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더 이상의 은유는 없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
저 처참한 주검 앞에서 눈노가 들끊고
당신의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이 時이고 노래이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 발생배경 : 60년대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 3`15 부정선거를 일으켰다. 국민들은 부정선거에 지금 까지 참았던 민주주의 열망을 태우기 시작했고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후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정이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이 되기 위해 헌법을 바꾸는 10월 유신을 행하였다. 이로써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다시 짓눌렸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로써 박정희의 독재정치는 끝이 났지만 아직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후 12`12사태로 전두환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은 10`26사건(박정희 죽은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의 보안사령관이였다.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였던 정승화와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은 권력을 잡기위해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정승화를 강제연행하였다. 그후 전두환은 12`12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를 해서 12월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에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12`12사태로 권력을 잡았다. 권력을 잡는 중 자신들의 편에 서지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빨리 제거를 했다. 이런 12`12사태는 당시 대통령이였던 최규하의 재가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합력을 가하여 총장 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런 사실을 접한 국민들은 매우 분노하였고 민주주을 정말 열망했다. 그래서 1980년 여러곳에서 국민들이 일어났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의 비상 계엄령이 공포되었고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2. 진행과정
? 80년 5월 18일
-00:05 광주 지역 민주 인사 등 연행
-01:00 광주 일원 공수부대 투입
-02:00 계엄군,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점령하고 학생 112명을 체포
-02:00 전남대 등 대학교 휴교령(9월 10일 까지), 광주,송정,목포 등 고교 휴교령
-09:00 전남대생들 등교 시작
-10:00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50~60명과 공수대원 대치
-10:20 전남대생 5백명 공수부대와 투석전 충돌, 전남대생 계엄 철폐를 외치며 도청으로 진출
-10:30 전남대 후문 시민연행
-10:50 광주역 앞 전남대생 2백명 집결
-11:00 시위대 금남로 3가 카톨릭센터 앞 연좌 시위
-11:15 시위대 충장로 파출소 앞 대치 후 파출소에 투석
-11:30 시위대 카톨릭 센터앞 대치, 연좌 농성
-14:30 동국대 주둔 공주 11여단 광주로 출발
-14:42 도청 앞 금남로 일대 1천 5백여명, 충장로 일대 1천 6백여 명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진압실패, 7공수 35대대, 31사단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진압 명령 수령
-15:00 공수부대(7공수) 시내투입, 진압작적실시
-21:00 통금 실시, 전국에서 소요 주동자 544명 검거(광주 연행자 477명)
?80년 5월 19일
-00:05~05:20 11특전여단 광주에 도착, 진압군 재편성
-08:00 계엄사, 민주인사및학생 549명 검거 발표(전국 통게)
-09:00 금남로에 군중들 운집 시작
-11:00 시위진압 탱크 동원 공수부대 잔혹한 구타, 연행, 총검사용, 체포된 시위대를 발가벗겨 무릎을 꿇게 한 뒤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고 군화로 전신구타, 광주 시내 초등학교 수업 중단 조치, 중`고등학교 귀가 조치
-11:20 도경 작전과장 데모대 놓아주엇다고 동구청 입구서 계엄군 하사 등으로부터 집단 구타, 곳곳 부상자 속출
-12:00 수업받던 학원생 연행
-11:30~13:30 시위대 107명 연행
-14:50 일반 시민들의 합류로 시위대 급증
-16:50 최초의 발포 : 광주고와 게림파출소 사이 동원 빌딩 앞에서 고장난 장갑차 1대, 시위대 150여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
-17:40 시외 버스 공용 터미널 잎 시위대 완전 분산(비내리기시작)
-18:00 시외 버스 공용 터미널 주차장에 시체 7~8구 목격돔. 광주공원 시위대 수천명 “전두환 타도” 외침
-19:30 전대 의대 앞 골목길서 최미자양(당시 19세) 계엄군 대검에 가슴 짤림
-21:00 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시위 지속
-23: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80년 5월 20일
-04:00 시민 궐기문 살포됨
-07:20 서2동 전남주조장 빈터에서 대검으로 난자, 살해된 월산2동 김해부씨(36)가 변사체로 발견됨. 오전 대체로 소강(비가오늘날씨)
-10:00 대법원 김재규 등 5명에 사형 확정
-10:20 금남로 3가 30명의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받는 것이 목격됨. 오전 외신기자. 독일 NDR, ADR TV 유르겐 힌츠페터 광주 도착
-14:20 서방 삼거리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에 사망, 부상자 발생, 광주역 부근 택시기사 20여 명 조직적 대응책 논의. 금남로 일대 제 3공수 11대대 15만 군중에 포위당함
-16:20 카톨릭 센터 광주고 충장로 금남로 등지에 시위 확산, 시위대가 도청을 하는 6개 방면 모든 도로에 밀어닥침
-17:50 충장로 시위대 육탄으로 경찰과 충돌 “ 광주 시민들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간을 낼 테니 경찰은 비켜달라” 협상시다
-18:20 택시기사 시위 참여. 택시 1백대가 3줄로 광주역 쪽으로 진출
-18:40 전남대 앞 5백미터 지점, 계엄군 1명사망. 광주역 쪽에서 택시,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집결
-18:50 택시 120대, 화물트럭, 버스 20대 라이트 켜고 금남로 차량 시위, 시민 2만명 뒤따름
-19:45 도청 광장 공수부대 포위됨. 시위대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으로 진격
-20:00 시위대 MBC 방송국 점령. 체포된 시위대 도청으로 연행. 소방서 시위대 점령. 2~3대의 소방차 도청 앞 6백 미터 지점까지 돌진. 계림동 시위 군중 1만~3만증가(도청진격). 전남대 병원 앞 1만 증가(도청 진격)
-20:10 노동청 앞 시위대 MBC에 화염병 투척, 시외버스 공용 터미널 시위대에 화학탄 발사
-20:50 시위 군중 시청 점령
-21:00 도청차고 불탐. 외각지역주유소에서 화염병 제작. 노동청 앞 시위 진압 경찰 4명 사망
-21:40 MBC방송국 전소
-22:00 심야로 이어지는 투쟁대열. 광주 시내 모든 거리는 시위 군중 10만 명 이상 운집. 광주역에 투입된 31사단 병력 퇴각. 금남로 3공수 11대대 고립상태. KBS앞 3공수 15,12대대 2만명 시위대와 대치. 전남대 입국 16대대 1백대 차량과 시위대와 대치. 광주시청 13대대 1만여명 시위와 대치. 양동복개상가 20~30명의 계엄군 시위대에 포위당함
?80년 5월 21일
-00:10 계속 대규모 시위. 전옥주씨 조선대 앞 스피커로 “전두환 물러가라”외치며 시위주도
-00:20 조선대 계속 총소리
-01:00 31사단 화염방사기 소대 출동
-02:10 3공수여단,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퇴각 02:13 시외전화불통으로 외부와의 연락두절, 광주지역일반전화선을 지시에 의해 단선
-02:30 계엄군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용산역 출발
-05:00 시위댄 2.5t 트럭에 시체운반
-05:50 광주역에서 출발한 시위대 1천여명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연좌농성. 아침에 계엄사령부 최초로 광주에서 유혈 충돌 공식 발표
-08:00 시위대 당국과 협상시도
-08:50 시위대 광주교도소 기습, 자진철수
-08:58 20사단 사령부 송정리 도착
-09:00 시위대 아시아 자동차 공장 진입.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를 몰고나와 도청으로 진격, 버스는 외각에서 도청으로 시민들 수송, 군인의 과잉 진압 사과요구. 현정부 규탄, 뉴욕타임스 특파원 심재훈, 르 몽드지 필립퐁스 광주 도착
-09:20 한국은행과 카톨릭 센터 사이 5천이상군중, 시체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주장
-09:50 시민 대표와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10:30 군헬기 4대가 도청, 조선대, 전남대에 이륙,착륙하여 도청 지하실에 모아놓은 시체와 진압 무기, 주요 기밀, 서류 공수 시작, 계엄사령관은 담화문 발표
-10:48 군헬기에서 “공수 병력 철수시키겠다”방송. 도시자와 시장도 설득방송
-10:56 계엄군 서울로부터 코와 귀를 자극하는 CS액 수송
-11:00~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11:30 전남지역 학생 총연맹 명의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 배포. “전남대생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조선대생은 계림파출소, 서강실업과 간호대는 MBC방송국, 고교생은 산수오거리, 시민은 도처으로 집결하라”
-11:50 카톨릭센터 앞 벽보 부탁 : ‘때려잡자 전두환, 물러가라 최대지, 사라져러 신현확, 비상계엄 해제하라, 칼부림이 웬말이냐, 너와 나 형제 지방색 타격’
-12:00 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분수대까지 퇴각. 최초의 집단 발포, 시민들은 공포탄인줄 알았으나 도로의 시민들이 쓰러짐. 부상자를 구하려는 시민들에게 까지 사격. 계엄군은 도청과 수협,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확한 조준사격을 함. 전난대 정문에서도 발포. “러닝 셔츠만 입고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질수해갔다. 그대 도청 쪽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이였다.(증언)” “고막을 찍는 듯한 총성과 함께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총탄에 맞고 그대로 넘어졌다. 당시 사상자가 얼마엿는지는 취재가 불가능(월간조선).
-12:10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에 계엄군 4~5명이 쓰러짐. 계엄군은 살상을 예고하는 듯 분수대 앞에 횡대로 도열
-12:30 분노한 시민, 각목을 든채 도청을 향해 돌격,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시위대 맨 앞의 503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 쪽에서 LMG기관총 난사. 차에 탄 시위대 20여명 살상당함
-12:40 버스 4대 화순 중앙 파출소에 방화. 주민 합세후 무기탈취
-12:45 시민에게 본격발포
-12:55 도청앞 YMCA에서 계엄군 발사. 시민 수십명 살상. 분수대 앞 계엄군은 횡대로 앉아 금남로 쪽을 향해 거총자세
-12:58 광성여객 버스 2대가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발포. 운전사 사망.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진격. 집중 사격을 받았으나 학동 쪽으로 빠져나감.
-13:00 무장을 시작한 시위대
-13:40 군용헬기 1대 도청광장에 착륙. 일반계엄군 9명 태우고 이륙. 도청광장이 임시헬기장이 돼 군용기와 경찰헬기가 수시로 이륙과착륙함. 공수 부대로 부상자와 중요 문서 이송
-13:50 전남도청에서 도지사가 시위 군중에게 요구 사항을 승낙할 테니 해산하라고 방송
-13:55 “3시까지 연행자를 석방한다”라고 군용헬기 선무 방송
-14:00 월산동 로터리와 전남도청 부근 헬기 기총소사
-15:00 광주시내 종합개인병원 총상 환자들로 가득 참
-16:30 광주 지역 공수대원 철수명령
-17:00 시민군 총기 교육 후 지역방위대 편성, 광주 공원 광장에서 특공대 편성, 헌혈하고 돌아가던 박금희양 총에 맞아 즉사. 도청에 남은 계엄군 화순 주남마을 쪽으로 철수
-24:00 외신기자, AP통신 테리 앤더슨, 타임지 사진기자 로빈 모아 광주 도착
?80년 5월22일
-00:05 완도 경찰서 파괴
-03:00 영광 2천여 명 시위 후 해산
-04:55 계엄군 증원 병력 광주 도착
-05:00 남평에 매복중인 계엄군의 사격으로 사망 1명, 부상 3명
-07:30 전남대 교정에서 암매장된 고교생 발견. 아침 뉴욕 타임스와 르 몽드지 1면 머릿기사. 최초로 세계에 알려짐
-08:10 도청간부수습대책논의
-09:30 계엄군 피란 행렬에 집중 사격
-10:30 2군 사령부자위권행사지시. 목포 일부 파출소 피탈
-12:00 도청 앞 5만 시민궐기대회 개최. ‘5`18수습대책위원회’결셩. 전남일보 현관에서 무기회수
-12:12 함평 경찰서 점거. 시위대 수천명 시위
-12:00~15:00 수습위원 계엄사 방문, 협상 결렬
-13:00 무등도서관 앞 1명 사망
-13:16 화순-광주간 도로에서 공수부대, 차량 1대 사격, 1명 사망, 7명 체포
-14:00 목포역 광장 시민궐기대회
-14:30 광주시장이 비행기에서 호소 전단 살포, 박충훈 총리 호소문 발표
-15:00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 개최, 매일 오후 3시와 9시 2차례 도청 앞 분수대에서 궐기대회 개최 결정
-15:18 관 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18구 도청 분수대에 안치. 추도식 거행
-16:00 부상자를 위한 모금 운동
-16:30 영암자역 무기 회수시작
-17:00 계엄사와 협상결과보고. 통합병원 통로에서 62연대 2대대와 시민군 교전: 사망 3, 연행 25, 부상 10명
-17:55 848명의 연행 시위대 석방
-18:00 학생수습위원회 구성. 도청 상황실에서 증명서 발급. 쌍촌아파트 교전
-19:10 사망자 56명, 도청 앞 광장에서 관을 놓고 추도식
-22:00 무기회수를 둘러싼 시민군 내무 대립 심화
?80년 5월 23일
-01:20 해남 우슬재에서 교전.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06:00 광주시 안정 회복. 남녀 고교생 7백 명 시내 전역 청소. 장례반·총기 회수반·차량 통제반으로 구분. 도청 중심으로 대자보, '민주시민강령'선포
1.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질서 회복에 힘씁시다
4.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07:00 시청 직원과 시민들 거리 청소에 나섬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학생들 무기 회수. 구용상 광주시장 전직원 정상 근무 지시
-10:00 수습대책위원회 조직 개편, 현재까지 파악된 사망자 전대병원 26명, 기독병원 17명, 적십자병원 21명, 조대병원 1명, 요한병원 2명, 기타 3명, 도청 내 44명 등 114명
-10:05 전남대 구내에서 교련복 차림 남자 고교생 가매장돼 있는 것을 도청으로 운구
-12:00 8백여 정 총기 회수, 차량 통제반 차량 단속
-13:00 계엄사 연행 학생 34명 석방
-14:00 주남마을 양민 학살. 18명 사망. 수습위원 10명 무기 1백 정 반납
-14:20 학생들 시민 시체 50구 상무관서 분수대로 운구. 시민 2만 명 운집
-15:00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장례 준비 모금 운동 전개해 1백만 원 대책위에 전달.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총격전. 계엄사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전역에 살포
-16:00 지원동 민가에 계엄군 난입, 시민을 향해 난사.
-19:40 계엄분소는 수습위원들에게 광주사태로 927명 연행해 882명 훈방하고 23일 34명을 석방해 현재 45명만 남아 있다고 발표
-21:00 목포역 시국성토대회. 5만여 명 횃불 시위
?80년5월 24일
-새벽 외각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회수
-08:00 광주 시내 생필품 품절. 무기 자진 반납 시한 12시까지 연장. 수습위 사망자 확인,미확인 합쳐 6백여명
-09:00 충정작전을 위한 계엄군 배치
-10:30 계엄군의 오인 사격. 31사단 96연대 3대대와 기갑학교 병력 사망 5, 중상 11, 경상 11명, 주남마을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양 헬기로 후송
-12:00 시체 3구 암매장한 계엄군 무선교신도청
-13:00 계엄사, 무기반납시한을 18시로 연장. 11공수 주남마을서 철수 개시
-13:10 공수부대 철수하면서 좌우 난사. 원제마을 저수지서 멱감던 방광범군(당시 10세) 숨지고 10분 뒤 진제마을에서 총소리 피해 달아나다 벗겨진 고무신 주우려던 전재수군(당시 10세)이 총에 맞아 사망
-14:05 계엄군의 오인사격. 효천역 전방 1Km 지점 11공수와 보병학교 병력 사망 9명 부상 33명 발생, 진월동 양민학살 2명 사망
-14:10 북동에서 학생 가장한 불량배가 주민들에게 금품을 강요한다는 제보를 받고 시민군 ?동
-15:00 수백의 공수대원 송정리 비행장에서 이동. 송정리에서도 헬기 기출소사. 제2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전북서 환자용 산소 1백통을 지원
-16:30 도청앞 상무관에 미확인 시체 40여구 안치
-18:49 계엄분소 예하 각 부대에 확인 사살과 이동시 표식을 달 것을 지시
-21:00 민간인으로 위장한 계엄군 시내 투입
?80년 5월 25일
-08:00 조작된 독침 사건 발생
-11:05 초교파적인 모금운동. 시체 120구로 늘어남
-12:35 목포.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13:10 목포서 기독교인 1천 명 시위에 이어 목포역 광정서 구국기도회
-13:35 피란가던 청년 2명 산속에서 사망
-14:20 화순방면 1번보스종점부근서 시체 2구 발견됐으나 게엄군이 인도 거부
-15:00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궐기대회 후 검정 리보 착용, 가두 시위.
-19:00 광주시 영세민에게 가구당 5천원 씩 지급. 정부미 6천가마 방출
-20:00 계엄사 광주 다시 악회됐다고 발표.
?80년 5월 26일
-04:00∼06:00 외곽 지역 주둔 계엄군 광주 진입
-05:00 시민수습대책위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을 막자'고 결의. 진입 현장에서 탱크 앞에 드러누워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
-07:20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알리는 방송
-11:30∼13:00 제4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15:00 제5차 민주 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우리는 왜 총을 들게 되었나' 낭독. 7공수 광주공원 소탕 명령 받음
-16:00 광주 상황을 알리기 위해 탈출(김요셉)
-19:00 외국인 207명 광주에서 철수
-21:00 전교사 문관 도청 잠입. 지하실 TNT 뇌관 분리 제거 후 복귀. 특전대 하사관 시내 사복 정찰
-23:00 시민군 병력 배치. 계림초교 30명, 유동 삼거리 10명, 덕림산 20명, 전일빌딩 40명, 전대병원 옥상·서방시장 10명, 지원동 30명, 도청 2백∼3백 명
?80년 5월 27일
-00:00 시내전화 끊김, 특전사 특공대 행동 개시
-02:00 20사단 행동 개시,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가두 방송
-03:30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
-04:00 31사단 무등경기장 중심으로 행동개시. 7공수 광주공원 도착. 11공수 관광호텔·전일빌딩 점거.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 중심 시가전
-04:10 3공수 도청 후문 월담. 도청 총격전
-04:30∼06:30 도청 함락
-05:00 계엄분소장 담화 발표. 광주 KBS 행진곡과 함께 군의 진입을 알리는 방송 되풀이
-05:23 광주시 점령 완료
-06:00 KBS를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 방송 (영어)
-07:30∼09:30 기갑학교 전차 14대 A.P.C. 1대 무력시위. 공무원 근무개시, 시내전화 개통
-08:00 광주경찰서 노병기 경장 풍향동서 출근길에 총탄 맞고 사망
-08:40 도청 안에 시체, 회의실 앞 분신소 시체 1구, 뒤뜰에 1구, 민원실 계단 앞 5구, 건물 사이 7구, 경비과 옆 1구 등 총 15구
-10:30 도경 지하실에 숨어 있던 고교생 등 7명 생포
-11:00 목포, 제5차 민주 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궐기대회, 시내 주요 건물 옥상 점거
-12:00 장형태 지사 의원 면직, 후임에 김종호 금호실업 대표
-22:50 목포 시민, 3천 5백여 명 횃불 시위.
-28일 새벽 4시경 시위대 체포·연행으로 목포 시위 막내림
3. 의의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이어져내려온 시민들의 자발적인 둔동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민주화운동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군부세력을 심판하였다. 그리고 끝내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생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행사로 인정이 되었다
광주 5.18 국립 묘역전경
오월에 산화한 꽃들
-5.18 다시 그날에
효담 박방현
망월에 도열한 나무들이여
사나운 해풍에 맨살로 맞서
생채기로 멍이 밴 갈대처럼
결사의 투지 가슴에 품고
총칼에 맨몸으로 맞선 채
빛고을 거리거리 내달리며
낭자한 선혈 뿌린 목숨들이여!
망월에 도열한 무덤들이여
오월의 햇살 눈부시고
훈풍불어 대지 감싸는데
생명이 소생하는 이 계절에
꺾이고 상한 지체 고추 세워
그 무덤 갈라 풀어 헤치고
더없이 팽팽한 탄력 보듬어
황홀한 경련으로 부활하거라!
해풍에 맨살끼리 부비며
상한 갈대의 호곡 같은
오월의 핏빛 목쉰 절규랑은
가슴에 고이고이 잠재우고
그날의 선연한 핏방울 되살려
자유의 화신으로 곱게 피는
시들지 않는 구원의 꽃이 되라!
목숨으로 사수한 빛난 성지
자유의 성역 빛고을에 퍼진
그 참혹한 선홍빛 절규가
화해와 사랑의 멧시지 되고
가슴에 서린 통한과 비애
지고선과 환희로 치환되며
영원한 참자유의 나무이자
청사 빛낼 화평나무 되어라!
빛고을 거리거리 내달리며
그날에 목숨 바친 투사이자
낭자한 선혈 뿌린 영들이여
경외와 흠모의 빛난 표상인
목숨으로 쟁취한 자유의 씨
육대주 지구촌 어느 곳이든
자유 쟁취위해 피 뿌리는 곳
살아 싹트는 씨앗이 되어라!
*나의 시작노트
80년 5월 나는 광주에 있었다. 금남로가 한 눈에 보이는 화니 백화점 5층에 내 사무실이 있었던 관계로 오월 내내 금남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모군중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사무실은 광주에 있었지만 내가 사는 집이 순천에 있는 관계로 자가용으로 출퇴근 하고 있었다.
대모가 있는 날이면 내 직원들이 대모군중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안 해도 가끔 음료수를 사다 주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경찰과의 대치국면은 점점 격화되고 있었고 5.18이 발발하기 직전 그날도 심한 대치 국면과 대모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가열되고 있어 사무실에서 우려스런 눈으로 그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둘러 내 차 기사와 같이 순천 집으로 퇴근했었다
그리곤 내가 순천 집에 있는 그 날 광주에서는 끝내 계엄군에 의해 살생의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고 전남도경국장이 지휘권을 포기하게 되자 전남 전 지역은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통신도 두절되어 정보의 마비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순천에 있으면서도 내내 좌불안석하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광주의 내 사무실에는 중요 서류와 고액의 상품이 있었고 매일 같이 30여명이 각 지방에서 영업활동을 한 결과에 의해서 돌아오는 어음을 결제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비상사태로 영업이 마비되니 자금의 압박이 오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 되고 말았다. 나는 죽어도 어쩔 수 없겠다는 각오로 승용차 기사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
광주시내와 인접해 있는 화순에 자가용차를 주차해 놓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에도 10여 킬로의 소로 길을 따라 광주를 향해 걸었다. 광주는 이미 시민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계엄군은 시 외곽 산속으로 퇴각한 채 몸들을 숨기고 있었다. 산속에서 계엄군들의 노리쇠 찰칵거리는 소릴 들으며 내딛는 발 거름은 숨이 막히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광주 시내 주남마을 앞을 지나려니 25인승 버스가 산속 계엄군의 집중사격으로 탑승자들이 몰살당해 있었고 흰 복장을 한 의사인 듯한 사람들이 들것에다 그 시신을 담아 도청으로 옮기고 있었다. 참으로 두렵고도 참혹한 광경이었다. 사무실에 겨우 도착했으나 광주에 살며 내 사업을 도와주던 동생의 안위도 알 길이 없었고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무실에는 한 사람의 직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중요서류와 귀중한 물품을 다소 챙긴 후 다시 광주를 빠져 나왔다.
나는 종일 공복인데다 심한 보행으로 인해 탈진상태였지만 빵 한 조각 우유한 병도 구할 수 없었다. 한창 젊은 청년인기사마저도 한발 한발 띠기가 힘겨운 정도였다. 수금장부와 비싼 손목시계를 챙겨 들고 왕복 20여 킬로를 걸어야 했으므로 기진상태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순천을 경유해 수금장부를 들고 사태가 좀 평온한 상태인 전북지역으로 으로 갔다.
전북에 있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로 시간은 흘렸고 다시 진압군들이 참혹한 대량학살을 저지르며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던 도청을 비롯하여 광주 진입을 감행했다. 나 역시 광주로 가려 했지만 장성 갈제터널 입구에서 진압군에 저지당하고 전주 위수사령부에 가서 통행권을 발부 받아 차창에 붙이고 외국 신부 몇 분과 민간인으로는 제일 먼저 광주에 진입했다.
광주는 참혹하고 처절했다. 타버린 차량과 가옥과 난사된 총 자국들이 건물 벽에 여기저기 보였다. 나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 했지만 그 5월에 부도를 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헤어날 수 없는 경제적 불운의 긴 터널에 빠지고 말았다. 내 사업도 어찌 생각하면 광주의 참혹했던 악몽과 그 운명을 같이 한 꼴이 되었지만 내 심정은 참혹한 주검들 앞에서 또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너무도 혼이 나간 상태 때문인지 의식이 멍멍한 채 사업이 부도나고 말았지만 오히려 담담한 채 모든 것이 오직 허탈할 뿐이었다.
이제 3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5.18민주화운동의 그 긴박한 현장에서 민주화투쟁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채 사업의 위기를 모면코자 위기상황의 현장을 누비며 동분서주하는 내 모습이 무언가 잘 못 되지 않았는지 후회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인지 그 후 광주 5.18민주화투쟁을 소재로 하는 몇 편의 시를 썼고 그러한 나의 의중에는 나의 마음 속 그날에 빚진 내 자신을 참회하는 의미도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제 광주의 민주화투쟁은 그 공적에 대해 엄정히 평가할 세월이 흘렀다고 보고 앞으로 후세들은 그날의 의기를 본받아 국난에 어떻게 대처하고 행동해야 할지의 푯대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빛고을의 거리거리 내달리며/ 그날에 목숨 바친 투사이자/ 낭자한 선혈 뿌린 영들이여/ 경외와 흠모의 빛난 표상인/ 목숨으로 쟁취한 자유의 씨/ 육대주 지구촌 어느 곳이든/ 자유 쟁취위해 피 뿌리는 곳/ 살아 싹트는 씨앗이 되어라!// 시연처럼 광주를 위한 아니 대한민국을 위한 피의 제전이 아니라 세계의 어는 곳일지라도 자유 쟁취의 열망이 존재하는 곳마다 그 표상이 되고 모범이 되며 그 씨앗이 되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차마 가슴만 미어져 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넋이여~ 편히 잠드소서~~
가슴아픈 우리의 과거가 오네요 오월은 가정의달 어버이달 어린이날로만 기억하곤 하는데 우리빛고을의 아픈 과거가 있는달이기도 하네요..고문님의 글에 맘 내려봅니다 가신임들 편히 잠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