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죽동리(竹洞里)
외동읍 죽동리(竹東里)는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윗첨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용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멀리 동대산맥이, 서쪽에는 ‘제내들’과 마석산(磨石山)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외동중학교 재학 3년 동안 이 마을 앞 7번국도를 죽동(竹東)마을 선후배들과 항상 함께 통학을 했지만, 마을 뒤로 우거진 대나무 숲만 보고 지나쳤을 뿐 한 번도 그 마을에 들어가 본 일은 없었다.
그리운 내 고향 죽동리
그래서 그런지 다른 동리와 달리 죽동리(竹東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이곳저곳에서 흘려들은 얘기와 향리(鄕里)에 살고계시는 ‘죽동댁’ 할머니, 연안리(淵安里)에 살고 있는 경주김씨 신계문중의 고종 누님(신계리에서 연안리로 출가) 얘기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죽동리(竹東里)는 토함산의 정기와 마석산(磨石山), 그리고 치술령의 정기가 관류하는 토함기맥(吐含氣脈)의 ‘마루금’이 밋밋하게 이어져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죽동리 풍경
위에서 말한 ‘마루금’이란 1993년 조석필이 「산경표를 위하여」라는 책을 쓰면서 처음 고안하여 제안한 용어인데, ‘능선(稜線)의 선’ 또는 ‘산줄기를 이은 선’이라는 말이다.
1993년 제안 당시에는 지도상에 그은 선(線), 즉 등고선(等高線)으로 그 의미를 한정했었지만, 지금은 의미가 확장되어 실제 산행(山行)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옛적 시골마을의 초가지붕은 가을추수가 끝난 뒤 새로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교체(交替)하는데 길게 등성이가 진 부분을 ‘용마루’라 하고, 산의 길게 늘어진 부분을 ‘산마루’라고 하는데, 이를 종합(綜合)하면 ‘마루금’이란 ‘길게 늘어선 산줄기’라고 볼 수 있다.
죽동리 풍경
여기에서는 위에서 말한 ‘토함기맥(吐含氣脈)’을 제대로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녹동리와 문산리, 석계리와 제내리, 죽동리와 괘릉리, 신계리 옆으로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형남기맥(兄南岐脈), 즉 토함기맥(吐含岐脈)이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토함기맥의 주봉은 당연히 토함산(吐含山)이다.
경주(慶州)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吐含山)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新羅人)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新羅)의 다섯 명산 중의 하나로 예부터 불교(佛敎)의 성지로 자리 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遺物)과 유적이 많은 산이다.
토함산(吐含山)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이 산이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산이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토함산정에서 본 동해의 일출
토함산(吐含山)은 산 자체로 조명되기 보다는 오히려 산기슭의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으로 인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특히, 석굴암 일대는 예로부터 해맞이 명소(名所)로 각광받은 터라 해마다 연초가 되면 새해 소망(所望)을 기원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번잡을 이루기도 한다.
산경표(山徑表)에는 낙동정맥이 남진하여 영남알프스를 일구기 직전, 백운산에서 곁가지를 틀어 치술령(隧述嶺)-토함산(吐含山)-추령-만리성재를 지나 호랑이 꼬리로 알려진 포항의 호미곶(虎尾串)에 이르는 산맥을 그리고 있다.
죽동리 풍경
형산강(兄山江)의 남쪽 수계를 관장하며 뻗어나가면서 이른 바 형남기맥(兄南岐脈 : 토함기맥)을 이루는데, 토함산은 그 한가운데에 불끈 솟아 맹주노릇을 하고 있다.
토함(吐含)이란 이름은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라 탈해왕(脫解王)의 이름에 연유됐다는 설도 있지만, 해(太陽)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함산(吐含山) 북동 건너편의 함월산(含月山)에 상대되는 산으로 함월산이 달을 머금은 음산(陰山)인 반면, 토함산은 모든 양기의 근원인 해를 토해내며 온 세상을 밝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1950년대의 석굴암 진입로와 석굴암 원경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토함기맥(吐含氣脈)에 대한 명칭부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의 산경표(山徑表)에서는 백두대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맥과 지맥의 명칭을 강(江)을 중심으로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토함기맥(吐含氣脈)이나, 호미지맥(虎尾支脈)은 하천이 아닌 산(山)과 ‘곶(串)’의 이름이다.
따라서 토함기맥(吐含氣脈)은 산의 명칭을 따른 명칭으로 틀린 이름이라 할 수 있으며, 형산강의 남쪽 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형남기맥(兄南岐脈)으로 지칭되어야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죽동리 풍경
형남기맥은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백운산(白雲山)에서 분기하여, 포항의 호미곶(虎尾串)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말한다.
백운산(白雲山)에서 동으로 달려 치술령(隧述嶺)을 넘은 산줄기는 토함산(吐含山) 직전에서 남쪽으로 ‘삼태지맥(三台枝脈)’을 나누어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도 삼태지맥은 하천의 이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토함기맥이 통과하는 죽동리
산경표(山徑表) 상의 지맥분류 정의에 의하면 삼태지맥(三台枝脈)은 동천강(東川江) 남쪽 산맥임을 감안하여 ‘동남지맥(東南支脈)’이라고 해야 맞는 이름이 된다.
어쨌든 토함기맥(吐含氣脈)은 ‘괘릉재’의 정상에서 ‘삼태지맥’을 나누어 보내고, 곧장 북으로 달려 토함산을 솟구친 후 영일만의 호미곶(虎尾串), 즉 호랑이꼬리를 향해 달리는 도상거리 98km의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또 삼태지맥(三台枝脈)은 삼태봉(631m)-입실리 동대산(445m)-울산시 무룡산(451m)-염포산(206m)을 경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문산리와 녹동리, 석계리와 제내리, 죽동리와 괘릉리, 신계리로 이어지는 토함기맥(吐含氣脈)은 형남기맥(兄南氣脈)으로 불려야 하고, 이들 지역에 깃들인 정기는 형남기맥의 정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본다.
토함기맥의 주로
토함기맥, 즉 형남기맥(兄南岐脈)의 주요 맥(脈)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백운산 산마루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의 천마산-치술령(隧述嶺)-녹동리-석계리-제내리-죽동리-괘릉리-신계리-동산령-토함산-추령-성황재- 만리성재를 거쳐 포항(浦項)의 대보등대 박물관 앞으로 이어진다.
이를 토함기맥, 즉 형남지맥의 주맥(主脈)이라 한다. 형남기맥의 지맥은 ‘괘릉재’ 정상의 가나안 목장에서 조항산(鳥項山)-우산(牛山)-대왕암으로 이어지는 맥(脈), 다시 가나안 목장에서 삼태봉(三台峰)-입실리 동대산(東大山)-울산시 무룡산(舞龍山)-당고개-방어진등대로 이어지는 맥(脈)이 있고, 치술령에서 제내리의 마석산(磨石山)-금오산(金鰲山 : 慶州 南山)으로 이어지는 맥이 있다.
토함기맥이 통과하는 죽동리 장군봉(장구배이 또는 장구뱅이)
토함기맥(吐含氣脈)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죽동리 신원마을에서 ‘장구뱅이(장군봉)’를 거쳐 죽동리와 방어리를 경계하는 작은 구릉을 계속 진행하여 괘릉리 입구의 동해남부선 철길과 7번국도가 지나가는 ‘웽고개’에 이르는 ‘마루금’이 토함기맥(吐含氣脈)의 중간지대가 된다.
죽동리(竹東里)에는 지금 울산-포항간 고속도로의 남경주 나들목(南慶州交叉路 ; S. Gyeongju IC)이 개설되고 있다. 동해고속도로(東海高速道路)의 10번 교차로로 2015년 6월에 개통될 예정이다.
죽동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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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竹洞), 대동
죽동(竹東)마을은 약 320년 전 김별강(金別監)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죽림(竹林)’ 동방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죽동(竹東)’이라 불렀다 한다.
죽동(竹東)에는 동해남부선 철로와 7번국도, 동천강(東川江)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마을로 지금은 폐역이 되고 말았지만, 동해남부선의 간이역(簡易驛)인 죽동역(竹洞驛)이 보일 듯 말듯 세워져 있다.
필자가 향리에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는 연안리(淵安里)에서 말방리(末方里), 그리고 죽동리(竹洞里)와 활성리(活城里)를 거치는 6km나 되는 자갈길을 매일 같이 걸어 다녔다.
죽동리 풍경
왕복 30여리의 거리였다. 자갈길 도로를 피해 말방리와 활성리의 들판을 거쳐 오는 논두렁길도 있었지만, 인근 죽동리의 선배(先輩)들이나 동급생(同級生)들과 웃고 떠들고 장난하며 오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 자갈길 도로를 걸어 다녔다.
인도(人道)도 없고, 차선(車線)도 없는 자갈길이었기 때문에 도로 가운데로 걷다가 앞쪽이나 뒤쪽에서 자동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접근하면, 바람이 부는 쪽 도로변으로 잽싸게 뛰어나가 먼지를 피하곤 했었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시원한 미루나무 가로수(街路樹) 그늘이 있어 뙤약볕 들길보다는 가급적 이 길을 선호(選好)하게 되었다.
그 시절 7번국도 가로수
이 길을 다니면서 주로 하는 장난은 도로변에 보식(補植)해 놓은 2~3m 높이의 버드나무 묘목을 몇 사람이 같은 거리에서 돌멩이로 맞히는 놀이였다.
전쟁 때 과속(過速)으로 질주하던 미군(美軍) 탱크나 트럭들이 들이받거나 넘어지면서 부러뜨린 버드나무 대신에 보식한 어린 버드나무 묘목(苗木)을 돌멩이를 던져 누가 잘 맞추나 내기를 하는 놀이였다.
매일같이 이 게임을 하다 보니 활착(活着)도 되지 않은 버드나무들이 거의 고사(枯死)하기도 했었다. 버드나무 맞추기 놀이는 주로 말방리(末方里) ‘하촌(下村)’ 마을을 지나 활성리(活城里) 입구 구간 중 중간쯤 되는 지점이었다.
죽동리 풍경
그런데 어느 날인가 큼직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필자가 부주의(不注意)로 버드나무를 때린다는 것이 앞쪽에서 돌을 던지고 있던 죽동리(竹東里) 3학년 선배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혀버린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던진 큼지막한 돌멩이가 선배의 뒤통수에 맞자 ‘퍽’하면서 머리가 터지고 선혈(鮮血)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엎어진 선배를 여럿이서 일으켜 세웠는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동서남북을 둘러봐도 인가(人家)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그 시간에는 자동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 헐레벌떡 선배를 부축하여 활성리 입구 민가(民家)에까지 겨우 다다랐지만, 그 시절에는 너무나 귀했던 ‘아까찡끼’를 구할 수 없었다.
아까징끼
‘아까찡끼’란 ‘머큐로크롬’을 말하는데, 옛적에는 ‘빨간약’ 혹은 ‘아까징끼’(일본어: 赤チンキ)라는 이름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어로 ’옥도정기(沃度丁幾)’라고도 했었다. 소독약으로 상처 난 부위에 바르는데, 몸에 바르면 노란색으로 보인다.
어쨌든 주인 ‘아지매’의 조언으로 된장독에서 한 그릇이나 될 정도의 된장을 퍼 와서 둘둘 뭉쳐 급한 대로 상처부위(傷處部位)를 막아 지혈(止血)을 하고, 한동안 쉬었다가 선배는 ‘죽동마을’ 동급생과 후배들의 부축을 받아 귀가 했었다.
주위에서 병원(病院)에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했으나, 뭐 별일 있겠느냐고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죽동리 풍경
필자는 이 시간부터 이튿날까지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튿날 아침 일찍, 아침밥도 굶은 체 ‘죽동마을’ 입구에서 그 선배가 등교(登校)하는지를 기다렸다.
바지주머니에는 어머니에게 참고서(參考書)를 사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하고, 받아 둔 돈을 담은 체였다. 만일의 경우 선배가 입실(入室)에 있는 의원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치료비(治療費)를 대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선배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람한 체구(體軀)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히쭉이 웃으면서 “요오야, 개안타. 학쪼가자”라며 어께를 툭 쳤다.
죽동리 풍경
뒷머리는 이발소에서 ‘바리깡’으로 약간 밀어버리고 고약(膏藥)을 바른 후 ‘호다이(붕대)’를 ‘하찌마끼(머리띠)’처럼 감고 있는데, ‘호다이’에는 시뻘건 ‘아까징끼’가 짙게 베어있었다. 고약과 ‘호다이’는 동네 구장(區長)댁에서 얻었다고 했었다.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다시 병원에 가야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고약(膏藥)과 ‘아까징끼’를 발랐으니 괜찮을 것이라며, 도리어 안심을 시켜주었다.
던진 돌이 크기도 했고, 엄청나게 센 힘으로 던졌지만, 빗나갔기 때문에 실제로는 머리가죽이 터지기만 했지, 머릿속에는 별다른 상처(傷處)를 입히지 않았던 것이다.
죽동마을
어쨌든 이 엄청난 사고를 당한 그 선배(先輩)가 지금은 어느 곳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이름은커녕 생사조차 모르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배의 만수무강을 기도드린다.
새원, 신원(新院)
‘새원’은 ‘신원(新院)’이라고도 하는데, 죽동리(竹洞里) 남서쪽에 있는 50여 가구 되는 자연 부락이다.
약 220여 년 전에 어떤 의원(醫員)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의원(醫院)을 두었다 하여 ‘신원(新院)’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하기 전 원(院)이 있었던 지금의 방어리 '원골'이나, ‘지초마을’ 등 인근마을에 의원(醫院)이 있었는데, 이곳에 다시 의원(醫院)이 생기자 사람들이 인근지역 의원(醫院)과 구분하기 위해 ‘새로이 생긴 의원(醫院)’, 즉 ‘신원(新院)’이라고 했고, 가까운 우리말로 ‘새원’이라 했다는 것이다.
‘신원(新院)마을’에는 주로 함안조씨(咸安趙氏), 평해황씨(平海黃氏)들이 많이 거주하며, 부락민들의 협동심(協同心)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신원마을 회관
현지에서는 주로 ‘새원’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도상(圖上)에서는 ‘신원(新院)’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새원’이나 ‘신원(新院)’이나 뜻은 같은 말이다. ‘새로운 원(院)’과 ‘신원(新院)’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마을을 ‘신원(新院)’이라 한 연유를 한 가지 더 들어본다. 옛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역(驛)과 역 사이에 설치되어 공무(公務)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어가던 국영여관(國營旅館)을 두었는데, 이를 ‘원(院)’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우리 지역 경부간(京釜間) 통로인 ‘영남좌로(嶺南左路 ; 지금의 영지로)’는 경주역에서 불국사, 방어리, 죽동리 신원마을, 냉천리, 구어리, 모화리를 거쳐 울산과 부산(동래)으로 연결되었다.
죽동리 풍경
경주관아(慶州官衙)를 출발하는벼슬아치들이 지금의 영지로(影池路)인 영남좌로(嶺南左路)를 따라 남행하는 경우 지금의 방어리 ‘원동(院洞)’ 마을에 설치한 ‘원(院)’에 잠시 들러 휴식을 취한 후 구어리(九魚里)에 소재했던 역참(驛站)을 거쳐 다음 역참으로 출발하곤 했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방어리의 영남좌로변 사람들은 지금도 그 당시 ‘원(院)’이 있었던 마을을 ‘원골’, ‘원곡(院谷)’, ‘원동(院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 무슨 이유로 이곳 ‘원골’의 ‘원(院)’이 폐쇄되고, 대신 지금의 죽동리 서북쪽 마을 끝부분에 위치한 마을에 그 ‘원(院)’을 이축하여 개설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 지은 원(院)’을 ‘새원’, 즉 ‘신원(新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원(院)’은 과거를 보러 오가는 선비들과 도일(渡日)하거나 귀국하는 조선통신사, 임지로 부임하거나 전임하는 지방관(地方官)들에게 숙식 또는 식량, 반찬, 신발, 취사도구 등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영남좌로
또 다른 일설에서는 ‘새(鳥)가 있는 동산’이라는 뜻에서 원래 ‘새동산’이라 한 이름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새동산’을 한자이름으로 고치면서 ‘새(鳥)’를 지금까지 없던 것이 처음 생겨났다는 의미의 ‘새’로 바뀌어 ‘新’이 되었고, ‘동산’은 ‘무엇을 재배하거나 사육하고 보호하기 위한 시설’의 뜻으로 ‘園’으로 바꾸었으며, 세월이 흐르자 이 ‘신원(新園)’이 다시 ‘신원(新院)’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원(新院)’은 앞서 소개한 대로 어떤 ‘의원(醫員)’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새로이 ‘의원(醫院)’을 두었다 하여 ‘신원(新院)’이라 했다는 말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죽동리 풍경
그리고 위에서 말한 영지로(影池路)는 냉천리(冷川里)에서 출발하여 죽동리(竹洞里)의 신원(新院)마을을 거친 후 제내리와 방어리를 경유, 괘릉리(掛陵里)의 영지저수지 우안(右岸)도로를 거쳐 동해남부선 철로를 넘어 7번국도와 연결되는 도로를 말한다.
외동읍 냉천리(冷川里) 211번지에서 괘릉리(掛陵里) 1055-1번지까지 이어지는 영지로(影池路)는 양남면에서 개곡리와 연안리, 냉천리, 제내리를 경유하여 서면(西面)으로 넘어가는 904번 지방도로와 냉천리에서 교차한다.
죽동리 새원들
(멀리 동대산맥 아래 '개곡저수지' 제방이 보인다. 바로 앞 분묘는 경암공 김응춘공의 묘소)
영지로(影池路)는 길이 6.610㎞, 너비 8m로 냉천리․연안리․죽동리․제내리․방어리․괘릉리를 경유하는데, 도로 시작 지점 인근에 냉천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영지로(影池路)에는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제내2리까지 운행하는 603번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정류소는 시외터미널↔중앙시장↔경주역↔팔우정↔박물관 앞↔고속사거리↔사천왕사지↔(통일전 입구 삼거리)↔동방↔통일전삼거리↔수북입구↔도지↔내동초등↔조양입구↔구정삼거리↔경주법주↔영불로삼거리↔신계입구↔영지입구↔영지↔방지↔둔전↔원동↔순지↔지초↔제내1리↔제내2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 죽동리(竹洞里) ‘새원’으로 운행하는 604번 시내버스 노선은 시외터미널↔중앙시장↔경주역↔팔우정↔박물관 앞↔고속사거리↔사천왕사지(통일전 입구 삼거리)↔동방↔통일전삼거리↔수북입구↔도지↔내도초등↔조양입구↔구정삼거리↔경주법주↔영불로삼거리↔신계입구↔영지입구↔영지↔방지↔둔전↔원동↔순지↔지초↔제내1리↔지초↔새원(죽동)↔연안↔냉천.내남입구↔입실정류장↔대부기공↔모화역↔모화종점으로 되어 있다.
603번 시내버스
영지로(影池路)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신원(新院)마을’에는 필자의 외동중학교 제7회 동기생(同期生) 두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졸업 후 50년 만에 하나는 서울 동대무구 창신동에, 하나는 경기도 용인시(龍仁市)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아직까지 만나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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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리 ‘한마음의 집’은 현재의 원장인 강정숙 원장(84세)이 사재(私財)와 퇴직금을 몽땅 털어 운영하는 시설로 10여명의 정신지체(精神肢體) 중증 장애우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잠시 강 원장과 그녀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강 원장은 지난 1947년에 상주농잠 부설 사범학과를 졸업한 다음 그해 9월부터 상주초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으로 공직에 나서 1975년 4월 청도군 중남중학교의 교감을 끝으로 퇴직 할 때까지 28년 동안 교편생활을 한 교육자이다.
남다른 투철한 아동교육정신이 바탕이 돼 중학교 교감자리에서 서울 홀트복지회 소속 홀트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강 원장은 8년 뒤인 1983년엔 경북 최초의 공립 장애인학교인 경주경희학교의 교장으로 스카우트되어 1996년까지 13년 동안을 경주에서 장애아를 위해 헌신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강 원장은 장애인학교에서 초·중·고교 과정을 졸업하고도 자립생활을 할 수 없는 경희학교 출신 장애아들의 딱한 사정을 외면치 못해 경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4년 5월 사비를 들여 외동읍 죽동리 571-1에 장애인 생활시설인 ‘한마음의 집’이라는 시설을 설립해 졸업생 5명을 돌보기 시작해 최고 11명에게 삶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죽동리 한마음의 집
초·중등학교 교사생활 28년과 홀트학교 교장 8년, 그리고 경희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13년 등 모두 49년 동안을 일반학생들과 장애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을 가진 강 시설장은 정신과 신체에 장애가 있어 학교를 졸업하고도 자립을 할 수 없는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장애인 돕기에 온 몸을 던진 우리 시대에 만나기 드문 복지교육자로 불리는데 부족함이 없다.
강 원장은 특히 2년 뒤 정년퇴직 때 받은 퇴직금 2억 원도 몽땅 경희학교 출신 장애인들의 자활시설비에 충당, 8300여㎥(2500여평)의 땅을 매입한 다음 250㎥(80여평) 규모의 시설물을 지어 지난 15년 동안을 한결같이 이들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
20살에서 40살까지의 경희학교 출신 장애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의 ‘한마음의 집’엔 현재도 10명의 장애인들이 강 시설장의 보호아래 숙식을 함께하면서 자동차부품인 전기매립 등을 조립하는 기술을 가르쳐 장애인들이 매월 일정액의 수입을 저축하면서 자립의 꿈을 키워가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주고 있다.
강정숙 원장
이처럼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바친 강 시설장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동을 받은 많은 분들이 전국 곳곳에서 매월 일정액의 성금도 지원도 해 주고 있어 또 다른 미담이 되고 있다.
여러해 전 대구지검 경주지청장으로 재직한 뒤 현재는 경기도 수원지청장으로 재직하는 서정식 지청장은 요즘도 강 시설장을 돕기 위해 매월 일정액의 성금을 ‘한마음의 집’으로 송금해 오고 있으며 자동차부품회사인 외동읍 구어리(九魚里) 동해금속<주>의 서동해 회장도 매월 200만원씩의 성금을 지원하는 등 적지 않은 곳에서 성금을 보내주고 있어 각박한 현실사회에 흐뭇한 화제가 되고 있다.
강 원장은 이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1980년 대한교육연합회장상과 경기교육대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는 경향신문사가 수여하는 교육상인 횃불상과 1991년 경상북도 교육상, 1997년에는 MBC와 한국전력공사가 주는 좋은 한국인 대상, 2011년 서라벌신문사의 제6회 서라벌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한마음의 집을 돕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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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리(竹洞里) 고분(古墳)은 외동읍 죽동리 일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복합유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지금의 경주시 불국동(佛國洞) 이남에서 울산시에 이르는 영남좌로(嶺南左路)로 부근에는 기원전 또는 신라(新羅) 초기의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죽동리 고분 발굴유물
유적이 주로 위치한 곳은 경주에서 울산(蔚山) 방향으로 가는 통로(영남좌로를 말한다)의 중앙부로, 부근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平野地帶)가 펼쳐져 있는 가운데 곳곳에 독립 구릉(丘陵)이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유적(遺蹟)은 이 독립구릉의 하나하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신라초기의 덧널무덤(木槨墓) 유적이 등거리(等距離) 간격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행정동 불국동의 조양동(朝陽洞)·구정동(九政洞)일대의 고분군, 남쪽의 죽동리 고분군, 구어리(九於里) 고분군, 그 남쪽의 울산(蔚山) 중산리(中山里) 유적인데, 이들은 모두 과거 경부(京釜) 통로인 경주~울산간의 영남좌로(嶺南左路)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
죽동리 풍경
그리고 죽동리(竹洞里) 유적에서는 보물 제1152호로 지정된 간두령(竿頭鈴) 등 청동일괄유물이 출토되었고, 곳곳에 청동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토기편(土器片)들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다.
유적 가운데 구릉의 남쪽부분에서 조기신라(早期新羅 : 250~350년) 토기들이 출토되어 일부지역인 죽동리(竹洞里) 산29-1번지 일대를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하고, 이를 ‘죽동리 고분군’이라 명명하였다.
발굴조사에서는 덧널무덤(木槨墓) 3기와 독널무덤(甕棺墓) 1기가 확인되었다. 덧널무덤은 세장방형(細長方形)의 무덤구덩이(墓壙)를 파고 세장한 나무덧널(木槨)을 설치한 다음, 덧널과 무덤구덩이 벽 사이를 흙으로 채우고 봉분을 올린 것이나 봉분은 삭평되어 없어졌다.
죽동리 덧널무덤
덧널무덤 가운데 1호와 2호, 두 기에서는 나무덧널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 경우 나무덧널은 세장한 장방형의 덧널 한쪽 3분의 1쯤을 칸막이하여 딸린덧널(副槨)을 둔 동혈묘광동곽구분식(同穴墓壙同槨區分式)의 주부곽식(主副槨式)인 경주형 덧널무덤이라 부르는 것의 전형적인 형식이었다.
무덤의 크기는 1호의 경우 무덤구덩이의 길이, 너비가 4.62× 1.26m이고, 나무덧널은 4.0×0.95m였으며, 2호의 경우 무덤구덩이는 4.05×1.12m, 나무덧널은 3.59×0.83m였다.
죽동리 풍경
두 무덤 모두 딸린덧널에 토기류(土器類)를 부장하였고, 으뜸덧널의 피장자 머리 측에 토기와 철기류를 부장(副葬)하였다.
1호에서는 조기(早期) 신라토기(新羅土器) 또는 고식(古式) 도질토기(陶質土器)라고 부르는 초기신라의 항아리․바리모양그릇받침․타날문항아리․와질토기인 두귀항아리․굽다리바리 등의 토기류와 도끼․손칼․미늘쇠(有刺利器)․투겁창․낫 등의 철기류(鐵器類)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2호에서는 와질(瓦質) 토기인 타날문항아리․굽다리바리․손잡이동이․조기(早期) 신라토기인 바리모양 그릇받침․항아리 등의 토기류, 낫․미늘쇠․판상(板狀)의 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와 벽옥제(碧玉製)의 굽은옥(曲玉)이 출토되었다.
죽동리 풍경
또 3호묘는 파괴가 심하여 무덤의 원상(原象)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단벽의 한쪽에서 토기와 석제곡옥(石製曲玉)을 매단 유리구슬목걸이, 손칼 등이 출토되었다.
옹관(甕棺)은 3호 덧널무덤의 위에 설치된 것으로 와질토기인 긴 독과 항아리를 합구(合口)시켜 만든 것이었다.
출토되는 유물(遺物)로 보아 발굴된 고분들은 4세기 초,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지리적 위치로 보아 경주(慶州)에서 울산(蔚山) 방향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에 자리 잡아 초기신라의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집단 가운데 한 취락집단(聚落集團)의 유력자 무덤들로 볼 수 있다.
죽동리 풍경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죽동리(竹東里) 산 320-6일대는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 출토가 있었던 곳으로 신라(新羅)가 기틀을 잡기 이전 인접 구어리(九魚里)에서와 같이 삼한시대의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죽동리(竹東里) 지역 고분이 대구-경산-영천-안강-경주-울산을 잇는 곡간(谷間)의 단위집단인 대구 신천동(新川洞)과 외동읍 구어리(九魚里) 지역과 같이 국가급(國家級)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들 고분에서는 세문경(細文鏡)과 간두령(竿頭鈴)등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다.
죽동리 풍경
죽동리(竹東里) 출토 유물(청동기)에는 현재 보물 제1152호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간두령(竿頭鈴) 1쌍, 혁금구(革金具) 25점, 동모(銅鉾) 1점, 동과(銅戈) 1점, 동검(銅劍) 1점, 소동탁(小銅鐸) 1점, 동대(銅帶) 1점, 칼자루 끝 장식(劍把頭飾) 2점 등 총 34점의 일괄유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동모와 간두령, 한국식동검(韓國式銅劍)은 특징 있는 유물로 손꼽히고 있다.
죽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검, 청동창, 청동 단추 등
또한 죽동리(竹東里)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시대에 만들어진 이 일괄유물은 출토 유물이 입실리(入室里) 유적 출토 일괄유물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중국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청동기(靑銅器) 유적으로는 거의 마지막 단계인 기원전 1세기 초로 추정된다. 죽동리(竹洞里)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종류와 개요를 도표화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 물 |
개요 및 특징 |
간두령
(높이 15.4㎝, 15.5㎝) |
같은 틀로 만들어진 한 쌍의 청동기 유물이다. 가운데가 빈 포탄형으로 아래 부분에 테두리가 돌아가 있다. 내부는 중앙에 구멍이 뚫린 칸막이를 설치, 방울을 넣어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윗부분은 4개의 긴 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짧은 선으로 이루어진 삿갓 모양의 문양대 2열과 짧은 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무늬 2개가 서로 마주보게 해, 여백이 마름모꼴이 되게 한 문양대 2열이 배치되어 있다. 아랫부분 테두리는 4단으로 되어 있다.
간두령
|
혁금구
(지름 4.3∼4.6㎝) |
모두 25점으로 형태로 보아 3종류로 나누어진다.
①류 : 대형인 것 1점이 있다. 표면이 볼록하고 3단을 형성하고 있다. 뒷면 한가운데에는 매달기 위한 소형의 고리가 1개 달렸다.
②류 : 전·후 평면이 원형인 것으로 23점이 있다. 표면이 볼록하게 되어 있는데, 테두리 쪽에서 단이 있어 높아지며 한가운데는 돌기가 튀어나와 있다.
③류 : ①류·②류와 다른 점은 표면 중에 돌기가 없고, 두께가 얇은 편이다.
혁금구
|
투겁창
(동모)
(길이 28.2㎝) |
끝부분은 일부가 파손되었고, 6.5㎝정도의 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날 부분에는 각각 3줄의 홈(혈구)을 새겼다.
자루가 끼워지는 부분 바로 위에 돌대를 돌렸고, 한쪽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다.
투겁창
|
꺽창
(동과)
(길이 23.4㎝) |
전체적으로 두께가 얇고 어깨부분도 얇으며, 폭이 좁은 전형적인 후기 꺽창이다.
등날부분의 홈인 혈구 밑 부분에는 물고기 뼈 모양의 무늬를 새겼다.
꺽 창
|
세형동검
(길이 30.2㎝) |
동검으로는 매우 긴 편으로 검의 끝부분이 9㎝정도로 길며, 등날은 어깨부분까지 갈았다.
다른 동검과 달리 등날부분의 홈인 혈구가 약간 오목하게 들어갔다. 어깨부분은 검신(劍身)에 비해 짧으며, 단면은 타원형에 가깝다.
세형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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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탁
(높이 5.2㎝) |
위에서 보면 마름모꼴로 말에 장식한 방울이다. 방울 아래의 중앙부분이 안으로 꺾여 들어갔으며, 윗부분은 반원형의 추가 달려 있다.
|
동대
(높이 4.8㎝) |
한쪽이 막힌 타원형 통(筒)처럼 생긴 유물이다. 상·중·하 3곳에 돌대를 돌리고, 그 사이에 많은 삼각형을 새기고 그 삼각형 속에 선을 그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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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끝 장식(검파두식)
(높이 3.6㎝, 4.4㎝) |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아랫부분 땅콩껍질을 세로로 자른 모양에, 네모난 돌기를 양측 면에 붙여 十자형을 이루게 하였다.
윗부분은 곧게 세워진 직육면체이다. 아랫부분은 속이 비어있고 한가운데 소형돌기가 붙어있으며, 윗부분은 속이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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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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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역(竹東驛)은 지금은 폐역(廢驛)이 되었지만, 경주(慶州)와 울산(蔚山) 간을 잇는 간이역(簡易驛)이었다. 동해남부선의 역으로 논 사이에 있는 단선승강장으로 2007년 6월 1일부터 여객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고 있다.
단출하게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지붕이 살짝 덮여 있는 죽동역(竹東驛)은 여느 버스 정류장(停留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죽동역(竹東驛)이라는 푯말만이 이곳이 기차역(汽車驛)임을 알려줄 뿐 처음 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역(驛)이었다.
죽동 철길 건널목
죽동역(竹東驛)은 1966년 6월 11일 을종(乙種) 승차권 대매소(代賣所)로 영업을 개시하여 이듬해인 1967년 8월 27일 현재의 역사(驛舍)를 준공한 역원(驛員) 무배치(無配置) 간이역이었다.
지금은 함께 폐역(廢驛)된 입실역(入室驛)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며, 1일평균 승하차 인원은 2003년 현재 평균 2명이었다. 사진 오른쪽이 괘릉리(掛陵里)의 ‘웽고개’로 오르는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왼쪽은 입실역(入室驛) 방향이다.
죽동역(竹洞驛)
죽동역(竹東驛)은 코레일(Korail) 대구본부 소속으로 경주시 외동읍 죽동리 235번지에 위치하며, 동해남부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입실역과 불국사역(佛國寺驛) 사이에 있는 간이역으로 죽동리(竹洞里) 건널목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승차인원이 곧 강차 인원이었고, 거의 죽동리 주민들이 이용객의 전부였던 죽동역(竹洞驛)은 지난 2006년의 경우에는 상․하행선을 모두 합쳐 하루에 6회 정도 운행되었다.
한편 죽동역(竹洞驛)의 역 이름의 유래는 마을 지명을 따른 것으로 대나무가 많아서 마을 이름이 ‘대방’에서 ‘죽방(竹方)’, 다시 ‘죽전(竹田)’에서 ‘죽동(竹洞)’이라 불리어졌다.
죽동역
타지에 있던 자녀들이 고향에 왔다가 다시 도회지로 갈 때, 반찬 보따리 등을 챙겨서 머리에 이고 역(驛)까지 나가 실어 주곤 하던 작은 농촌마을의 만남과 이별을 중재한 죽동역(竹東驛) 승강장의 풍경은 소박한 간이역의 서정으로 손색이 없었다.
짧은 승강장(昇降場)에다 슬레이트 지붕 하나, 벤치 두 개로 어느 기차역보다 단출함이 느껴지는 간이역, 이런 간이역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에서 볼 수 있는 역들이었다.
여기에서 죽동역(竹東驛)의 주요 운수일지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쪽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동역은 1966년 6월 11일 무배치(無配置) 간이역으로 ‘죽동대매소(竹洞代買所)’로 영업을 시작했다. 1967년 8월 27일 역사를 준공하고, 1967년 9월 1일 을종승차권 대매소로 지정된다.
죽동역
1977년 5월 1일 불국사역(佛國寺驛)으로 관리역이 변경되었으며 1984년 3월 1일 다시 입실역(入室驛)으로 관리역이 변경된다.
1990년 1월 1일에는 을종대매소(乙種代買所) 지정이 취소되어 2007년 6월 1일 일반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게 된다. 다른 간이역(簡易驛)과 다르지 않은 경우로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역세권이 감소하면서 승하차 승객이 없기 때문이다.
죽동역 주요연혁
영업개시시기
1966년 6월 11일(무배치간이역)
주요 운수일지
1967년 8월 27일 역사준공
1967년 9월 1일 을종승차권 대매소로 지정
1977년 5월 1일 불국사역으로 관리역 변경
1984년 3월 1일 입실역으로 관리역 변경
1990년 1월 1일 을종대매소 지정 취소
2007년 6월 1일 일반열차 통과
|
죽동역
지금은 벤치와 기둥형 폴싸인,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켜지지 않는 가로등이 죽동역(竹東驛)이 가지고 있는 전부이다. 이채로운 것은 예전의 지주형 목재 폴싸인에 비해 죽동역의 폴싸인은 1990년에 제작된 일체형(一體形)의 철제(鐵製) 폴싸인 이라는 점이다.
‘폴싸인’이란 승강장(昇降場) 건물에 매달려 있거나, 뿌리를 박고 우뚝 서 있는 안내구조물(案內構造物)로서 우리말로는 ‘이정표’ 정도로 표현하면 된다.
죽동역 일체형의 철제 기둥형 폴싸인(역명판)
죽동역(竹東驛) 주변에는 넓게 논이 있고, 역(驛)에서 바라보는 낮은 언덕 아래로 마을이 있다.
1965년 당시 역(驛)의 건립은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당시의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역사(驛舍) 준공에 적극 동참하였다. 동네 주민들이 지게로 흙을 짊어지고 가서 철길을 돋우었다.
그리고 이 간이역(簡易驛)을 이용한 주민들은 주로 죽동리(竹洞里)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인 말방리, 활성리, 개곡리, 방어리, 신계리, 북토리, 괘릉리 등의 지역 주민들이 이 역에서 기차를 이용했고, 부산(釜山)이나 울산(蔚山), 경주(慶州)를 다녔다.
죽동역과 죽동마을
주요 농산물(農産物)인 쌀, 콩잎, 부추 등의 채소류를 팔러 다니기도 했고, 인근 몇 개의 동네에서 경주시내와 울산(蔚山)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이용했다. 1970년대 울산에서 경주간의 통학기차(通學汽車)는 아침, 저녁으로 운행했었다.
죽동역(竹東驛)까지 오려면 멀게는 2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와야 했고, 말방리(末方里)나 활성리(活城里), 괘릉리(掛陵里) 동대산 기슭 마을에서는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역까지 오기도 했었다. 그때는 주로 농로(農路)를 이용해 다녔고 길도 포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동역(竹東驛)에서 기차를 타면, 부산(釜山)에서 청량리역(淸凉里驛)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쁨은 여간 크지가 않았다. 서울까지 가려면 10~12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죽동역 매표소
죽동역(竹東驛) 앞에는 신라시대 연못이었던 ‘장산못’이라는 저수지(貯水池)가 있었는데, 지금은 울산-포항 간 동해고속도로(東海高速道路) 남경주 인터체인지 공사로 매워 버렸다.
그리고 역 건널목의 옆에는 구판장(購販場) 정도의 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볼썽사납게 흉물처럼 뼈대만 남아 있다. 그 가게에서 기차 시간표를 붙여 놓고 기차표를 위탁판매(委託販賣)해서 표를 팔았다.
죽동역이 개업(開業)할 때는 동네 주민이 모여 첫 기차의 개업을 축하했는데, 개통한 첫 기차를 타면 장수(長壽)도 하고 건강하고 복 받는다고 해서 죽동리(竹洞里)의 촌로(村老)들은 별 볼일이 없는데도 일부러 기차를 타고 경주나 부산(釜山) 등지를 다녀오기도 했었다.
죽동역의 승객들
그리고 또 기차 이용을 많이 해야 철도당국(鐵道當局)에서도 좋아 할 것 같아서 협조차원(協助次元)에서 죽동리(竹洞里) 주민들은 별 볼일이 없었더라도 기차이용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었다.
또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예비 신혼부부(新婚夫婦)들의 웨딩 촬영지로 죽동역(竹東驛)을 많이 이용했었다. 주로 봄에 많이 왔었는데, 봄에는 역 주변에 ‘개나리’가 많이 피었기 때문이다.
개나리 만발한 죽동역
서울이나 부산(釜山) 등지의 먼 길을 떠날 때는 기차에서 끼니를 때워야 했는데, 먹을거리로 계란(鷄卵)을 삶아서 가거나 김밥을 만들어서 갔다.
거의 하루 종일 가야 해서 어디 다른데서 사먹을 데나 가진 돈이 풍족(豊足)하게 없으니까 집에서 만들어 가곤 했던 것이다.
이러다가 이용객(利用客)이 적어 폐업을 한다는 안내문이 역사(驛舍)의 벤치에 미리 붙어 있었을 때는 너무나 서운하고 섭섭했다고 회고 한다. 늘 기차가 서던 것이 안서고 그냥 지나 가버리니까 더 없이 섭섭했다는 것이다.
벤치에 붙여놓은 폐업안내문
그러면 여기에서 지난 1965년부터 폐역(廢驛)이 된 지난 2007년 5월 말일까지의 죽동역(竹東驛) 승․강차(乘降車) 인원의 변화추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쪽 표에서와 같이 1965년 승차인원(乘車人員) 4,582명, 강차인원(降車人員) 3,685명으로 개업을 시작해 1978년 67.395명으로 최대치(最大値)를 기록하고, 강차인원 53,176명을 기록했었다.
1979년에도 연이어 61,996명으로 상승세(上昇勢)를 유지했고, 강차인원 43,486명으로 전성기(全盛期)를 구가한다.
죽동역
그러나 1990년에는 승차인원(乘車人員)이 175명으로 급격히 줄고, 강차인원도 9,483명으로 그 하락세(下落勢)가 시작되어 1991년부터 2005년까지 거의 승차인원이 한 자리 수에서 두 자리 숫자에 그치는 등의 저조한 이용객을 기록한다.
그리고 모두들 농촌을 버리고 대도시로 이농(離農)을 하자 2006년에는 연간 승차인원 140명, 강차인원 630명을 기록했고, 2007년에는 드디어 승차인원 146명, 강차인원 113명으로 죽동역의 이용객은 그 종지부를 찍었다. 3일에 1명 정도의 승객이 타고 내린 것에 불과했었다.
죽동역 연간 승․하자 통계자료
년도 |
승차인원
(단위: 명)
|
강차인원
(단위: 명) |
화물 발송량
(단위: 톤) |
화물도착량
(단위: 톤) |
1965 |
4,582 |
3,683 |
- |
- |
1966 |
16,327 |
12,814 |
0 |
0 |
1967 |
23,100 |
17,338 |
113 |
3 |
1968 |
37,833 |
25,670 |
0 |
0 |
1969 |
51,449 |
37,387 |
0 |
30 |
1970 |
54,638 |
41,422 |
0 |
0 |
1971 |
49,715 |
38,781 |
0 |
0 |
1972 |
40,549 |
27,649 |
0 |
0 |
1973 |
35,288 |
24,972 |
0 |
0 |
1974 |
41,399 |
30,805 |
0 |
0 |
1975 |
44,695 |
32,811 |
0 |
0 |
1976 |
43,779 |
37,430 |
0 |
0 |
1977 |
47,863 |
38,106 |
0 |
0 |
1978 |
67,395 |
53,176 |
0 |
0 |
1979 |
61,996 |
43,486 |
0 |
90 |
1980 |
57,569 |
41,383 |
0 |
0 |
1981 |
55,073 |
39,699 |
0 |
0 |
1982 |
51,164 |
37,798 |
0 |
0 |
1983 |
45,977 |
32,019 |
0 |
0 |
1984 |
42,043 |
28,916 |
0 |
0 |
1985 |
41,700 |
25,860 |
0 |
0 |
1986 |
37,848 |
29,290 |
0 |
0 |
1987 |
33,182 |
19,372 |
0 |
0 |
1988 |
27,184 |
13,181 |
0 |
0 |
1989 |
23,735 |
12,940 |
0 |
0 |
1990 |
175 |
9,483 |
0 |
0 |
1991 |
25 |
6,734 |
0 |
0 |
1992 |
0 |
5,164 |
0 |
0 |
1993 |
0 |
1,811 |
0 |
0 |
1994 |
0 |
1,132 |
0 |
0 |
1995 |
0 |
733 |
0 |
32 |
1996 |
0 |
791 |
0 |
0 |
1997 |
0 |
1,037 |
0 |
0 |
1998 |
0 |
610 |
0 |
0 |
1999 |
0 |
838 |
0 |
0 |
2000 |
0 |
469 |
0 |
0 |
2001 |
0 |
1,393 |
0 |
0 |
2002 |
75 |
261 |
0 |
0 |
2003 |
0 |
539 |
0 |
0 |
2004 |
17 |
200 |
0 |
0 |
2005 |
25 |
390 |
0 |
0 |
2006 |
140 |
630 |
0 |
0 |
2007 |
146 |
113 |
0 |
0 |
죽동역
승객의 승하차(乘下車)가 한창일 때는 죽동역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면, 너른 벌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 간이역(簡易驛)에서의 한가함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비록 낡아서 한쪽이 떨어져 나간 벤치이긴 했지만, 청록색(靑綠色) 슬레이트 지붕아래 나란히 놓아져 있던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지난 4월 7일 경주시내에서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제7회 동기회를 마치고, 울산공항(蔚山空港)으로 가면서 포항과 울산을 하루에 몇 번 운행하는 열차가 죽동역(竹東驛)을 그냥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필자 또한 서운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죽동역
철길 침목(枕木)에다 교실에서 훔쳐온 분필로 낙서질을 하기도 하고, 기차가 오지 않는 틈을 타 ‘철까치(레일)’ 위로 균형을 잡으며 떨어지지 않고 걸어가 본 기억을 수없이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 죽동역(竹東驛)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기차의 모습에서 까닭모를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나마 명년쯤이면 철길 자체가 모두 거두어지고, 유서 깊고 애환(哀歡) 서린 역사(驛舍)들이 모두 철거된다니 가버린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조차 영겁(永劫)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죽동역
여기에서 기이 다른 파일에서 소개한바 있는 김창근의 ‘동해남부선’을 게재하여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우리들의 추억과 애환이 덕지덕지 눌어붙었던 추억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을 되돌아보시면서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동해남부선
김창근
바다를 끼고 흐르는
시월의 창변
옛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익은 가을이 떠 내리고
젊은 날의 흐린 갈증을 일깨워
미련처럼 길게 누운 그림자
동해남부선
그 외진 철길 위로
후줄근히 젖어
남루한 우울이 밀리면
가버린 시절의 간이역
어느 시간표에도 없는 슬픔이
기적 소리에 실려
자꾸만 아득히 멀어지는데
행선지가 없어 더욱 막막한
어둠의 궤적에 올라
오늘은 누가 그렇게
또 떠나 가는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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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죽동역 열차시각표 및 여객운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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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리(薪溪里) 파일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죽동리(竹洞里)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한 한 사람의 호국무장이 있었다. 경암공(敬庵公) 김응춘(金應春)공이다.
김응춘(金應春)공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신여(信汝)이며, 만호(萬戶) 김세적(金世積)의 증손이다. 그는 명종 2년 외동읍 죽동리 ‘새원’부락 장군봉(장구뱅이)아래서 태어났다.
김응춘공의 묘
공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양산(梁山)고을에서 마을의 장정들과 규합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공적으로 훈련원정에 제수되었고, 1593년(선조 26)에 3등 공훈으로 올랐으며, 같은 해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명나라 장수를 따라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機張)에서 왜군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자, 이 공으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에 제수되고, 곧 주부(主簿)로 옮겼다.
김응춘공의 재실 추감재(죽동리 소재)
그의 사후(死後)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충의각(忠義閣)이 경남 울산시 울주군 온양면 남창리 255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김응춘(金應春)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따서 세운 경암정(敬庵亭)은 1946년 외동읍 신계리(薪溪里) 김씨 문중에서 신계리 ‘상섶’마을에 세웠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중앙에 2칸 대청을 들이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으로 구성되었다.
기단(基壇)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후 평면을 시멘트로 마무리하였으며, 납작한 초석 위에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신계리의 경암정(敬庵亭)
여기에서 소개한 김응춘(金應春)공은 임진왜란 때 진주와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랑(宣武郞)을 제수받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증직으로 내려졌던 김녕김씨 김응춘(金應春)과는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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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동리(竹洞里) 출향인사로는 외동중학교 31회 졸업생인 이상식 치안감(治安監)이 있다. 그는 경찰대학교 5기생으로 재학 시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그간 경찰청 본부에서 근무해오다 지난 2005년 2월 초순경 총경(總警)으로 승진하면서 강원도 영월군 경찰서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지난 2013년 12월 24일 단행된 경찰청(警察廳) 인사에서는 경찰청 정보국장(情報局長)에 당시의 이상식 경찰청 정보심의관을 내정함으로써 치안감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죽동리 풍경
죽동리(竹洞里)는 필자의 향리인 괘릉리에 인접해 있는데도 위에서 소개한 이상식 치안감 외에 이 마을 출신 인사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재경외동향우회 임원을 역임한 구분선, 장택현, 이종대(필자의 외동중학교 동기생) 향우, 그리고 우리 외동향우회 카페에서 향토시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울산의 김현섭 향우 등이 죽동리(竹洞里) 출신이다.
죽동리 갓골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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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말한 대로 죽동리(竹洞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자료가 없어 이쯤에서 파일을 덮는다. 배경음악은 다른 동리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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