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첫 단추 잘 끼도록 도와준 김기룡(대전교구 공주 신관동본당 주임) 신부
내가 아는 신부님들 중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특정한 신부님에 관해 쓰려면 아무래도 많은 만남이 있었던 분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여러 신부님을 만났지만 인격적 만남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논산성당에 다녔는데 그 당시는 프랑스 신부님이 계셨다. 신부님이 빵과 우유와 계란을 먹는 것을 우연히 보고 나도 신부가 되면 저렇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물론 신부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다. 신부님은 교리시간에 환등기로 어린 우리들에게 만화 비슷한 것을 보여주시면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12월에 서산군 운산면이란 곳으로 이사를 갔다. 봄과 가을 판공 때만 신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 판공날은 요리문답을 제대로 못 외워서 불안에 떨면서 공소에 가곤 했다.
신학교 때는 방학 동안에만 집에 왔기에 주일에 버스를 타고 본당 교중미사를 다녔고, 미사가 끝나면 본당신부님에게 얼굴 도장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신부님들과의 깊은 만남은 없었다. 물론 신학교에도 신부님들이 계셨지만 학생들을 퇴학시키는 무서운 분들로만 여겨졌다.
1974년 12월, 내가 부제품을 받기 1주일 전에 서산본당 소속 운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김기룡(요한 사도) 신부님께서 초대 주임 신부님으로 부임하셨다. 나는 부제품을 받은 후 신부님 배려로 방학동안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었다. 신부님과의 인격적 첫 만남이었고 신부님과의 첫 공동 생활이었다.
김 신부님은 예리하시면서도 자상하고 인자하게 나를 대해주셨다. 실수 투성이인 나를 옹호하고 친절하게 타일러 주시곤 하셨다.
신부님은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제'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 매일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성당 마당을 왔다갔다 하시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직 공소 티를 벗지 못한 그곳을 본당으로서 꼴을 갖추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주일 저녁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공소를 찾아가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셨다. 대철중학교에서 이사장 대리 자격으로 업무를 보셨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리수업도 하셨다. 본당과 학교 일까지 맡아 수고가 많으셨다. 당시 본당엔 회장단과 부인회만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나이 50살이 넘었는데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다. 그래서 신부님은 사목협의회를 만들고 레지오 마리애도 도입하셨다.
나는 신부님에게서 사목 행정도 꼼꼼히 배웠다. 공문 작성 법이라든가 (당시는 그런 것을 신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재정에 관한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셨다. 금전 출납부, 분계장 적는 법이라든가 관련 항목에 의한 수입 지출 결의서 만드는 법 등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배울 수 있었다.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습도 보여주셨다. 금전적으로 깨끗해야 한다며 철저하고 정확하게 계산하고 정리하셨다. 그래서 나는 신부가 된 후에도 사목 행정이나 재정 정리 등에는 자신이 있었다. 신자들의 잘못된 관행도 고치려고 노력하셨다.
김 신부님은 이처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시다.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도 있으리라. 같은 교구이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스런 마음이다. 신부님, 내내 건강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