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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분석
슈퍼바이저: 김순초 교수님
발표일: 10월17일
발표자: 김명선
1.친가
1)할아버지
할아버지가 9세경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처녀로시집와3형제낳음)밑에서 자람.할아버지가 할머니와 결혼하여 아버지를 가진 상태에서 재산에 욕심있던 계모에게 누명(할아버지가 계모를 좋아한다)받고
본가에서 쫓겨남.
집안이 부유하여 특별한 벌이 없이 서당훈장으로 소일하며 살다가 무일푼으로 쫓겨난 할아버진 경제적 능력
없이 집에서 한량으로 지내시다 40세에 중풍을 앓기 시작해서 46세에 돌아가심.키가 크고 인물이 좋았다
2)할머니
학자집안애서 태어나 정략결혼으로 시집옴.첫날밤 신랑이 잘생겨서 좋았다고 말씀하곤 했다.
인물은 없지만 똑똑해서 예쁘다는 칭찬을 시아버지께 많이 들었다함.신혼초까지 부유하게 살다가
무일푼으로 쫓겨난 후 남편 대신 떡장사,그릇(사기)장사,생선장사,박물장사등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짐.
장사하고 돌아오면 모르는 여자가 밥하고 어린 고모를 씻겨 할아버지 옆에서 같이 자고있는게 맨날 이 었 다고 말하신게 생각남.
큰아들인 아버지를 남편 같이 의지하고 사랑하셨으며 엄마를 미워하셔 고부 갈등이 심했고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 날 무척 예뻐하셨다.내가 고교 다닐 무렵 사고로 오른다리를 허벅지까지 절단하시고 그뒤 자 궁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83세때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와 화해를 못하셨다.
3)아버지
큰아들로 태어나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 가계를 책임져야했다.
‘11세 부터 엄마를 따라 다니며 장사를 도왔다.장에서 지게꾼을 했다.나무하러가서 길잃어 날이 새서야
집에 왔었다.난 니들만할 때 학교도 못다니고 지게지고 돌아다녔는데 니들은 행복한 줄 알아’등의 말을
입버릇처럼 함.독학으로 고등검정까지 마쳤으며 자격증만 7가지가 넘었을 정도로 배우는 일에 열정이 많았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을 자식 처럼 키웠다.
인물이 좋고 재치가 있어 집밖에선 호인이고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 많았다함
할머니를 사랑하셨고 어려서는 날 예뻐했는데 내가 엄마를 두둔하기 시작하면서 날 싫어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저녁시간에 집에 있었던 날이 없었으며 월급날이면 항상 부부싸움을 했고
항상 엄마가 기절하는 것으로 끝났다.
‘내가 우습냐?내가 돈버는 기계냐? 주는대로 쓰고 없으면 죽어라’고 하던 말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폭행의 수준이 학대로 악화되 소송 끝에
2004년 11월 부터 단절 된 상태로 지냄.
5)삼촌과 고모
고모는 내가 태어나기 전 시집가고 삼촌은 어렸을때 부터 한집에 살았는데 중학교 다닐 무렵 부터 메이커만 고집했고 학교 친구들이 부자집 아들인줄 알 정도로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러워 밥은 굶어도 아침마다 용돈은 꼭 챙겨줘야 했다함.삼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근무할때도 항상 이런저런 구실로 집에서 돈을 가져다 썼으며 결혼 후에도 여자문제들이 많아 아버지가 가족 몰래 집담보 대출로 돈을 해줘야했으며 그빚이 점점커져 결국엔 집이 경매처분됨.아버지와 단절된 후 연락안함.
2.외가
1)외조부
키가크고 인물이 좋으시고 다정한 성격이셨다.십대 부터 양조장에서 일하셔서 재산을 많이 모아 농사를 많이 지으셨다.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하시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할머니가 평생 맘고생을 많이 하셨다함.엄마가 열 살 쯤에 다른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온 후 함께 키우셨는데 그때 부터 할머니와 사이가 멀어졌으며 그이유로 돌아가실 때까지 죄인 처럼 사셨다함.어려서 외가에 가면 새벽 부터 주무실때까지 일만하셨던게 생각난다.자식중 엄마와 사이가 제일 좋아서 우릴 많이 예뻐하셨고 불쌍히 생각하셨다.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양조장에 가서 야쿨트 얻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외할머니와 말씀을 거의 안하셨고 할머니 눈치를 많이 보셨다.
2)외할머니
마르고 작은 체구에 소년같은 외모와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였고 정갈하고 부지런하셨다.할아버지 만큼 생활력이 강하셨고 양조장 다니시는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외삼촌들과 함께 꾸리실 정도로 강하고 엄격하셨고 흐트러짐을 싫어하셨다함.
할아버지가 혼외정사로 밖에서 아들을 데려오신 후 부부 사이가 나빠졌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맘을 열지 못하신것 같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날 우시면서 ‘이제 발뻗고 자것다.‘하시던게 생각난다.자식 중에 이모를 가장 좋아하시고 매맞고 사는 엄마 보다 막내외삼촌 걱정을 많이 하셨다.
3)엄마
9남매 중 3녀로 태어나 부모님이 항상 바쁘시니 집안일은 항상 엄마 차지였다함.위에 언니(이모)가 있었지만 나이차가 많이나는 큰언니는 20세쯤에 질병으로 사망하고 바로 위 이모는 공부를 잘하고 개정군수에게 청혼이 들어 올 정도로 예뻐서 외할머니 자랑거리였으며 일을 안시키셔서 집안일과 동생들 건사는 엄마 차지였다함.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외할머니께 '니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는 꾸중을 많이 들었다함.이모가 일찍 서울 부자집으로 시집을 가고 엄마도 언니를 따라 상경했다가 스므살에 간호보조로 일하던 중 단골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처음엔 친절하고 재치있는 말솜씨와 서글서글한 외모가 어린맘에 들어 결혼하고 싶었다한다.
아버지를 만난지 얼마안되어 아이가 생겼으나 엄만 '너무 무서워서 혼자 병원가서 지웠다한다.
'실 그땐 그게 어떠것인지도 모르고 그랬다'한다. 일을 후에 알게 되어 아버지도 냉담해졌고 할머니는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후 엄마는 정식으로 결혼식도 못 올리고 단칸방에서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고 항상 할머니에게'내아들 신세 망치지 말고 당장 나가라. 내가 봐둔 여자가 있다. 지금 데려와야하니 얼른 나가라 '는 말을 듣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서울에 은마아파트관리소장이면서 보일러 기술자여서 벌이가 좋았고 중앙난방하는 아파트여서 저녁시간에는 거의집에 없었고 낮에 잠깐씩 집에오는데 할머니랑만 지내는 엄마는 아버지가 오는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살았다고 한다. 첫애기를 지우고 4년만에 나를 가졌고 기다리던 임신이라 엄마,아빠 모두 좋았더란다. 배가 불러 나를 나을때가 다되가는데 웬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 000씨 애가졌다. 내가 너보다 더 먼저 살았었다. 시엄니가 우릴 떼어 논 사이에 너가 들어 온거다. 나도 애기 가졌다. 소문 듣고 왔는데 사실이다. 000씨 너가져라. 그 두모자 정떨어진다. 내가 포기할테니 애지우게 돈줘라'며 돈을 요구해 엄마는 남편을 뺏길것 같아 이모와 외할아버지에게 연락해서 돈해줬더니 그 뒤엔 연락이 없었다한다.
그일이 있은 후로 아버지는 집에 오질 않고 할머니를 통해 연락이오면 옷가지를 챙겨다 주고 생활비도 할머니를 통해 보내온 돈을 타서 썼는데 '배속에 아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한다. 너마 아니었으면 진작 그만두는건데...란 말을 많이했다.
내가 태어 난 후 한2년 정도 신접살림을 차려 살다가 할머니와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엄마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구타가 시작되던 중에 둘째아기를 갖게되고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와 더 이상 아이 낳는것을 싫어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힘들어하다가 또 딸을 낳게되고 그게 할머니와 갈등이되고 아버지직장에서 사고로 사직을해 무직상태가 길어지면서 아버지의 구타는 더 심해진다.
그러던 중 또 아이를 갖게되고 아버지의 구타 때문에 엄마는 셋째아기를 7개월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게되고 아버지는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중동 파견근무를 지원해 출국한다.그리고 한3년 착실한 가장 역할을 하던 아버지가 귀국을하고 다시 할머니와 살게되면서 다시 남편의 구타와 고부간의 갈등 속엣 점점 아들에게 집착하고 딸들에게는 원망을 듣고 남편과의 사이는 증오로 바뀌면서 산다. 시어머니가 십여년이 넘게 입토원을 반복하다 사망한 후 남편은 불명예 퇴직을하고 작은 딸은 출가를 하고 큰딸은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아들은 군입대를 하면서 남편의 구타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되고 결국엔 자녀들의 도움으로 소송 끝에2004년 접근금지명령을 마지막으로 지옥 같았던 결혼생활을 본의 아니게 마무리하고 현재 출가한 큰딸과 산다.
4)이모와 외삼촌들
이모는 40대에 이혼하기 전까지 왕래를 자주하가 이모부의 외도로 이혼하게된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가 최근 재가한 남편이 사망한 후 다시 연락 되었으나 고혈압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시다 침가 악화되어 현재 요양원에서 지내신다.
외삼촌들이6명이지만 왕래가 거의 없다. 어렸을 때 외가에 가서 만나곤 했는데 외숙모들의 차가운 말투와 태도가 날 주눅 들게 하고 창피하게 했던 것 같다.
요즘도 아빠가 엄마 때리니? 라고 인사말 처럼 물었 던게 생각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내가 크면 저런 사람들하고는 만나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 언니 따라서 돈 벌러 나왔는데 삼촌들은 6명 모두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산을 분배하셨는데 그때 엄마가 제일 살기가 힘들었는데도 엄마는 미운사위에게 다 뺏긴다는 이유로 외할머니께서 못주게 하셨다고 이모께 들었다.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조사 및 두분 제사 외 에는 왕래안함.
5)시부
인물이 좋고 키가 크시며 온순한 성격이나 자니이 생각하는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있는것 같다.
신랑이 9살 쯤 건설회사에 취업해서 리빙에 파견 근무한던 중 사고로 (납치되었던것같다) 부상입고 송환되어 한동안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로 불안장애로 통 받으면서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50대 후반 쯤 부터 증상이 호전되어 현재는 대증치료 중인것 같다.
6)시모
작은 체구지만 성격이 다부지고 생활력이 강하심 . 외향적이고 목소리가 크심.교회생활을 열심히 하시며 대범하고 손이 큰 편이심.
" 시집 올때 신랑 얼굴 못보고 왔는데 술담배안한다는 말에 무조건 ok였다. 우리 아버는 바람둥이에 술,도박 좋아하셔 그것만 안하면 무조건 좋았었다."
젊어서 병을 얻은 남편 대신 생게를 꾸려야겠기에 여장부로 사셨다.새색시때는 큰집서 하는 담배 농사를 돕느라 신혼이 뭔지도 신랑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살앗고 담배 농사를 접고 나서는 신랑이 병들어 사랑이란걸 모르고 살았다하심.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좋은편이다. 평생을 남의일 하던 분이시라 맞벌이 하는 나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해 주신다.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것 같다.
메세지를 자주 주고 받는데 "주여이는 내 기둥이다. 너도 내 기둥이다. 큰 비전을 갖고 열심히 살자" 는 말씀을 자주 해주신다.
7) 남편
아버지 같이 살까봐 결혼은 안하고 싶었다는 말에 내 맘이 꼿혔다.
아버지가 아파서 엄머가 대신 생계를 꾸리고 그 덕에 어린 주열이는 소년 가장이되어 자랐다.병든 아버지라도 있었으니 불안하지는 안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사는게 힘들어서 자살하고 싶거나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것 같다고 했고 그럴때마다 실같은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면서 맘을 정리하곤 한다며 운동화 끈 같은 목걸이를 걸고 다니다가 채원이를 낳고 끊어 버린 것 같다. 성격이 온순한 편이고 싫은 말을 잘 못하지만 어지로 뭘 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항상 동의를 먼저 구하고 일을 해야만 하지만 조용하고 인내심 많다. 담배는 싫어하고 술은 좋아하지만 주량이 적어 특별한 주정이 없고 소박한 편이라 남의 것을 욕심내지는 않지만 자기것만은 지킬려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다.
2006년 에베레스트 8848km정복하고 왔을 만큼 삶에 대한 투지와 집념이 강하다.
긍정적이고 음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길 좋아하고 자기 얘길 들어주는것을 좋아한다.
성적인 관심이 많은 편이고 나도 좋아하는 편이라 사이가 좋다.
8)채원
성격이 조용하고 온순한 편이지만 대범한 면도 있어 환경이 바뀌거나 선생님이 바뀌어도 잘 적응하는것 같다.
새로운것을 배울때 집중력이 좋고 남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할때 틀리는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먼저 손짓을 해야 내게 다가오는데 전에 왜그런가 햇는데 미술치료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키운걸 알게 된 후 부터는 항상 내가 먼저 아이에게 다가설려고 노력을 많이하고 스킨쉽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지난 여름 방학때 함께하는 미술치료 수업을 하고 난 후 둘사이가 많이 자연스러워 졌다. 아이가 많이 가벼워 진것이 사랑스럽다.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데 벌써 그런 고민을 하는게 맞는지 의아하다. 암튼 엄마 같은 간호사가 되는게 최신 희망이다
9)예원
성격이 밝고 애교가 많다. 많이 혼을 내지만 언니와 다르게 자꾸 와서 엉기는 편이다.
노래를 좋아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아빠를 많이 좋아할 때인지 지가 아빠애인이란다.
아이들 둘다 온순하다.
3. 미해결 과제 파악
1)신뢰감대 불안감
엄마가 나를 낳던 날 엄마는 아버지 없이 날 낳으러 병원에 가셨다. 하루 종일 진통했지만 난산이라 제왕절개 수술을 권유했으나 "낳다가 죽겠다"하여 결국 겸자분만(집게같은 기구를 산도내에 밀어 넣어 태아머리를 집어 잡아 당겨내는 분만법)으로 74년 설날 오전 11시15분에 난 태어났다. 5년을 기다리다 태어난 나는 4.1kg의 우량아로 뽀얗고 토빠 사이는 호전되고 아버지는 엄마와 혼인신고를 하고 서울집에 데려왔다한다.할머니와도 분가하여 2년 가까이 살았는데 엄마는 그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자주 말하곤 하셨다. 그땐 아버지도 착한 남편이었다고...아마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좀더 다르게 살았을거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그시간동안 엄마와 할머니는 사이 더 안좋아졌고 아버지가 직장에서 사고로 해고된 후 할머니와 함께 살게되면서 고부갈등이 자꾸 문제가 되고 아버지가 원치 않던 여동생이 태어나고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자 엄마가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구타는 시작된다.이때 날 사랑해 주던 아버지가 엄마를 대리고 욕설을 퍼 부어 대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이 깨진것 같다. 아마 그때부터 사람은 변한다는것을 깨달은것 같다. 며칠동안 밤마다 경기를 했고 숨이 넘어가게 울다가 누군가에 등에 업혀 잠이 들었던게 기억나는데 그런 날 밤새 업어준게 아버지였다는 걸 이번 자기 분석하면서 엄마로부터 새롭게 들었다.
2)안정대 불안
아버지에게 맞은 후 엄마는 남동생을 7개월만에 낳게된다.내가 서너살쯤이었는데 옆집에 여동생을 맡기고 나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던게 생각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엄마가 하혈하면서 아기를 낳으러 들어가고 난 수납창구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면서 아까 옆집 아줌마가 한 얘기가 자꾸 생각나서 울었었다.
"니엄마가 아직 애날때가 아닌데 큰일이다. 아들이라고 좋아하더만..."
아빠를 기다리면서도 아빠가 오는게 무서워서 싫었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안정과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로 자란것 같다.
3)솔선성대 죄의식(3-6세)
항상 니들만 아니면...니가 그때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도 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엄마가 정말 나때문에 이렇게 사는것 같아 죄의식이 들었고 엄마가 어디로 가버릴까봐 걱정했었다.
4)근면성대 열등감(6-12세)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유치원도 안나온 애가 공부를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며 그때마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열심히 노력했다. 성격은 내성적이었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 시간 없이 집에 빨리 가서 동생들을 봐줘야 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한둘 밖에는 없었다.3학년때 쯤 친구집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저녁을 먹고 집에 갔는데 어제 아빠에게 맞은 엄마는 아파 꼼짝 못하고 동생들은 봐 줄 사람이 없어 하루 종일 굶은 것을 보고 친구 집에서 놀고 배불리 밥 먹고 온 것을 후회했었다.
그후 부터는 친구들과 방과 후에 놀아 본적이 없다. 집에 오면 동생들도 씻어 줘야하고 밥도 챙겨 줘야하고 내 숙제도 해야 하고 엄마약까지 사러 다녀야했다.
동네에 약국이 하나뿐이었는데 그집 딸이 내 짝이었다. 그친구가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이나와 비교를 많이 하셨는데 내가 약을 사러가면 그 친구 엄마(약사)가 "엄마가 왜 아프니? 또 맞았어? 뭘로 맞았니? 너도 맞았니?" 묻곤 했는데 난 창피하고 다른 손님들이 들을까봐 잔돈도 못 받고 뛰어 나온 적이 많았다. 그친구 엄마를 무척 싫어해서 시험기간이면 그집 약봉투를 벽에 붙여 두고 밤새 공부 하곤 했다. 집 보다 학교가 좋았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학용품과 문제집을 얻어 공부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잘하면 최고였다.
누구도 내가 누군지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쓰질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사람들에게 무시안당하고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학교 성적은 물론 백일장 대회, 사생대회, 과학 경시대회, 수학경진 대회, 웅변대회까지 최선을 다했고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5)정체성대 역할 혼돈
-중학교시절: 초교 졸업 앞두고 성적이 좋아 아빠는 날 위장 전입시켜 우리집은 부천 변두리였는데 난 서울 중학교로 학교를 다녔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성격이 밝아졌다. 친구도 많아졌고 학교에 있을 땐 오히려 사람들이 날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TV에서 파독 간호사 다큐멘터리를 버면서 나도 간호사가 되어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엄마는 너무 답답해 보였다.내가 없으면 안되면서 항상 남동생만 끼고 사는 모습이 답답했다. 마치 남동생을 남편 처럼 사랑하는 모습이 할머니랑 똑같다고 느꼈다. 도시락도 여동생과 나는 단무지, 콩자반인데 남동생은 부잣집 도련님 같이 싸준다. 계란 후라이를 남동생것 하나만 해서 밥그릇 바닥에 깔고 밥을 퍼 준다. 누나들이 빼서 먹을까봐 그랬겠지? 우리들은 언제나 마가린에 간장 넣고 비벼서 먹으면서 난 저런 엄마는 안 될꺼다.'다짐 했던게 생각난다.
집에 오면 학교에 갈 시간만 기다렸다. 엄마가 사는 모습도 불쌍하다 모해 우울했고 집에서 보다 학교에서 날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집을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다.
하지만, 내가 집을 나가면 오늘밤에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갈 수 가 없었다.
-고교시절:연합ㄱ고사 성적이 전국 10위안에 들어 아버지의 기대가 많았고 서울 강서구에서 평판이 좋은여고에 입학햇다.빨리 3년이 지나고 간호사관학교에 가서 간호장교로 살다가 해외 로 갈 수 잇는 기회가 생기면 이민 갈 계획을 세우고 공부에 몰두하던 중에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오른다리 허벅지까지 절단했다.다리가 없으니 간병인이 필요했는데 간병인을 쓸 처지가 안되고 여자들병실이니 아버지는 불편해서 안된다하고 엄마는 가출햇고 고모나 작은집 식구들은 남일인듯하고 할 수 없이 내 차지가 되었다.
우리집 식구 모두 다 나쁠게 없었다.그렇게 고2겨울 방학까지 보내고 할머니가 보름뒤에 다시 입원하는데 이번엔 자궁경부암 3기란다...산모 기저기로 2-30장 흥건히 젖는 하혈을 못견뎌 입원하고 다시 내가 간병을 한다. 야간자습이 끝나고 할머니 병실로 가서 기저귀 갈아 주고 씻겨서 재워주고 보호자 침상에서 새우잠자고 아침에 학교갔다가 야간자습 끝나고 다시 병원가서 자고 하는날들이 고3여름까지 계속이다. 성적은 떨어지고 상황은 더나빠지고 세상도 지그지긋해 쟜다.
학비 줄사람도 없는데 학교 가기만 하면 뭐하나?...나를 포기한것인지 인생을 포기한것인지 ...눈 뜨자마자 먹기 시작해서 눈 감을때까지 계속 먹다가 잤다. 체력장을 할 무렵엔 90kg넘었다.
한양대 간호학과를 지원했으나 실패한다. 왜? 라고 묻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구태여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뻔한 변명 같아 싫었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 줄 수 있을텐데 "수고햇다.그래도 장하다.다시 도전해서 내년에 대학가면 된다! 너무 실망마라~"
내가 내 일기장에 이렇게 쓰면서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난다.
폭식과 거식이 반복되면서 몸무게가 100kg넘는다. 할머니는 6개월 남았다면서 퇴원 권유 받고 퇴원하고 이모에게서 가출한 엄마가 어딨다고 연락이 왓지만 찾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안맞고 산다면 그걸로 다행이다 싶엇고 아빠한테 다시 잡혀 오지말기만 바랬다. 엄마가 정말 필요했지만 어쩌면 엄마는 내게 위안을 준사람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런 맘으로 견딜 수 잇었던것 같다.동생들은 고2, 중3...그런데 아버지는 불명예 퇴직, 할머니는 똥오줌 받아내고있다.아무것도 좋아진것이 없고 나만 대학에 못갓고 나만 뚳뚱해졎다. 나만...실패했다. 내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자살을 결정하고 부천 전철역에서 뛰어 내릴려고 갔었는데 정전으로 전철이 3시간 끊기는 바람에 실패하고 죽는것도 내맘대로 되질 않는다며 화장실서 엉엉 울다가 화장실 문짝에 붙어잇는 간호학원 전단지를 보고 알바를 하면서 학원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말에 그 담날 부터 낮엔 학원 다니고 밤엔 학원서 소개 해 준 병원서 알바를 햇다.
30만원 받아서 학원비 12만원내고 12만원 엄마주고 3만원 버스 회수권 끊고 동생들 만원씩 주고 부천역에서 엄마랑 동생들이랑 치킨 한마리 시켜 먹으면서 행복했던게 생각난다. 엄마가 걱정되어 첫 삐삐를 사준던날 엄마가 울면서 "내가 너 없으면 죽었을 거다!" 부천역 지하상가 한가운데서 어색하게 서서 울다가 온 날이 생각난다.
엄마가 그삐삐 아직도 가지고 있는걸 결혼전날 보고 또 울었던게 생각나다.
그렇게 1년지나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개인의원에 취업을 했는데 원장님이 열심히 하는 만큼 준다는 말에 일을 열심히 했다. 원장님이 참 잘 해주셨다. 타자 1장에 500원 준다는 말에 원장님 대학원 숙제를 했는데 하루는 "명선씨, 공부 다시해서 학교 다니지 그래? 조금만 하면 대학갈 것 같은데...전에 다니던 조무사도 대학 나와서 간호사 되서 중동 갔다! 한번 해 봐...여기만 두기는 아깝다. 적극적으로 밀어 줄께" 내인생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가족도 날 인정해 주질 않는데 날 알아주다니...학교 다닐때 선생님들 말고는 날 인정해준 사람이 있다니...돌아 보면 내인생에는 그런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다음날 단과반 등록하고 낮엔 근무하고 7시에 마치고 학원가서 단과 3시간 듣고 병원 아래 층 독서실에 가서 책좀 보다가 새벽 1-2ㅅㅣ쯤 잠들어 아침 6시 기상 다시 출근...여전히 내인생은 우중중하지만 이렇게만 살다가 죽기는 싫다.
"설마...이렇게만 살다가 죽겠어? 뭐가 힘들어? 어차피 죽을려고 했잖아? 그날 전철 안끊겼으면 죽었을텐데...안그래? 버텨! 버텨바! 제발 버텨바!" 밤마다 일기장에 구멍이 뚫릴때까지 써댔던 말들이다.
집이 싫었다. 집에 가기 싫었다.할머니는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이엇고 고통과 씨름하느라 그런지 담배를 입에 달고 사셨고 기저귀는 여기저기 널려 있고 설겆이 통엔 설겆이거리가 한가득, 빨래통엔 빨래가 한가득,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한곡도 내맘대로 들을 수 없는 집은 집이 아니라 감옥 같았다. 혼자서 노래방엘 자주 갔었는데 집나간 엄마가 걱정되는날...아니 보고싶은 날엔 노래방가서 우는건지 노랠하는건지...암튼 그런시간을 보내고 오면 엄마가 차라리 도망간게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집 담보로 대출 받은 돈으로 주식을 햇는데 다 날려 버리고 엄마는 가출한지 2년 만에 다시 끌려왔다. 그 날을 잊을 수 없을 만큼...엄마 스스로가 다시는 나갈 생각을 못 할 만큼 ...무서운 날이었다. 차라리 죽는게 나을것 같다!
다행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남동생이 건장해진 뒤로는 엄마가 맞는 횟수와 강도가 현저히 준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하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어떻게 1년이 지나고 첫 수능을 보고(참고로 난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다) 몇군데 합격 통지서를 받았는데 선택한 학교는 가천길대학. 이유는 4학기 장학금에 직장에서 30분 거리라서 선택했다.
살을 많이 뺐고 100kg가 넘던 몸무게를 30kg넘게 빼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업하려고 몸매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것이다. 점점 나를 회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존감이 회복되고 이었다. 원장님 배려로 2학년 1학기 까지 근무를 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가 있었고 그후엔 지인이 하시는 산부인과에 소개해 주셔서 학생인데도 꾀 파격적인 대우로 야근하면서 학교 실스블 할 수 있었는데 그때 내가 평생할 일을 찾았다.
밤을 하얗게 새고 출근하지만 밤동안에 태어난 녀석들이 학교 다녀와 보면 분유를 먹고 엄마 젖을 빨고 출혈로 죽다시피한 산모를 밤새 수혈하면서 지켜 보다가 출근할 때 쯤되면 살아아나는 것을 보면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란게 절실히 느껴졌다.
수업시간 내자리는 언제나 맨 뒤 벽에 서서 졸음과 싸워가면 듣는 수업이지만 이걸 알아야 밤에 가서 써먹을 수 있으니 들을 수만 있다면 서서들은들 뭐가 어때? 뭐가 힘들어 ? 어차피 죽을려고 한거아니야? 엄마 같이 소모품으로 살거야?
엄마 같이 살고 싶으면 나가...당장 나가서 니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아!!! 오던 잠이 도망간다.
다이어리, 일기장, 심지어 책뚜껑까지 보이는데 마다 "엄마 같이 살고싶어?" 써둔게 생각난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98년 첫 취업을 하는데 IMF시절이라 월급이 제때 나오질 않고 그렇게 체불임금 920만원이되던 날 부산에 가기로 결심한다. 부산가서 조산사 훈련을 받고 오고싶다는 생각을 1년 넘게 하면서 지내던 중 920만원 체불임금이 날 부산에 가게 만드는 동기를 준것이다. 2000년 1원 부산에 간다. 엄마는 남동생이 지키기로 한다.
거기서 2년 가까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던것에 깊이를 주어 나를 발전시키다.
좋은 친구들도 만들고...김정미(제이엄마), 박정란 ! 재산 같은 친구들이다.
지금 까지 내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주는 식구 같은 사람들이다.
남자도 사귀었는데 스므살 쯔음 영어회화 학원서 친구로 만나서 스물셋 부터 애인으로 만났는데 자꾸 결혼하자는 바람에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고있었다. 부산서 조산사 수련을 마치고 2001년 9월 천안서 지금 직장에 미리와서 취업하고 있는 김정미를 만나러 왔다가 얼결에 취직이 되어 3년만 있다가 노르웨이(파견 간호사) 갈 생각으로 일하던 중 다음해에 박정란이 오고 내인생은 드디어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생각하면 이루어 지는 성취감을 맛본다. 여전히, 엄마가 걸리지만 지금 일을 해야만 다 갚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2004년 여름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다. 나이가 차면서 자꾸 집에 인사 가자던 그가 부다스럽고 언제까지고 결혼을 미룰 수도 없었고...그래서 헤어지고 난 뒤 10년 가까이 만나던 사람을 헤어지고 나니 맘이 허전하여 산에 다니던 차에 우연한 계기로 지금 남편을 만났다. 내가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도 더 할말없냐고 묻는 말에 맘이 꼿혀서 그가 좋아지려던 어느날 정말 우연히 엄마가 덜컹되버리고 난 다시 혼란에 빠진다.
다른 어떤 무었이든 하고 싶었지만 결혼은 정말 하기가 두려웠다.
결혼만 안할려고 10년 가까이 사귀 던 사람과 헤어졌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복병을 만나다니... 결혼은 정말 두려웠다.
처녀가 애를 가졌지만 부끄런게 무시될 만큼 고민되어 박정란에게 고민을 털어 놨는데
"추카해요...이제 부턴 진짜 행복해 질거예요...참 잘됐어요. 고민 그만해요!" 내 결혼을 찬성해준 두사람 중 한사람이고 나머지 한사람은 신랑이다. 임신하고 16주가 되어서야 결혼식을 했으니 입덫도 몰래해야하소 병원도 몰래 다녀야 했다.눈치 챈 사람은 다 알고 있었는데도 난 감추고 아닌척 하느라 하루하루가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채원이를 갖은 동안은 매일매일 투정뷔고 화냈던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다.
법정에서 접근금지 명령을 주어 어마가 드디어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와 지고 난 결혼식을 오린다.결혼하기 전날 아버지가 찾아와 벼원 간호부로 찾아가 당직 간호과장에게 험담을하고 그사란이 다시 김정미에게 확인전화를 하고 내 자취집 현관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리다가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이 와서 데려가면서 끝이난 일이 있었지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맘이 편했다. 그 뒤에 살던집을 처분했는지 내짐이라며 택배로 16박스로 보내왔는데 전부다 쓰레기였다.
태배비만 17만원 주고 울었던게 생각난다.
박스마다 빨간 글씨로 어디 얼마나 살사나 두고 보자! XX년아!
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고 심장이 멎는것같고 공포스럽기까지하다.
첫 아기가 나오면서 엄마랑 같이 살기 시작하고 둘째아기를 낳고 키우고 살면서 신랑이 아무리 잘 해주어도 언제 변할지 몰라 행복해하지도 못하고 만족이 안되고 아이들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나를 발견하고 박정란의 권유로 미술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존재를 믿는다. 그가 나를 사랑하심도 믿는다. 믿는데도 두려운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을 낳기전에 시작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더 늦지 않은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김순초 목사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다.아니...그저 행운이 아니고 축복이다!!!!
*현재 나의 문제
@남편이 나를 배신할 것같아 두렵다.
@ 남편이 변할것같아 두렵다.
@엄마하고 애기를 할 때마다 화가난다.
@아이들에게 엄마 갑은 엄마가 될까봐 두렵다.
@남동생이 환청으로 정신과 병동에서 치료 중이다.
@아바지와 화해를 해야한다는데 그런 맘이 생기 질 않는다.
아니 그러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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