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광치(新光峙)
姜 宗 弘
“요놈은 달개비…, 요놈은 바랑이, 요놈은… 환삼덩굴….”
나는 폭 180cm 두둑, 깊이 50cm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인삼포 잡초를 뽑으며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중얼거렸다. 인삼포 두둑 앞면을 150cm 간격으로 180cm 길이 전주(前柱)를, 뒷면을 역시 150cm 간격으로 150cm 길이 후주(後柱)를 세우고, 전후주(前後柱)에 동서(東西)로 도리를 연결하여 종(縱)으로 연목(서까래)을 걸치고 고정시켜 검정 차광막을 씌운 삼막(蔘幕)에 이런저런 잡초가 많았다. 처음 잡초 이름을 외우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 싹을 냈다. 토양 속에 예비 씨앗이 있어 다시 싹을 내는ㄴ 것 같았다. 입하, 소만, 망종, 말복까지 기세가 대단하던 잡초가 처서가 지나면서 세가 수그러들더니 추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기가 꺽인 모습이었다. 이제 사실상 잡초를 맬 필요는 없지만 아직 마저 매지 못한 인삼포 몇 칸을 마저 매고 금년 제초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었다.
“요놈은 소리쟁이….”
나는 인삼포 한쪽 구석에서 소리쟁이 하나를 발견했다. 금년 들어 8차례나 잡초를 매면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이상했다. 나는 소리쟁이를 뿌리까지 잘라냈다. 소리쟁이, 고양이 밥, 쑥, 쇠뜨기 등 여러해살이 잡초는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나고, 성장이 빠르고 생명력이 강하여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작물의 적(敵)이었다. 잡초를 두고 어떤 농사도 지을 수 없어 무ㆍ배추농사는 이랑을 검정비닐로 씌우고, 벼농사 등은 선택적 제초제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삼밭은 오직 사람 손으로 매야하는데 그 인건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부녀자들을 쓴다고 해도 일당 6만 원에 점심, 간식 비 등을 포함하여 7만 원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 작업량이 인삼포 6칸, 80칸을 한번 매려면 100만 원정도, 한 달에 두 번이니 200만원, 4개월 전체 인건비가 800만 원을 웃돌았다. 그러나 차광막 그늘에서 하는 인삼밭 제초는 중노동도 아니어서 나 같은 노인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2주마다 한 번씩 맨다면 80칸 전체를 혼자서 맬 수 있었다. 굳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세상의 행, 불행은 마음먹기에 따fms 것이었다.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하기가 너무고 불안하여 현지 인부 임실댁 한 사람만 고용하여 길을 가듯, 산을 오르듯 매기로 했다.
나는 처음 잡초에 강아지풀, 냉이 등 몇몇 밖에 몰랐지만 매년 4월부터 인삼밭 잡초를 매며 임실댁에게 배워 지금은 방가지똥ㆍ진득풀ㆍ비름ㆍ쇠비름ㆍ비노리ㆍ메꽃ㆍ쇠뜨기ㆍ고양이밥ㆍ소리쟁이 등 온갖 잡초들을 알게 되었다. 임실댁은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서 그런지 모르는 잡초가 없었다.
여름철은 새벽 5시부터 삼포에 들어가 잡초를 맸다. 이른 아침이라 기온이 선선하여 능률도 좋았다. 5월 초에는 인삼 꽃대도 따야 했다. 인삼은 5월 초순에 꽃대를 내어 중순에 꽃을 피우고 7월 중순이면 빨간 열매를 다는데 종자용 인삼 씨는 4년 근이라야 하기 때문에 3년 근 미만은 꽃을 따서 인삼을 튼실하게 키워야 했다. 이렇게 10월까지 잡초를 매고 추분이 지나면 서울로 가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가족이라야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여 아내가 모두였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삼막에서 임실댁이
“사장님, 사장님-. 안 들려유?”
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저 불렀어요?”
하고 물었다. 임실댁은
“그럼, 이곳에 또 누가 있어요?”
하고 물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天川面) 와룡리(臥龍里), 진안군 백운면(白雲面) 노촌리(蘆村里) 경계 호남정맥(湖南正脈) 신광치(新光峙)-. 어느 쪽이든 막창 마을에서 6킬로미터 이상을 오르는 해발 750미터 고갯마루에 달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얼마후 임실댁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사장님, 정말 그렇게 잘 안 들려요?”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여
“미안합니다. 잡초 이름을 외우다가 그만….”
하고 대답했다.
“잡초 이름 그것 외어서 뭘 하시렵니까?”
“꼭 뭘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미안합니다.”
그러자 임실댁이
“미안할 것은 없고요. 사장님, 어서 밖에 나가보셔유.”
하고 말했다.
“밖에?”
“네, 조금 전 경적소리가 났어요.”
“경적소리?”
“네. 누가 온 것 같아유.”
노촌리에서 이곳까지 임도가 있어 고랭지 배추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경운기로 오르내리고 이장(里長) 길원남씨가 4륜구동 화물차로 임실댁을 이곳 삼막에 출퇴근 시키느라 다닐 뿐 다른 사람이 찾아올 리가 없었다. 딱 한번 지난 4월 장수소방서에서 신광사 화재예방 훈련으로 찾아와 농업용 쓰레기 소각을 조심하라고 했다.
누가 왔다면 나가봐야 했다. 그러나 허리에 감각이 없고 두 발이 몹시 저려 삼막 전주(前柱)를 붙들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데 임실댁이
“에구-. 사장님! 제가 뭐랬어요? 허리운동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참견했다.
나는 2009년 6월 정년퇴직을 했다. 당시 나는 62세라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반드시 생계 때문은 아니고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맡겨진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지만 이제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이고 싶었다. 축산, 양봉, 양식 등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TV에서 퇴직 후 불고기 식당을 차려 연매출 수 천 만원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직장에 다닐 때 주식시장을 기웃거린 덕분에 작은 사업 정도는 할 수도 있었지만 매일 얽매이는 일은 질색이었다. 한동안 집에서만 궁싯거리다가 아내와 다투기도 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았다.
직장에 근무할 때 주말마다 등산을 다닌 덕분에 아내와 충돌도 적었고 서울 근교의 산들은 물론 전국의 유명하다는 산은 모두 다니고, 남한 쪽 백두대간, 4개의 정맥 등을 종주(縱走)할 수 있었다. 대간(大幹)ㆍ정맥(正脈)ㆍ기맥(岐脈) 등의 종주는 단 한 번도 물길에도 끊어지지 않는 산줄기를 일정 구간씩 이어가는 산행으로 한 번 종주에 1년 또는 2년이 소요되기도 했다. 종주 산행은 산의 기(氣)를 받으며, 산의 숨소리, 울림을 들으며, 여러 가지 초목과 바위들, 산을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백두대간 종주 때문에 설악산 신선봉(神仙峰), 상봉(上峰), 황철봉(黃凸峰) 등의 바위너덜, 고루포기산 피덕령, 태백 ‘귀네미마을’, ‘피재’ 고랭지 농장 등을 만나고 호남정맥 종주 때문에 전라도 곳곳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백두대간 종주 중에 만난 ‘국유림대부지’라는 팻말이 생각났다. 고랭지 배추농장 피덕령, ‘귀네미 마을’ 등도 일종의 국유림 대부지였다. 피덕령은 1965년 군사정부가 강릉시 왕산면 백두대간 고루포기산 기슭 60만여 평 산지를 개간하여 부근 화전민들을 옮긴 곳으로 여름철 서늘한 기온을 이용하여 고랭지채소, 씨감자 등을 생산하고 있었고, ‘귀네미 마을’은 1985년 태백ㆍ삼척 지역의 식수공급을 위한 광동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민을 옮긴 대규모 고랭지 채소농장이었다.
나는 산림청 국유림관리소에 국유림대부 문제를 문의했다. 국유림관리소는 ‘국유림관리에 관한 법률 제21조’ 규정에 의거하여 민간인도 국유림을 대부받아 경작, 목축, 산나물과 약초 배, 스키장 등을 할 수 있다는 통보를 했다. 다만 해당지역에 2년 전부터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고, 마을 작목반 단위로 신청을 받는데 대부 면적은 개인당 3ha, 임대료는 공시지가의 2~5%라고 했다.
나는 국유림에 인삼을 재배할까 했다. 인삼은 여름철 기온이 서늘하고 배수가 좋은 사양토 표토에 오염되지 않은 숙전(宿田)이 좋다고 했다. 인삼(人蔘)은 연작피해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농약을 살포해야 하는데 충청도 금산(錦山) 등의 기존 경작자들이 새로운 재배지를 찾아 전라북도 진안(鎭安), 경상북도 상주(尙州)ㆍ문경(聞慶), 충청도 괴산(槐山)ㆍ음성(陰城)까지 진출하고, 심지어는 비무장지대까지 넘보고 있었다. 인삼은 생산 주기가 6년이라 자금 회전이 늦은 편이지만 반년만 잡초를 매고 반년 동안 쉬는 매력이 있었다. 또 산지에 재배하면 인삼의 연작 피해도 없고, 차가 왕래하지 않는 산지라 인삼밭을 통째로 훔쳐가는 차떼기 도둑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삼재배 후보지로 2001년 종주한 호남정맥의 신광치(身光峙), 전주 남쪽 전주-광양 고속국도 황산재 터널 위쪽 440m봉, 되목날봉(450m) 등을 생각했다.
호남정맥은 장수ㆍ함양 경계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서쪽 장수(長水) 장안산(長安山)으로 분기하여 전라도를 좌도와 우도로 가르며 꼬불꼬불 463.7킬로를 이어가 남해 바닷가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에서 끝을 맺는 전라도 산줄기였다.
호남정맥은 당시 남부지방 특유의 활엽수와 철쭉, 가시덤불 때문에 등산로가 전혀 없었고, 활엽수에 시야가 가려져 엉뚱한 지능을 들어 헤매는 고약한 산줄기였다. 그러나 팔공산-신광치 구간은 수목도 그렇게 울창하지 않고 시야 또한 좋아 팔공산에서 북쪽으로 <역(逆) 산3백리(山三百里), 역(逆) 수3백리(水三百里)> 조망이 펼쳐졌다. 수분치(水分峙)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 물이 진안군, 금산군, 영동군, 옥천군까지 300 리를 북상하고, 추풍령을 지난 백두대간 산줄기가 삼도봉, 대덕산, 덕유산을 거쳐 장안산, 팔공산까지 3백리를 남하하는 조망이었다.
당시 신광치(新光峙) 안부는 고랭지 배추가 물결치고, 미처 배추를 심지 못한 공터에 빨간 열매를 단 키 높이 여뀌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또 안부 중앙을 가로 지르는 농로 옆에 함석지붕 건물 하나가 있었다. 그날 하산하는 길에 천천면 신광마을의 신광사(新光寺)도 만났다. 절 안내판은 신라 경문왕 5년(865년) 대낭혜(大朗慧) 무염(無染)이 창건하고, 조선 헌종 15년(1849년) 장수 현감 조능하(趙能夏)가 중창했다고 적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 대웅전의 점판암 너새지붕이 인상적이었다. 신광사 주지스님은 일행에게 각각 차 한 잔씩을 권하며 무염국사가 ‘새로운 빛’을 염원하여 신광사를 세운 것이라며 무염국사는 신광사 창건 18년 전 보령에 구산선문 성주사(聖住寺)를, 진해에 성흥사(聖興寺) 등을 세웠는데 성인으로 추앙받아 절 이름에 모두 ‘성(聖)’자가 붙고, 신광사 또한 진산 이름이 ‘성(聖)’자가 붙은 성수산(聖壽山)이라 했다.
퇴직 2년 후 나는 인삼막 설치를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장수군 천천면 와룡리 신광치를 찾았다. 당시 신광치는 전주 부근 황산재 터널 위쪽 440m봉, 되목날봉(450m) 일대 정맥과 함께 개간이 되어 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신광치는 우선 인삼의 주산지 금산 인접이었다. 다시 찾아간 와룡리에서 신광치 배추농사를 서쪽 백운면 노촌리 사람들이 짓는다는 것을 알고 다시 신광치 서쪽 백운면 노촌리를 찾았다. 노촌리는 대대로 벼, 고추, 깨, 콩 농사를 짓는 마을로 갈대가 유난히 많아 노촌리라 부른다는데 여느 시골처럼 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머리카락이 허연 노인들뿐이었다.
노촌리 이장 길원남씨는 10여 년 전 이곳에 귀농한 젊은이 분이었다. 이장은 마침 신광치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 그만 두게 되어 임대가 가능하다며 나의 귀촌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신광치에 차가 다니지 않아 불편하지만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신의 화물차로 날라 주겠다며 마을 공동취사 담당 임실댁을 인삼농장 인부로 추천해 주었다. 노촌리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마을회관에서 공동취사를 하고, 주민들에게 회관 2층에서 컴퓨터ㆍ인터넷을 가르치는 것이 공동체 마을 같았다.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 아내에게 시골로 내려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펄쩍 뛰었다. 하필 왜 어려운 농사를 지으려 하느냐, 농촌은 자신의 체질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은 코앞에 병원이 지천으로 있어 몸이 아파고 걱정이 없는데 시골에 병원다운 병원이 있느냐고 했다. 나는 아내의 뜻을 꺾을 수 업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혼자 신광치로 내려가 이장 길원남씨의 협조로 신광치 안부를 경운기로 깊게 갈아 퇴비를 넣었다. 배추 농사를 짓던 땅이라 그렇게 화학비료 성분을 없애야 했다. 낡은 함석지붕 건물도 고치고 지붕 위에 태양광 전기시설도 했다. 실내에 방충망도 설치하고 관리사 주변에 오가피, 오미자, 앵두나무 등을 심고 텃밭도 만들었다. 모두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하다 보니 힘은 들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즐겁기만 했다. 외로움은 고집으로, 의지로 극복했다.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고 큰돈을 벌어 아내 앞에 내놓을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하지만 인삼농사가 반드시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아니고 다만 뭔가 할 일을 갖게 되는ㄴ 의미였다. 농사는 분명 수천 년을 이어온 자연과의 싸움, 아니 나 자신과의 인내심 싸움이지만 언젠가 이곳으로 올 아내를 생각하면 신이 났다. 그 2년 후 인삼막을 설치하고 인삼모종을 심었다. 아내가 곁에 있어만 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모든 고통들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삼막 바깥은 바야흐로 9월 하순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높아진 하늘에 고추잠자리 몇 마리가 낮게 날고, 500미터 전방 관리사 앞에 빨간 헬멧을 쓴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가끔씩 와서 진안군지 「월랑(月郞) 소식」 「인삼조합 ‘회보’」, ‘전기세 고지서’ 등을 휭 던지고 가버리는 집배원이었다. 관리사 뒤쪽의 하얀 억새를 배경으로 서 있는 집배원 모습이 한 장의 그림엽서 같았다. 나는 일부러 기다려 준 집배원이 미안하여 반갑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집배원은
“이동출씨 본인 맞습니까?”
하고 본인 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안면이 있는 집배원이 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집배원은 내게 핸드폰 비슷한 기기와 송곳 펜을 내밀며
“등기우편이라 서명을 하셔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등기?”
“네. 법원에서 보낸 것입니다.”
“법원?”
나는 의아했다. 법원은 나와 전혀 무관한 곳이었다. 집배원은 서명을 받자마자 곧 오토바이 폭음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집배원이 떠난 후 나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〇보내는 곳 : 서울가정법원[서울시 서초구 강남대로 193(양재동 25-3). 지하철 3호선ㆍ신분당선 양재역 9번 출구 (우) 137-889]
〇받는 사람 : 전라북도 무주군 백운면 노촌리 미재 신광치 농장 이동출
〇조사기일 소환장 : 사건번호 2016가합2333. 이혼 및 위자료 청구
〇원고 : 김영자
〇피고 : 이동출
위 사건에 관하여 조사할 사항이 있으니 2016. 10. 17. 10:00, 당 법원 15호 법정에 출석하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나를 겁주려고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 같았다. 아내에 큰돈을 쥐어 주려고 시작한 인삼농사 때문에 아내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삼수확은 아직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든 이혼은 막야 했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수구 꼴통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제 추분이 지났으니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이때 등 뒤쪽에서
“사장님. 여태껏 여기 계셨어요? 점심시간이에요. 오늘 점심은 제가 김밥을 싸왔으니 함께 드시지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임실댁이었다. 사방 시야는 오직 첩첩한 산, 산뿐이었다. 41메
(끝)
|
첫댓글 전라도니까 임실댁이 음식 솜씨는 좋겠씁니다.
어느 황혼이혼
강선생 특유의 섬세한 배경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등기우편물에 기재된, 세목적인 내용공개가 씁쓸한 라스트 씬으로 여운을 남겼습니다 ./ 박무형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