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달 둘째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벌써 2009년 동문회 마지막 답사입니다. 강추위 속에서 올 시산제를 광교산에서 올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올해 마지막 답사를 준비하다보니 더 잘하고 싶은 맘에서 공지가 늦은 점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바랍니다.
올해 답사는 테마형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청송 심씨”집안을 필두로 하여 9월달 답사까지 해서 일단락 마무리를 지었으며 두번째로 “청풍 김씨”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1차는 6월달에 의왕시 일원으로 답사를 다녀왔으며 이번에는 인천시 소래산 下에 있는 “김재로묘”를 답사하고 2010년 1월에는 “김극형묘”가 있는 충북 충주쪽을 답사하려 합니다. 이번 답사지는 동북아의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는 인천시의 서남부권을 위주로 선정하였으며 특히 2009년 10월 19일 개통한 “인천대교”의 위상과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자리에 울 “아풍동”님들을 초대하오니 꼭 오셔서 좋은 시간 만들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1. 일시 :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출발
3. 답사지
1) 하 연[河演, 1376~1453] 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 (소래산 下) 본관 진주(晉州). 자 연량(淵亮). 호 경재(敬齋) ·신희옹(新稀翁). 시호 문효(文孝).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96년(태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 예조참판을 지내고,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교(敎)의 2종(宗)으로 통합하고 사사(寺社) 및 사전(寺田)을 줄일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425년 경상도관찰사, 그 후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31년 대제학을 역임, 1445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70세 때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에 올랐다. 1451년(문종 1)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배향되고, 1454년(단종 2)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편저로 《경상도지리지》 《진양연고(晉陽聯藁)》 등이 있다.
2) 하우명(河友明, 1413~1493) 묘 및 효자정각 선생은 호가 연당(蓮塘), 본관은 진주(晉州)로 서울 돈화문 밖에서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 연의 3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는데, 아침저녁으로 항상 손수 조리한 찬(饌)으로만 상(床)을 올렸으며, 선생의 노모 또한 아들이 직접 조리하지 않았을 때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애통하고 상심하여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제수(祭需)는 반드시 손수 마련하였으며 땔나무, 물 깃는 일도 몸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다. 3년 동안의 시묘(侍墓) 살이를 마친 후에도 어머니를 추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영당(影堂)을 세우고 철따라 나는 새로운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모셨다. 기제(忌祭) 때는 "우리 어머님께서는 평소에 자식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셨다."고 하면서 먼저 죽은 형제자매의 신위(神位)를 나란히 배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벼슬에 뜻이 없어 세조가 두 번씩이나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지방관이 그의 효행을 상신하자 나라에서 정각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해 주었다. 정각은 맞배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방풍판(防風板)이 달린 목조건물이며, 정려비(旌閭碑)는 높이 1.27m, 폭 61cm, 두께 22cm의 규모이다. 이 비각은 1700년대에 처음 세워진 후, 후대에 내려오면서 수차에 걸쳐 중수를 실시했으나 관리 소홀과 비바람 등으로 인해 원형을 잃어가자 1988년에 국비 388만 3천원을 들여 전면 보수하였고, 이어 1997년에 담장을 설치하였다. 1995년에는 조선 성종조에 좌찬성을 지내고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지은 강희맹의 「소래하중추정문기비(蘇萊河中樞旌門記碑)」를 세웠다.
3) 김재로 묘 김재로(1682∼1759)의 자는 중례, 호는 청사로 숙종 28년(1702) 진사가 되고 숙종 36년(1710)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제학·대사간·우의정·좌의정 등 내외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특히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실로도청 당상을 겸직하여 [경종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찬충추부사 때에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명사(明史)]를 가져 오기도 하였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에는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 석수(羊) 한 쌍 그리고 장명 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곡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 모습과 36세 때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4) 답동성당 인천 중구 답동에 소재한 답동성당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구한말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 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전면에 3개 종탑을 가지고 있고 각 종탑마다 8개의 작은 돌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으며 각각의 종탑 아래에는 나무로 된 낡은 출입문이 있다. 벽면을 넓게 둘러싸는 붉은벽돌과 흰 화강암으로 된 계단이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긴 아치형으로 된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 성당의 창문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성당 뒤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담쟁이 덩굴로 덮혀 있는 낡은 담장이 오랜 역사를 증명 하는 듯 정감이 있다.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제 물포에 건립된 이후 답동성당의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으로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답동성당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86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프랑스정부의 지원을 받은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선교활동을 공식화한다. 선교의 명을 받은 홍요셉 신부가 1889년 7월 1일 제물포교회를 창설하고 포교활동을 벌이면서 답동부지에 성당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지만 신학교로 전임하고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뤄지다가 제3세대 서요셉신부시절 1897년 7월 비로소 단층벽돌구조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지역사회사업의 구심점이 된 답동성당은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을 위해 4년 2개월에 걸쳐 확장공사를 하게 된다. 기존의 성당을 세워둔체 외곽에 벽돌을 쌓아올리는 까다로운 공사였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답동성당의 건물 내부 형태에 대한 설명으로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의자 없이 마룻바닥에서 미사를 드렸으며 1973년에 와서야 인조대리석 바닥으로 개조한 다름에 의자를 비치했다. 외관은 로마네스크식 정면중앙과 좌우 반원아치로된 포오치를 두고 상부에는 반원아치창을 두고 정면 중앙에는 탑상부와 양측 소철탑의 상부에는 뾰족 돔을 얹어 아름다운 외관을 형성하고 있어 인천의 소중한 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다. 그 무렵에는 종탑 위에 종은 없었지만 우아하게 뾰족한 작은 탑이 선창가나 시내에서 보였다고 한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린 것은 신축된지 3년 뒤인 1900년 항구에 사는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3개의 종을 설치해서 인천 하늘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해도 매일 낮12시와 저녁 6시에 울리면서 인천의 명물이 되었다.
5) 인천향교 향교는 공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성현을 모시는 제사 기능과 지방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을 갖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우리나라와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 양무와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당, 그리고 유생들의 처소인 동·서 양재 등이 있다. 이 향교는 15세기 중반에 중수되었다고 전하나, 현재의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중반에 시행된 몇 차례의 중수 때 삼문 등은 크게 보수되었다. 대성전은 공자 이하 중국 20성현을 배향한 곳으로서, 부연을 단 겹쳐 마박공 지붕의 이익공계 건물이다. 기둥머리 사이에는 창방을 걸고 가운데, 화반을 얹어서 장혀와 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런 형식은 조선 후기 익공계 건물의 대표적 유형이다. 대성전 뒷면 좌우측에는 우리나라 역대 성현을 배향한 동무와 서무를 배치하여 문묘 공간을 이루고 내삼문을 지나면 명륜당, 동재, 서재로 이루어진 교육시설이 있다. 건축 양식은 팔각지붕인 명륜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모두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6) 이허겸(李許謙, ? - ?) 묘와 원인재 고려의 외척으로 현종비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의 외할아버지이며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김수로왕·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李子淵)과 이자상(李子祥), 이자겸(李資謙)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또는 경원(慶源,仁州). 손자 이자연(李子淵)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는 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했다.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었고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의 봉작과 식읍(食邑) 1,500호(戶)가 추서되었다. 원인재는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허겸은 고려시대 외척 세력인 이자연(李子淵)의 할아버지이다. 이자연은 세 딸을 고려 문종의 비로 혼인시켜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는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원래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왼쪽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해체되어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팔작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32세손이 쓴 《원인재기(源仁齋記)》와 33세손이 쓴 원인재상량문(源仁齋上樑文)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07년(순조 7)이나 1835년(헌종 1)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묘려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7) 인천대교 [仁川大橋, Incheon Bridge] 인천국제공항과 인천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다리. 해상다리과 연결도로를 포함하여 총길이 2만 1270m이다. 해상다리는 사장교 형식이며, 주경간 길이 800m로 세계에서 7번째로 길다. 국내 최초로 외국인이 사업시행자로 참여한 사회자본 사업으로서 2005년 7월 착공되어 2009년 10월 19일 개통되었다.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8 - 234 - 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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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도 많이 남았네! 빨리 그날이 오기를........
시험이 있어서 ㅠㅠ--- 12월 20일 까진 꼼짝 못하겠어여;;
무슨 시험요 합격하시라고 엿을 사들여야 하는데 합격氣 보내드릴테니 찰떡처럼 콱 붙으()
은희 총무님 수고하셨어요^^* 아름다운 모습 늘 간직하시길요^^*
지는 복도 없는가 뵈유 항시 이러니 으이 갈학기 끝나믄 다시 글루 갈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