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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 있어서 밭을 갈기 전에 한 삽씩 밭을 갈아엎고 심은 것들도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밭을 갈았습니다. 서울에서는 이번 토요일 물골에 가서 할 일들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금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밭이 질퍽하면 들어가서 일할 수 없으니 며칠 연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지만 며칠이라면 직장에 매여 있는 몸이니 훌쩍 일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밭이 질면 맨발로라도 몇 가지 일을 끝내야만 할 것 같아 금요일 일을 마친 후 물골로 향했습니다. 고슬고슬하니 갈아진 물골의 밭을 보니 내 마음도 고슬고슬해집니다. 며칠 전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는 저에게 아내가 "질그릇이 떨어져도 깨트리지 않을 수 있는 고슬고슬한 밭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한 말이 떠올라 잘 갈아진 물골밭의 흙을 한 줌 쥐어봅니다. 정말 질그릇이 떨어져도 잘 안아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네요. 말리시는 게 뭔가요?" "삼백초뿌리라고 하는데 차로 끓여 먹으면 좋다고 아들이 갖다준 거라우. 얼매나 퍼지는지 몰라. 서울양반도 올해 좀 줄테니 밭 한구석에 심어보시구랴. 그리고 잘 말려서 다음에 오면 차 끓여 먹을 것은 따로 줄게."
게다가 지난 주 땅이 질어서 밭을 갈지 못했기에 이주일만에 왔으니 심어야 할 것들이 줄을 섰습니다. 토란에다가 쥐이빨옥수수, 그냥 옥수수, 땅콩, 해바라기, 호박, 완두콩, 수수를 다 심어야 하고 고추모를 내기 위한 비닐을 미리 쳐두어야 합니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비닐을 쳐야 습기가 보존돼서 가뭄에도 땅이 마르지 않고, 잡초들도 덜 올라온다고 합니다. 고추모를 심을 비닐 아홉 도랑을 치는데 몇 번이나 "아이구, 죽겠다"는 소리가 났는지 모릅니다.
"에이,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해야지." "에이그 저 영감탱이, 그럼 진작에 그렇게 하라고 하든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 그려?" "저 할망구는 글쎄 이날 이때껏 나한테 지는 적이 없다니까." "아이고, 두 분 왜 그러셔요? 재밌게 하세요, 재밌게. 이거 농사짓는 것 즐겁게 살자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싸우실 것 같으면 뭣하러 여기까지 와서 농사를 져요?" 그러다 보면 잠시 소강 상태, 두 분 모두 서로의 심기를 살피면서 의견을 맞춰 일을 하십니다. 이번에는 한 주간 쉬어서인지 하루에 일을 다 마치지 못할 것 같아 부모님이 물골에서 사나흘 더 주무시고 오시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밭일에만 매달리지 마시고 좀 노시면서 하세요." "야, 노는 것도 놀 줄 알아야 놀지. 여기서야 밭일하는 게 노는 게지." "이봐 할망구, 그러게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말도 있잖아." "난 그때 젊어서 놀면 늙어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해서 놀지 못했지. 근데 살아보니까 그 말이 맞어. 놀 줄 알아야 놀지."
40대 중반을 살아가면서 때론 자연과 벗삼아 살고, 흙을 만지면서 놀기도 하지만 도시에서는 친구들을 만나도 마땅히 함께 놀이를 할 것이 없습니다. 도시에서의 놀이는 대부분 돈이 없으면 놀지 못하는 것들이지요. 문득 '물골노부부는 평생 이 곳 외딴집에 살면서 어떤 것을 놀이삼아 사셨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저 자연과 더불어서 노는 것인지 일하는 것인지,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 노는 그런 삶을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늘 사람이 그립긴 했어도 사시사철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 하나되어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기에 가능했었던 일이겠지요. "할머니, 뭐하세요?" "응, 옥수수 심어. 자식들하고 손주들 오면 쪄주려고." "우리도 오늘 옥수수 심었어요." "서울양반, 재밌었어?" "오늘은 좀 일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좀 쉬엄쉬엄 놀면서 혀. 일은 그렇게 해야지 힘이 안 들어." "할머니, 지금 그럼 놀고 계시는 거예요?" "그럼, 요거 열리면 가마솥에 푹 삶아서 손주놈들하고 자식들 먹일 거 생각하는 게 노는 거지 뭐." 뭔가 통달하신 것만 같습니다. 물골할아버지는 무학이시고, 할머니도 독학으로 가까스로 한글을 떼셨다고 들었는데 대화를 하다보니 인생의 참 맛에 대해서는 이미 달관을 하신 것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마음 속으로 '할머니, 우리 어머님, 아버님도 잘 노시게 해주세요' 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옵니다. |
첫댓글 '친구하고 손 잡고 나와 뒷동산 올라가서...일과 놀이는 함께 하자' 대충 이런 가사 였는데.. 뒷동산에서 소도 뜯기고 놀이도 함께 한다는 우리 민요가 있었어요..
나무 목사님, 옛날에는 일과 놀이가 하나였지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나저나 목포에 언제 내려가야 할텐데....목포항구에서 싱싱한 회 한 접시 놓고 정겨운 이야기를 나눠야 할텐데....산다는게 뭔지.....늘 행복하시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흙과함께 하시고 계시군요. 저도 근교에서 주말농장수준의 밭에서 감자.고추,상추.가지.더덕,배나무...를 하면서 땀흘리는게좋고 내손으로 지어서 먹는게 좋아서 즐기면서 일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