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구문론 / 이종섶
(낭송: 김춘경)
바람은 형용사다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깃발을 휘날리게 한다
나무와 깃발 같은 것들 앞에 흔들린다와 휘날린다를 붙이는 것은
목숨과도 같아서 그런 표현이 사라지면 흔적조차 사라져버리는 것
이다 바람은 동사도 된다 바닥에 있는 것들을 날아가게 하고 무생
물체까지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야 바람 따
라 움직이지 않겠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
며 생명을 흉내낸다 바람을 통해 잠깐씩 살다 가는 목숨들이 아주
많다 바람은 접속사 역할도 한다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며 꽃과 꽃
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까지도 만나게 한다 바람이 없으면 외롭
게 살다가 저 혼자 마감하는 세상 바람이 있어 서로가 손길을 스치
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 수있는 것이다 바람은 그러나
명사는 아니다 명사의 형질이 없어 무엇이든 명사로 보이는 순간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꾸며줄 수도 있고 움
직여줄 수도 있으나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되지 못하는 비문(秘文)
바람은 그러므로 존재사다 모든 것이 되고 싶으나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점 미련도 없이 대상의 존재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문법
에 만족한다 명사와 명사 사이에 불기도 하고 한 명사를 불어 다른
명사를 불게도 하는 구문론 읽을수록 끝이 없고 쓸수록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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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