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척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작은 외숙
최중호
대전현충원으로 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용사들의 묘비를 찾았다. 먼저 장교 제2 묘역의 211 묘판에 계시는 고 윤영하 소령의 묘를 찾아 참배한 후, 사병 제2 묘역으로 가 다섯 용사의 묘도 참배를 했다. 그 후 천안함 46용사의 묘역도 참배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해 보니 작은 외숙도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래 작은 외숙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외사촌 누나에게 전화를 해 묘역을 물어보았다. 외사촌 누나는 장교 제2 묘역만 알뿐 묘판과 묘비의 번호는 모르고 있었다. 가끔 찾아가는 곳이지만 묘비가 있는 위치만 알고 있다 하였다. 참으로 난감했다. 대전현충원에 가 묘판과 묘비의 번호를 모르고 묘비를 찾는 것은, 큰 아파트 단지에서 동·호수를 모르고 집을 찾는 것과 같다.
한동안 고민하다가 대전현충원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마침 그곳에는 안장된 분의 이름만 입력하면 묘역과 묘판 그리고 묘비의 번호까지 안내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곳에서 작은 외숙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다.
‘육군 소령 신동규’ 장교 제2 묘역의 211 묘판에 묘비는 4555호였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일까? 211 묘판이라면 내가 오늘 찾아갔던 고 윤영하 소령의 묘비가 있던 곳이 아닌가? 고 윤영하 소령의 묘비가 4376호이니까 바로 그 옆에 작은 외숙의 묘비가 있었는데 찾아뵙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참으로 송구스러웠다.
그날 밤, 내일 작은 외숙의 묘를 참배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설레 밤잠을 설쳤다.
이튿날 새벽 까치 우는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묘소에 가져갈 간단한 제수를 준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대전현충원 근처에서 반쯤 핀 장미 한 다발을 샀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덜 피운 인생의 꽃을 활짝 피우시라는 생각에서 그리하였다.
대전현충원의 장교 제2 묘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묘비를 찾으려는데 소나무 숲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집에선 반가운 손을 맞으러 간다 해서 까치가 울었는데, 이곳에선 까마귀가 울다니……. 까마귀는 저승을 오가는 사자(使者)라고 한다. 작은 외숙께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나는 작은 외숙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외숙의 묘비를 보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는 항상 작은 외숙을 그리워하며, 살아생전에 작은 외숙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내 동생이 살아있다면 지금쯤 높은 자리 하나는 하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늘 작은 외숙의 전사를 아쉬워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생각이 내게로 전이된 것일까? 마치 어머니가 그리워하던 작은 외숙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흘리는 눈물인 것 같다.
작은 외숙의 묘비를 보았다. 앞면에는 ‘육군 소령 신동규의 묘’라 새겨져 있고 뒷면엔 4555란 묘비 번호와 함께, ‘1951년 1월 1일 파주에서 전사’라고 새겨져 있다.
대전현충원의 기록에 의하면 작은 외숙은 ‘육군 제1사단에서 복무했으며, 낙동강 방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0년 10월 평양탈환전투에 참전하였으나,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의 신정 공세로 작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경기도 파주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전공으로 인해 전사하기 전에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대전현충원에서는 2013년 1월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작은 외숙의 묘는 본래 야트막한 외갓집 뒷산에 모셔져 있었다. 후손으로는 딸이 하나 있는데 큰 외숙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여 작은 외숙의 제사를 모셔 왔다. 하지만 작은 외숙의 딸인 외사촌 누나는 그것이 좀 어색했던지 자신이 아버지 제사를 모시겠다고 했다. 출가외인이라지만 작은 외숙에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외사촌 누나가 살아있을 때는 작은 외숙의 제사를 잘 모실 수 있지만, 사후에는 자식들이 외조부의 제사를 잘 모실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 작은 외숙을 대전현충원으로 모시게 된다면 자손들이 자주 찾지 못하더라도 국가에서 관리를 해주기 때문에 좋을 것 같았다.
외사촌 누나에게 전화를 해 “작은 외숙을 대전현충원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외사촌 누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년 후 작은 외숙을 대전현충원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외숙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작은 외숙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지금의 전진 부대에서 복무를 하셨다. 그 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국군이 후퇴할 때 작은 외숙의 고향에선 좌익세력의 사람들이 득세하였다. 그때 외갓집에도 시련이 닥쳐왔다. 그들은 작은 외숙이 국군의 장교라는 이유로 큰 외숙을 데려가 처형을 하였다. 큰 외숙의 사망 소식을 작은 외숙도 들었다. 그래 국군이 북진할 때 큰 외숙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은 외숙이 잠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전시이라서 그랬던지 작은 외숙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말을 타고 고향으로 오셨다”고 하셨다. 큰 외숙의 억울한 죽음에 작은 외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그 화를 이기지 못해 허공을 향해 권총을 세 발 쏜 후 분한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그 길로 다시 북진을 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께서 보신 작은 외숙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지 얼마 후, 작은 외숙의 전사 소식과 함께 유해가 고향 집에 도착했다.
외할머니는 작은 외숙이 전사해 한 줌의 유해로 돌아와 외갓집 뒷산에 묻혔지만, 작은 외숙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가끔 점집을 찾아 가 아들의 행방을 묻곤 하셨다. 아마 그때 무당이 “살아있다”는 말을 했던가 보다. 그러한 탓인지 어머니도 그렇게 씩씩하고 대장부답던 작은 외숙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으셨다. 전쟁 중 포로가 된 동생이 북녘땅 어느 곳엔가 살아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작은 외숙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외할머니가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왜 작은 외숙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전사했다는 절망보다 막연하게나마 살아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큰 슬픔을 잊으려 하셨는지 모른다.
묘비를 손으로 어루만질 때마다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이 자리가 내가 작은 외숙을 처음 만나는 자리다. 준비해 간 제수를 올리고 향불을 피웠다. 그리고 술 한 잔을 따른 후 큰 절로 인사를 올렸다.
작은 외숙의 묘비는 고 윤영하 소령의 묘비에서 불과 7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제 장교 제2 묘역에 와서 고 윤영하 소령의 묘만 참배하고 돌아갔을 때, 지척의 거리에 계셨던 작은 외숙께서는 얼마나 야속하셨을까? 작은 외숙께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도 같이 올렸다.
작은 외숙이 경기도 파주 전투에서 전사하신 지 63년이 지났다. 이제 작은 외숙은 그렇게 작은 외숙을 그리워하시던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저 세상에서 만나,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계실 것 같다. 또한, 못난 생질도 왔다 갔다는 말씀도 하셨을까?
* 장교 제2 묘역 211묘판에 있던 윤영하 소령의 묘비와 사병 제2 묘역에 있던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한상국, 박동혁의 묘비는 2015년 9월 21일 장사병 제4 묘역 413묘판의 합동묘역으로 옮겼다.
(2014. 육군.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