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란 용어(헬라어로는 뮈토스)는 신약성경에 5회 나오는데(딤전 1:4;4:7; 딤후
4:4; 딛 1:14; 벧후 1:16) 그중 4회는 목회서신에 나온다. 이상의 여려 경우들에 있어
서 신화란 진리의 진실성과는 구별되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의미 한다(예컨데 딤후 4:4
에는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신화>를 좇으리라"). 이것은 신화에 대한
고전적인(헬라적이고 로마적인)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핀다르(Pindar)시대
이후로 이 용어는 허구적인(헛된) 이야기(말)라는 의미를 지녀왔는데 이것은 역사적이
고도 참된 이야기(말)를 가리키는 로고스라는 용어의 의미와 반대가 된다<이와 같은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이 요한복음 1:1,14에서 그리스도께 로고스라는 칭호를 사
용한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으며, 바울이 자기가 선포한 복음을 로고스란 용어로써
흔히 표현한 의미(이유)를 잘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Socrates)도 어떤
특정한 이야기를 "헛된 꾸민 이야기(신화)가 아니고 참된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Plato, Timaeus, 26E). 신약성격시대에도 이 신화란 용어는 이러한 뜻으로 사용되었
다. 이처럼 필로(Philo)도 "허탄한 이야기(신화) 대신에 참된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했으며(Exsecr. 162) 위(僞) 아리스테아스(Pseudo-Aristeas)도 부사형을
사용하여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중에는 "뜻이 없거나 허탄하게(뮈토도스) 기록된 말씀
이 하나도 없다"고 확언했다(Letters of Aristeas to Philocrates, 168). 영어에 있어
서도 신화적(mythical)이라는 단어는 원래 전설적인(fabulous), 허탄한(fantastic),
역사적으로 실증되지 않은(historically unauthentic)이라는 단어들과 동의어이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 신화라는 용어는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정
도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인데, 그는 신약성경의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를 주장하여 신약성경에 제시된 기독교의 메시지에서 신화적인 요
소들을 제거하려고 메시지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불트만은 오늘
날 우리들에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과학 이전 시대의 비과학적인 세계관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Kerygma and Myth, S.P.C.K.,London, 1935을 보라). 이처럼
불트만이 성경에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한 이유는 그가 이 세
계는 외계로부터의 어떠한 개입(간섭)도 있을 수 없고 오직 고정된 자연법칙들에 의해
서만 움직이는 세계라는 봉쇄된 세계관(view of a closed world)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 맥콰리(John Macquarrie)는 "불트만이 반 세기 전에 유행했던 거짓되고 비
과학적인 봉쇄된 우주관(pesudo-scientific view of a closed universe)에 사로잡혀
있다"고 적절히 비판했다(An Existentialist Theology, S.C.M.Press. London, 1955.
p.168);그리고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불트만이 우리는 자연법칙들의 상호연관
성을 의심케 하는 신화적인 요소들을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도 전적으로 지지받기 어려운 개념을 (신화적인 것과 비신화적인 것에 대한) 판단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불평(비난)했다. ('창조와 구속의 교리' Dogmatics, 2권,Lut
-terworth Press, London, 1952, p.190)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 즉 케리그마는 그것이 성경의 신
화적 세계관 속에서 제시되는 한 현인들에게는 신뢰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성경의 신화적 세계관은 기독교 복음전파에 있어서 참된 거침돌(스칸달론)로
간주되어 있지 않은 거침돌(장애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분명
한 신화적 요소들(그의 가정임)을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선재
(先在), 그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무죄성(無罪性), 그리스도의 죽
음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사항들을 충족시켜드리는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이
라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중에 재림하심, 이 세상 사
람들의 최후의 심판, 영적인 존재들의 실재, 성령님의 인격과 능력, 삼위일체 교리,
원죄의 교리, 죄의 결과로서 죽음에 대한 교리, 성격에 기적적인 사건들로 서명된 모
든 기사들, 불트만은 이러한 철저한 비신화화(非神話化)의 과정을 통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독교를 도대체 믿을 수 없는 것인 양 배우 과격하게 비판하고 있음에 틀림없
다. 그리고 불트만은 예수님을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로 하락시켰으며(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l,II.S.C.M.Press, London, 1955,pp.46,75 참조), 그리스도 사
건을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보았다(Kerygma and Myth, p.19). 또한 불트만은 기독교의 참된 거침
돌(장애물)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구속(球贖)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
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인간(죽을 인간)을 선택하신 것과 연관시키고, 우리
의 구속을 하나님께서 전혀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한(어떤) 사건-이 사
건은 본질적으로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사건들에 속한 것임-을 선택하신 것과 연관시키
는 것.(Kerygma and Myth, p.43)
불트만의 이상과 같은 상대주의(相對主義-그리스도의 사건이나 우리의 구속을 절대
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것=역자 주)는 주관주의(主觀主義)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사건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의미는 그것이 단순히 주관적인 의미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데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나 부활 사건은 과거에 일
어난 역사적인(자료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말씀(복음) 전파를 믿음으로
써 주관적으로 체험되어야 할 종말론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Kerygma and Myth, pp.
41,209;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Vol. I,S.C.M.Press, London, 1952, p305).
사실 나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현재적인 나의 체험
일 뿐이고 어떤 과거의 사건이나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기독
교 메시지는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인 구조 안에 압축되어 있다. 역사적 사건들과 종
말론적 사건들은 순전히 주관주의적인 입장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의 신성(神性)에 대한 선언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교리적 선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나에 대한(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실존적인 가치 판단으로 해석되
어져야한다는 것이다(즉, 나에게 있어서 신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역자 주). 그리하여 예컨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나를
도우실 수 있다"라는 객관적인 공언은 "나를 도우시는 것 보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의 아들이시다"라는 즈관적인 가치 판단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Essays에 나오
는 '세계교회 협회의 기독론적 고백'(The Christological Confes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S.C.M.Press, London, 1955,p.280). 한마디로 말해서 진리는 바
로 주관적 가치 판단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가장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실존적이
고 현재적인 것임에 틀림없으며 주관적인 신앙적 응답을 필요로 하는 것임에 틀림없지
만, 그것이 필요로 하는 신앙이란 객관적인 사실(진리)에 대한 믿음(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객관적 진리(사실성)-이 객관적 진리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를 통하여 인간 세계의 모든 일 들을 자유롭고 초자연적으로 개입(간여)하시는 것임
-를 빼버린다면, 그러한 기독교는 마치 묶은 고리에서 풀려난 풍선처럼 제멋대로 떠다
니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근거없는 이념에 불과한 것이다. 브루너(Brunner)는 비판 하
기를, "불트만(Bultmann)은 세계관의 문제를 신화의 문제와 혼동했으며, 기독교를 현
대인의 인생관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했고, 기독교를 실존주의 철학의 모든 개념들에 적
응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써 그는 신약성경의 메시지에서 여러가지
개념들-즉, 신약성경의 메시지에 반드시 속해 있어야 할 개념이면서도 현대인의 세계
관과 전혀 모순되지는 않지만 어떤 이상주의적 철학의 자기 이해(自己理解)와는 모순
되고, 특히 그러한 이상주의적 철학의 모든 편견들과는 모순되는 개념들-을 제거해 버
렸다; 한편 불트만은 그의 역사관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에프 하팍스(단번에), 즉 그리
스도 사건 유일회성(唯一回性)에 대한 의의를 연속적 역사속의 한 사건(an Event: 여
러 사건들 중의 한사건)으로 간주하는 큰 과오를 범하였다"고 하였다.(Dogmatics,
Vol, I.pp.267-268)
그런데 브루너(Brunner)는 "불트만(Bultmann)의 비신화화 이론(과정)에 있어서 문
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지 신학적인 중심 과제들인 계시의 문제, 구원사(救瑗史)의 문
제, 그리고 하나님을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라고
갈파하였지만(Dogmatics, Voll.II.p.186), "성경에 나오는 기적에 관한 기사들과 여러
가지 이적에 관한 기록들은 역사적인 사실들이라기보다는 신화를 창출하려는 노력(상
상)의 결과로 이루어진(기록된)것"이라고 비판하여 마지 않았다(Ibid, p.192). 다시
말해서 브루너는 신약성경엔 제거되어야 할 신화적 요소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의견
(판단)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신화화를 추진하는 사람으로서 불트만과
같이 아주 과격하게(급진적으로) 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교리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교리(브루너는 역사적인 예수와 부활
하신 그리스도를 구분함으로써 비성경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승천의 교리, 마지막 날의 일반적 부활의 교리 등을 거부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불트만과 똑같은 입장-물론 그가 불트만과는 달리 이러한 교리들이 원래 케리그마에
속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기는 하지만-에 서 있
었음을 알 수 있다(Ibid,pp.352 이하). 그러나 불트만의 입장을 비판하는 브루너의 주
장 가운데에도 현대 과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브루너는 강조하기
를, "나는 성경의 세계관이 현대 과학의 세계관과 절대적으로 모순된다고 너무 지나치
게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현대 과학의 결과로 보아 우리는
성경의 창조 기사에 나타난 공간과 시간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교리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난 천지창조의 기사와 낙원
에 관한 기사를 신화들로 간주하여 배격했던 것이다(Ibid,p.74참조). 이와 같이 그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고대의 성경 기자들이나 모든 사도들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
지 않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기록된 분명히 신화적인 내용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기사(언급)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확언했다(Eternal hope,
Lutterworth. Press, London, 1594). 그러나 역(逆)으로 말해서(!), 현대 과학(근대
과학)에 의해서 신화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성경의 세계관 중 어떤 내용들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에 위해서 존경스러운(인정되어야 할)것들로 다시 판명될 수도 있다. 예
컨대 인간 역사의 돌연적 종말에 관한 성경의 교리는 근래에까지는 단지 기독교의 묵
시적 공상으로밖에 간주되지 않았으나 오늘날엔 가장 정확한 과학적 진리들(계산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결과 브루너는 "인간 역사의 돌연적 종말과 같은 어떤 성경적
교리들은 더 이상 과학적 지식을 익힌 현대인들로서는 버려야 할 불합리한 교리(이론,
지식)가 아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교육받은 현대인들은 이제 비신화화 작
업을 시작했던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비신화화를 배제하는 작업<반(反)-비신화
화(非神話化)작업:de-demythologization)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 바르트(Karl Barth)-그는 불트만이나 브루너가 채택했던 전제들과 비슷한 전제
들로써 성경의 권위 문제를 다루었음-는 신화(myth)와 전설(saga 혹은 legend)을 구분
했다. 그러나 브루너는 말하기를 "바르트가 의미하는 전설은 불트만과 자신(브루너)이
의미하는 신화와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Dogmatics, Vol.p.74).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전설이란 비록 그것의 일반적 역사성(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의
역사적 진실성)이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성경의 본질적 증언과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는
것이고, 신화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위장되엇기 때문에 성
경의 본질적 증언과 필연적으로 모순되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 기록들
중 특별한(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내용의 역사성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부인하였으며, 그러한 특별한 내용들을
인간 세계의 영역으로(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구적인 진리의 영역으로) 격하시켰다.
(Church Dogmatics).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Vol, I. part I. T and T.
Clark, Edinburgh, 1936,pp.375이하). 그러나 이 문제는 원칙상 용어 정의(定義)에 관
한 것이다. 즉 불트만과 브루너가 신화(myth)란 용어로써 표현한 것을 바르트는 전설
(legend)이란 용어로써도 표현하였던 것이다.
신화에 관한 다른 하나의 정의-우리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것이 사실상 상징(상징적 표현)과 같다는 것이며, 인간의 교유한 언어로써는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루너는 주장하
기를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신화(Myth, 앞에서 정의된 의미의 신화)와 분리될 수 없
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의 진리들은 반드시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으로(an-
thropomorphic)(즉, 인간적인 언어로)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불트만은 이
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신화적인 언급들의 특성이라고 했다-"성경에는 하나님에 관
한 사항들이 인간적인 방법(표현)으로 언급되어 있다"(Dogmatics, Vol, II,p.268). 바
로 이러한 의미에서 불트만은 설명하기를, "신화적 표현이란 저 세상의 일들을 이 세
상의 용어들로써, 신적인 일들을 인간 생활의 용어들로써 표현하기 위해 상징(imagery
)을 사용한 것"이하로 했다(Kerygmz and Myth, p.10).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신화를
성경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인간이(신화적 표현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써는 하나님께
관한 일들을 말할 수 잇는 방법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용어가 아니고서는 자신
에 관한 일들을 인간에게 전달하실 수 잇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한 일들이 이 세상의 용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상징적인 의미로(즉, 신화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의 용어는 하나님께 관한 일들을 사실적(여자적)으로 표현하기에 언제나 부적절한 것
이 결코 아니다. 참으로 신약성경에는 그러한 의미의 상징적 표현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여자적(如字的)으로 표현된 것들도 많이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승
천 사건은 사실적인 현상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즉, 그리스도의 승천이 그것을 관찰하
는 인간의 눈에 비친 모습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항목에서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신화의 개념은 개혁주의적(改革主義的) 성경교리에 위
배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그리스도 사건들, 그리스도께 관한 말씀들)
는 로고스(The Logos: 진실되고, 역사적 사실인 말씀)이시지 어떤 뮈토스(허탄하고,
꾸민 이야기로서의 신화)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적 학자들의 손에 의해서 비신화
화(非神話化)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