뿐이다. 교사(49%)나 학생(41.7%)의 상당수가 “교사가 보는 앞에서만 응하는 척”한다고 답하였다. 학생의 경우는 그보다 더 많은 수(43.2%)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따른다”고 답하였다. 학생들의 4.3%는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며 반항한다”고 하였다.
학교의 수준으로 보면 중학생이 고등학생에 비하여 교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비율이 높다. 일반계 고등학생의 49.4%는 “교사가 보는 앞에서만 응하는 척한다”고 답하였으며, 실업계 고등학생의 50.2%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따른다”고 답하였다(부록 표3-8 참조).
<표3-8> 생활지도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행동을 지적할 때의 반응
구 분 |
①고분고분 따르는 편 |
②보는 앞에 서만 응하는 척 |
③못마땅한표정, 마지못해 |
④노골적으로 적대시,반항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93 (13.9) |
327 (49.0) |
239 (35.8) |
8 (1.2) |
667 (100.0) |
514.737*** |
학 생 |
127 (10.9) |
488 (41.7) |
505 (43.2) |
50 (4.3) |
1170 (100.0) | |
학부모 |
486 (47.3) |
174 (16.9) |
337 (32.8) |
31 (3.0) |
1028 (100.0) |
***p<.001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거나 바른 생활 태도를 갖도록 자주 독려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교사, 학부모와 학생들의 응답이 엇갈리고 있다. 교사들의 56%는 “매우 그렇다”고 답하였으며, 40.7%는 “다소 그렇다”고 답하여 약 97%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수업에 집중하거나 바른 태도를 갖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은 연령이 많을수록 학생들에게 독려한다고 답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십대의 교사가 “매우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32.4%인데 비하여 30대는 55.1%, 40대는 61.8%, 50대는 68.5%에 이른다. 학부모들도 이와 유사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45%가 “매우 그렇다”고, 46%가 “다소 그렇다”고 답하였다.
이에 반하여 학생들은 10%만이 “매우 그렇다”고 답하였으며, 54%가 “다소 그렇다”고 답하였다. “별로 그렇지 않다”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 학생이 35%에 이른다.
<표3-9> 학생들의 수업 집중이나 바른 생활태도 독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374 (56.0) |
272 (40.7) |
20 (3.0) |
2 (.3) |
668 (100.0) |
666.100*** |
학 생 |
121 (10.3) |
638 (54.3) |
335 (28.5) |
81 (6.9) |
1175 (100.0) | |
학부모 |
461 (44.7) |
478 (46.3) |
81 (7.8) |
12 (1.2) |
1032 (100.0) |
***p<.001
3) 교사와 학생 관계
학교 생활 속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둘 사이의 의사소통 정도와 의사소통에 방해가 되는 요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교사들은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 11.8%가 “그렇다”고 답하였으며, 57.5%가 “다소 그렇다”고 답하였다. 학부모들의 34.5%는 “그렇다”고, 48.6%는 “다소 그렇다”고 답하였다. 이에 비하여 학생들은 44%가 “별로 그렇지 않다”고 23%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교사들의 69.3%가 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반면에 학생들의 67%는 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표3-10>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
구 분 |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거의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79 (11.8) |
385 (57.5) |
197 (29.4) |
8 (1.2) |
669 (100.0) |
838.775*** |
학 생 |
67 (5.7) |
320 (27.3) |
517 (44.0) |
270 (23.0) |
1174 (100.0) | |
학부모 |
356 (34.5) |
502 (48.6) |
148 (14.3) |
26 (2.5) |
1032 (100.0) |
***p<.001
“교사와 학생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교사들은 여러 요인을 고르게 지적하고 있다. 교사들의 34.5%는 “문화와 정서의 차이”라는 요인을, 32.8%는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 부담” 요인을, 28.8%는 “학급당 학생수 과다” 요인을 지적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학습 부담” 요인은 불과 3.9%만이 지적하고 있다.
학생들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47.6%가 “문화와 정서 차이”를 꼽고 있다, 그 다음으로 24.5%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 요인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다. “교사의 과중한 업무”와 “학급당 학생수 과다” 요인은 각각 13.9%의 학생들이 지적하고 있다.
<표3-11> 교사와 학생의 친밀한 관계 형성 방해 요소
구 분 |
문화와 정서 차이 |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 |
학급당 학 생수 과다 |
학생들의 학습부담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29 (34.5) |
218 (32.8) |
191 (28.8) |
26 (3.9) |
664 (100.0) |
243.926*** |
학 생 |
555 (47.6) |
162 (13.9) |
162 (13.9) |
286 (24.5) |
1165 (100.0) |
***p<.001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학생 당사자는 물론 교사와 학부모에게도 제시하였다. 학생들이 가장 중요하게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34.2%)이며,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니까”(27.2%), “졸업장을 따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23.4%),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15.2%) 등이다. 학생들과 면담을 해보면 의외로 학생들은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학교를 다닌다는 답을 거리낌 없이 한다. 네 가지 답지 중에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를 선택한 비율은 가장 낮으나, 교사(9.2%)나 학부모(4.6%)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은 수이다.
학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한 다른 조사 결과를 비교하여 보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친구 사귀기”는 의외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 의식을 국제적으로 비교한 연구(윤철경, 2000: 6)에 의하면, 한국 학생(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들의 31.9%는 학교 생활에서 “친구 사귀기”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공부”(19.8%), “입시준비”(8,2%), “취업준비(1.6%)”, “특기 개발(18.2%)”, “인격 수양”(13.5%) 등에 비하여 뚜렷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니까”(37.3%) 다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의 25% 정도는 학생들이 지식 습득, 졸업장이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하여서도 학교에 다닌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하여 학부모들은 60.5%가 “지식 습득”을 위하여 학생들이 학교에 다닐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졸업장이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하여서 다닌다”는 응답은 6.6%에 불과하다. 학부모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학생들이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는가를 질문한 것이기는 하나, 평소 학생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진학의 기대와 압력에 비하면 응답률이 낮다.
<표3-12>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
구 분 |
①당연히 가야하는곳 |
②지식 습득 위해 |
③친구를 만나기위해 |
④졸업장획득 상급학교진학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42 (37.3) |
167 (25.7) |
60 (9.2) |
180 (27.7) |
649 (100.0) |
343.835*** |
학 생 |
318 (27.2) |
401 (34.2) |
178 (15.2) |
274 (23.4) |
1171 (100.0) | |
학부모 |
289 (28.2) |
620 (60.5) |
47 (4.6) |
68 (6.6) |
1024 (100.0) |
***p<.001
4) 논의
교과 수업, 학교 규율,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의사소통에 관한 교사, 학생, 학부모의 인식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질문지 조사는 대체적인 경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학교의 맥락이나, 특정 교사, 학생의 인식과는 다를 수 있다. 수업에 대한 집중 정도를 질문한 경우, 교사는 자기가 담당한 교과 수업의 경우에 한정하여 답할 것이다. 학생의 경우는 대체적인 경향을 염두에 두고 답한 경우도 있을 것이며, 특정한 과목을 염두에 두고 답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연구의 일환으로 실시한 면담자료를 활용하되 가능한 한 특정 맥락을 떠나 일반적인 경향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교과 수업의 집중, 이해, 학교 규율의 준수 등에 관한 조사 결과는 학교교육의 위기에 관하여 몇가지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앞의 참여관찰 대상 학교의 경우와는 달리 “적어도” 학생들은 절반 이상이 교과 수업에 대한 집중도 낮고, 이해도도 낮으며,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교사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체로 스스로 학교 규칙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면서도 교사가 생활지도를 할 경우 대부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따르”거나 “보는 앞에서만 응하는 척”한다. 또한 학생들은 교사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보면 선행의 연구에서 조사한 것과 분포가 다소 상이하더라도 전반적인 경향은 일관된다. 교사와 학생의 의사소통 불능(혹은 곤란)을 “붕괴”로 규정하는 연구들은 이 연구에서 조사한 결과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학생 혹은 교사들의 그러한 현실 인식을 곧바로 “붕괴”로 규정하는 것은 학교교육의 문제를 애매하게 규정함으로써 정작 접근하여야 할 근원적인 문제를 소홀하게 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학교교육의 핵심에 위치한 교과 수업에 학생들이 집중하지 못하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에 흥미와 관심이 없는 이유로 “학생의 특성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내용”, “재미없는 수업 방법”을 지적하고 있다. 면담 자료도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하고 있다.
교과서가 너무 어려워요. 한자어도 많고, 희한한 소리도 많아요.(**고 2학년 학생1)
1학년때 국사과목 다 배웠어요. 그 많은 내용을. 시험 보기 위해 공부했지, 이해하고 안하고는 고려도 되지 않았어요. 오로지 진도만 나갔어요.(**고 2학년 학생2)
교과 수업 시간에 교사와 학생들이 실속있는 상호작용을 하기 어려운 것은 이렇듯 개인차를 고려함이 없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학교교육과정, 한 학년에 이수하여야 하는 교과목 수의 제한과 평가방법 등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원리, 입시제도라는 조건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학교교육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개인차를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사교육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종래 학교가 지녔던 지위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학교와 학원을 대비시키는 면담 자료는 학교교육의 운영 원리가 “교과 내용을 자세히 이해하고 싶은” 혹은 “깊이 있게 들어가고 싶은” 학생들의 요구에서 멀리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에서 배울 때, 제일 짜증나는 것은 이해 안되고 지나갈 때예요. 학원은 물어볼 기회가 더 많아요. 학원은 한 반에 일곱명 정도에요. 영어 같은 경우, 학교에서는 5분 정도 설명하는데, 학원에서는 더 자세히 가르쳐 줘요.(**고2학년 학생1)
학원에 가면 요약 정리도 잘해주고, 깊이 들어가는 것도 많아요. 학교에서는 중간에 맞추다보니 그냥 진도 나가버리잖아요.(** 고2학년 학생3)
학교에서 학생들의 개인차를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교과 수업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교 규율도 개인차를 존중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신들의 개성을 발휘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그것을 지탱하는 논리가 합리적이거나 일관되지 않다는 점에서 학교 규율에 반발하고 있다. 이렇듯 개인차를 존중받고자 하는 요구가 수업 시간에 그리고 학교의 일상생활에 대한 규율에서 수용되지 않아, 정작 가르쳐야 할 학생들의 마음을 잃고 있는 상태는 현재와 같은 학교교육을 지속시켜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질문지 조사는 교사와 학생간의 인식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부 질문에 관하여서는 일치하는 점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현재 학교교육의 현실에 대한 교사와 학생간의 인식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교사들은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받는 사교육” 탓으로 돌리거나 “다른 학생들이 산만하기” 때문으로 간주한다. 학생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과목 자체가 싫어서”거나 “교사가 알아듣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으로 간주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수업을 하기 어려운 것을, “학습 자체에 무관심한 학생” 탓이거나 “학급당 학생수 과다” 탓으로 돌린다. 이에 비하여 학생들은 “학생의 특성과 수준을 무시한 교육내용”, “재미없는 수업 방법”의 탓으로 돌린다.
교과 수업 뿐 아니라 학교 규율, 통제에 관하여서도 교사와 학생 간의 인식 차이가 드러난다.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학생들을 통제하여야 한다고 보는 교사,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공부하라는 교사를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 통제 90%는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의 여건이라는 것이 다 받아들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여중 교사)
한번 머리가 길어 잘린 적이 있어요. 너무 억울하여 두 분 선생님께 하소연을 했어요. 두 분 성향이 전혀 다른 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대답은 똑같았어요. “머리에 신경 쓸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머리 몇 센티인가 생각하는 것이 더 신경이 쓰여요.(**고 2학년 학생)
이러한 인식의 격차는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학교에서 그러한 차이에 관하여 상호 논의하고 토론하고 각자의 삶을 성찰해보고 대안을 스스로 모색해볼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 역시 학교교육 위기의 한 측면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2. 학교교육에 관한 세대간 인식 격차
학교교육의 위기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은 이 위기의 주요 양상 혹은 원인으로 세대간 의식 격차를 지적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학생과 교사 및 학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학생 세대와 성인 세대간에 학교교육에 대한 인식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가. 세대간의 인식 격차
1) 학교관
학교의 필요성이나 기능에 대하여 학생과 교사 및 학부모간에는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인 세대의 경우 대다수가 학교는 해당 연령의 사람들이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며, 지식이나 가치관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학생 세대는 3분의 1 정도가 학교의 필요성이나 기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학교교육은 학생의 개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주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학생과 교사의 경우 반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학부모의 경우에도 부정적인 응답이 상당수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학생 세대가 성인 세대보다 더 부정적인 학교관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 세대 중에서는 학부모보다 교사가 학교에 대해 더 부정적이다.
“학교는 해당 연령의 사람들이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다”라는 의견에 대하여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그렇다(매우 그렇다와 다소 그렇다 포함)는 응답이 그렇지 않다(별로 그렇지 않다와 전혀 그렇지 않다 포함)는 응답보다 더 많았으나 학생은 교사나 학부모에 비해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그렇지 않다, 즉,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 아니라는 응답이 교사와 학부모의 경우 모두 12.8%에 불과하였으나 학생은 31.2%에 달하였다(표3-12 참조). 부정적인 견해는 특히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많이 나타나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40.8%에 달하였다. 또한 서울과 광역시 학생들보다 중소도시와 읍․면 지역 학생들, 여학생보다 남학생 가운데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았다(부록 표 3-13 참조).
<표3-13> 학교는 해당 연령의 사람들이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312 (46.9) |
268 (40.3) |
71 (10.7) |
14 (2.1) |
665 (100.0) |
215.503*** |
학 생 |
319 (26.9) |
496 (41.9) |
267 (22.6) |
102 (8.6) |
1184 (100.0) | |
학부모 |
530 (51.2) |
373 (36.0) |
100 (9.7) |
32 (3.1) |
1035 (100.0) |
***p<.001
또한 “학교는 지식이나 가치관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라는 의견에 대해서도 교사와 학부모의 경우 각각 12.1%와 7.1%만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반면 학생은 3분의 1에 가까운 응답자가(31.5%)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였다(표3-13 참조). 중학교 학생은 27.5%만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반면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은 37%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여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학교의 기능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교사나 학생 모두 여성보다 남성이 더 긍정적이다(부록 표 3-14 참조).
<표3-14> 학교는 지식이나 가치관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311 (46.5) |
277 (41.4) |
75 (11.2) |
6 (.9) |
669 (100.0) |
367.526*** |
학 생 |
293 (24.7) |
520 (43.8) |
314 (26.5) |
59 (5.0) |
1186 (100.0) | |
학부모 |
606 (58.3) |
359 (34.6) |
63 (6.1) |
11 (1.1) |
1039 (100.0) |
***p<.001
학교교육은 학생의 개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주는데 효과적이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학생세대나 성인세대나 모두 부정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며, 특히 학생은 과반수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였다. 교사의 48.3%, 학부모의 28.7%, 학생의 55.3%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표3-15 참조). 학생 가운데 중학생은 47.4%만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반면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은 이 수치가 66.7%에 달하여 학교급이 높을수록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사들의 경우 연령이 낮을수록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학생과 교사 모두 남성보다 여성이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15 참조).
<표3-15> 학교교육은 학생의 개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주는데 효과적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20 (17.9) |
226 (33.8) |
291 (43.5) |
32 (4.8) |
669 (100.0) |
264.870*** |
학 생 |
202 (17.1) |
327 (27.6) |
445 (37.6) |
209 (17.7) |
1183 (100.0) | |
학부모 |
357 (34.4) |
384 (37.0) |
247 (23.8) |
51 (4.9) |
1039 (100.0) |
***p<.001
2) 교과관
학교 교과의 중요성에 대해 학생들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절반이 채 되지 않으며, 절반 이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의 본분은 교과공부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도 절반 이상이다. 또한 절반 이상의 학생이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교사와 학부모는 대다수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할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학생의 본분은 교과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본다.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고 된다고 생각하는 교사와 학부모는 3분의 1 전후에 불과하다. 반면 교과가 보다 실용적이어야 하며,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며, 주지교과외 교육활동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생과 성인세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학생은 교사나 학부모에 비해 훨씬 강하게 동의하고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의견에 대해 응답 교사의 69%, 응답 학부모의 74.6%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학생은 반수 이하(42.4%)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즉, 학생은 반 이상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표3-15 참조). 학교 교과의 가치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는 중학생(52.1%)보다 고등학생에게서 많이 나타나며, 고등학생 중에서도 일반계 고등학생(66.5%)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또한 남학생보다 여학생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부록 표 3-16 참조).
<표3-16>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35 (20.2) |
326 (48.8) |
191 (28.6) |
16 (2.4) |
668 (100.0) |
374.964*** |
학 생 |
126 (10.7) |
375 (31.7) |
494 (41.8) |
187 (15.8) |
1182 (100.0) | |
학부모 |
325 (31.4) |
447 (43.2) |
236 (22.8) |
26 (2.5) |
1034 (100.0) |
***p<.001
“학생의 본분은 공부(교과)를 잘 하는 것이다”라는 의견에 대해서도 교사와 학부모는 과반수(각각 65.3%, 71.5%)가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나, 학생은 과반수(60.8%)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였다(표3-17 참조).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중학생이나 일반계 고등학생보다 실업계 고등학생에게서, 남학생보다 여학생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부록 표 3-17 참조).
학생들의 경우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59.1%)이 그렇지 않은 학생(40.9%)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교사와 학부모의 경우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각각 32.5%와 37.6%에 불과하다(표3-18 참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중학생보다(53.2%) 일반계 고등학생 가운데 더 많다(68.2%)(부록 표 3-18 참조).
<표3-17> 학생의 본분은 공부(교과)를 잘 하는 것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99 (14.8) |
338 (50.5) |
196 (29.3) |
36 (5.4) |
669 (100.0) |
384.200*** |
학 생 |
101 (8.5) |
363 (30.6) |
454 (38.3) |
267 (22.5) |
1185 (100.0) | |
학부모 |
289 (27.9) |
451 (43.6) |
241 (23.3) |
53 (5.1) |
1034 (100.0) |
***p<.001
<표3-18>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8 (4.2) |
189 (28.3) |
267 (39.9) |
185 (27.7) |
669 (100.0) |
256.782*** |
학 생 |
300 (25.4) |
398 (33.7) |
329 (27.8) |
155 (13.1) |
1182 (100.0) | |
학부모 |
93 (9.0) |
296 (28.6) |
372 (35.9) |
274 (26.5) |
1035 (100.0) |
***p<.001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실생활에 직접 활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동의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각각 87.8%, 76.5%, 84.9%). 그 가운데에서도 학생은 강하게 동의하는(매우 그렇다) 비율이 과반수(50.8%)를 차지하여, 교과 내용의 실용성에 대해 성인 세대에 비해 훨씬 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3-19 참조). 특히 일반계 고등학생은 92.5%가 교과 내용이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부록 표3-19 참조).
<표3-19>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실생활에 직접 활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70 (25.5) |
340 (51.0) |
140 (21.0) |
17 (2.5) |
667 (100.0) |
131.789*** |
학 생 |
598 (50.8) |
436 (37.0) |
110 (9.3) |
34 (2.9) |
1178 (100.0) | |
학부모 |
419 (40.6) |
457 (44.3) |
137 (13.3) |
19 (1.8) |
1032 (100.0) |
***p<.001
“학교는 학생들이 원하면 새로운 과목들(예: 댄스, 만화, 컴퓨터게임 등)을 개설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그렇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다(각각 90.9%, 84.1%, 77.2%). 학생들은 63.9%가 매우 그렇다고 응답하여 가장 강하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표3-20 참조).
<표3-20> 학교는 학생들이 원하면 새로운 과목들(예: 댄스, 만화,
컴퓨터게임 등)을 개설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21 (33.1) |
341 (51.0) |
85 (12.7) |
21 (3.1) |
668 (100.0) |
275.584*** |
학 생 |
756 (63.9) |
320 (27.0) |
87 (7.3) |
21 (1.8) |
1184 (100.0) | |
학부모 |
359 (34.6) |
442 (42.6) |
199 (19.2) |
38 (3.7) |
1038 (100.0) |
***p<.001
“학교교육에서 주지과목의 비중이 줄고 교과외 교육활동(예: 클럽활동, 학생자치활동 등)의 비중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각각 82.2%, 74.8%, 71.7%)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에 비하여 훨씬 많다.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학생이 가장 강한 긍정을 나타내었다(표3-21 참조).
<표3-21> 학교교육에서 주지과목의 비중이 줄고 교과외 교육활동
(예: 클럽활동, 학생자치활동 등)의 비중이 확대되어야 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63 (24.4) |
337 (50.4) |
149 (22.3) |
19 (2.8) |
668 (100.0) |
123.594*** |
학 생 |
530 (44.8) |
443 (37.4) |
167 (14.1) |
43 (3.6) |
1183 (100.0) | |
학부모 |
284 (27.4) |
459 (44.3) |
251 (24.2) |
43 (4.1) |
1037 (100.0) |
***p<.001
3) 학교 규율
학교 규율에 대해서도 학생은 성인 세대에 비해 부정적이다. 교사와 학부모는 대다수가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었으나 학생의 경우 열 명 중 네 명은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학교의 규율이나 예절이 권위주의적이라는 면에 대해서는 학생과 성인 세대 모두 과반수가 동의하고 있었으며, 동의하는 경향은 학생에게서 훨씬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교사는 학교 규율을 지키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학생은 대다수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학교 규율 제정에 학생들이 참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과반수가 동의하고 있었으나 다른 응답 경향과는 달리 학생보다 성인 세대가 동의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과반수가 학생 자신의 좋고 싫음을 떠나 선생님의 말씀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인 세대에 비하여 학생의 수용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선생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규율은 학생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는 의견에 대해 응답 교사의 90.2%, 응답 학부모의 89.2%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학생의 경우 59.3%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고, 40.8%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였다. 즉,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대해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나 동의하는 경향은 성인 세대에게서 훨씬 강하며 교사의 경우 연령이 높을수록 강하다. 학생의 경우 고등학생이 중학생보다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대해 더 회의적이다. 또한 교사나 학생 모두 여성이 남성보다 더 회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표3-22, 부록 표3-22 참조).
<표3-22>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규율은 학생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89 (43.3) |
313 (46.9) |
61 (9.1) |
5 (.7) |
668 (100.0) |
455.606*** |
학 생 |
252 (21.3) |
450 (38.0) |
299 (25.3) |
183 (15.5) |
1184 (100.0) | |
학부모 |
517 (49.8) |
409 (39.4) |
95 (9.2) |
17 (1.6) |
1038 (100.0) |
***p<.001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학교의 규율이나 예절이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교에서 강조하는 규율이나 예절은 권위주의적이다”는 의견에 대해 학생의 79.1%, 학부모의 62.3%, 교사의 60.1%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교사와 학부모보다 학생에게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표3-23 참조). 학생의 경우 고등학생이 중학생보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나며, 교사의 경우 연령이 낮을수록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23 참조).
“교복, 두발 등에 관한 규율을 지키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세대간 격차가 크게 나타난다. 교사와 학부모의 경우 각각 37.4%와 51.6%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학생은 78.2%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즉, 교사는 다수가 규율 준수와 학업에의 열중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반면, 학생은 다수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표 3-24 참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중학생보다 고등학생 가운데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24 참조).
<표3-23> 학교에서 강조하는 규율이나 예절은 권위주의적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54 (8.1) |
347 (52.0) |
210 (31.5) |
56 (8.4) |
667 (100.0) |
221.747*** |
학 생 |
377 (32.0) |
555 (47.1) |
209 (17.7) |
37 (3.1) |
1178 (100.0) | |
학부모 |
149 (14.5) |
492 (47.8) |
309 (30.0) |
79 (7.7) |
1029 (100.0) |
***p<.001
<표3-24> 교복, 두발 등에 관한 규율을 지키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구 분 |
매우그렇다 |
다소그렇다 |
별로그렇지 않다 |
전혀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62 (9.3) |
188 (28.1) |
275 (41.2) |
143 (21.4) |
668 (100.0) |
450.989*** |
학 생 |
529 (44.7) |
396 (33.5) |
197 (16.7) |
61 (5.2) |
1183 (100.0) | |
학부모 |
194 (18.7) |
341 (32.9) |
315 (30.4) |
186 (18.0) |
1036 (100.0) |
***p<.001
“학교 규율 제정에 학생들이 참여해야 한다”에 대해서는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 동의하는 비율이 높다(각각 67.7%, 87.3%, 89.6%). 그러나 다른 응답 경향과는 달리 학생보다 교사와 확부모가 동의하는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학교 규율 제정에 학생들의 참여 필요성에 대해서는 학생 세대보다 성인 세대가 더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표3-25 참조). 학생의 경우 광역시 지역 학생이 여타 지역 학생보다 참여 필요성을 더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25 참조).
<표3-25> 학교 규율 제정에 학생들이 참여해야 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86 (27.8) |
398 (59.5) |
75 (11.2) |
10 (1.5) |
669 (100.0) |
271.995*** |
학 생 |
356 (30.1) |
444 (37.6) |
256 (21.7) |
125 (10.6) |
1181 (100.0) | |
학부모 |
478 (46.1) |
451 (43.5) |
83 (8.0) |
24 (2.3) |
1036 (100.0) |
***p<.001
성인 세대나 학생 모두 과반수가 학생 자신의 선호도와 관계없이 선생님의 말씀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좋고 싫음을 떠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학부모의 80.1%, 교사의 79.8%가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 학생의 경우 이 비율은 60.1%에 달한다. 성인 세대에 비하여 학생의 수용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선생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많다(표3-26 참조). 수용해야 한다는 반응은 교사의 경우 30대가 다른 연령대에 비해, 학생의 경우 서울과 광역시 학생이 중소도시와 읍·면지역 학생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26 참조)
<표3-26> 학생들은 좋고 싫음을 떠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구 분 |
매우그렇다 |
다소그렇다 |
별로그렇지 않다 |
전혀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35 (20.2) |
398 (59.6) |
124 (18.6) |
11 (1.6) |
668 (100.0) |
293.676*** |
학 생 |
161 (13.6) |
551 (46.5) |
342 (28.9) |
130 (11.0) |
1184 (100.0) | |
학부모 |
389 (37.8) |
446 (43.3) |
159 (15.5) |
35 (3.4) |
1029 (100.0) |
***p<.001
4) 직업관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직업에 대해서 대체로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은 성인 세대에 비해 더 개방적이다. “백댄서를 장래 희망으로 삼는 친구나 동료 학생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진술에 대하여 학부모의 45.9%, 교사의 25.7%, 학생의 11.0%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학생의 57.3%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표3-27 참조). 교사와 학부모 모두 연령이 높을수록, 남성이 여성보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부록 표3-17 참조). 또한 “좋은 직업이란 사회적인 지위나 권위와 상관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 학생의 70.9%, 학부모의 70.3%, 교사의 68.6%가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 학생의 경우 41.4%가 매우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28 참조).
<표3-27> 백댄서를 장래 희망으로 삼는 친구나 동료 학생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7 (4.0) |
145 (21.7) |
359 (53.7) |
137 (20.5) |
668 (100.0) |
678.526*** |
학 생 |
43 (3.6) |
87 (7.4) |
375 (31.7) |
677 (57.3) |
1182 (100.0) | |
학부모 |
122 (11.8) |
353 (34.1) |
423 (40.9) |
136 (13.2) |
1034 (100.0) |
***p<.001
<표3-28> 좋은 직업이란 사회적인 지위나 권위와 상관이 없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97 (29.5) |
261 (39.1) |
170 (25.4) |
40 (6.0) |
668 (100.0) |
62.487*** |
학 생 |
490 (41.4) |
349 (29.5) |
265 (22.4) |
81 (6.8) |
1185 (100.0) | |
학부모 |
297 (28.7) |
430 (41.6) |
221 (21.4) |
86 (8.3) |
1034 (100.0) |
***p<.001
5) 교사-학생 상호 인식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교사의 전문적 지식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학생 문화에 대한 이해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대처 면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교사가 학생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4분의 1에 불과하였으며, 교사 스스로도 절반 정도만이 동의하고 있었다. 교사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나 교사도 절반에 못 미치며, 학부모의 경우에도 절반 남짓만이 긍정적으로 응답하였다. 전체적으로 학생은 성인 세대에 비해 교사에 대해 덜 긍정적, 혹은 더 부정적이다. 한편 학생관에 대해서는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깊이 생각하기보다 즉흥적으로 생각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나 규범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성인 세대와 학생 모두 과반수가 학생 통제를 위해서는 체벌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성인 세대가 학생보다 요즘 학생에 대해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체벌에 대해서도 더 허용적이다.
“교사들은 담당 교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교사의 94.7%, 학부모의 80.0%, 학생의 70.4%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29 참조). “교사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열의를 보이고 있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교사의 87%, 학부모의 69.1%, 학생의 58.1%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30 참조). 중학생이 고등학생보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교사의 지식과 안목이나 지도 열의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30 참조).
<표3-29> 교사들은 담당 교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가지고 있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60 (38.9) |
373 (55.8) |
32 (4.8) |
3 (.4) |
668 (100.0) |
174.370*** |
학 생 |
357 (21.7) |
576 (48.7) |
268 (22.7) |
81 (6.9) |
1182 (100.0) | |
학부모 |
313 (30.4) |
511 (49.6) |
162 (15.7) |
44 (4.3) |
1030 (100.0) |
***p<.001
<표3-30> 교사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열의를 보이고 있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157 (23.5) |
424 (63.5) |
84 (12.6) |
3 (.4) |
668 (100.0) |
214.491*** |
학 생 |
153 (13.0) |
532 (45.1) |
365 (30.9) |
130 (11.0) |
1180 (100.0) | |
학부모 |
196 (19.1) |
513 (50.0) |
283 (27.6) |
35 (3.4) |
1027 (100.0) |
***p<.001
반면 “교사들은 학생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학생의 26.7%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 교사의 경우 50.3%, 학부모의 경우 53.5%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31 참조). 학생 가운데서도 고등학생이 중학생보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부정적이다(부록 표 3-31 참조). “교사들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편이다”라는 문항에 대해서도 학부모의 54.6%, 교사의 45.1%, 학생의 38.8%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32 참조). 역시 고등학생이 중학생보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부정적이며, 교사의 경우 연령이 낮을수록, 여교사가 남교사보다 더 부정적이다(부록 표 3-32 참조).
<표3-31> 교사들은 학생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8 (4.2) |
308 (46.1) |
325 (48.7) |
7 (1.0) |
668 (100.0) |
388.296*** |
학 생 |
59 (5.0) |
257 (21.7) |
556 (47.0) |
311 (26.3) |
1183 (100.0) | |
학부모 |
102 (9.9) |
450 (43.6) |
405 (39.2) |
76 (7.4) |
1033 (100.0) |
***p<.001
<표3-32> 교사들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편이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7 (4.0) |
274 (41.1) |
347 (52.0) |
19 (2.8) |
667 (100.0) |
140.133*** |
학 생 |
76 (6.5) |
380 (32.3) |
543 (46.2) |
176 (15.0) |
1175 (100.0) | |
학부모 |
77 (7.5) |
485 (47.1) |
407 (39.6) |
60 (5.8) |
1029 (100.0) |
***p<.001
한편 “요즘 학생들은 깊이 생각하기보다 즉흥적으로 반응한다”는 문항에 대하여 교사의 97.2%, 학부모의 91.7%, 학생의 79.1%가 그렇다고 응답하였으며(표3-33 참조), “요즘 학생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규범의식이 부족하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교사의 97.2%, 학부모의 86.6%, 학생의 70.1%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34 참조). 읍면 지역 학생들은 다른 지역 학생들보다 요즘 학생들이 즉흥적으로 반응한다거나 타인배려와 규범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부록 표 3-34 참조).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체벌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교사의 90.4%, 학부모의 71.9%, 학생의 53.8%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표3-35 참조). 학생 가운데 실업계고등학생이 체벌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가장 부정적이다(부록 표 3-35 참조).
<표3-33> 요즘 학생들은 깊이 생각하기보다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428 (64.0) |
222 (33.2) |
16 (2.4) |
3 (.4) |
669 (100.0) |
333.210*** |
학 생 |
300 (25.4) |
634 (53.7) |
195 (16.5) |
52 (4.4) |
1181 (100.0) | |
학부모 |
466 (45.1) |
481 (46.6) |
62 (6.0) |
24 (2.3) |
1033 (100.0) |
***p<.001
<표3-34> 요즘 학생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규범의식이 부족하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400 (59.8) |
250 (37.4) |
19 (2.8) |
0 (0) |
669 (100.0) |
406.035*** |
학 생 |
239 (20.3) |
587 (49.8) |
288 (24.4) |
64 (5.4) |
1178 (100.0) | |
학부모 |
363 (34.9) |
537 (51.7) |
116 (11.2) |
23 (2.2) |
1039 (100.0) |
***p<.001
<표3-35>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체벌이 불가피하다
구 분 |
매우 그렇다 |
다소 그렇다 |
별로 그렇지 않다 |
전혀 그렇지 않다 |
계 (%) |
유의도 (χ2) |
교 사 |
222 (33.2) |
383 (57.2) |
60 (9.0) |
4 (.6) |
669 (100.0) |
301.679*** |
학 생 |
152 (13.0) |
479 (40.8) |
405 (34.5) |
137 (11.7) |
1173 (100.0) | |
학부모 |
233 (22.6) |
509 (49.3) |
220 (21.3) |
71 (6.9) |
1033 (100.0) |
***p<.001
나. 논의
선행 연구들이나 교사들이 보고하는 경험에 의하면 학교의 위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교실 수업 장면이다. 학생들과 교사 간에 상호 교감이 단절되고 교사는 강의하지만 학생은 듣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수업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잔다거나, 교실을 뜬다거나, 아예 출석하지 않는 행위는 이와 같은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이다.
학생이 교사의 수업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수업 내용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는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 반응을 설명해 준다. 학교 교과의 중요성에 대해 학생들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절반 이상의 학생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누구나 배워야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학생의 본분은 교과공부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도 절반 이상이다. 절반 이상의 학생이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교과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과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교사의 수업을 수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학교의 위기는 교실 상황을 벗어나 학교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수업 장면 뿐 아니라 학교 생활 도처에서 교사와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예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조사 대상 학생의 3분의 1 정도는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며, 지식이나 가치관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학교교육이 학생의 개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주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학생문화 이해도와 변화에의 대처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교사가 학생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자신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절반 이상의 학생이 교사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의 기능과 필요성, 교사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일 때 학생들은 교사와 학교를 거부하게 된다.
교사들의 당혹감과 위기 의식은 학교 규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생들과의 갈등에서도 비롯된다. 학교 규율은 학생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근거 없이 자신들의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 구석구석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기제이다. 그러나 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규율은 학생다움을 유지하고, 절제와 책임감을 기르는데 필요한 장치이다. 특히 복장과 두발에 관련된 규율은 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교사와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영역이다. 최근 두발 자율화 문제를 놓고 학생들이 선언을 하고 시위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조사 결과 교사는 대다수가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었으나 학생의 경우 열 명 중 네 명은 학교 규율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교사는 학교 규율을 지키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학생은 대다수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응답 학생의 79%가 학교의 규율이나 예절이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규율에 대한 이와 같은 학생-교사간 인식 격차는 학교 규율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학생-교사간 갈등을 설명해 준다.
3. 공교육체제의 해체 양상
일면적인 관찰일 수는 있지만, 역사적인 흐름에 비추어 볼 때 80년대 이후 세계의 교육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의 지원과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교육, 즉 공교육체제의 지속적인 확대 경향이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계적인 취학률이 감소했다거나 교육에 대한 재정투자 증가율이 감소했다거나 하는 실증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이에 따른 국가경쟁력 약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복지부문에 대한 재정투자를 억제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교육부문에서도 국가의 개입과 책임을 줄이는 대신 민간 영역을 확대하는 대대적인 재구조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김기수, 1998; 천보선, 김학한, 1998). 물론 이러한 재구조화의 동기 중에는 새롭게 부상하는 지식․정보사회에 교육이 부응해야 한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학교 체제로는 새로운 세계가 요구하는 개성 있고 창의적인 인간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종래의 공교육체제는 커다란 변화를 겪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각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대대적인 교육개혁은 학교의 형태와 운영 방식을 다양화함으로써 기존의 학교 개념을 상당히 바꾸어 놓고 있다. 한편, 철학과 지향점은 전혀 다르면서도 그러한 와중에서 새로운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교육이 등장,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또 학교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탈학교 운동이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경향은 거대한 관료체제로 운영되어 오던 종래의 공교육체제를 해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비록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종래의 학교교육이나 공교육체제에 대한 관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다.
가. 학교체제의 다양화
상식적인 의미에서 학교란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이다. 당연히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이고 배우는 사람은 학생이다. 물론 가르치고 배워야 할 내용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내용이 비교적 단순하던 시절에는 학교라는 장소가 굳이 고정될 필요가 없었고, 또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도 일정한 형식이나 요건을 갖출 필요도 없었다. 생존을 위한 일상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인류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복잡한 규범이 만들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교육 내용은 표준화되었으며, 그것을 가르칠 교사 역시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학생들은 표준화된 절차와 형식에 따라 배워야 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받았다.
근대 공교육체제는 이러한 형식성이 가장 고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입학과 진학, 졸업이 법제화되었으며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교사의 자격이 인정되고 교육과정이 운영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시민혁명 이후 교육기회가 보편화됨에 따라 교육 인구가 급증하고, 다른 한편으로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일정한 수준의 훈련받은 인력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체제의 운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나는 공교육체제의 운영을 위한 재원 조달의 문제이다. 유․초․중등교육 인구는 대체로 전국민의 1/3에 육박하는데, 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인력과 시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가 재정이 소요된다. 세계 경제의 호황과 복지국가의 이념 하에서는 이러한 재정 지출 확대가 용이하였지만, 7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불황과 이에 따른 복지국가 이념의 후퇴 속에서 교육을 위한 국가 재정의 확대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공교육체제의 운영을 위하여 불가피한 거대한 관료체제가 교육의 형식화, 획일화, 경직성 등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일리치(1971)를 비롯한 탈학교론자들이 지적하듯이, 공교육체제의 보편화 이후 교육은 실제로 어떤 내용을 얼마나 배웠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수준의 학교 졸업장을 획득했는가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이는 학교의 교육 독점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가정과 사회에서의 자연스러운 교육 가능성을 극소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 표준화한 내용과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개인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 능력을 일정한 규격에 의해 재단할 수밖에 없다. 책임과 권한이 분산된 관료제적 운영 방식 속에서는 새로운 변화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은 특히 다양성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지식․정보 사회가 구체화되면서 모든 나라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교육 과제가 되었다.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교육개혁은 종래의 공교육체제가 직면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교육부문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출을 억제하거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운영 체제의 재구조화․슬림화․민영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체제의 다양화를 위한 여러 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미국의 협약학교나 영국의 재정지원학교(강태중 외, 1996) 제도의 도입, 지불보증전표제(Voucher system)나 교육구좌제(education account), 그리고 개인에 의한 영리 목적의 학교 운영 허용(Edison Project: 매일경제지식부․한숭희, 2000; http://www.edisonschools.com)이나 우리의 학점은행제처럼 학교가 아니라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력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교육이 곧 정형화된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오래된 통념을 깨는 것이었으며, 교육체제 운영에 개인의 참여와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관료제를 약화시키고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인터넷의 확대로 가상공간에서의 학교를 정규학교로 인정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은(The Philadelphia Inquirer & Daily News, Nov. 14, 1999) 전통적인 학교, 교사, 교육과정의 개념을 오래지 않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으로 보인다. 또 교육이 점차 시장체제 속에 편입되는 현상을 당연시하는 경제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 교육이 더 이상 공공재(公共材)가 아니라 민간재(民間材)라고 주장한다(천세영, 2000; 1998).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움직임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종래의 획일화된 학교체제를 다양화한다는 정책 목표 아래 1998년 특성화고등학교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듬해에는 미국 협약학교 제도의 일부 요소를 도입하여 자율학교 제도의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학점은행제나 사내대학(社內大學)처럼 고등교육 학력 취득기회를 다양화하고, 최근에는 자립형사립고등학교와 사이버고등학교의 설립도 검토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두드러진, 실제와 인식에서의 이러한 변화들을 근거로 곧 지난 2세기 이상 독보적 지위를 유지해 온 공교육체제가 해체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러한 새로운 경향들은 공교육체제의 확립 과정에서 어렵게 확보한 교육의 평등성을 위협하고 빈부간의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커다란 약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비록 학교의 형태나 교육 방식은 다양화된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책임지는 공교육의 기회와 질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변화들 속에서 종래의 공교육체제나 학교가 차지하고 있던 독점적 지위는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국 새로운 교육체제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나. 대안학교와 탈학교 운동의 확산
‘대안교육’ 또는 ‘대안학교’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이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70년대 초중반에 당시 교육운동 형태로 확산되고 있던 자유학교(free school)를 대안학교(alternative school)로 부르고 있었다. 여기서 ‘대안’이란 기존의 교육이나 학교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나 학교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새롭다’거나 ‘다르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기존의 학교나 교육에 관하여 무엇을 문제시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실제로 대안교육의 의미가 사람마다 매우 다르게 이해되며 또 대안학교 역시 통일적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안교육을 서술적인 의미에서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더 좋은 교육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대안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이후, 좀더 본격적으로는 80년대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색되어 온 대안교육에 초점을 맞춘다면 몇 가지 뚜렷한 문제의식과 가치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대체하고자 한 대상은 근대 공교육체제이다. 대안교육은 매우 다양한 흐름을 보여주지만, 근대교육과 대비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짚을 수 있다(이종태, 2000a).
첫째, 전체적인 특징을 짚는다면 대안교육은 대체로 근대성 또는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들, 예컨대 과학적 합리성이나 보편주의, 정초주의적 인식론, 기계론적 세계관, 물질적 풍요 중심의 가치관에 비판적이다. 그렇다고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닌 한계는 비판하지만, 그 자리에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하고 성찰하는 미학적 이성 또는 생태학적 합리성을 놓는다(박이문, 1997). 보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상호 이해와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인정하고 또 중시한다. 물질적 풍요를 거부하고 원시적 삶을 지향하지는 않지만, 욕망의 조절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둘째, 대안교육은 아동 또는 학습자를 보는 관점이 전통적인 근대교육과 다르다.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에 따르면 아동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도 아니다. 따라서 교사 중심의 교육이 자연스러우며, 성인의 관점에 의한 통제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안교육에서는 대체로 아동(학습자)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며 따라서 자율적인 학습을 중시한다. 당연한 귀결로서, 종래 학교와 같은 규율과 조직, 엄격한 교육과정 등을 중시하지 않으며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필요에 바탕을 둔 교육을 추구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맞추기보다는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춘다’는 생각으로 만든 니일(A. S. Neil, 1992)의 섬머힐은 전형적인 예이다.
셋째, 대안교육은 공통적으로 생태주의를 지향한다. 생태주의란 생태계의 온전한 유지가 인간 생존의 전제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근대문명의 인간중심성을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사조이다. 이러한 생태주의가 반문명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자연의 파괴를 가져오는 기계문명의 편리함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스스로의 노동을 통한 의식주의 해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태도를 중시한다. 그러한 행복은 기계에 빼앗긴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의 회복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안교육은 다양한 노작과 체험활동을 강조한다.
넷째, 대안교육은 공동체적 삶과 가치를 중시한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문명은 대립과 경쟁에서 초래되는 자원 낭비와 파괴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가치의 지향은 탈근대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 삶과 가치의 구현은 경쟁과 통제가 불가피한 대량교육체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안교육은 하나같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소규모 학교를 지향한다. 한편, 이러한 소집단 내의 인간관계가 스스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가 위치해 있는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대안학교들이 교육과정이나 교사진의 수급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섯째, 대안교육은 대체로 영성(靈性)의 가치를 중시한다. 과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물질문명은 종교가 지닌 비물질적이고 내면적인 삶의 차원을 억압하였지만, 그 결과 정신세계의 황폐화가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특정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도 영적 진리 또는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D. Randle, 1989).
대안학교란 이러한 이념적 지향을 실천하는 학교이다. ‘학교’라는 말이 붙는다는 점에서 대안학교 역시 ‘학교’의 일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념적 지향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대안학교는 비록 외형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내용과 형식에서 기존의 학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또는 다름을 지향한다). 현존하는 대안학교의 유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우선 학교의 존재 형태를 기준으로 전일제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 ‘학교’라는 말은 전자에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대안학교가 90년대 초부터 계절제 프로그램이나 주말 또는 방과후 학교 형태로 등장했음을 고려할 때(이종태, 1999), 그리고 아직도 대안교육의 이념이 추구되는 중요한 장(場)임을 생각할 때 후자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부류의 대안학교들은 비록 이른 바 제도권 학교교육의 보완적 기능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제도의 벽이 높은 우리 사회19)에서 일반인들이 비교적 큰 갈등 없이 부분적으로나마 대안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이며, 나아가 전일제 대안학교로 가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일제 학교라고 해도 두 부류가 다시 뚜렷이 구분된다. 하나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정규’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가를 받지 못한 ‘비정규’ 학교이다. 전자에는 1998년부터 시행된 특성화고등학교 제도에 의해 2000년 현재 11개 학교가 운영 중에 있다. 물론 이 경우에 다소 애매함이 있기는 하다. 비록 내면적으로는 대안교육을 할 목적으로 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기는 하지만, 법적인 용어로 그것이 대안학교임을 밝히는 절차는 따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육과정을 포함한 학교 운영 전반에 걸쳐 사실상 교육청의 많은 통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당초 추구하는 대안교육 이념을 제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형편이기도 하다. 다만, 잠정적인 특성화고등학교의 운영 내규에 따라 일반 학교와는 다른 기준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 있다는 점20)이 대안교육의 가능성을 말해준다.
비인가 전일제 대안학교의 전체 집합은 알 수가 없다. 변산 공동체학교나 안산의 들꽃피는학교처럼 널리 알려진 학교들도 있지만, 소규모 형태로 다양하게 운영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학교가 더 많다. 또 이들 가운데는 정규 학교 인가를 준비하는 곳도 있지만, 아예 인가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곳도 많다. 이들은 스스로 설정한 대안교육의 이념에 충실하고자 하며 따라서 학교의 운영 방식이나 교육 내용이 매우 독특한 경우가 많아 어떤 면에서는 대안학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우리 나라에 비해 학교라는 제도의 장벽이 높지 않은 대개의 다른 나라에서는 비전일제, 비인가 대안학교의 존재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간혹 비인가 학교의 경우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기는 하지만, 학교 설립이 우리처럼 까다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섬머힐이나 하트랜드의 작은학교, 독일의 자유대안학교나 발도르프 학교, 미국의 협약학교(대안학교와 다소 거리는 있지만)나 자유학교 등에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강태중 외, 1996).
한편, 학교의 존재 형태 외에 교육 이념이나 목적에 비추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류의 대안학교를 생각해 볼 수 있다(이종태, 1998).
첫째, 자유학교형 대안학교이다. 영국의 섬머힐 학교가 이러한 유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주된 동기는 종래의 학교교육이 지나치게 아이들을 통제, 억압하며 교사(어른)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아이들의 무한한 잠재가능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기초로 하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형의 대안학교는 공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던 1970년대에 미국에서 하나의 붐을 이루었으며, 독일에서도 ‘자유대안학교’라는 이름으로 7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섬머힐을 모방한 자유학교 형태는 많은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지난 1992년에 설립된 일본의 ‘기노쿠니 아이들의 마을’도 그 한 사례이다. 뚜렷하게 섬머힐을 닮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학교의 특징은 거의 모든 대안학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둘째, 생태학교형 대안학교이다. 다소 임의적 판단이기는 하지만, 이 유형의 전형은 지난 1982년에 설립된 영국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인도 태생의 평화운동가이자 생태주의자인 사티쉬 쿠마르에 의해 설립된 이 학교는 마을 안에서 소규모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식교육뿐만 아니라 의식주에 관련된 기본적인 활동들을 교육내용으로 삼고, 마을의 다양한 생산자들이 교사로 봉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섬머힐이 주로 아이들의 자유스러움을 중시한다면, 이 유형의 학교는 생태와 노작, 그리고 지역사회와 학교의 결합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주로 특정 이념을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종교단체들이 설립, 운영하는 경우가 많으며, 80년대 이후 환경 위기에 관한 인식의 고조와 함께 세계 여러 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셋째, 재적응학교형 대안학교이다. 학교 부적응 학생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학교로서, 미국의 자유학교가 그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학교는 1995년 현재 미국에만 약 5,000개에 이른다고 한다(Kellmayer, 1995). 일본의 ‘도코슈레’는 비정규 학교로서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재적응 기회를 만들 수 있는 학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광의 성지고등학교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주로 일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도저히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사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교육적 결실을 맺고 있다. 1998년 이후 설립된 몇몇 대안교육 분야 특성화고등학교들은 이 학교와 같이 부적응 학생들만을 선발하여 교육활동을 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유 이념 추구형 대안학교이다. 앞의 세 유형이 비교적 일반적인 수준의 교육 목적을 추구하는 학교들이라면, 여기에 분류되는 학교들은 매우 독특한 교육 이념과 방식을 바탕으로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또는 슈타이너 학교)이다. 이 학교는 인지학이라는 독특한 철학을 체계화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사상을 기반으로 1919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에는 세계적으로 6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령 전 교육부터 중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과정을 운영하며, 수업 방식이나 학급 운영 방식 등이 매우 특이하다. 이처럼 발도르프 학교는 이미 세계적으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신만의 종교적 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교육활동을 펴는 학교가 세계 도처에 있다. 우리의 경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와 일체화된 교육을 지향하는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이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대안학교의 확산과 더불어 최근 기존 학교체제의 동요를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으로는 탈학교 운동을 들 수 있다. 물론 ‘운동’이라고 해서 이것이 통일된 이념이나 조직적인 대오를 갖추어 전개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자연발생적으로 종래의 학교 질서에 공공연하게 저항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이러한 행위들이 점차 사회적으로 용인되어간다는 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여러 해 전부터 표면화된 일본의 ‘부등교’ 현상은 여전히 사회적 교육적으로 문제시되고는 있지만, 점차 학교를 떠난 아이들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검정고시 같은 제도를 마련해 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
학교의 장벽이 높은 우리 나라에서도 점차 학교를 떠난 아이들에게 관대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고등학교 중도 탈락자인 서태지의 화려한 등장이나 IMF 사태 이후 정부가 주도적으로 확산시킨 ‘신지식인론’ 영향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교에 대한 신뢰가 낮아짐으로써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7년 3월 빈약한 시설로 비인가 학교로 개교하는 간디청소년학교에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비교적 모범생이었던 27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자퇴 또는 졸업 후 입학했던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가지고 있던 카리스마가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최근에는 당당하게 학교의 교육 방식을 거부하고 자퇴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으며, 이들은 일부 성인들의 지원 아래 학교 밖의 길을 공동으로 모색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자퇴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자퇴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까지 하고 있다(탈학교모임친구들, 1999).
아직 미미하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탈학교 운동을 전개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일단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탈학교실천연대’는 교육문제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제도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탈학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학력폐지 운동, 탈학교 학습 네트워크 건설 운동(교육통화시스템의 실험, 다양한 학습공동체 구성), 학교개혁 운동 등을 실천하고 있다(이한, 1998). 한편, 이러한 방식의 실험은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교육활동과 결합되어 새로운 실험 형태인 ‘교육문화협동조합’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조합원들의 공동 출자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역통화’의 운영을 통하여 교육과 문화의 공동 향유를 위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이종태, 2000b).
이상에서 개관한 대안학교나 탈학교 운동이 가까운 장래에 기존의 학교를 대체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그럴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래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생태주의나 공동체성과 같은 가치들의 중요성이 인식될수록 학교를 거부하고 대안교육이나 대안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비록 기존의 학교체제를 대체하는 데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그 정당성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교육 이념이나 학교의 형태를 새로운 사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