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운 선생님!
이경국님 인터뷰(2007. 10. 13 대담 : 김상범, 정리 : 이성희)
1960년 7.29 선거를 통한 선생님과 인연의 시작
김상범 : 바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기에 이경국 선생님께서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오신 분들 중, 측근 중에서도 측근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을 언제부터, 어떤 인연으로 가깝게 모시게 되었는지부터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경국 : 4․19 혁명이 나던 해 서울에서 데모를 하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서울 유학생들이 경찰서 등 여기 저기 공공기관을 향해서 좀 난폭하다싶게 데모를 했었지요. 그 때, 어느 분이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신다고 해요.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했지요. 그 때 선생님을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마디로 “이러면 안 된다.”고 하시며 비폭력 운동을 강조하셨어요. 순수한 거리 행진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4․19 혁명의 참뜻을 알려야지, 폭력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 이후,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뵙게 되었지요. 얼마 후 선생님께서 사회대중당의 공천으로 7.29 선거에 출마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선생님과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된 셈입니다. 저는 대성학교 출신도 아니고 선생님을 잘 몰랐었는데 7.29 선거를 통한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저의 새로운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김상범 : 선거운동 당시 찬조연설자로 마이크를 잡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정황을 좀 말씀해주시겠어요?
이경국 : 그 때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모였지요. 선거에는 돈이 필요하잖아요? 당시 선생님은 대성학원 설립에 기부하신 터라 돈이 없으셨어요. 출마자나 돕자고 나선 사람들이나 모두 몸으로 때우려는 열정만 충만했지요. 선전 포스터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요. 저는 학생 때부터 웅변을 하기도 했었고, 목소리가 좀 크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넌 마이크를 잡고 유세를 해라.” 해서 대성학교 출신인 김태완 등과 동네 골목골목을 누볐지요. 리어카나 지게에 앰프를 설치해서 다녔는데, 봉산동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청렴결백한 장선생을 국회로 보냅시다.” 하고 가두 연설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원주시 ․ 군 곳곳을 기호 2번 피켓을 들고 누볐는데 모두 각자 주머니를 털어가며 다녔지요. 리어커를 끌고, 지게를 지고 다닐망정 치악산 골짜기 구석구석까지 다니던 운동원은 우리들 밖에 없었어요. 그 때 상대는 민주당 후보인 박충모씨였는데 사적으로는 무위당 선생님의 부친과 친분도 있고 해서, 마치 삼촌 조카처럼 친밀하셨지요. 그렇지만 서로 이념이 달랐어요. 선생님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나 조봉암 선생의 혁신 사상에 동조하셨기에 사회대중당의 공천을 받으시게 되었죠. 선생님은 남북한 중립화 통일에 뜻을 두셨거든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자호인 청강(淸江)의 뜻 그대로 도덕 정치를 지향하셨어요. 합동 유세하실 때 선생님이 한 번 나서서 말씀을 하시면 사람들도 다 감탄했었어요. 참 청렴하고, 강직하고, 깨끗하다는 데는 다 공감하는데도 중립화 통일안은 청중에게 먹히지 않았어요. 청중들은 언변이 뛰어나지도 못했음에도 박충모 선생이 사회대중당은 빨갱이 사상이라고 하는 데 다 넘어갔지요. 중립화 통일안은 그 당시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죠.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김상범 : 사회대중당으로 출마하셨던 7․29 선거 운동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이경국 : 정치적 문제도 문제지만 몇 가지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해볼까 해요. 7․29 선거 운동 당시 근 한 달 정도를 선생님댁에서 유숙했었는데, 그 때 김영주 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실질적인 선거대책본부장 역할을 맡고 있었지요. 나중에 사무실 세도 못 내면서 아주 애를 먹었던 실무자였어요. 저야 뭐 깜깜해지도록 열심히 유세를 하고 돌아와 선생님께서 여론이 어떠냐고 물으시면 ‘좋습니다.’가 전부였지만 김영주 회장님은 말하자면 총기획자였어요. 매일 밤 10시나 11시 경에 일정을 마치고 나면 우리 둘은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댁으로 향했어요. 댁에 도착하면 늦은 시간이라 부모님은 이미 취침하셨지요. 그런데 불이 꺼지고 이미 잠드셨을 부모님 방 앞에 조용조용히 가셔서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으셔서는 “아버지,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하시며 꼭 절을 하셨어요. 사모님께서는 계란을 한 개씩 깨서 참기름과 소금을 뿌려서 주시는 데, 저한테는 목을 쓴다고 꼭 두 개를 주셨어요. 어려운 살림 속에서 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이었지요. 그리고 늘 셋이서 한 방에서 잤어요. 사모님과 아이들 있는 방으로 가시라 해도 내 집에 온 손님들을 두고 어떻게 따로 가시냐면서 내내 우리와 함께 주무셨는데, 1시 2시가 되도록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어요. 운동의 방향이라든가 그 날 그 날의 평가 등을 이야기하셨지요. 저는 고단해 먼저 잠에 떨어지곤 했지만 그 두 분은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은 말씀을 나누었는지 몰라요. 그런데도 새벽에는 먼저 일어나셔서 부모님의 요강을 내어 손수 씻으시곤 하셨지요. 그 일은 늘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라 들었어요. 진실하게 성심성의껏 부모님을 섬기는 모습을 한 달 가까이 목격하면서 선생님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지요. 생활 속에 살아있는 유교적 가풍이라고 할까요? 20대 초반에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뵐 수 있었던 일은 제게는 큰 복이었지요. 김영주 형과 선생님과의 동지애를 목격한 것도 그렇고요. 그 때 제 인생의 진로가 정해졌던 겁니다. 이 때 이후로 저는 선생님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이 가시는 대로 좇아가고 선생님이 하라 하시는 일은 하고자 하는 것이 제 숙명 같은 길이 되었지요.
우리는 무위당 선생님 이야기만 하는데 나는 동생이신 장교장 선생님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선거가 끝나고 5․16이 나고 선생님께서 바로 서대문 교도소에 수감되셨잖아요? 그 후 가정 대소사를 챙기시는 일에 이르기까지 장화순 교장 선생님은 형님 뒷바라지에 애를 많이 쓰셨는데 본인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하셨어요. 7․29 선거 운동 과정 중에는 선생님께서 밥 먹는 곳을 한 곳 지정해주셨는데 바로 태평양반점이었죠.(밝음의 집 옆 건물로 상호는 래래반점으로 바뀜) 그 곳에 가면 짜장면과 우동은 항상 먹을 수 있었어요. 외상으로 말이죠. 지금은 돌아가신 조수원 사장님은 나중에 선생님과 의형제를 맺기도 하셨을 정도로 각별하셨는데, 우리가 가면 곱빼기로 해서 배불리 먹여주시고 참 후하게 대해주셨어요. 밀가루도 비쌀 때인데 수 백 명이 한 달이 훨씬 넘도록 드나들었는데도 한결같이 따뜻이 대해주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짜장면 우동이라지만 밀가루가 비쌀 때였거든요. 조사장님께 들어서 안 이야기지만 장화순 교장선생님께서 매달 일정액을 가져다주시곤 했다고 해요. 나중엔 안 받으려 해도 굳이 가져다 값으셨다고 해요. 한 7-8년을 그렇게 하셨다고 기억돼요. 형님 뒷바라지를 하셨던 장화순 교장 선생님의 면모든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는데 그런 것도 선생님 집안의 가풍이고 내력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그렇고, 사모님도 그렇고 형제분들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가톨릭의 사랑과 유교의 효 등을 몸소 실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도 다 선생님의 영향이었습니다.
원주교구 재해대책위원회(사회개발위원회 전신)에서 동원 탄좌, 사북사태에 이르기까지
김상범 : 원주교구 재해대책위원회 시절 이야기도 좀 해주시지요.
이경국 : 1965년 선생님 주례로 혼인을 하고 건축업으로 돈 좀 벌려 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대뜸, “춘천 가서 김영주 형 좀 데려와.” 하시는 거예요. 당시 김영주 형은 원주군청 공보실장을 하다가 춘천시청 공보실장으로 영전해갔는데 말하자면 스카웃이 되었던 것이었어요. 계속 했으면 시장, 군수, 도지사로의 출세 길이 열려있는 셈이었죠. 제가 트럭을 직접 가지고 가서 함께 이삿짐을 싸 왔지요. 그 길로 김영주 형은 원주로 온 것이에요. 선생님과 김영주 형과의 사이가 그런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지켜보면서 무위당 선생님과 김영주 선생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확인했지요. 김영주 선생은 곧고 선생님은 폭이 넓어서 모든 걸 감싸 않으시고 했어요. 그런데 사회 운동을 하는 데는 맺고 끊는 게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 역할을 김영주 선생이 맡아주었어요. 완곡했지만 선생님께,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하는 식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어요. 정세 판단이 늘 정확했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부르셨겠죠. 그 때 김영주 형은 그 좋은 부귀영화 자리를 놓아두고 와서 지학순 주교님의 보좌관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김영주 형은 신자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주교님을 모신 지 4-5년 후에야 김영주 형은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은 혁명과도 같은 일대 파격이었지요. 지주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러던 중 남한강 유역에 수해가 엄청나게 나서 재해대책 본부를 꾸리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게 되었는데 그 때 저를 부르셨습니다. 가 뵈었더니 광산에 가서 광부들과 일 좀 하라고 하시는데, 지학순 주교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 때 지학순 주교님께서 “너, 베드로 알지?” 그러셔서 “네” 했더니, “너, 사람 낚는 어부 한 번 해 봐.” 그러시는데 주교님 명령이니까, 순명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 생각했지요. 그 때부터 15년간을 천주교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 산하 재해대책 본부의 광산 일을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세계 협동조합 역사 속에서 광산 협동조합이 성공한 일은 없었습니다. 협동조합의 근간이 된 영국도, 그리고 독일도 광산에서는 실패했어요. 그런데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이 광산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해냈던 일은 제게 긍지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이경국이가 해서 가능했던 게 아니라 뒤에 무위당 선생님, 김영주 형, 여기 계신 김상범, 박재일 등 같이 일했던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3-4번이나 그만두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기차를 타고 영주로 돌아서 봉화 거쳐 6시간 7시간을 가야 겨우 황지에 도착했어요. 개보따리를 들고 가서 보름씩, 20일 씩 있다가 오는데 환경도 열악한 막장에서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협동조합 교육을 하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거든요. 모두들 “이 미친 놈 헛소리 한다.” 할 판이었지요.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 일을 했는데,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하면 선생님께서는, “너는 네가 가진 제 장점을 모른다.”고 하시면서, “너는 한 가지를 알려주면 열 가지로 풀어먹는 기술이 있으니 할 수 있다.”고 하셨죠. 제가 누구하고든 같이 어울려 술 잘 먹고 뭐든 쉽게 풀어 단순하게 얘기하는 재주는 있었지 싶어요. 사실 그것은 선생님께 배운 것이기도 하고요. 그 분들하고는 술을 빼 놓고는 아무 일도 안 되잖아요? 또 노동조합과 연대해야 하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많은 대화가 필요했지요. 함께 밥 먹고, 함께 술 마시며 얘기하는 일의 연속이었지요. 당시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부 시절이고 천주교가 사회적으로 부정부패 그만두라고 외칠 때였기 때문에 천주교와 개혁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사회운동을 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어요. 내가 광산에 가면 정보과 형사가 꼬박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나중에는 참 좋은 일을 한다고 그 형사마저도 감복했지만 말입니다. 그 곳의 물가가 원주보다 3배 정도 비쌌는데 서울서 직접 물건을 떼다가 3배 이상 싸게 팔았으니 감동할 일이었지요. 광부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장화였는데 이걸 1/3 가격으로 주니까 다들 좋다고 난리가 난거에요. 소비조합을 통해서 이루어낸 변화가 광산에서의 신용협동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죠. 그러자 그곳의 장사치들이 위협을 하기도 하고, 의식이 없는 광부들도 장사치들에게 술을 얻어먹고 나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하기도 했어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도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결국 15개의 단위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재무부의 인가를 취득하였고, 한창 번성할 때는 소비자조합이 50개 가까이 늘었지요.
그 때 소비조합이나 협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교육에서 나왔어요. 서울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광부들이 전부 나서서 등짐 져서 나르고, 싼 물건 왔으니 사 가라고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활동한 광부들 대부분이 원주에서 교육받고 의식이 바뀐 이들이었어요. 당시에는 광산촌에서 하는 사회 운동에 동참하는 일은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는 일이었지요. 그 어려운 가운데도 50명이나 30명 단위로 그분들을 원주교육에 모셨지요. 광부들은 원주에 가면 사람대접 받는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원주에 도착하곤 했지요. 지금은 한살림 매장으로 사용하는 성바오로 병원 뒤의 교육원에서 시작된 교육은 이후 10여 년 간 이어졌습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실무교육인 회계교육을 비롯해 지도자의 의식을 바꾸는 지도자 양성교육, 인간교육, 소비조합교육 등을 포함하고 있었죠. 선생님의 둘째 아우이신 장상순님이 회계업무 지도를 전담하셨어요.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1965년도 원주교구 설정 후,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님은 이미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림에 따라 발생하게 된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힘을 같이하시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개발위원회 산하에 재해대책사업개발위원회를 열어주셨던 것이죠. 신용협동조합 운동이나 농촌 문제, 광산 문제에 대한 일들이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졌죠. 특히 은행 문턱은 높아지고 고리채가 만연하면서 어려운 사람은 더욱 어려워지고 인간이 대접 못 받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하시고 진광학원에 협동조합연구소를 설립해주셨어요. 돌아가신 장상순 선생께서 총괄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강원도 협동조합 운동의 원 뿌리지요.
선생님께서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직접 광산촌에 오셨어요. 그래서 교육받으며 얼굴을 익힌 광부들을 만나시고 현장도 보시고 하셨죠. 나중에 한국 노총 위원장을 지낸 삼척탄좌 노조 지부장이던 김규벽씨가 그 때 많이 도와주었어요. 내가 일할 수 있도록 뒤에서 울타리가 되어 주셨죠. 이렇게 운동의 제일 중요한 힘은 교육을 통한 정신적인 변화에서 나왔어요. 그 정신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강연을 해 주신 분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고 또 당시 재해대책위원회 김영주 실장님이셨죠. 뿐만 아니라 지학순 주교님은 교육 프로그램 때마다 특별 강연을 해 주셨어요. 광산은 특수 분야니까 각계의 전문가들도 그 때의 교육에 참여했는데, 지금은 KBS 이사장을 하고 있는 김금수씨가 고려대학교에 있는 노동문제 연구소 위원으로 있으면서 비밀리에 강의를 하고 가기도 했어요. 무위당 선생님은 그 때마다 일주일 동안 함께 하면서 강의가 끝나면 물밥(밥과 술)을 같이 나누며 난상토론을 하셨어요. 그것도 교육의 한 과정인 셈이었죠. 그 때 마다 선생님은 광부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어요. 현장 상황을 다 듣고 나신 후, 종합해서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시면 모두가 선생님께 머리 숙여 승복하고 분위기가 상승했지요. 그러면 저는 그런 과정을 통해 다시 힘을 얻어서 언제 그만두겠다고 그랬냐는 듯 다시 그 먼 현장을 향해 기차를 타곤 했고요. 아주 중요한 거는 나는 혼자 외롭게 광산에 갔다가 오고, 농촌 활동을 나갔던 동지들도 돌아오고 하면 일주일씩 꼬박 평가 토론을 했지요. 그 회의 때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으셨어요. 한 번도 소홀하신 적이 없으셨죠. 모든 의견을 다 들으시고 종합해서 방향설정을 해 주시곤 했어요. 어쩌다 당신이 돈이 생기시면 시장에서 고급 요리도 사주시고, 끝나면 선생님 모셔다 드리면서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 댁에서 한잔 더 먹고 오기도 하고 그랬죠.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회의에서 끝나면 하려던 이야기가 쑥 들어가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지요. 선생님께서 변함없이 우리 곁에 계셔주신 것이 정말 큰 힘이었어요.
동원탄좌 사북사태 때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그 일의 주역 역시 원주에서 교육받은 광부들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바로 주모자로 몰리게 되었는데 당시는 전두환 시절 아닙니까? 전부 빨갱이로 몰려 군사 재판을 받게 생겼는데 지학순 주교님이 당시 1군 사령부의 장군에게 직접 “이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시면서, “현장을 직접 가 봐라. 이경국을 데리고 가서 확인을 해봐라. 그들은 삶을 위해 몸부림친 것이니 죄가 없다.” 하신 거예요. 그 때 저도 군복을 입고 가서 군인들과 함께 현장소장에게 거짓 없이 브리핑을 하도록 해서 지주교님 말씀을 증거했죠. 1군 사령부의 수뇌부들이 직접 막장에 가서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지를 보고, 그러면서도 인간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것을 보고 나서 광부들은 중죄를 면하게 되죠. 광부들의 의식이 바뀌니까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몸부림을 치게 된 것이 사북 사태의 본질이었거든요. 그것은 누가 조종한 것이라 할 수 없었어요. 의식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지주교님 덕분에 저도 처벌을 면했죠.
광산에 대한 지주교님의 애정은 진폐증과 규폐증 환자들에 대해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놓으신 일로도 현실화됩니다. 당시 지주교님은 가톨릭계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무원들을 향해 광산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면서 지속적으로 진 ․ 규폐 환자들이 “산업재해자”로서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당시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가톨릭계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약 150여 명의 발의 의원을 모아서 법안을 상정하고 국회에서 통과되었죠. 고엽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보상 지침은 아직도 마련되지 못한 점에 비해서 볼 때 주교님의 뚜렷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용협동조합 중앙회의 사무총장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을 다 이루지 못한 회한
이경국 : 광산일을 하는 중이었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너, 강원도 신용협동조합 회장에 출마해야겠다.” 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머뭇거렸더니, 하라면 하라고 하셔서 결국 회장이 되었죠. 당시 4년 동안 광산일을 병행하면서 80여 개가 되던 강원도내 신협 중 부실 조합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서 정상화시키는 일을 했지요. 강원도 지부 회장으로서 전국대회에 다니고 하다보니 1983년도에 전국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김상범 : 강원도 지부장을 하시면서 전국 부회장이 되셨네요?
이경국 : 네, 그 때 마침 신협 중앙회 연수원장이 공석이 됐어요. 마침 김영주 회장님도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를 떠나셨을 때이고 해서 선생님께 김영주 회장을 연수원장으로 추천하면 어떻겠냐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며 아주 반기셨어요. 사실 서열상으로는 기존의 직원이 가야했지만 연수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김영주 회장님의 역할이 필요했거든요. 당시 이사회에서는 반대하는 분도 계셨는데 무위당 선생님과 몇 번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드렸더니 금새 마음을 바꾸었죠. 연수원은 김영주 원장님의 부임 후 몇 달 안 지나 큰 변화를 이루어냅니다. 그런 식으로 제가 능력을 보이다보니까 1987년에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사무총장이 됩니다.
사무총장이 되고 참 애석한 일부터 겪어야 했지요. 전임자가 신용조합법을 개정하는 법안을 추진중이었어요. 이원조직에서 연합조직인 삼원조직으로 바꾸려는 법안이었는데, 이미 국회에 상정돼 있는 상태에서 제가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봉산동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이 크게 걱정하시면서, “야, 한국 신협, 아직 일러. 한국 신용조합은 아직 삼원조직으로 갈 준비가 안 된 상태인데 너무 빨리 가면 안돼.” 라 하셨죠.
김상범 : 아, 선생님이 반대하셨나요?
이경국 : 그럼 반대하시고, 말고요. 그런데 전임자가 추진하던 법안이니 후임으로서 되돌리기가 어려웠죠. 1988년 법이 통과돼서 삼원조직이 되었는데, IMF 사태가 왔을 때 신협이 매우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죠. 결국 IMF를 겪으면서 신협은 다시 이원조직으로 회귀하죠.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이 앞을 내다보신 일에는 탄복하겠어요. 지금도 그 일을 막아내지 못한 일이 참 가슴 아픕니다. 생각할수록 선생님 앞에 죄스러운 일이 그 일이에요. 그 때 선생님의 큰 뜻을 내가 헤아렸으면 어떻게든 막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무총장 재임 시절 연변에 신용협동조합을 만들려고 열성을 다했던 것도 역시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세계 신용협동조합 협의회에서 예산을 투입하여 중국에 협동조합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을 통해 접근하려 했는데, 아직 교류 이전이던 1989년 무렵이라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래서 선생님께 여쭈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대뜸 조선족을 향해서 해 보라 하셨습니다. 연변이나 흑룡강성 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두면 대개 함경도민 출신이 많은 지역이니 만큼 통일 후 그들이 북쪽에도 협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도록 지도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요. 북한이 경제를 알아야 하는데, 실패 없이 경제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신용협동조합을 먼저 알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어요. 그 어른이 그런 생각을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때 미국 쪽의 강정렬 박사(한국 초대 신협회장)와 함께 연변으로 가서 조선족들을 만나보니 가능하겠더라고요. 그 곳에서는 협동조합을 호조사(互助社)라 하는데 조직 가능성은 주 자치정부의 허용 여부에 달려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교육 사업부터 시작하자 해서 김영주 연수원장 시절 연변 쪽의 실무진이 될 분들을 20명 단위로 모셔서 일주일이나 보름씩 집중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지요.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해 한 달씩 연변 지역에 우리 조합원들을 파견하는 실무 현장 교육도 실시했습니다. 약 5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조합을 창립하게 되었는데, 창립식 때 맨 뒷줄에 점잖은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어요. 북한의 조평통 정치부장인 이상오라고 해요.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죠. 당시 연변 농과대 모 교수가 북한도 신용협동조합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 했던가 봐요. 자본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자본주의와 교류해가려면 인민들이 돈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은 어려운 사람들끼리 도우며 사는 성공적 사례라며 북한에도 도입하면 좋겠다고 했다나요? 그래서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세계 3위권이라는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의 실체를 확인 차 연변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 강의를 끝낸 후, 손광보 원장님과 같이 저녁 식사도 하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많이 했지요. 이상오 정치부장은 덴마크에서 유학을 했고 5개국어를 한다고 합디다. 덴마크는 유럽 공산주의의 본산 아닙니까? 그 때 이상오 정치부장이 1주일만 평양에 가서 김정일 동지께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제안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김정일 동지가 좋다고 하면 제 3국에서든 남한의 연수원에서든 북한의 일군들을 교육해 달라고 말이에요. 당시 김영삼과 김일성간의 회담 이야기가 무르익고 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때여서 가능할법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가는 문제도 그렇고 갔다 와서도 그렇고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임수경이 다녀와서 옥살이 하던 때니 참 결정하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일단 한국에 가서 성사 여부를 알아보겠다며 기념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이상오 정치부장은 그 다음날 교육에도 참가했습니다. 돌아와서 안기부에 확인해보니 어떻게 이런 거물을 만났냐고 하더군요. 제 3국인 중국에서는 만나도 좋다는 정부의 해석이 내려졌어요. 돌아와서 이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으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퍽 즐거워하셨죠. 결국 연변에서는 10개의 신협이 창립되었고 6개가 운영되었습니다. 북한과는 사무총장 임기 동안 두 번의 교류가 있었고 그 경과를 전화상으로라도 말씀드리면 병석에서도 참 좋아하셨는데, 지금은 교류 관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성희 : 직접적 교류는 없어도 연변 신협을 통한 교류는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경국 : 그렇죠. 그 때 장부니 뭐니 하는 것도 계속 이 곳에서 인쇄를 해서 보내주고 그랬지요. 우리가 도와준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족을 통해서 제가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곡식 한 톨을 수확하면 1/3을 광복군에게, 1/3은 학교를 짓는데, 1/3은 먹고 사는데 썼던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서 두 개의 단과 대학(농과대, 과학대)과 한 개의 종합 대학(연변대)을 세워낸 민족이었으니 참 자랑스러운 일이죠. 선생님은 우리 동족들의 그런 아름다운 정신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당장 조선족에게로 가서 신협 운동을 이어나가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 그리운 선생님!
김상범 : 그 후에 무위당 선생님이 써 준신 글씨나 난 같은 거 가지고 계시면 소개 좀 해주세요.
이경국 : 가까운 분들에게는 글 써 주시거나 하시는 걸 잊으셨어요. 와서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셨지만 우리는 옆에서 눈치만 보는 거지. 신협 사무총장 시절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내가 아주 힘들었어요. 내가 좀 다혈질이잖아요? 어르신이 나를 아주 잘 아셔요. 하루는, “내가 글을 하나 보냈다. 표구해서 잘 봐라.” 그러셨어요. 그 때가 선생님 발병 직전이었는데, “내유신령內有神靈” 이라고 써 주셨죠. ‘네 마음에 신령함이 있으니 모든 걸 인내하고, 참아라.’는 뜻으로 인식되었죠. 그걸 사무총장실에 걸어 놓고 보면서, 내가 싸워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 열악한 광산에서 그 거칠다는 광부들하고도 일을 해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광산에서의 일은 조합을 만들어내는 산고였지만 노동조합 일은 조합원은 이미 주인인데, 주인끼리 싸우는 일 같아서 노동조합의 요구 앞에 힘겨웠지요. 가령 생리 휴가를 한 달에 두 번씩 달라고 하는 데는 납득이 잘 안 됐어요. 또 그 모든 걸 제도화로 연결하려는 사고는 일반 회사에서나 하는 일이지 공동체인 조합원이 조합을 상대로 강팍하게 요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죠. 바로 그 때, 선생님께서 주신 글씨는 ‘모든 걸 신에 의지해서, 네가 인내하면서 해결해라.’ 하는 교훈으로 들렸어요. 그리고 임종 직전이었는데, “너 내가 병풍 하나 써 준 것 있냐?” 하고 물으시고 나서 보내면 잘 표구하라 하셨죠. 전에 상지대에서 전시회할 때 내 놓았던 글이죠. 삼조(三祖) 승찬(僧璨)의 게송인 신심명(信心銘)이었죠. ‘신심을 따로 놀게 하지 말고 일치되는 삶을 살아라’는 의미로 ‘내용 있는 삶을 살아라.’고 계도하시는 뜻으로 받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이라 힘은 좀 약하셨지만 소중한 글씨입니다. 여덟 폭 병풍으로, 기념관에 있는 정도 크기입니다. 글씨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 일은 서울 한살림을 낼 무렵 선생님께서 “박재일이가 잘돼야 된다.”시며 직접 쓰고 치신 작품을 골라 인사동 전시로 기금을 만들어 주시던 일입니다. 오늘날 한살림 운동은 하나의 성공 사례로서 선생님의 생명 운동에 포커스가 맞추어지는 핵심 고리가 되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한살림의 방향이 잘못 간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써주신 한살림의 휘호만으로도 선생님의 뜻은 알 수 있잖아요? 바로 그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생명력 말이에요. 땅 속에서 준동하며 흙을 풀어헤쳐 생명의 씨알이 싹을 틔울 길을 준비하는 지렁이의 덕을 닮은 일명 지렁이체, 얼마나 생기 넘치는 휘홉니까? 그래서 이걸 다른 스타일로 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어요. 물론 그들이야 깔끔하고 세련된 걸 생각했겠지만 말이에요. 그 생명력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를 통해서 소비자는 시장보다 싼 값에 좋은 먹거리를 공급받고, 또 생산자는 판로를 걱정하지 않고 안정되게 생산에 종사하는 그런 밑바닥으로부터의 ‘더불어. 함께’ 라는 삶의 공동체를 꾸려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거든요. 복잡한 유통 단계를 뛰어넘어 저렴해진 직거래를 통해 가급적 많은 소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운동으로 가야 하는데, 시중가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요. 이걸 원래의 정신으로 되돌려 바꿔보자는 것이 원주권 한살림 관계자들의 고민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 뿌리, 원래의 정신을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방식은 선생님을 잘 모시는 일이 아니죠. 한 살림 조합원이나 아끼는 분들의 비판 여론을 잘 수렴해서 본래 한살림 정신과 한살림이 일구어낸 성과를 더욱 발전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도시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직접 연결해서 도시민과 생산자가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누는 과정을 통해 삶의 질을 높여가는 진정한 공동체적 망을 구현해 나가야지요. 저는 그런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순전히 선생님께서 사람 만들어 주신 경우에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정말 선생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믿고 따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원주에 얼마나 많았는가를 생각하게 되요. 주변에서 빛을 보지 못하면서도 선생님을 모시는 것을 거의 숙명처럼 여기며 일을 했던 동지들, 이긍래 형, 신협의 박준길 전무, 최규택씨 등은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던 낮은 곳을 기면서 일한 대표라고 생각 되요. 선생님이 “이거 할래?” 하시면 “예.” 하고 따라다녔던 이런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얼마만큼의 뜻이라도 펴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늘 겸손하게, ‘더불어 함께 살자! 기어라, 살려고 하지 말아라!’ 하셨던 말씀이 오늘에서 더욱 절실히 들려오고 선생님이 더 보고 싶어지고 그러지요.
이성희 : 무위당 기념관과 준비중인 생명평화재단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이경국 : 우선 선생님을 기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회원 확충이 급선무에요. 그러려면 우선 선생님의 사회적 운동 사상이 생명 평화 사상으로 전환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책자나, 영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잘 알려야겠지요. 그래서 그 분의 사상을 많은 이들이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이분의 사상과 철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펴서 섬김을 받는 때가 됐을 때, 돈이 모아져서 생명 있는 재단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 분이 과연 훌륭하신 분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모이면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마음을 열고, 수많은 사람들이 만 원, 십만 원씩 지갑을 열 때 생명 평화 재단을 위한 재원도 확보될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나도 일조를 하겠지요.
김상범 : 장시간 소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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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의 사상과 협동운동의 기억
이경국 (전 신협중앙회 사무총장)
무위당 선생님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3.15부정선거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을 때 저는 대학을 다녔습니다. 원주에서도 재경 유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며 흥분의 도가니에 싸여 있을 때, 학생들은 방황하고 흥분된 젊음을 인도해 줄 지도자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 학생 대표 몇 사람이 무위당 선생님을 찾아뵌 후 공공시설 파괴와 방화를 멈추고 평화적 시위를 하게 되어 칭송을 받은 일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무위당 선생님과 제가 개인적인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후 무위당 선생님께서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입후보하셔서 제가 선거 돕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시골 마을 곳곳을 누비며 선생님을 국회로 보내자고 부르짖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성품이 워낙 청렴하셨기에 자동차 한 대 없이, 물론 돈도 없이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거운동에는 정성을 다해 몸으로 때우는 분들만 있었습니다. 저는 김영주 선생님과 한 달 가까이 숙식을 하면서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밤 12시 집에 돌아오면 사모님께서 계란 두 알을 목이 가라앉은 선생님과 제게 주시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선생님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참 배운 점이 많았습니다. 몸이 피곤하신 데도 아침 일찍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던 일, 매일 아침 부모님의 요강을 손수 비우고 우물가에서 씻으시던 일 등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던 모습,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동지들을 늘 따뜻하게 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이 분을 평생 선생님으로 섬기고 모시면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주 지역 협동운동의 출발
5.16쿠데타가 나고 선생님이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셨을 때, 저는 숨어살다가 자수해서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부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후 제대해 나오니까 선생님은 춘천교도소에서 풀려 나오셨습니다. 그후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되어 선생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원동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용협동조합 교육이 있다고 남으라고 하셔서 저도 다른 50여 분과 함께 그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67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위당 선생님 주관으로 서울에서 강사가 두 분 오셔서 교육이 진행되었습니다.
협동조합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해 교육을 받으면서 생소하기는 했지만 신선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5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로치데일 공정개척자 28명의 노동자가 협동운동을 시작하던 시절, 그리고 프랑스, 독일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이 기업의 착취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헤쳐나가며 함께 잘살아 가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농촌운동을 겸한 라이파이젠 신용조합, 도시의 슐체 델리취 신용조합, 그리고 20세기 캐나다, 미국의 신용조합 성공 사례를 듣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고 오신 메리 가별 수녀님이 1960년 5월 부산에서 33명의 조합원과 함께 3,400환을 모아 성가신협을 시작한 후 전국에 50개 조합이 설립된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무위당 선생님도 강의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조상들의 전통문화인 두레, 계, 품앗이 등 다양한 협동의 문화를 소개하시고 돈이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고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살려면 협동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더구나 이농현상이 점점 가속화되고 은행 문턱이 높아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일수놀이나 사채 시장에 매달려 허덕이는 중소상인을 위해서도 신용협동조합 조직을 키워내어 땀 흘려 노력하는 민중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무위당 선생님이 신협중앙회 감사로 취임하셔서 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지학순 주교님께서도 신협이 처음 시작되었던 부산에서 사목하신 적이 있어서 원주교구에 신협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무위당 선생님과 의견이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총회를 열어 무위당 선생님께서 이사장을 맡으시고 저희들은 조합원으로 참여하여 가입금, 출자금을 내고 원동성당에서 신협조직을 태동시켰습니다. 매주 미사 후 출자금 증좌운동을 펴 많은 분들이 가입하고 참여하면서 신협은 원활히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경제적 여건이 어렵고 삶이 각박하여 조합 자본금을 늘리는 것이 쉽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되어 무위당 선생님은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실무를 보던 분이 출자금을 몽땅 털어서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사장으로서 몇 십만 원이나 되는 돈을 책임져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되신 것입니다. 당시 그 액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위당 선생님은 주위 분들에게 돈을 꾸어 조합원의 피해를 막고 일을 조용히 수습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지도자로서 책임지는 선생님의 모습에 감격해 했습니다.
그후 선생님은 교회 안에서 조합을 하는 것보다 교회 밖에서 운동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시고, 지 주교님과 상의하셔서 당시 진광학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협동조합운동은 오로지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하셨습니다. 서울의 협동연구원에도 사람들을 파견하여 한 달간 교육을 받게 하여 강원도 전역에 신협운동을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선생님 둘째 동생인 장상순 선배가 자원봉사로 교육을 전담하는 일을 하면서 진광신협이 설립되고,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대성중고등학교 제자들과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밝음신협을 태동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신협과 지역사회개발 운동
원주를 비롯한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 신협운동이 확산되고 활기에 넘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협동운동의 필요성을 강의하시고, 시간을 쪼개어 현지에 가서 격려해 주시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1972년 남한강 유역에 엄청난 수해로 광산지역, 농촌지역, 어촌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받게 되자 지 주교님이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구호를 요청해서 많은 원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교구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구호를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공무원, 사회단체 등 많은 분들이 모여 수해지역 주민에게 어떤 방법으로 지원을 해야 보람도 있고 보다 나은 삶을 만들 수 있을까 의논하여 의견을 수렴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원조를 집행하기로 하여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 사업위원회가 설립되고, 김영주 선생님이 기획관리실장으로 취임하여 큰 일을 책임지게 됩니다.
여기서 김영주 선생님을 잠시 소개드리는 것이 무위당 선생님의 협동운동 이념, 철학, 사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19혁명 후 7.29선거 때 김영주 선생과 제가 선생님 댁에 1개월여 기거하였을 때, 저는 어렸고 부족한 점이 많아 두 분이 말씀 나누시던 것을 귀동냥 삼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인간의 삶을 위해 어떻게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지 이야기 나누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원래 김영주 선생님은 원주군청 공보실장을 거쳐 춘천시 공보실장으로 승진하셔서 훗날 군수, 시장, 도지사까지 공직에서 일하실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위당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춘천 가서 김영주 선생님 이삿짐을 싸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춘천 가신 지 얼마 안 된 때라 의아해 했더니 지 주교님 비서관으로 일하시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영주 선생님 사모님은 원주로 다시 이사 오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당시 김영주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교구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이 지 주교님과 의논하셔서 미래의 큰일을 위해 큰 나무를 미리 심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1973년부터 김영주 실장님과 함께 일을 하게 됩니다. 광산지역을 책임 맡아 그곳에서 청춘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광산에서 광부들과 손잡고 협동조합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협, 소비조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실천에 옮기고 그 광부들을 모시고 원주로 와서 1주일씩 정신교육, 협동운동 및 회계 교육을 지도하였습니다. 정신교육은 주로 무위당 선생님, 김영주 선생님, 지 주교님 특강으로 막장에서 내일이 없이 살아가는 그분들에게 희망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낭비벽 높은 광부들이 저축을 하고 적금을 들어 고향에 소도 사고 논밭도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원주 지역보다 두세 배나 비싼 공산품을 서울에서 직접 구입, 저렴한 가격으로 나눠 쓰는 일도 하게 됩니다.
고생도 많이 하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농촌, 광산의 사업과 운동의 기획을 광산에 출장 가서 실천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동료들과 토론하면서 그 문제점을 도출하고 토론하면서 다시 기획을 하여 실천에 옮기는 일을 반복하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무위당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은, 저희들이 회의할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현장의 소리를 들으시고, 며칠씩 회의가 계속되어도 자리를 뜨시는 법 없이 경청하시고는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방향을 제시하시고, 또 개별적으로도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던 점이었습니다.
협동운동의 열쇠, 인재 양성
그 이후 재해대책 사업위원회가 해체되고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무위당 선생님과 사회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신 김영주 선생님은 한 단계 뛰어넘는 협동의 문화를 사회 전체에 펼치는 일에 착수하십니다. 가톨릭농민회 운동의 지원과 인력 안배, 신협운동의 인력 배치, 농산물의 직거래를 위한 일본 생협 연수, 선진지역 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의식을 바꾸면서 지도자를 양성하십니다. 특별히 무위당 선생님은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부정부패 반대와 가톨릭 교회의 현장 참여를 통한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로 우리를 이끌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뒤에 계시면서 사람을 앞세우시는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1981년에는 저에게 신협 강원도연합회에 출마를 권하시고 회장에 당선되자 광산지역 신협을 15개로 늘리고 소비조합도 자리를 잡게 하는 데 뒷바라지를 해주셨습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화 운동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 사는 게 편리해지면, 협동조합이 사람보다 돈을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부단히 조합원 교육, 임직원 교육에 임해야 한다, 둘째 임원은 사회를 밝게 하려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명문대학을 나오거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은 봉사하기 힘들다, 셋째는 지도자는 편견이 없는 사람, 정치․종교․학력․지역을 뛰어넘어 누구나 어울리는 사람이 필요하다, 넷째는 협동조합 운동가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 강한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협동조합 지도자 교육 때마다 꼭 필요한 용도에 감사히 쓰여지는 돈이어야 회수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네, 신협의 창시자였던 라이파이젠이 처음 신협을 만들어서 10년 동안 운영하다가 문을 닫은 이유가 뭔지 아나? 바로 용도가 정확하지 않은 돈을 꿔줘서 그래, 그러니까 돈을 안 갚는 거야. 노름돈, 사채, 깡달라돈 등 나쁜 데 쓰려고 빌려간 사람들은 잘 갚지 않아. 그러니까 교육을 잘 해야 돼. 나도 원동성당에서 실패한 이유가 사람을 잘못 써서 그런 거 아니야.”
저는 강원도연합회에서 4년 일하고 1985년 중앙회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협은 지역별로 부패해서 인간이 아니라 돈 중심의 운영으로 병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특정 지역은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재무부로부터 마구잡이 인가를 얻어 조합을 방만하게 운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 전국 신협 지도자를 원주로 모아 잘못 가는 협동조합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일과 관련해서는, 첫째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씀, 둘째 제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말씀, 셋째 전체를 보는 눈, 협동의 이상과 현실의 조화,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보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새기게 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협동운동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습니다. 신협의 문제 해결도 교육을 담당하는 연수원에 훌륭한 분을 모시는 데 있다고 임원회의에서 결정하여 무위당 선생님이 추천하신 김영주 선생님을 신협 연수원 원장으로 모시게 됩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 기뻐하셨습니다. 김영주 선생님은 교육 프로그램을 철저히 개편, 조합원 방문교육, 임원 교육, 초급 중급 관리자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연수원의 일이 자리잡도록 노력하십니다.
1987년 사무총장이 공석이 되어 임원 전체회의에서 그 일을 맡아 달라고 하여 제가 중책을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은 신협 조직을 2단계에서 3단계로 바꾸어 도 연합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면서 독립성을 갖는 상향식의 협동조합 법안을 상정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 일을 가지고 선생님께 상의 드렸더니 한국 신협은 아직 이르다고 말씀하시면서 준비가 없는 조직은 실패한다고 단호하게 일의 추진을 막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이 저나 신협 지도자들로서는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무위당 선생님 말씀대로 3단계 조직으로 분화하지 않고 2단계 조직을 유지했더라면 IMF의 큰 진통을 덜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협동운동의 시대적 의미
1985년도에 사회개발위원회 구성원들이 퇴직하면서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원주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협은 이미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있어 자립기반이 형성되어 있지만, 한살림은 농민과 도시민이 직접 만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과 연대를 통해 건강한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길을 1980년 무렵부터 준비한 결실이었습니다. 박재일 회장님이 서울 제기동에서 작은 쌀가게를 세 얻어 시작한 운동이 이제 수만 명의 회원을 갖게 되고 전국에 나눔의 공동체, 땅을 살리는 먹을거리의 확장, 삶의 질을 높이는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협동의 선각자로서의 높은 이상을 실현한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무위당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일깨워 주셨던 협동의 문화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작은 부분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물질 중심의 현대 산업사회를 대신할 진정한 의미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초에서 1970년대까지는 6.25전쟁 후 경제적으로 너무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대에는 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협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하는 것이 협동운동의 시대적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농 현상이 심화되고 도시에 살려고 오는 분들이 많아서 농촌이 피폐된 시대에는, 농민과 도시민의 만남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하는 직거래운동, 먹을거리의 환경 개선 운동,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협동운동의 의미로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큰 뜻을 우리들이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겸손하게 반성하면서 협동운동을 시작하던 1960년대 초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재음미하고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가닥을 잡아나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협동운동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평소 말씀대로, 첫째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는 일, 둘째 교육을 부단히 지속성 있게 추진하는 일, 셋째 남과 북의 통일에 대비하여, 협동운동을 북녘 백성들에게 심어주면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주의의 모순에서 살 길을 찾아주는 일, 넷째 시대에 맞는 협동문화 개발을 꾸준히 하는 일, 다섯째 돈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돈은 수단이지 사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일……
저는 무위당 선생님 9주기 모임에서 몇 말씀 드리면서 협동운동을 사랑하시고 이 땅에 썩는 밀알들을 수없이 교육하신 무위당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젊은 지도자들이 이 운동을 잘 지켜나가도록 부탁 드립니다.
(이글은 2003년 5월 24일 무위당 선생님 9주기 추모행사 “문을 활짝 열고 밑바닥 놈들과 하나가 되어” 이야기 마당의 원고내용입니다. 이경국 선생님은 현재, 무위당 만인계 원주추진위원회 상임대표로 수고해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