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일본의 전국 통일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3개의 국가가 충돌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이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해지고(150만결의 토지가 30만결로 확 줄어듬)
명나라도 많은 쌀과 은(돈)을 소모하여 재정이 약화되었다.
일본 역시 많은 병력을 상실하고 도요토미 가문이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으로 큰 이득을 본 것은 여진족의 누르하치인데 여진족을 견제하는
명나라, 조선이 일본과 싸우는 사이 누르하치가 세력을 크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청나라가 세워지는 원인이 된 전쟁이기도 하다.
* 일본의 전국 통일
원나라와 고려의 일본 정벌이 끝난 이후 보상이 없자 분노한 지방의 다이묘(영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트렸다.
이후 일본은 2개로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때 해적들이 날뛰어 고려를 침략했는데
남북조 시대는 조선이 건국되는 1392년에 일본이 통일되면서 끝나고
무로마치 막부가 한동안 일본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지방 다이묘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약해지자 전국의 다이묘들이 독립된 세력을 세워
일본은 수십개 이상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신라가 호족들 때문에 산산조각 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중국에서도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이 원소, 원술, 유비, 조조, 공손찬 등
여러 세력으로 분열된 적이 있다.
일본은 다이묘들끼리 서로 싸우며 약 100년 동안 분열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오다 노부나가라는 다이묘가 세력을 크게 확장해 일본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마침내 모든 세력을 통합시켜
일본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직 일본을 통일하기 이전에 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때부터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1587년,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씨 가문을 불러와
"조선 국왕에게 일본으로 와서 입조하라는 말을 전해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1588년까지 조선 국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대마도주는 보나 마나 조선이 히데요시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입조는 격이 낮은 나라가 높은 나라에게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선은 자기가 격이 낮은 나라라고 인정할 리가 없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오랑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마도주는 명령을 따르는 척 하면서
조선에게 히데요시가 통신사 파견 요청을 했다고 거짓을 알렸다
(히데요시의 국왕 입조 요구를 왜곡해서 통신사 파견 요청으로 바꾸었다.)
당시 대마도주는 쌀을 조선에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히데요시의 요구에
조선이 대마도와 무역을 금지 시킬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거짓을 하게 된 것이다.
* 통신사 파견
1589년 9월, 유성룡과 이덕형이 통신사 파견을 하자고 주장하자
선조는 황윤길(서인), 김성일(남인), 허성(북인)을 통신사로 임명한 뒤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1590년 3월에 출발한 통신사는 7월이 되자 일본의 수도에 도착했으나
히데요시는 다른 곳을 정벌하고 있어서 결국 통신사가
히데요시를 만난 것은 11월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조선을 자신보다 급이 낮은 국가로 취급하고 있었으니
통신사를 상대로 무례함을 저질렀다.
히데요시가 선조가 보낸 국서에 대한 답장을 늦게 쓰거나 통신사가 있는 자리에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들이 오줌을 지렸다고 한다.
어쨌든 통신사는 히데요시가 늦게 쓴 답장을 받고 귀국하려는데....
답장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답장에는 선조를 전하가 아닌 합하(신하를 부르는 말)라고 부르거나
조선이 히데요시에게 보낸 물건을 조공이라고 불렀으며
또 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입조라고 적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답장에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명나라를 공격하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이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김성일은 답장의 내용을 예의 바르게 고치라고 요구했지만
고쳐진 것은 합하를 전하로 바꾼게 전부였다.
한편 히데요시는 조선에 직접 가려고 했으나 일본 국왕이 말려서 실패로 끝났다.
사실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 계획에 히데요시 신하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성공 가능성도 낮게 보았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일본도 통일했는데 명나라를 정벌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명나라를 정복해 대륙의 주인이 되는 생각을 품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인도 정벌까지 하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 조선 정벌의 준비
히데요시는 1591년부터 조선 국왕이 입조하지 않았으니 조선부터 정벌하겠다고 선언하고는
조선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를 나고야(규슈 북쪽)에 만들었다.
나고야에 병력과 배를 모아 조선을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력과 재정은 조선을 능가하고 있어서
병력을 더 많이 동원해서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무려 30만명이나 되는 병력이 일본에 있었다.
다만 히데요시는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경 써야 해서
절반의 병력인 15만명 만 조선 정벌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20만명을 조선 정벌에 보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정벌에 참여한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들,
일본의 서쪽에 있는 대부분의 다이묘들,
일본의 동쪽에 있는 일부 다이묘들이다.
조선을 정벌할 15만명의 병력은 총 9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었고
수군이 1만명에 가깝게 편성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