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4강 - 4부(2012. 11. 12.)
答 李叅政 漢老 (一).
李 叅政 問書附(두 번째)
答 (二)
그리니까 “뭐냐?” 이 말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말하자면 어디 한정되지 않고, 고정되지도 아니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어디든지 한정시켜놓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요? 화두가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니까 이것도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번역을 해야 되는데요. 그러나 아무튼 의심만 제대로 들어가면 우리가 식당에 가도 그렇고, 절에 곳곳에 가도 “이 뭣꼬” 라고 하는 것이 많이 써 붙여놓고, 책도 “이 뭣꼬” 라고 하는 것이 많이 있긴 있더군요. 아무튼 제대로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긴 해요. 그러나 글을 가지고 논할 때는 또 정확하게 글을 이야기하다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是甚麽오? = 뭐냐?
鼓山(고산)이
釋然了悟(석연료오)호대, 확 퉁겨가지고 釋然히 了悟 = 깨달았다.
了心便亡(료심변망)하고, 了. 깨달은 마음마저도 곧 잊어버리고, 없어지고
唯微笑(유미소)하야, 오직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擧手搖曳而已(거수요예이이)어늘, 擧手 = 손을 들어서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서 흔들면서 가버린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 광경을 한번 그림으로 그려봐요.
雪峰曰(설봉왈)
子作道理耶(자작도리야)아? 자네가 도리를 지었는가?
鼓山이 復搖手曰(부요수왈), 설봉이 자네가 무슨 도리를 얻었느냐? 하니까 고산이 다시 손을 흔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和尙(화상)하 何道理之有(하도리지유)닛고?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뭘 도리를 지었느니 말았느니 그 따위 물음을 왜 묻습니까? 손을 썩~~ 흔들면서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대답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런 광경은 참 멋있지요.
雪峰(설봉)이 便休去(변휴거)하며,
설봉이 그만 그대로 그냥 쉬어 버렸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두 가지 사례가 여기까지이고, 또 한 가지 사례가
蒙山道明禪師가 趁盧行者하야 至大庾嶺하야 奪衣鉢이어늘
盧公이 擲於石上曰 此衣는 表信이라 可力爭耶아
任公將去하노라 明이 擧之不動커늘 乃曰 我는 求法이요
非爲衣鉢也니 願行者는 開示하소서
盧公曰 不思善不思惡하라 正當恁麽時하야 那箇是上座의
本來面目이어뇨
明이 當時大悟하야 通身汗流하며 泣淚作禮曰 上來密語密意外에
還更有意旨否잇가
盧公曰 我今爲汝說者는 卽非密意어니와 汝若返照自己面目하면
密意却在汝邊이니 我若說得인댄 卽不密也라하시니 以三尊宿의
三段因緣으로 較公於一笑中의 釋然컨댄 優劣이 如何오
請自斷看하라 還更別有奇特道理麽아
若更別有則却似不曾釋然也리라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
蒙山道明禪師(몽산도명선사)가
趁盧行者(진노행자)하야, 노행자를 쫓아가서
至大庾嶺(지대유령)하야 대유령에 이르러서 그리고
奪衣鉢(탈의발)이어늘, 衣鉢을 빼앗으려하니
盧公(노공)이 擲於石上曰(척어석상왈),
노공이 돌 위에다 옷하고 발우를 올려놔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此衣(차의)는 表信(표신)이라. 이 가사는 믿음을 표하는 것이다.
可力爭耶(가력쟁야)아? 힘으로서 가히 다툴 수 있겠는가?
任公將去(임공장거)하노라. 그대가 가져가는데 막지는 않으리라. 하니까
明이 擧之不動(거지부동)커늘, 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거늘,
그것이 돌에 붙어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이 분위기가 노행자가 비록 행자지만, 거기에 벌써 법으로ㆍ법력으로 압도당해 버렸는데, 그 돌 위에 던져놓은 가사와 발우가 그것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노행자의 법문에 압도당해가지고 그것 들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장군이었잖아요. 몽산 도명선사는 장군이었어요. 그러니까 남보다 빨리 여기까지 쫓아온 겁니다.
擧之不動. 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니, 압도당해가지고 차마 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乃曰 我(내왈 아)는 求法(구법)이요 非爲衣鉢也(비위의발야)니,
나는 법을 구하려는 것이지 衣鉢을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願行者(원행자)는 開示(개시)하소서.
원컨대 행자는 저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盧公이 曰(노공왈)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니
正當恁麽時(정당임마시)하야,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해서
那箇是上座(나개시상좌)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어뇨?
무엇이 그대의 본래의 면목이냐?
우리가 늘 선ㆍ악, 남ㆍ여, 노ㆍ소, 남ㆍ북, 동ㆍ서, 좌ㆍ우, 전부 상대적인 것으로 형성 되어있는 이 현실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지요. 전부 상대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상대적으로 되어있는 현실에 이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本來面目은 합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놓아버렸을 때, 상대적인 관계를 다 놓아서 不思善不思惡. 그랬을 때 무엇이 진정한 우리의 참 모습이냐? 무엇이 참 얼굴이냐? 무엇이 참 나냐? 전부 이것 아니면 저것인데, 말하자면 규정지어져 있지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규정지어져 있는데, 그 규정지어져 있는 것을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진정한 나의 참 모습.
참 사람은 무엇인가? 그러니 도명이라고 하는 참 순직한 장군출신의 蒙山道明禪師가,
明이 當時大悟(당시대오)하야, 그때 그만 크게 깨달았다.
通身汗流(통신한류)하며,
온 몸에서 땀이 그냥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泣淚作禮曰(읍루작례왈),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지어서 말하기를
上來密語密意外(상래밀어밀의외)에,
위로부터 내려온 密語密意. 비밀한 말과 비밀한 뜻 밖에
還更有意旨否(환갱유의지부)잇가?
또한 다시 다른 뜻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盧公이 曰, 노 행자 = 육조스님이 말하기를
我今爲汝說者(아금위여설자)는,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卽非密意(즉비밀의)어니와, 곧 비밀한 뜻이 아니지만,
汝若返照自己面目(여약반조자기면목)하면,
그대가 만약 자기의 본래면목을 返照 = 돌이켜 비춰본다면
密意가 却在汝邊(밀의각재여변)이니,
비밀한 뜻이, 비밀한 뜻이 도리어 그대에게 있다.
그렇지요. 그것은 정말 너무 분명한 사실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것이 드러낼 수도 없고, 보여 줄 수도 없고,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줄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ㆍ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참~~ 이 법문은요? 정말 깊이깊이 까지 접근한 그런 표현입니다. 汝若返照自己面目. 그대가 만약 자기 면목을 返照한다. 라고 한다면 그 비밀한 뜻이, 그래서 비밀한 뜻이 라고 한 겁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감추어서 비밀한 뜻이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경지ㆍ궁극적 경지. 인간 궁극적 경지이기 때문에 거기는 설명이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密意입니다. 却在汝邊이니, 그대에게 邊이니,
我若說得(아약설득)인댄, 내가 만약에 설명한다면
卽不密也(즉불밀야)라하시니, 그것은 이미 비밀한 것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설명하면 그것은 비밀이 아니지요.
以三尊宿(이삼존숙)의, 이, 세 어른들. 세 분의 어른들
三段因緣(삼단인연)으로, 세 가지 인연. 세 가지 인연으로
較公於一笑中(교공어일소중)에 釋然(석연)컨댄,
그대의 한번 웃는 가운데 석연해진 것하고 비교한다면
優劣(우열)이 何如(하여)오?
어느 것이 더 우수하고, 어느 것이 더 劣하냐?
請自斷看(청자단간)하라. 청컨대 스스로 판단해 봐라.
還更別有奇特道理麽(환갱별유기특도리마)아?
또한 다시 특별이 기특할 도리가 있는가?
若更別有卽(약갱별유즉) 만약 다시 특별이 있다면
却似不曾釋然也(각사부증석연야)리라.
일찍이 석연히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다.
但知作佛(단지작불)이언정 莫愁佛不解語(막수불불해어)어다.
참 좋은 말이지요. 다만 부처되기를 알지언정 부처되어서 말할 줄 모를까 염려하지 말라. 부처되어서 말할 줄 모를까 염려하지 말라.
옛날에 제가 즐겨 읽던 徒然草(도연초)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일본에 吉全(길전)이라고 하는 스님이 쓴, 한 500백 년 전 일본 스님이 쓴 책인데,
일본 교과서에도 지금도 사용되고 있고, 그 책 하나 연구해가지고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여러 수 10명됩니다. 거기에 보면 옛날 어떤 젊은 스님이,
-자기도 승려가 가지고 앞으로 뭘 할까하고 생각하다가 큰스님들 가만히 살펴보니까 법사가 참 근사해 보이거든요. 법문 초청하러 오는데, 말을 가지고 와서 말을 태우고 가지, 가면 또, 큰 행사 같은데 법문하니까 행사 치루고 나면 한바탕 거하게 잔치가 벌어지고 노래도 부르고, 거기서 최고 대접받지, 가만히 젊은 스님이 보니까 법사가 제일 좋아 보여요.
‘그래 나도 앞으로 법사 돼야 되겠다.’ 하고, 법사 되려면 말을 탈줄 알아야 되는데, 하고 말 타는 것부터 배우고, 허허허 법사가 되려면 노래도 한번 부를 줄 알아야 되는데 하고, 한 500백 년 전에는 일본에 어떤 종파인지는 몰라도 그런 풍토가 있었어요. 그 책에는 분명히 사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도 한 곡조 부를 줄 알아야 되는데 하고, 그래 노래 부르는 것 배우고, 말 타는 것 배우고, 그러다 보니까 법사 공부는 하나도 안 배운 겁니다. 하하하하하하 정작 법사 공부는 하나도 안 배웠어요.
허허허하하하하하하 여기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 라고 하는 말에 아주 딱 들어맞는 소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古來得道之士가 自己를 旣充足하고 推己之餘하야
應機接物에 如明鏡當臺하며 明珠在掌하야 胡來胡現하며
漢來漢現호대 非着意也라 若着意則有實法與人矣리라
公이 欲大法明하며 應機無滯인댄 但且仍舊언정 不必問人이니
久久하면 自點頭矣리라 臨行面稟之語를 請書於座右하라
此外에 別無說이니 縱有說이라도 於公分上에는 盡成剩語矣라
葛藤이 太多일새 姑置是事하노라
古來得道之士(고래득도지사)가, 옛날부터 도를 얻은 선비들은
自己(자기)를 旣充足(기충족)하고, 자기를 이미 충족하고
推己之餘(추기지여)하야, 자기의 그 나머지를 미루어서
應機接物(응기접물)에, 근기에 응하고 사람들을 接하는데
如明鏡當臺(여명경당대)하며,
밝은 거울을 거울 대에다 올려놓을 것 같으면 곳곳에서 그냥 다 비추는 겁니다. 갑이 오면 갑을 비추고 을이 오면 을을 비추고요. 비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겁니다. 거울이 거울 대에 걸려 지느냐 못 걸려 지느냐가 문제지요. 그리고 또
明珠在掌(명주재장)하야, 밝은 구슬이 내 손바닥에 옴에
胡來胡現(호래호현)하며, 호 나라 사람이 오면 호 나라 사람을 비추고,
漢來漢現(한래한현)호대, 한인이 오면 한인을 비추고, 오랑캐가 오든지 한인이 오든지 다 거기에 나타나게 돼있습니다.
非着意也(비착의야)라. 결코 마음 쓸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전혀 마음 쓰지 않고도 자연히 저절로 그렇게 된다.
若着意則有實法與人矣(약착의즉유실법여인의)리라.
거기다 뜻을 붙인다면 실법으로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뭐든지 자연스럽게 넘쳐서 흘러가게 되어있는 것이고, 꽉 차면 넘치게 되어있고, 넘치면 흘러가게 되어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인데,
公이 欲大法明(욕대법명)하며 應機無滯(응기무체)인댄
但且仍舊(단차잉구)언정 ←그냥 지나감
不必問人(불필문인)이니,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물을 것이 아니니,
久久(구구)하면 自點頭矣(자점두의)리라.
오래 오래하면 저절로 점두하게 될 것이다.
臨行面稟之語(임행면품지어)를,
떠날 때에 얼굴을 마주하고 들려준 말을
請書於座右(청서어좌우)하라.
청컨대 좌우에다가 써서 붙여두라 말입니다.
此外(차외)에
別無說(별무설)이니,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 떠날 때 일러준 말이 뭐지요? 두 번이나 나왔었지요? 처음에 주해서에도 제가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에본문에도 있었지요?(4강-3)
理則頓悟라 乘悟幷消어니와 事非頓除라 因次第盡이라.
(이즉돈오 승오병소 사비돈제 인차제진) 참 유명한 말입니다. 이치로는 다 된 것 같지요? 그러나 事面으로는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理와 事를,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아니하는 면을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고 병행할 줄 알아야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此外에 別無說이니 縱有說(종유설)이라도
於公分上(어공분상)에는, 그대의 分上에는
盡成剩語矣(진성잉어의)라. 모두 다 남는다. 필요 없는 말이 될 것이다.
葛藤(갈등)이 太多(태다)일새. 이리저리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을 세.
姑置是事(고치시사)하노라. 이쯤에서 그만 두노라.
또 이참정의 問書附가 또 하나 붙었습니다.
우리가 모처럼 운문암에서 공부를 하든지, 공부가 좋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가면서 공부를 하든지, 참 이런 훌륭한 조사의 가르침을 앞에 놓고,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 소중한 시간인데요. 이제 얼마 안 남고, 책은 아직도 10분의 1도 안 넘어갔고... 생각하면 ??????
又 (李 叅政 問書附)
邴이 比蒙誨答하사와 備悉深旨호이다 邴이 自有驗者三이니
一은 事無逆順히 隨緣卽應호대 不留胸中이요
二는 宿習濃厚를 不加排遣하야도 自爾輕微요
三은 古人公案에 舊所茫然을 時復瞥地호니 此非自昧者니다
前書에 大法未明之語는 盖恐得少爲足하야 當擴而充之언정
豈別求勝解耶릿가 淨除現流도 理則不無라 敢不銘佩릿가
邴(병)이 比蒙誨答(비몽회답)하사와,
지난 날, 比자는 지난 날, 誨答 = 가르치신 답을 입었다. 입으니 = 받으니
備悉深旨(비실심지)호이다. 받고 깊은 뜻을 갖추어서 다 알았습니다.
이때 悉자는 알았다 이 말입니다. 備悉 = 갖추어서 알았습니다.
邴(병)이 自有驗者三(자유험자삼)이니,
내가 스스로 공부의 효험이 있는 것이 세 가지나 된다.
一은
事無逆順(사무역순)히 隨緣卽應(수연즉응)호대
不留胸中(불유흉중)이요.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간에,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나, 내 마음에 달콤한 것 = 順하는 것이나 간에, 그런 것 관계없이 隨緣卽應이라. 인연을 따라서 곧 응해요. 사람 살다보면 하루 종일 친구 만나고 소임 만나고 하듯이, 마음에 드는 일만 있습니까? 특히 신도들 많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더 그렇지요. 참~~ 안 왔으면 싶은 사람이 있는데도 ‘왜 또 왔는가?’ 싶기도 하고... 하하하하하하 왔으면 싶은 사람은 ‘왜? 안 오는가?’ 싶기도 하고... 그것이 다 事無逆順이라. 일에 대해서 거슬리는 일이나 순하는 일이나 간에 분별없이 隨緣卽應이라. 인연 따라서 다 그대로 응해준다. 거울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는 하듯이요. 隨緣 = 인연 따라서 곧 인연에 맞춰요. 흉중에 남겨 두지 않아요. 不留胸中. 내 마음에 다 머물러 두지 않는다. 또 두 번째는
二는
宿習濃厚(숙습농후)를, 숙세에 익힌 그 습기가 아주 농후해요. 그것을
不加排遺(불가배견)하야도, 가히 힘써서 물리치지 않더라도
自爾輕微(자이경미)요. 아~ 참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요.
봄에 눈 녹듯이 스르르~~ 시간이 지나면 응달에 있던 얼음도 어느새 스르르~~ 다 녹아버렸어요. 自爾輕微요. 저절로 輕微해져요. 세 번째는
三은
古人公案(고인공안)에 舊所茫然(구소망연)을,
옛날에는 고인들의 공안이 무슨 소린지 도대체 몰랐는데, 아득한 것을
時復瞥地(시부별지)호니, 때에 다시 문득 돌이켜서 보니, 그 말입니다.
此非自昧者(차비자매자)니다. 이것은 스스로 미혹하지 않음이라.
“다 알게 되더라.” 이 말이지요.
前書(전서)에 大法未明之語(대법미명지어)는,
지난 편지에 큰 법을 아직 밝히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蓋恐得少僞足(개공득소위족)하야,
그대가 得少僞足 = 작은 것을 얻고 만족을 얻을까 염려해서
當擴而充之(당확이충지)언정,
마땅히 확대시키고 또, 거기다 더 채울지언정,
擴而充之라는 말이 유교 말인데, 참 좋은 말이지요. 자기 공부를 자꾸 확대시켜가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꾸 채워야 돼요. 더 넓히고 더 채우고ㆍ넓히고 채우고, 공부는 그래야 됩니다. 계속 끊임없이 안목을 넓혀가고 거기다 채우고ㆍ넓히고 채우고, 그렇게 할지언정
岩別求勝解耶(기별구승해야)릿가?
어찌 따로 수승한 이해를 구했겠습니까?
그 말에 대해서 대혜스님이 뭐라고 한 마디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을 제가 得少僞足할까봐 제 자신을 경계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淨除現流(정제현류)도 理則不無(이즉불무)라
敢不銘佩(감불명패)릿가? 淨除現流 = 現流를 깨끗이 제거 하는 것도,
現流는 일종의 망상인데요. 自心現行流注하는 煩惱(자심현행류주번뇌)그랬습니다.←(주해) 내 마음에서 지금 흘러가는 그 번뇌. 理則不無 = 이치로써는 없지 않아요. 완전히 제거 하는 것, 淨除되니까 번뇌가 없다 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캄캄한 법당에 불을 딱 켜는 그 순간, 어둠이 싹 사라졌다. 틀림없는 사실이거든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事面으로는 또 그것이 그렇게 일관성이 없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로는 틀림없습니다. 성냥을 탁 켜는 그 순간 성냥하나지만, 그 넓은 법당의 어둠이 싹 사라져버립니다. 理則不無니, 이치는 없지 아니하나, 敢不銘佩릿가? 감히 명심해서 지우지 않을 일이 있겠습니까? 꼭 명심하겠습니다.
理則頓悟라 乘悟幷消어니와 事非頓除라 因次第盡이라. 하는 그 말입니다. 이참정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한마디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일관성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答 (二)
信後에 益增瞻仰하노라 不識커라 日來에 隨緣放曠하야
如意自在否아 四威儀中에 不爲塵勞의 所勝否아
寤寐二邊에 得一如否아 於仍舊處에 無走作否아
於生死心이 不相續否아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
公이 旣一笑에 豁開正眼하야 消息頓亡하니 得力不得力은
如人이 飮水에 冷煖을 自知矣니라 然이나 日用之間에
當依黃面老子所言하야 刳其正性하며 除其助因하며
違其現業이니 此乃了事漢의 無方便中에 眞方便이며
無修證中에 眞修證이며 無取捨中에 眞取捨也니라
古德이 云 皮膚脫落盡이라도 唯一眞實在하며 又如栴檀繁柯가
脫落盡이라도 唯眞栴檀在라하니
斯違現業除助因刳正性之極致也라 公은 試思之하라 如此說話도
於了事漢分上에는 大似一柄臘月扇子어니와 恐南地에 寒暄이
不常이라 也少不得일새니 一笑하노라
答, 대혜스님 답입니다.
信後(신후)에 益增瞻仰(익증첨앙)하노라.
편지를 받은 뒤에 더욱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不識(불식)커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不識커라 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번역을 하니까 딱 들어맞더라고요. “알지 못해라.” 하면 뭘 어떤 말을 알지 못해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來(일래)에, 요즘에
隨緣放曠(수연방광)하야,
인연 따라서 자유로워져서ㆍ인연 따라 자유로워서
如意自在否(여의자재부)아? 뜻대로 자재하십니까?
四威儀中(사위의중)에
不爲塵勞(불위진노)의 所勝否(소승부)아?
塵勞의 이기는 바가 되지 않습니까? 塵勞에 이기는 바라고 했지만,
塵勞에 끌리는 바가 되지 않습니까?
寤寐二邊(오매이변)에 得一如否(득일여부)아? 일여합니까?
於仍舊處(어잉구처)에, 옛 대로, 옛 모습대로 그냥 그대로 사는데
無走作否(무주작부)아?
꼭 그렇게 하려고 일부러 달려가서 짓는 것은 없습니까?
於生死心(어생사심)이 不相續否(불상속부)아?
생사심은 상속하지 않습니까?
但盡凡情(단진범정)이언정 別無聖解(별무성해)니라.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但盡凡情이언정. 이것 우리가 禪畵ㆍ禪書ㆍ선차(선화 선서 禪茶). 禪자를 많이 써 붙이잖아요. 심지어 선어록까지요. 또 춤추는 것도 禪舞(선무)라고 그래요. ???????? 그런 禪자가 들어갔을 때의 禪書나 禪畵나 禪茶(선다)나 그것을 정리 한 것, 설명한 것이, 선의 정신이 한 마디로 뭐냐? 但盡凡情이 別無聖解, 이 여덟 자로 정리를 합니다. 범부라고, 범부로서의 어떤 감정. 범부로서의 감정은 없어요. 그렇다고 성스러운 이해도 없어요. 別無聖입니다. 아주 내가 뛰어났다. 잘났다. 아주 명품이다. 고급스럽다 하는 그런 생각마저도 뚝 떨어진 겁니다. 그렇다고 천박하게 범인의 어떤 감정이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성인에도 치우치지 않고, 범부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런 경지. 그것이 선서니 선차니 선화니 선무니 하는 것을 이것으로써 정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억해 두면 필요할 겁니다.
公이 旣一笑(기일소)에, 그대가 이미 한바탕 웃음에
豁開正眼(활개정안)하야, 바른 눈을 활짝 뜨고
消息이 頓亡(소식돈망)하니,
消息頓亡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은 消는 뭡니까? 消는 줄어드는 것이고, 息은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래 “고향 소식이 어떻더냐?” 라고 하면, 말하자면 “고향의 집에 잘되더냐? 잘못 되더냐? 농사가 잘되더냐? 잘못 됐느냐?” 본래 이런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우리의 어떤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소식이라고 표현을 하고, 그 다음에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소식이라고 하고요. 다양하게 쓰이지요.
消息이 몰록 없어졌으니
得力不得力(득력부득력)은, 힘을 얻고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煖(냉난)을 自知矣(자지의)니라.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冷煖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음이라.
然(연)이나, 그러나
日用之間(일용지간)에, 일상생활 속에서
當依黃面老子所言(당의황면노자소언)하야,
마땅히 黃面老子의 말한 바를 의지해서
刳其正性(고기정성)하며 除其助因(제기조인)하며,
正性을 깎아버리고, 刳其正性이라는 것은 婬欲(음욕)이 正性이라고 주해에 그렇게 해놨네요. 除其助因은 도와주는 因을 제거한다. 그 외에 助因은 뭐지요? 婬欲을 도와주는 조건들. 그런 모든 조건들이 다 助因에 해당됩니다.
違其現業(위기현업)이니,
現業 = 바로 현재에 우리의 10악 번뇌. 이러한 것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그 現業은 除其助因이라.
此乃了事漢(차내료사한)의 無方便中(무방편중)에
眞方便(진방편)이라. 방편이 없는 가운데 참다운 방편이며
無修證中(무수증중)에 眞修證(진수증)이며,
修證이 없는 가운데 참다운 修證이며
無取捨中(무취사중)에 眞取捨也(진취사야)니라.
無取가 없는 가운데 참다운 無取라. 참~~ 이것 필요한 말이고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도를 통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
닦아야 할 것ㆍ조심해야 할 것ㆍ해서는 안 될 것은 안하고, 당연히 좋은 일은 억지로라도 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刳其正性하고 除其助因하며 違其現業이라.
이것은 了上. 일 다 마친 사람. 확철히 깨달은 사람들의 방편 문 가운데 참다운 방편이고, 修證.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가운데 진짜로 닦는 것이 되고, 取捨가 없는 가운데 진짜로 取捨가 있느니라. 하~~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古德(고덕)이
云(운), 말하기를 皮膚脫落盡(피부탈락진)이라도,
皮膚脫落盡 = 온갖 번뇌가 다 떨어져 나갔다. 이런 말입니다.
온갖 어떤 번뇌도, 온갖 악업도ㆍ번뇌도 다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나서
唯一眞實在(유일진실재)하며,
한 진실만이 남아있다. 이렇게까지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又如栴檀繁柯(우여전단번가)가, 전단나무 번거로운 가지가
脫落盡이라도, 다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唯眞栴檀在(유진전단재)라하니, 오직 참다운 전단은 그대로 남아 있다.
껍질 다 벗겨지고 잔가지 다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원 둥치는 있다 이 말입니다.
斯違現業除助因刳正性之極致也(사위현업제조인고정성지극지야)라.
이것이 수행의 진면목이다. 수행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것이다.
公은 試思之(시사지)하라. 시험 삼아 생각하고 생각하라.
如此說話(여차설화)도, 이와 같은 이야기도
於了事漢分上(어료사한분상)에는, 일을 마친 사람의 分上에는
大似一柄臘月扇子(대사일병납월선자)어니와,
한 자루의 섣달 부채와 같을 것이다. 섣달 부채도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여기 뭐라고요?
恐南地(공남지)에 寒暄(한훤)이 不常(부상)이라.
남쪽 땅에는 춥고 더운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울 때도 추운 날이 있고, 추울 때도 더운 날이 있어요. 그러니까 부채는 항상 상비해 둬야지요.
그와 같이 일상생활의 수행. 6바라밀 닦고, 10악을 끊고, 10선을 닦고 하는 그런 어떤 수행을 항상 곁에 두고 臘月扇子와 같이 생각하고 지낸다. 이런 말입니다. 이것이 참 수행자의 이런 태도가 가장 아주 정상적인 어떤 본보기가 되지요. 이 분은, 이참정은 깨달은 사람의 대표라고 그랬지요. 깨달은 사람에게 더 채찍을 가하는 어떤 선지식의 모습. 이런 가르침은 참 만고의 표본입니다. 서두에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이 서장은 선불교의 교과서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참~~ 우리 불교를 이해하고, 정말 조사스님들의 아주 진수를 이해하는데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는 그런 내용이다. 이런 표현을 했었습니다. 寒暄不常이라.
也少不得(야소부득)일새니, 또한 없앨 례야 없앨 수 없다.
부채도 상비해 둬야 된다. 말입니다.
一笑(일소)하노라. 하노라 라고 했는데, 한바탕 웃으리다.
一笑하노라. 한바탕 웃으리라. 우습지요?
‘내 편지가 좀 웃기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첫댓글 _()()()_
[무엇이 그대의 본래의 면목이냐..상대적인 관계를 다 놓아서 不思善不思惡 그랬을 때 무엇이 진정한 우리의 참 모습이냐? 전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규정지어져 있는데 그 규정지어져 있는 것을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진정한 나의 참 모습..]
[上來密語密意外에 還更有意旨否잇가? 我今爲汝說者는 卽非密意어니와 汝若返照自己面目하면 密意가 却在汝邊이니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위로부터 내려온 비밀한 말과 비밀한 뜻 밖에 또한 다시 다른 뜻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비밀한 뜻이 아니지만 그대가 만약 자기의 본래면목을 돌이켜 비춰본다면 비밀한 뜻이 도리어 그대에게 있으니
다만 부처되기를 알지언정 부처되어서 말할 줄 모를까 염려하지 말라][理則頓悟라 乘悟幷消어니와 事非頓除라 因次第盡이라...理와 事를,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아니하는 면을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고 병행할 줄 알아야 된다]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고맙습니다.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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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取捨가 없는 가운데 진짜로 取捨가 있느니라..._()()()_
옮겨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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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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