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인제는 누구인가? |
이성규 기자, 2007-10-22 오전 11:5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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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는 .......
● 유년시절, 지독한 가난과 시련을 축복으로 승화해내다
1948년 12월 11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산리. 논밭을 합해 9900㎡(3천평)가 넘지 않는 전형적인 소농이었던 아버지 이윤식씨(1986년 작고)와 어머니 김화영씨(2000년 작고) 슬하에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의 16세손이다.
당대의 운명적 가난은 어린 이인제와 그의 집안을 예외로 남겨두지 않아, 10형제 가운데 넷을 병마로 앗아갔고 초등학교(논산백석초) 월사금도 한해 늦은 9살에야 어렵사리 허락할 정도였다.
“나는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열 명의 아이 가운데 여섯 명만이 성장하였다. 내 위로 아들 하나 딸 하나, 내 아래로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차례로 어린 나이에 홍역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어린 동생 둘이 고열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들이 죽으면 집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흐느꼈지만 큰 소리로 울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연신 한숨을 쉬실 뿐이었다. 나이 어린 나도 긴장한 탓인지 이른 새벽 아버지가 일어나 무엇인가를 지게에 지고 사립문을 나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조용히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양지바른 시냇물 언덕 가장 자리에 묻어주러 가셨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들으면서 나도 몰래 울음을 터트리던 기억이 새롭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그는 지독한 가난과 시련을 “시대의 운명”으로 수긍하고 “문명의 관점에서는 가난했으나 위대한 자연과 일체가 되어 성장한 어린 시절을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담대한 심성의 싹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트고 있었던 것이다.
● 선생님을 꿈꾸던 소년, 마음속에 영웅을 키우다
어려운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험을 잘 봐서 5등 안에 들면 돈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부모를 설득,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된다.
초등학교 내내 읽을 만한 변변한 책 한권 없이 주렸던 탓일까. 논산중에 들어가면서 소년 이인제의 열정과 향학열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의 문학전집을 모두 통독했고, 책이란 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댔다. 그 때 소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준 책을 접하게 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목숨을 바쳐 역사를 열어가는 영웅들의 삶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위대한 군인이나 정복자에 관한 책이라면 빠트리지 않고 읽었다. 그 때부터 이순신, 나폴레옹, 징기스칸이 내 마음의 영웅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군인이 되어 분단된 나라를 통일시키고 우리 민족이 대륙을 호령하는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어느 사이 밀어내 버린 것이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에 대한 존경심에서 싹터 위대한 교육자 페스탈로치 전기(傳記)를 읽으며 굳어졌던 선생님이 되겠다던 어린 소년의 꿈은 그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영글어갔다.
● 문학소년 소녀를 만나다.
소년 이인제는 다부지고 강단있는 의지의 소유자였지만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에도 탁월함을 보였다. 타고난 논리와 목소리는 웅변가로서도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백일장 등 각종 글짓기 대회의 장원은 대부분 그의 몫이었고, 교내는 물론 충남도내 각종 웅변대회에서 우승도 그의 독차지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온갖 어려움을 넘어 재능을 불태우던 소년 이인제에게 또 하나의 운명적 조우가 이루어지게 한다. 논산시내 중학생 연합시화전에서 당시 논산여중 학생회장이던 김은숙을 만난 것이다. 훗날 평생의 반려자로 이어질 문학소년ㆍ소녀의 만남은 중3 시절 그렇게 시작됐다.
1965년 논산중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큰형님 덕제씨의 헌신적 도움으로 경복고등학교에 입학,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은 2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는가 하면, 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농민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투고하는 등 다방면의 재능이 분출하던 시절이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였다.
● 변호사의 길, 그리고 ‘사회적 조건’에 눈을 뜨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영웅을 꿈꾸던 소년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다시 새로운 진로를 결심하게 된다. ‘아브라함 링컨 전기(傳記)’는 대학입시에서 소년시절 꿈인 장군이 되기 위한 육군사관학교가 아닌, 아브라함 링컨 같은 변호사가 되어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 것이다. 이와 함께 결정적인 계기는 군인보다 법관의 길이 어떻겠느냐는 김은숙 여사의 권유였다.
그렇게 선택한 서울대 법대(68년 입학)는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삶과 사회에 눈을 뜨게 하는 신천지로 다가왔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느 사이 청년이 되어 있었고, 나의 의식은 더 이상 좁은 가정과 학교 교실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그는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의 본산인 ‘사회법학회’에 들어가 정치사회적 모순들에 어떻게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시빈민 문제와 전태일 열사 분신 등 노동현안에 눈을 뜨면서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다.
“우리가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사회법학회는 민주당 이협 전의원과 최기선 전인천시장, 이신범 전의원, 장기표 씨,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등 주축이었다.
대학생활 내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탓에 사법시험 공부를 하지 못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시험을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아 군에 입대하게 된다. 1976년 육군 사병으로 전방 부대에서 근무하고 1978년 병장으로 제대한 이후 본격적인 고시 공부에 돌입해 사시 21회에 합격했지만, 동기생들보다 5-6년이 늦은 터였다.
● 입영전야, 가슴 뜨거운 눈시울이 젖어온다
언제나 당당했던 청년 이인제도 실패와 좌절을 피하지는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입영을 연기하면서 몇 차례 응시한 사법시험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신 것이다. 공부에 몰입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사법시험 합격 후 법무관으로 군대생활을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시험 실패는 단순히 계획 차질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슴 저미는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입영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데, 바로 결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귀어온 헌신적인 여인에게 입영 전 결혼해달라고 청했다. 그녀와 양가의 승낙을 얻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영 3일전 우리는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없이 나의 신부는 논산훈련소를 향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젖어온다.”(‘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 영장기각률 70% 소신 판사
사법 연수원을 수료한 후 그는 1981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직을 시작으로 법조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2년여의 법관생활에서 그가 주변에 심어준 인상은 ‘소신 판사’였다. 영장기각률이 무려 70%에 이를 정도로 소신 있는 법 해석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뚜렷한 컬러를 만들었다는 평이다. 1983년 말 판사생활을 끝내고 변호사로 나선 뒤 그의 소신은 사회정의를 위해 옥고를 치르게 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으로 이어졌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투옥된 사람과 근로자의 산재, 해고사건 등 노동 인권 관련 변호에 많은 시간을 투여함으로써 대학시절 갖게 된 믿음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 하나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정치인 이인제로 나서다.
변호사 생활은 처음으로 경제적 안정이라는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위축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나는 딸들을 위해 경제적 여유를 가지는 일이 싫지는 않았다”고 변호사 시절의 여유를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난생처음 맛보았던 여유와 안정은 그리 오래갈 운명이 아니었다. 87년 격동하는 정치정세는 ‘변호사’ 이인제를 ‘정치인’ 이인제로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다. 6월 항쟁으로 온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이 용암처럼 분출되던 그 해, 그는 제도정치권 진입을 결단하게 된다. “ 1987년 6월 항쟁은 전두환의 신군부독재체제를 무너뜨렸다. 이제 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나는 제도 정치권에 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민주주의의 지평을 열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오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미답(未踏)의 세계인 정계를 향했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정계진출은 변호사로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 명을 상대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필연의 결단이었다.
● 88년, 깨끗하고 젊은 39세 청년 국회의원 이인제
정계입문은 1987년 9월 통일민주당의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취임을 통해서였다. 당시 민주세력의 양대산맥인 동교동과 상도동 모두 인연이 있었으나, 주위의 권유를 받아 상도동 진영에 합류한다. 그러나 13대 대선을 앞둔 민주세력의 분열은 군부독재세력의 정권연장으로 귀결되는 참패를 낳았고, 경험이 없는 초보정치인으로서 특별한 기여를 하지 못한 한계를 절감하며, 88년 총선에 나서게 된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4.26 총선에 경기도 안양갑구(현 안양만안)에 출마,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국회입성에 성공한다. 깨끗하고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젊은이 이인제의 포부를 유권자들이 받아준 결과였다.
● 청문회 스타, 이인제의 화려한 부상
1988년에 열린 '국회 5.18 광주청문회'에 쏠린 국민의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고, 그 기대만큼의 스타 국회의원들을 배출해냈다. 특히 국회 노동위원회 3총사로 불리며 맹활약을 펼쳤던 이인제 노무현 이해찬 초선의원 세 사람은 청문회 스타로 일약 국민적 스타로 급부상했고,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특히 이인제 의원은 탁월한 논리전개와 예리한 질문으로 발군의 역량을 보였다는 평을 얻었다.
● 3당합당, 그 놀라운 사태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정통 민주화 세력이 독재세력과 손을 잡다니! 나로서는 정말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충격적인 사태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난감한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떠올렸다. 또 민주세력이 분열된 상황과 독재세력 제압을 위한 길을 고민했다.
“당시 나는 결단을 주도한 김영삼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독재 세력에 굴종하기 위해 통합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독재세력을 제압하여 민주화를 압당기겠다는 의지로 통합을 결단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그는 또 결단했다. 김영삼을 도와 안에서 투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 때 독재세력과 결별하면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 최연소 노동부 장관, 10년 앞을 대비하는 불꽃같은 개혁 -고용보험제도
청문회 스타와 당대변인으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최연소 노동부 장관 발탁이라는 파격으로 이어졌다. 그는 파격에 부응이라도 하듯 산업현장을 ‘발로 뛰는 장관’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잠시도 의자에 앉아 결재를 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였고, 리더로서 확고한 조직운영의 원칙을 갖고 추진해나갔다.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이 제시되고, 실현가능한 목표가 세워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해관계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는 확고한 원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안팎의 반대를 뛰어넘어 목표를 달성해내는 특유의 추진력과 뚝심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용보험제도’다. 가장 성공적인 사회안전망으로 꼽히는 제도가 바로 노동부 장관 이인제의 개혁성과 추진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재계와 경제부처의 반대가 집요하게 제기되었으나, 고용정책의 일대 혁신과 10년 후 고용환경 변화에 대비한 과감한 결단의 산물이 바로 ‘고용보험제도’인 것이다.
노동부 장관으로서 보여준 원칙과 목표의식, 비전과 과감한 추진력 등 그의 진면목은 경기지사로서의 화려한 비상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 경기지사, 지방자치의 사표(師表)가 되다
초대 민선 경기지사. 최연소 노동부 장관에 이은 경기지사 이인제의 화려한 비상은 각종 개혁과제를 풀어나가는 탁월한 수완과 성과를 통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그는 경기도지사에 취임하자 경기도정의 목표를 「일등경기 일류한국」으로 정하고, 도정방침인 「경제제일」,「환경우선」,「문화근본」이란 목표에 따라 15대 정책 50대 중점사업을 추진 잘사는 경기 건설에 앞장 섰다.
실제 그의 재직 기간 경기도의 일자리 증가 비율은 26%로 임창렬 지사 17%, 손학규 지사 16%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었다.
“나는 지사실의 문짝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취임 즉시 도청에 어린이집을 열게 하여 공무원들의 육아부담을 줄여주었다. 회의는 자료를 미리 컴퓨터에 입력하여 서류 없이 진행시켰다. 천 여 명의 행정모니터 요원을 자원봉사자로 임명하여 현장의 숨소리가 직접 도정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공무원들을 일주일씩 기업 현장에 파견시켜 공무원의 책상과 치열한 현장간의 거리감을 줄여나갔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는 적재적소와 신상필벌을 인사의 원칙으로 하였다.”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中에서...)
확고한 원칙하에 이루어진 성과들은 중소기업지원센터(광교테크노벨리)/ 여성능력개발센터/ 경기신용보증재단 설립/ 경기문화재단 설립/ 광주-여주-이천 세계도자기 축제/ 고양 세계 꽃박람회 등 자치단체 최초라는 놀라운 것들은 다른 자치단체들의 벤치마킹의 표본이 되었다. 특히 여성능력개발센터는 유엔(UN)이 여성을 위한 사업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평가해 세계 여러 나라의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노동부 장관과 경기지사를 거치면서 이루어낸 성과들은 여성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개혁정책의 모범 사례로 평가를 받고 있다.
● 운명의 결단, 97 대선
97년은 평탄하던 그의 정치행로에 태풍의 계절로 다가왔다. IMF외환위라는 초유의 국란은 정국의 불안정성을 한층 가중시켰고, 미국의 클린턴 영국의 블레어 등 40대 지도자들의 등장이라는 트렌드와 맞물려 정치권의 세대교체 요구를 더욱 거세게 만들고 있었다.
“위기 그 자체보다 위기를 간파하지 못하는 무지와 무능이 더 두려워진다. 위기가 터지면 궁극적으로 그 모든 고통과 부담은 국민의 몫이 된다. 지금도 어떤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중략)... 나는 아직도 지역패권구도와 낡은 기득권 의식에 잠들어 있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 국가의 앞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지역감정과 기득권의 낡은 틀을 깨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 낼 리더십은 어디에 있는가. 민주화의 지평은 열렸고 그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위협은 사라졌다. 이제 획일적 사고를 벗어나 다양성과 다원성이 존중되는 민주사회의 내실을 키울 세대는 누구인가. 산업사회를 성숙의 단계로 도약시키고 동터오는 지식문명을 개척할 강인한 지도력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은 세대교체 그는 1997년 3월, '정치의 명예혁명'을 슬로건으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에 이어, 같은 해 8월 경기도지사직을 사임하고, '세대교체를 통한 변화와 창조',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국민신당 제15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버스 한대로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 같은 해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500여만 표를 획득했다.
● 2002년 대선
이인제 후보는 1998년 9월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개혁이 대통령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안되며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합당에 동참, 평당원으로 백의종군의 길에 나섰다.
그는 1998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초청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연구 및 미국내 정치, 경제, 과학계 전문가 및 정책입안자들과 교류를 통해 한미양국의 이해증진과 인맥을 구축해왔다. 5개월간의 미국 생활을 마친 뒤, 귀국길에 이탈리아 밀라노 첨단패션산업지역과 영국 런던 증권거래소, 프랑스의 산업현장 등을 비롯, 통일 독일과 일본 등을 거쳐 돌아왔다.
이러한 체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1999년 9월에는 중국을 방문, 북경대학에서 '21세기 세계경제와 한중 경제협력'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 후보는 국정운영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2001년 3월에는 인도의 방갈로르 IT산업단지를 방문,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인도 소프트웨어 산업을 시찰한데 이어, 5월에는 러시아의 IMEMO(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 러시아의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나눴다.
이 후보는 선거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독자 출마하여 500만표를 얻은 97년 대선 뿐 아니라, 2000년 4월13일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새천년민주당이 영남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1위를 해 전국정당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은 지역구를 맡지 않은 채 비례대표로 의회에 진출해 왔던 관례를 깨고, 직접 고향인 논산금산지역구에 출마해 상대 후보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이어 지난 2000년 8월 30일 실시된 새천년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의 지지를 얻어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선거만 나서면 승승장구를 하는 이 후보는 이상하게도 조직과 파벌이 좌우하는 당내 경선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해 2위에 머물렀고, 2002년에는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경쟁자였던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는 쓰라린 아픔을 겪기도 했다.
● 다시 광야(廣野)에 서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 후보는 노무현 후보의 급진주의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자민련에 입당한 그는 월드컵 휘장비리 사건, 이회창 대선자금 수수사건, 탄핵역풍 등 노무현 정권의 탄압과 구속, 불리한 정치환경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스스로 ‘얼음속에 갇혀 지낸 세월’이라는 표현을 한다.
● 부활하는 산하, 이인제의 화려한 비상(飛上)
그 후 민주당을 나온지 4년 6개월만인 2007년 5월 국민중심당을 떠나 박상천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에 복당을 했다. 그는 복당의 변으로 ‘민주당 중심의 중도개혁세력 대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으며, ‘2002년 당원들에게 진실을 고하지 못하고 탈당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민주당은 통합신당과의 통합과 분열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독자대선후보 선출한 뒤 후보단일화를 통해 한나라당과 양자대결구도로 가야 한다며, ‘혼란에 빠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조순형 후보가 출마하자 아름다운 경선을 하겠다며,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던 조순형 후보와는 달리 버스투어를 하는 등 특유의 저인망식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그의 선거운동은 그를 따르는 매니아층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바탕으로 했지만, 과거에 대한 깨끗한 사과와 정치적 부침에 대해 민주당 지지층의 동병상련의 감정이 결합되면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천 경선을 시작으로 거의 전 지역에서 50%가 넘는 고른 득표를 보이며, 저력을 과시했다.
그의 승리비결에 대해 그와 민주당 안팎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려는 당원들의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뛰어난 자질과 검증된 도덕성과 강력한 권력의지가 꺼져가던 당원과 국민들의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낸 것이다.
- 출처 : 이인제 홈페이지 | |
첫댓글 우리 학교 선배고 나아가 동향인이라 좋아한다/ 그 분의 말을 들어 보면 너무나 매끄럽다, 참 언어는 타고났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는 순간 매끈한 면만 잇지 가슴에 남기는 여운은 뭔지 아쉬운게 있다 그것이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