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30) 성종 1
*성종의 등극과 사회개혁
981년 7월 22세의 나이로 등극한 성종은,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인 대종 욱과 선의태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경종의
제3비인 헌애왕후 황보씨와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는 자매간으로 성종의 누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성종은 경종과 처남 매부사이였던 셈입니다.
성종은 광종의 철권정치와 경종의 화합의 정치를 왕족의 신분으로 이를 지켜보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두 선대왕의 정사를 다루는 방식이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정치를 펼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왕권중심의 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한 광종과 경종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려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이를 정착시키는 등 사회적 여건이 많이 성숙한 단계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바탕위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중앙집권적 왕권국가의 완성을 위해 대대적인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자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들의 품계를 한 계급씩 올려 주었으며, 그해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의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번쇄하다하여 이를 전부 폐지하였습니다.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에 거행되던 고려시대 최고의 국가 행사로서 불교의례와 민족 고유의 전통습속의례가 결합된 종교 제전이자 축제였습니다.
팔관회는 본래 불교신도가 하루 동안 엄숙히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키기 위해 열었던 불교법회에서 기인하는데, 팔관의 '관'은 금(禁)한다는 의미로 '팔관'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높고 사치한 자리에 앉거나 꽃과 향수로 치장함, 가무음곡, 오후 식사를 금하는 팔계를 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다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듯하여 보이지만, 연등까지 폐지해버린 성조의 조치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당시에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바를 제6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바가 있습니다. 즉, “여섯째,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5악(岳), 명산, 대천 용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간신이 신위와 의식절차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지내도록 하라. 이렇듯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하면 아니 될 것이다.”
창국주인 태조의 유업이라 할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기까지 성종은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같은 부담과 왕실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의 비난을 무시하면서까지 이 같은 일을 단행하였을까요?
이는 개국 초기보다 권력구조의 핵심에 오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개국공신이나 강력한 호족이 아니면 정치판에 끼어들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과거를 통하여 신진관료들이 속속 배출 된 까닭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고 성장한 성종은 불교 대신에 유교를 어렵지 않게 선택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성종은 변화된 사회를 이끌어 가고자 중국의 선진 제도를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교육과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선택하여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중국의 관제를 모방하여 3성6부로 관제를 정비하여 이 관제가 고려 중앙관제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고려의 창립 과정에서 태조는 삼한통일이 제일의 목표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양날의 칼과 같은 지방 호족들과의 결혼정책을 통하여 나라의 안정을 꾀하였고, 혜종과 정종은 호족들의 세를 뒤에 업고 권력투쟁을 벌이며 허우적거리는 시기였고, 광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는 피를 통하여 중앙집권적인 왕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였습니다.
선대의 노력으로 내부갈등에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할 필요가 없는 성종은 오로지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고려를 개혁해 나갈 책임과 환경이 부여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고려왕조실록(31) 성종 2
*다져지는 나라의 기틀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쏟기 시작한 성종은 우선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여 토호들의 횡포가 잦은 지방의 제도부터 정비를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983년 성종2년에 이루어진 12목 설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국을 12개 목으로 나누고 임금이 파견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는 고려가 개국한 이래 바야흐로 임금이 지방까지 완전히 장악한 정치를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995년에는 전국을 10도제로 개편하여 절도사 체제를 구축하고 지방호족들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함으로서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됩니다. 또한 지방교육과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를 1명씩 뽑아 12목에 각각 파견하는 등 지방교육과 의술의 증진에도 힘을 썼습니다.
특히 괄목할 만한 관제는 993년 상평창(常平倉)을 12목에 설치하여 물가 조절을 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비록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중앙정부의 직제를 3성6부로 개편하여 국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종의 국가체제의 정비는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추진되어 그 효과가 더욱 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강한 나라나 발전하는 기업을 보면 인재의 발굴을 절대 개을리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종 또한 나라의 기틀을 견고하게 다지기위하여 항상 인재를 기르고 발굴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재위기간 동안에 유교의 주요 덕목이라 할 효도와 절의를 강조하여 나라 안의 풍속을 아름답게 가꾸었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휼하고 태학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에게는 재물을 넉넉히 보내주어 살림 걱정없이 학문에 더욱 정진하게 하였고,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으며 튼튼한 고려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때 성종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대외관계였습니다. 당시 중원을 차지한 송나라와 발해를 멸망시키고 강자로 부상하여 송나라와 패권을 겨루던 거란과의 사이에서 고려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이쪽저쪽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특히나 기마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거란의 군대는 송과의 전쟁마다 큰 승리를 하는 용감무쌍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삼한을 통일한 태조시절부터 거란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광종 때 30만 군대를 조직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었기에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고토라고 여기고 있었고, 게다가 고려로서는 같은 민족국가라고 여기던 발해를 기습하여 멸망시킨 거란인지라 더더욱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왕조실록(32) 성종 3
*거란과의 전쟁 -1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거란과 고려 간에는 전쟁의 가능성이 늘 상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란이 고려를 대등한 정도의 경쟁국으로 여긴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단지 거란의 입장에서는 송나라와의 전쟁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고려와의 싸움에 국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은 송나라보다 국력이 처지는 거란으로서는 고려가 송과 손잡고 자신들과 맞서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고려와는 외교적으로 풀어가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991년 10월 압록강 밖의 고려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고려에서 쫓아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끼어있어 완충역할을 해주고 있었는데 이제 고려가 이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거란은 불안감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거란과 고려 사이에 드디어 한판 붙게 된 것입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세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강감찬 장군이 대승을 거둔 귀추대첩입니다. 또한 현종 때 두 번째 거란의 침입에는 비록 패하기는 하였으나 거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강조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란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는 어떤 사람이 활약을 펼쳤을까요. 우리가 익히 아는 서희의 담판과 강동 6주의 획득이 바로 이때 일어난 일입니다.
서희는 광종 1년 18세의 나이에 감과에 급제한 후 여러차례 승진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 정4품으로 국왕에게 국정 자문을 하는 차관 정도 직급)에 올라 송나라에 파견 되었습니다. 당시 송나라와 고려 간에는 10여 년간 교류가 없었는데, 서희는 송나라에 파견되어 두 나라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절도있고 예법에 적합한 행동으로 송나라 관리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그 후 병관어사(兵官御事, 국방부 대변인)와 내사시랑 (內史侍郞, 내무부 차관)을 거치면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여 왔을 때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군대를 편성하여 북계로 가서 거란을 방어토록 하였습니다. 이때 성종도 친히 거란군을 물리치고자 서경(평양)으로 갔다가 안북부(현재의 안주)까지 진군하여 머물고 있었습니다. 거란군이 봉산군을 함락 시키고, 고려의 선봉 군사와 선봉대장 윤서안이 포로로 잡혔다는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거란의 총대장 소손영은 다음과 같은 글을 퍼트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영유하였다. 그런데 너희 고려에서 우리 강토를 강점하고 있으므로 이제 너희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으면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서희는 성종에게 달려와 소손녕의 글을 전하며 “전하 그들과 화해할 수있는 조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고 고하였고, 성종은 서희의 말에 따라 이몽전을 거란의 병영으로 보내 화의를 제의 하였습니다. 이에 소손녕은 ”아군 80만 대군이 도착하였다. 만일 강가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를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한시라도 빨리 우리 군영 앞에 나와 항복하라. 아니면 고려는 멸망을 각오하라.“ 하고 항복을 종용하는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제 고려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로, 순간의 판단에 국가의 운명이 갈라질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 주여! 고려는 어찌해야한다는 말입니까.....
첫댓글 유학정치이념의 실현자 제6대 왕 성종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고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형태를 띠게 되어 불교 행사들이 폐지되기도 하였지요 !
중강님의 고려왕조실록 잘 공유하고 흔적 남겨 봅니다
성종(成宗 960 ~ 997)
고려 제6대 왕 고려시대,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