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예우의 제 45회 정기 공연으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구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간사지' 는 극작가 최송림의 작품으로 중견 연출가 황남진의 연출로 한국 문화
예술 위원회의 2005 창작 활성화 사전지원 작품이기도하다.
작품의 무대는 경남 고성군 거산리 앞바다의 갯벌로 속칭 속싯개로 불리우는 곳이다.
한 고장의 삶의 터전인 간사지. 그 갯벌 땅이 개발이란 외부의 압력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현지민의 동조하에 매몰 되고 파괴 되어 간다. 그로 인해 지역민의 갈등은
고조되고 그들의 삶의 방편인 전통의 맥 조차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땅을 고수하고 고향을 지키려는 소시민들은 절규의 몸부림을 치고 투쟁하며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몸부림치기도 한다.
시골 갯벌을 중심으로 사랑과 분열, 이기와 파괴, 삶과 죽음에 이르는 서사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으로 대학로 연극가에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정통 연극이라 하겠다.
정체불명의 요상한 연극이 판을 치는 대학로에서 정통 리얼리즘의 깃발을 나부끼며
세월따라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네 정서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작가의 말대로 연극 '간사지' 에는 지역 농요 및 고성 오광대 탈춤을 통해 지역민의
진한 정서를 어우르고 있다.
갯가의 점방 '속싯개'에 오랜 세월 고향땅을 밟지 못하다가 당숙(허월당)의 장례로 인해
문상을 겸해 고향을 찾은 종갑(강태기 분)이 찾아들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종갑과 사춘기 시절 함께 오광대 탈춤놀이를 하며 사랑을 나누던 숙자(김희정 분)는
종갑이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며 집안이 모두 이사하고 그 후 학생운동으로 인해 수배자가
되어 쫒기는신세로 고향을 등지고 있는 사이 결혼하여 광일(이경영 분)이란 아들까지
낳았지만 의처증이 심한 남편에게 시달리다 결국 이혼하고 낚시점같은 작은 점방 속싯개를
운영하며 생활하여 왔던 것이다.
한편 종갑은 수배 생활 속에 급기야는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 선산 대신에 화장터 뒷산에
뿌린 일로 당숙인 허월당(공호석 분)의 진노를 사서 그간 고향땅을 밟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패륜아로 매도했던 당숙의 죽음을 맞아 상주가 되어 고향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극의 전개 시점에 갯가에 버려진 채 방치된 핏덩이가 발견 되며 처녀의 유산흔적인
핏덩이는 극 전반에 흐르는 오해와 갈등, 사건의 중요 모티브가 된다.
'간사지'는 실상 허종갑의 가족사와 얽혀 이야기가 전개 된다. 선대인 감골댁은 전형적인
농어촌의 아낙으로 고기잡이배가 전복되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농요를 벗하며 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고 결국 병을 얻어 앓다가 남편이 있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한다. 종갑의 아버지는 그렇게도 처절한 땅을 팔아 먹고 그 돈으로
노름판을 전전하다 결국 다 날리고 고향을 떠났다가 생을 마치고 결국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지 못한 것이다.
정군수와 더불어 종갑의 삼총사로 불리웠던 죽마고우 이상락(박정순 분)은 종갑의
수배시절 공무원 신분인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 종갑을 외면했던 친구로 지금은 귀농하여
난치병을 감추고 열심히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다.
종갑,상락은 오랜만의 만남에 숙자와 더불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 서로간의 오해와
갈등을 풀어간다.
그러나 상락은 극 중 숙자의 아들 광일과 사랑하는 연인인 허미옥(임은연 분)을 강제로
범하고 결국 그로 인해 허미옥이 유산하여 핏덩이를 버리게 되며 허월당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핏덩이를 수습하려는 허도치(이상용 분)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미옥은 정신을 놓는 등
일파 만파의 소용돌이 속에 상락 자신 또한 책임감에 스스로 목을 매게 되고 사건은 점점
혼란 속에 빠진다.
한탄과 넋두리 속에 종갑은 향토색 짙은 '월이제'란 행사의 책임자로 내정 되고 사람들
은 '월이제'를 통해 함께 어우러지며 간사지 너머의 황금 들판 바다를 바라보며 신명나게
오광대 탈춤판을 벌인다.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는 월이제는 끝이 난다.
이제 간사지의 암흑은 끝이 나는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속단에도 불구 하고 작가는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는 작품의 끝자락에서도 가슴 답답하리 만큼 사건의 연속성을
이어가고자 한다. 최숙자의 집에는 무당집 냄새 자욱한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그는 때론
침묵처럼, 때론 아우성 처럼 가끔은 희망처럼 몸부림 친다.
간사지란 작품을 통해 작가는 시종일관 한 고장의 사람들의 자신들의 전통을 잇기 위한
투쟁, 인연의 아름 다움, 고향의 향토색 짙은 정서를 무대화 시키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하여 연출자는 밀폐된 지역사회의 사랑과 증오, 해원과 죽음의 대서사시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와 몸짓, 삶의 현장에서 발하는 빛의
모습을 통해서 절규하는 인간 본성의 모습을 사실적인 몸부림으로 표출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정통 리얼리즘 연극을 펼쳤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주장에 쉬이 동조하기엔 몇가지 부족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땅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몸부림, 고향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원 주제라면 더욱 확실하게 그 점을 추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밀폐된 지역사회의 사랑
그리고 증오라는 주제와의 이원화된 이야기는 극의 전개에 있어 자주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흐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연극은 지극히 설명적이다. 고성오광대놀이를 통해 상황의 전개,
해설을 꾀하고자한 면도 없지 않으나 전반적인 흐름은 진부하리만큼 설명적이다. 또한 사실
주의에 기초를 하여 무대화했다손 치더라도 희곡을 무대화시킴에 있어 어쩡정한
정통양식으로 표출하다 보니 주제의 전달이 모호하다. 작가가 그동안 보여 주었던 일련의
작품들의 범주에 속하는 무거운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하는 간사지는 작가가 요구하는
메시지를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니 정제되거나 절제되는 연극적 표출의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예컨데 프롤로그 부분의 과다한 시간 분배와 에필로그 부분의 간결하지 못한 욕심으로
관객들은 대체 연극의 시작과 끝이 어딜까 혼돈하고 있다. 심지어는 주인공이 마지막
메세지를 거듭하여 외쳐도 관객들은 무감각하다. 아니 무감각 하다기 보단 극의 마무리를
알지 못하고 있음이라. 작품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장면에서조차 관객의 호응을
끌어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분명 이 연극은 작가나 연출자의 욕심만큼 극적 요소를
창출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이다. 연극의 생명은 메시지의 전달에 있다. 그것이 작가의 몫이
건, 연출자의 몫이건, 아님 관객의 몫이건 공감대적인 메세지의 전달에 실패한다면 그 작품
은 이미 무대위에서 죽은 연극이라함이 지나친 독설인지? 한편으로 이러한 극적 요소나
메세지를 방해하는 요소로 앞서 언급한 두세대간에 걸친 사랑, 애정 표출에 있어서의
애매모호성에 있다. 밀폐된 지역에서의 사랑이란 말대로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표출하기
위해 과연 어떠한 표현양식이 등장했는지 반문하고 싶다. 어설플 정도로 약하게 그려지고
있다 하겠다.
특히 대극장 무대에서 무대와 조명 또 음악이란 훌륭한 쟝르를 동원하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려낼 수도 있을 법인데 그러한 표현에는 너무나 인색하다. 반대로 그저 사람
좋을 것 같은 이상락이 갑자기 돌변하여 허미옥을 강제로 범하는 장면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이상락이 갑자기 미친것인가? 아님 원래부터 색욕이 강한 남정네인가? 그도 아니면
순간적으로 허미옥의 미모나 흩으러진 옷차림에 넋이 나가 돌발적인 욕정이 생긴 것인가?
도대체 무엇일까..그러한 충분한 설명, 표현 없이 모티브가 되는 중요한 부분을 그렸다면
단지 연극을 이어가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장면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출가는 극의 표현에 있어 생각의 자유로움에 한계가 있다. 시대를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시.공간적 표출에 있어 인색하거나 한계성이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다음으로 극의 전개를 이끄는 고성 오광대 놀이패의 무대가 극에 있어서의 스토리 부분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같은 농요나 춤사위는 극의 보조 역활의
범주를 넘어서는 안된다. 특히 뮤지컬이나 악극이 아니고 사실주의 연극을 표출하는 데 있어
스토리의 전개를 적절하게 이어주는 수단으로 그같은 놀음이 절제되고 잘 분배되었음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대극장 무대는 무대 미술이 생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간사지의 미술은 최악이다. 물론 열악한
우리 연극계의 예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현실만을 탓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가 아닐런지. 적은 예산으로 효과적 미술을 표출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함도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이다. 둑방의 다리를 마감처리도 하지 않아 합판의 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셋트 등은 좋은 연극을 접하고자 하는 관객의 발길을 돌리는 원인이 됨을
명심해야 할 점이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의 연기적인 면이다. 오랜 연극 활동과 기초가 탄탄한 배우들로 구성되어
비교적 좋은 연기들을 보여 주었다. 일부 배우의 연기가 조화미를 가져오는 데 약간은 표현
양식에서 튀어 보인다거나 대극장 무대에서의 조금은 과장된 모션 등이 부족함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자신들의 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극 일정의 끝부분이어서 많이들 지친탓인지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느낌이다. 대극장에서
육성으로만 연기하다 보면 탄탄한 발성 기초와 체력이 유지 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몇몇 장면에서 일부 배우의 에너지가 떨어져 높은 소리의 대사 전달에 문제점을
드러 냈고 배우가 힘들어 하다 보니 관객 또한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몇가지 점만 보완 된다면 좋은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확신 한다.
요즘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최송림 작가가 오랜만에 대극장용 사실주의 희곡을 선보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끊임 없이 희곡을 선보이는 작가의 작품에서 아쉬운 점인 극적요소와 표현
양식의 현대화라는 숙제를 푼다면 그의 작품이 좀더 재미있게 관객에게 어필하리라 믿는다.
결론적으로 우리 연극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간사지'도 좀 더 절제되고 압축된 작품
으로 재 작업화 되어 중극장 이하의 무대에서 새롭게 선보인다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본다.
비록 연극의 성격이 리얼리즘에 기초한 사실주의 서사적 쟝르의 범주일 지라도 표현 기법에
있어 새로운 해석을 마련하고 젊은(나이의 젊음이 아닌 사고의 젊음) 감각의 연출력을 동원
한다면 분명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오랜만의 대극장 연극을 보면서 꺼져가는 연극에 대한 의지를 다시금 불태울 수 있음은
연극 이외의 수확이라 하겠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답니다.
함께한 '무유사랑' 회원들께 즐거웠던 마음을 전하며-
때론 작품의 비평에 있어 관객의 주관적인 면이 작가, 연출자,그리고 스탭, 연기자의 노고에
누를 끼치거나 그 분들의 의욕을 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 송구스런 마음이며 단지
아마추어 연극인의 관객평으로 너그러이 양해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초대해 주신 극작가 최송림 선생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작품활동에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