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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同人 (동인)
(天火同人 , 乾上離下 : 하늘과 불이 동인괘가 되니, 하늘은 위에 있고 불은 아래에 있다)
[傳] 同人은 序卦에 物不可以終否라 故受之以同人이라하니라 夫天地不交則爲否요 上下相同則爲同人이니 與否義相反이라 故相次라 又世之方否엔 必與人同力[一作欲]이라야 乃能濟니 同人所以次否也라 爲卦 乾上離下하니 以二象言之하면 天은 在上者也니 火之性炎上하여 與天同也라 故爲同人이요 以二體言之하면 五居正位하여 爲乾之主하고 二爲離之主하여 二爻以中正相應하여 上下相同하니 同人之義也라 又卦唯一陰이라 衆陽所欲同하니 亦同人之義也라 他卦에 固有一陰者나 在同人之時하여 而二五相應하고 天火相同이라 故其義大라
[程頤의 설명] 동인괘(同人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사물은 끝내 비색할 수 없으므로 동인괘(同人卦)로 받았다.” 하였다. 천지가 사귀지 못하면 비(否)가 되고 상하가 서로 함께하면 동인(同人)이 되니 비괘(否卦)와 뜻이 상반된다. 그러므로 서로 다음이 된 것이다. 또 세상이 비색할 때에는 반드시 남과 함께 하여야 구제할 수 있으니, 동인괘(同人卦)가 이 때문에 비괘(否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건(乾)이 위에 있고 리(離)가 아래에 있으니, 두 상(象)을 가지고 말하면 하늘은 위에 있는 것인데 불의 성질이 타 올라가서 하늘과 함께하기 때문에 동인(同人)이라 하였고, 두 체(體)를 가지고 말하면 오(五)가 정위(正位)에 거하여 건(乾)의 주체가 되고 이(二)가 리(離)의 주체가 되어 두 효(爻 ; 五爻와 二爻)가 중정(中正)으로 서로 응해서 상하(上下)가 서로 함께하니, 동인(同人)의 뜻이다. 또 괘(卦)에 오직 한 음(陰)이 있어서 여러 양(梁)이 함께 하고자 하는 바이니, 또한 동인(同人)의 뜻이다. 다른 괘(卦)에도 진실로 한 음(陰)인 것이 있으나, 동인(同人)의 때에 있어서는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서로 응하고 하늘과 불이 서로 함께하므로 그 뜻이 큰 것이다.
同人于野면 亨하리니 利涉大川이며 利君子의 貞하니라
사람과 함께 하되 들에서 하면 형통하리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며 군자의 곧음으로 함이 이롭다.
[本義] 同人于野니 亨하고 利涉大川하니 利君子貞하니라
[朱熹의 본 뜻] 사람과 함께 하되 들에서 함이니 형통하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니 군자의 곧음이 이롭다.
[傳] 野는 謂曠野니 取遠與外之義라 夫同人者以天下大同之道면 則聖賢大公之心也요 常人之同者는 以其私意所合이니 乃 暱比之情耳라 故必于野니 謂不以暱近情之所私而于郊野曠遠之地라 旣不繫所私면 乃至公大同之道니 无遠不同也니 其亨을 可知라 能[一作旣]與天下大同이면 是는 天下皆同之也니 天下皆同이면 何險阻之不可濟며 何艱危之不可亨이리오 故利涉大川이라 利君子貞은 上言于野는 止謂不在暱比요 此는 復言宜以君子正道하니 君子之貞은 謂天下至公大同之道라 故雖居千里之遠하고 生千歲之後나 若合符節하며 推而行之면 四海之廣과 兆民之衆이 莫不同[一作合]이라 小人則唯用其私意하여 所比者는 雖非라도 亦同하고 所惡者는 雖是라도 亦異라 故其所同者則爲阿黨하나니 蓋其心不正也라 故同人之道 利在君子之貞正이라
[程頤의 설명] 야(野)는 광야(曠野)를 이르니, 멂과 바깥의 뜻을 취한 것이다. 남과 함께하는 자가 천하(天下) 동인(同人)의 도리로써 하면 성현(聖賢)의 크게 공정한 마음이요, 상인(常人)들이 함께하는 것은 사사로운 뜻에 합하는 바로써 하니, 바로 친하고 가까이하는 정(情)일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들에서 하는 것이니, 친하고 가까이하는 사사로운 정(情)으로 하지 않고 교야(郊野)의 광원(曠遠)한 곳에서 하는 것이다. 이미 사사로운 바에 매이지 않으면 지공대동(至公大同)한 도(道)여서 먼 곳도 함께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형통함을 알 수 있다. 천하(天下)와 대동(大同)을 하면 이는 천하가 모두 함께하는 것이니, 천하가 모두 함께한다면 무슨 험조(險阻)인들 건너지 못하며 무슨 어려움과 위태로움인들 형통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재천(大川)을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군자의 곧음으로 함이 이롭다(利君子貞)’은 위에서 ‘들에서 한다’고 말한 것은 다만 친하고 가까이 함에 있지 않아야 함을 말하였고, 여기서는 다시 군자의 정도(正道)로써 하여야 함을 말하였으니, 군자의 정(貞)은 천하의 지공대동(至公大同)한 도(道)를 이른다. 그러므로 비록 천리(千里) 먼 곳에 거하고 천년 뒤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일치하며, 이것을 미루어 행하면 사해(四海)의 넓음과 조민(兆民)의 많음이 함께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소인(小人)은 오직 사사로운 마음을 써서 자신과 친한 자는 비록 옳지 않더라도 찬동하고, 미워하는 자는 비록 옳더라도 또한 달리한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자는 아당(阿黨)함이 되니,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인(同人)의 도(道)는 이로움이 군자의 곧고 바름에 있는 것이다.
[本義] 離亦三畫卦之名이니 一陰이 麗於二陽之間이라 故其德이 爲麗 爲文明이요 其象이 爲火 爲日 爲電이라 同人은 與人同야라 以離遇乾하여 火上同於天하고 六二得位得中而上應九五하며 又卦唯一陰而五陽同與之라 故爲同人이라 于野는 謂曠遠而无私也니 有亨道矣라 以健而行이라 故能涉川이오 爲卦 內文明而外剛健하며 六二中正而有應하니 則君子之道也라 占者能如是면 則亨而又可涉險이라 然必其所同이 合於君子之道라야 乃爲利也라
[朱熹의 본 뜻] 리(離) 또한 3획괘(三畫卦)의 이름이니, 한 음(陰)이 두 양(陽)의 사이에 붙어 있다. 그러므로 그 덕(德)이 려(麗 ; 붙어있음)가 되고 문명(文明)이 되며, 그 상(象)이 불이 되고 해가 되고 번개가 되는 것이다. 동인(同人)은 남과 함께하는 것이다. 리(離)로서 건(乾)을 만나 불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함께하고, 육이(六二)가 정위(正位)를 얻고 중(中)을 얻어 위로 구오(九五)와 응하며, 또 괘(卦)에 오직 한 음(陰)뿐이어서 다섯 양(陽)이 함께 더불므로 동인(同人)이 된 것이다. 들에서 함은 광원(曠遠)하여 사(私)가 없음을 이르니, 형통할 도(道)가 있는 것이다, 굳건함으로 행하기 때문에 대천(大川)을 건널 수 있으며, 괘(卦)됨이 안은 문명(文明)하고 밖은 강건(剛健)하며 육이(六二)가 중정(中正)하면서 응(應)이 있으니, 군자의 도(道)이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한다면 형통할 것이요 또 험난함을 건널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함께하는 바가 군자의 도(道)에 합하여야 이로움이 된다.
彖曰 同人은 柔得位하며 得中而應乎乾할새 曰同人이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동인(同人)은 유(柔 ;六二)가 정위(正位)를 얻었으며 중(中)을 얻어 건(乾 ; 九五)에 응하므로 동인(同人)이라 한 것이다.
[傳] 言成卦之義라 柔得位는 謂二以陰居陰하여 得其正位也요 五中正而二以中正應之는 得中而應乎乾也라 五剛健中正而二以柔順中正應之하여 各得其正하니 其德同也라 故爲同人이라 五는 乾之主라 故云應乎乾이라 象은 取天火之象하고 而彖은 專以二言하니라
[程頤의 설명] 괘(卦)를 이룬 뜻을 말하였다. 유(柔)가 위(位)를 얻었다는 것은 이(二)가 음효(陰爻)로서 음위(陰位)에 거하여 정위(正位)를 얻었음을 말한다. 오(五)가 중정(中正)한데 이(二)가 중정(中正)으로 응함은, 중(中)을 얻어 건(乾)에 응하는 것이다. 오(五)가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한데 이(二)가 유순하고 중정(中正)함으로 응하여 각각 그 바람을 얻었으니, 그 덕(德)이 같으므로 동인(同人)이라 한 것이다. 오(五)는 건괘(乾卦)의 주체이므로 건(乾)에 응한다고 말한 것이다. <상전(象傳)>은 하늘과 불의 상(象)을 취하였고, <상전(象傳)>은 오로지 육이(六二) 효(爻)만 가지고 말하였다.
同人于野亨利涉大川은 乾行也요
‘사람과 함께 하되 들에서 하면 형통하리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는 것은 건(乾)의 행실이요,
[傳] 至誠无私하여 可以蹈險難者는 乾之行也라 无私는 天德也라
[程頤의 설명] 지극히 성실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서 험난함을 밟을 수 있는 것은 건(乾)의 행실이다. 사사로움이 없음은 하늘의 덕이다.
文明以健하고 中正而應이 君子正也니
문명(文明)하고 굳건하며 중정(中正)으로 응함이 군자의 정도(正道)이니,
[傳] 又以二體言其義라 有文明之德而剛健하고 以中正之道相應은 乃君子之正道也라
[程頤의 설명] 또 두 체(體)로 그 뜻을 말하였다. 문명(文明)한 덕이 있으면서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한 도(道)로써 서로 응함은 바로 군자의 정도(正道)이다.
唯君子아 爲能通天下之志하나니라
오직 군자여야 천하의 마음을 통할 수 있다.”
[傳] 天下之志萬殊나 理則一也라 君子明理라 故能通天下之志하나니 聖人이 視億兆之心을 猶一心者는 通於理而已라 文明則能燭理라 故能明大同之義요 剛健則能克己라 故能盡大同之道니 然後에 能中正하여 合乎乾行也라
[程頤의 설명] 천하의 마음이 만 가지로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 군자는 이치를 밝게 알므로 천하의 마음을 통할 수 있으니, 성인(聖人)이 억조 만백성의 마음 보기를 한 마음처럼 하는 것은 이치를 통달하기 때문일 뿐이다. 문명(文明)하면 이치를 밝게 알므로 대동(大同)의 뜻을 밝힐 수 있고, 강건(剛健)하면 자신의 사욕(私慾)을 이길 수 있으므로 대동(大同)의 도(道)를 다하는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중정(中正)하여 건(乾)의 행실에 합한다.
[本義] 以卦德卦體로 釋卦辭라 通天下之志라야 乃爲大同이요 不然則是私情之合而已라 何以致亨而利涉哉아
[朱熹의 본 뜻] 괘덕(卦德)과 괘체(卦體)로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천하의 마음을 통하여야 대동(大同)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는 사사로운 정(情)으로 합한 것일 뿐이니, 어찌 형통함을 이루어 이롭게 건너겠는가.
象曰 天與火同人이니 君子以하여 類族으로 辨物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하늘과 불이 동인(同人)이니, 군자가 보고서 유족(類族)으로 사물을 분변한다.”
[本義] 類族辨物하나니라
[朱熹의 본 뜻] 족(族)을 분류하여 사물을 분별한다.
[傳] 不云火在天下, 天下有火하고 而云天與火者는 天在上이어늘 火性炎上하여 火與天同이라 故爲同人之義라 君子觀同人之象하여 而以類族으로 辨物하나니 各以其類族으로 辨物之同異也라 若君子小人之黨과 善惡是非之理와 物情之離合과 事理之異同이니 凡異同者를 君子能辨明之라 故處物에 不失其方也라
[程頤의 설명] 불이 하늘 아래에 있다거나 하늘 아래에 불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늘과 불이라고 말한 것은 하늘이 위에 있는데 불의 성질이 불타 올라가서 불이 하늘과 함께하므로 동인(同人)의 뜻이 된 것이다. 군자(君子)는 동인(同人) 괘(卦)의 상(象)을 관찰하여 유족(類族)으로 사물을 분변(分辨)하니, 각기 그 유족(類族)으로 물건의 동이(同異)를 분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자(君子) · 소인(小人)의 당(黨)과 선악(善惡) 시비(是非)의 이치와 물정(物情)의 이합(離合)과 사리(事理)의 이동(異同)과 같은 것이니, 무릇 이(異)와 동(同)을 군자가 밝게 구별하므로 사물을 대처함에 그 방법을 잃지 않는 것이다.
初九는 同人于門이니 无咎리라
초구(初九)는 사람과 함께 하되 문을 나가서 하니, 허물이 없으리라.
[傳] 九居同人之初而无係應하니 是는 无偏私하여 同人之公者也라 故爲出門同人이라 出門은 謂在外니 在外則无私昵之偏하여 其同이 博而公이니 如此則无過咎也라
[程頤의 설명] 구(九)가 동인(同人)의 처음에 거하여 계응(係應)이 없으니, 이는 편사(偏私)가 없어 사람과 함께하기를 공정하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문을 나가 남과 함께함이 된다. 문을 나간다는 것은 밖에 있음을 이르니, 밖에 있으면 사닐(私昵 ; 사사로이 친함)의 편벽됨이 없어서 함께함이 넓고 공정한 바, 이와 같이 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本義] 同人之初라 未有私主하고 以剛在下하여 上无係應하니 可以无咎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朱熹의 본 뜻] 동인(同人)의 초기라서 사사로이 주장함이 없고 강(剛)으로 아래에 있어 위에서 계응(係應)이 없으니,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出門同人을 又誰咎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문을 나가 남과 함께 함을 또 누가 허물하겠는가.”
[傳] 出門同人于外면 是其所同者廣하여 无所偏私라 人之同也에 有厚薄親疎之異면 過咎所由生也어늘 旣无所偏黨하니 誰其咎之리오
[程頤의 설명] 문을 나가 밖에서 남과 함께 하면 이는 그 함께 하는 바가 넓어서 편사(偏私 ; 특정인에게만 호의를 보임)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함께 할 때에 후박(厚薄)과 친소(親疏)의 차이가 있으면 허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데, 이미 편당(偏黨)하는 바가 없으니, 그 누가 허물하겠는가.
六二는 同人于宗이니 吝하도다
육이(六二)는 남과 함께 하되 종당(宗黨)과 하니, 부끄럽다.
[傳] 二與五爲正應이라 故曰同人于宗이니 宗은 謂宗黨也라 同於所係應이면 是는 有所偏與니 在同人之道에 爲私狹矣라 故可吝이라 二若陽爻면 則爲剛中之德이니 乃以中道相同하여 不爲私也라
이(二)는 오(五)와 정응(正應)이 되므로 ‘종당과 함께 하다(同人于宗)’이라고 하였으니, 종(宗)은 종당(宗黨)을 이른다. 계응(係應)하는 바에 함께 하면 이는 편벽되이 친하는 것이니, 동인(同人)의 도리에 있어서 사사롭고 편협함이 된다. 그러므로 부끄러울 만한 것이다. 이(二)가 만약 양효(陽爻)라면 강중(剛中)의 덕(德)이 되니, 이는 중도(中道)로써 서로 함께 하는 것이어서 사사로움이 되지 않는다.
[本義] 宗은 黨也라 六二雖中且正이나 然有應於上하여 不能大同而係於私하니 吝之道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朱熹의 본 뜻] 종(宗)은 당(黨)이다. 육이(六二)는 비록 중(中)하고 또 정(正)하나, 위에 응(應)이 있어서 대동(大同)하지 못하고 사(私)에 매이니, 부끄러운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同人于宗이 吝道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남과 함께 하되 종당(宗黨)과 하니, 부끄러운 도(道)이다.”
[傳] 諸卦以中正相應爲善이나 而在同人則爲可吝이라 故五不取君義라 蓋私比는 非人君之道니 相同以私는 爲可吝也라
[程頤의 설명] 여러 괘(卦)는 중정(中正)이 서로 응함을 좋은 것으로 여기나, 동인괘(同人卦)에 있어서는 부끄러울 만함이 된다. 그러므로 오(五0는 군주의 뜻을 취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친함은 인군(人君)의 도리가 아니니, 서로 사사로움으로 함께 함은 부끄러울 만함이 되는 것이다.
九三은 伏戎于莽하고 升其高陵하여 三歲不興이로다
구삼(九三)은 병사(兵士)를 풀 속에 숨겨두고 높은 구릉에 올라가서 3년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함이로다.
[傳] 三은 以陽居剛而不得中하니 是는 剛暴之人也라 在同人之時하여 志在於同하니 卦唯一陰을 諸陽之志 皆欲同之하고 三又與之比라 然二以中正之道로 與五相應하니 三以剛强으로 居二五之間하여 欲奪而同之나 然理不直, 義不勝이라 故不敢顯發하여 伏藏兵戎于林莽之中하며 懷惡而內負不直이라 故又畏懼하여 時升高陵以顧望하여 如此至於三歲之久토록 終不敢興이라 此爻는 深見小人之情狀이라 然不曰凶者는 旣不敢發이라 故未至凶也라
[程頤의 설명] 삼(三)은 양(陽)으로서 강위(剛位)에 거하여 중(中)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강포(强暴)한 사람이다. 동인(同人)의 때에 있어서는 마음이 함께 함에 있으니, 괘(卦)에 오직 한 음(陰)을 여러 양(陽)의 마음이 모두 함께 하고자 하며, 삼(三)은 이(二)와 매우 가깝다. 그러나 이(二)가 중정(中正)의 도(道)로써 오(五)와 서로 응(應)하니, 삼(三)이 강강(剛强)으로 이효(二爻)와 오효(五爻)의 사이에 처하여 빼앗아 함께 하고자 하나, 이치가 정직하지 못하고 의(義)가 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서 병사를 수풀 속에 숨겨둔 것이며, 악(惡)한 마음을 품고 안에 정직하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또 두려워하여 때때로 높은 구릉에 올라가 관망(觀望)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3년의 오램에 이르도록 끝내 감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효(爻)는 소인(小人)의 정상(情狀)을 깊이 나타내었다. 그러나 흉(凶)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감히 나오지 못하므로 흉(凶)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本義] 剛而不中하고 上无正應하여 欲同於二而非其正이요 懼九五之見攻이라 故有此象이라
[朱熹의 본 뜻] 강(剛)하면서 중(中)하지 못하고, 위에 정응(正應)이 없어 육이(六二)와 함께 하고자 하나 정응(正應)이 아니며, 구오(九五)에게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하므로 이러한 상(象)이 있는 것이다.
象曰 伏戎于莽은 敵剛也요 三歲不興이어니 安行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병사(兵士)를 숲 속에 숨겨둠은 적이 강하기 때문이요, 3년이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니, 어떻게 행하겠는가.”
[傳] 所敵者五니 旣剛且正하니 其可奪乎아 故畏憚伏藏也하여 至於三歲不興矣니 終安能行乎아
[程頤의 설명] 상대가 오(五)인데 이미 강하고 또 바르니, 빼앗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엎드려 숨어서 3년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끝내 행할 수 있겠는가.
[本義] 言不能行이라
능히 행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九四는 乘其墉하되 弗克攻이니 吉하니라
구사(九四)는 담에 올라가나 공격하지 못하니 길(吉)하다.
[本義] 乘其墉하나 弗克攻이니 吉하리라
[朱熹의 본 뜻] 담에 올라가나 공격하지 못함이니 길(吉)하리라
[傳] 四는 剛而不中正하여 其志欲同二하니 亦與五爲仇者也라 墉은 垣이니 所以限隔也니 四切近於五하여 如隔墉耳라 乘其墉하여 欲攻之로되 知義不直而不克也하니 苟能自知義之不直而不攻이면 則爲吉也라 若肆其邪欲하여 不能反思義理하고 妄行攻奪이면 則其凶大矣라 三은 以剛居剛이라 故終其强而不能反이요 四는 以剛居柔라 故有困而能反之義하니 能反則吉矣라 畏義而能改하면 其吉宜矣라
[程頤의 설명] 사(四)는 강하고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마음이 육이(六二)와 함께 하고자 하니, 또한 오(五)와 적이 된 자이다. 용(墉)은 담이니, 한계하여 막는 것이다, 사(四)는 오(五)와 매우 가까워 마치 담이 가로막혀 있는 것과 같다. 담에 올라가 공격하고자 하나, 의(義)가 곧지 못함을 알아 능히 하지 못하니, 만일 의(義)가 곧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길(吉)함이 된다. 그러나 만약 간사한 욕심을 부려서 돌이켜 의리(義理)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공격하여 빼앗음을 행한다면 흉(凶)함이 클 것이다. 삼(三)은 강(剛)이 강위(剛位)에 거하였으므로 곤하면 능히 돌아오는 뜻이 있으니, 능히 돌아오면 길(吉)하다. 의(義)를 두려워하여 잘못을 고친다면 길함이 마땅하다.
[本義] 剛不中正하고 又无應與하여 亦欲同於六二로되 而爲三所隔이라 故爲乘墉以攻之象이라 然以剛居柔라 故有自反而不克攻之象하니 占者如是면 則是能改過而得吉也라
[朱熹의 본 뜻] 강(剛)이 중정(中正)하지 못하고 또 응여(應與)가 없어서 또한 육이(六二)와 함께 하고자 하나 삼(三)에게 가로막힘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담에 올라가 공격하는 상(象)이 된 것이다. 그러나 강(剛)이 유위(柔位)에 거하였으므로 스스로 돌이켜 능히 공격하지 않는 상(象)이 있으니,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잘못을 고쳐서 길(吉)함을 얻을 것이다.
象曰 乘其墉은 義弗克也요 其吉은 則困而反則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담에 올라감은 의리상(義理上)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요, 길(吉)함은 곤(困)하여 법칙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傳] 所以乘其墉而弗克攻之者는 以其義之弗克也라 以邪攻正은 義不勝也니 其所以得吉者는 由其義不勝하여 困窮而反於法則也일새라 二者는 衆陽所同欲也로되 獨三四有爭奪之義者는 二爻居二五之間也일새라 初終은 遠이라 故取義別이라
[程頤의 설명] 담에 올라가나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의리상(義理上)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邪)로 정(正)을 공격함은 의리상 이기지 못하니, 길(吉)함을 얻는 까닭은 의리상 이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곤궁해서 법칙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육이(六二)는 모든 양(陽)이 함께 하고자 하는 바이나, 오직 삼(三)과 사(四)만이 쟁탈의 뜻이 있는 것은 이 두 효(爻)가 이(二)와 오(五)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초(初)와 종(終)은 멀므로 뜻을 취함이 다르다.
[本義] 乘其墉矣면 則非其力之不足也요 特以義之弗克而不攻耳라 能以義斷하여 困而反於法則이라 故吉也라
[朱熹의 본 뜻] 담에 올라갔으면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의리상(義理上)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의(義)로써 결단하여 곤(困)하여 법칙(法則)에 돌아오므로 길(吉)한 것이다.
九五는 同人이 先號咷而後笑니 大師克이라야 相遇로다
구오(九五)는 남과 함께 하되 먼저는 울부짖다가 나중에는 웃으니, 큰 병력으로 이겨야 서로 만난다.
[傳] 九五同於二而爲三四二陽所隔하니 五自以義直理勝이라 故不勝憤抑하여 至於號咷라 然邪不勝正하여 雖爲所隔이나 終必得合이라 故後笑也라 大師克相遇는 五與二正應이어늘 而二陽이 非理隔奪하니 必用大師克勝之라야 乃得相遇也라 云大師, 云克者는 見二陽之强也라 九五君位而爻不取人君同人之義者는 蓋五專以私暱應於二하여 而失其中正之德일새라 人君은 當與天下大同而獨私一人은 非君道也요 又先隔則號咷라가 後遇則笑는 [一有正字]是私暱之情이요 非大同之體也라 二之在下도 尙以同於宗爲吝이어든 況人君乎아 五旣於君道无取라 故更不言君道하고 而明二人同心하여 不可間隔之義하니 繫辭云 君子之道 或出或處或黙或語하나니 二人同心하면 其利斷金이라하니 中誠所同엔 出處語黙이 无不同하여 天下莫能間也라 同者는 一也니 一不可分이니 分이면 乃二也라 一은 可以通金石, 冒水火하여 无所不能入이라 故云其利斷金이라 其理至微라 故聖人贊之曰 同心之言이 其臭如蘭이라하시니 謂其言意味深長也라
[程頤의 설명] 구오(九五)는 육이(六二)와 함께 하나 삼(三) · 사(四) 두 양효(陽爻)에게 막히는 바가 되었으니, 오(五)는 스스로 의리(義理)가 곧고 이치가 우세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분함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서 울부짖음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여 비록 막히는 바가 되었다 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합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뒤에는 웃는 것이다. 큰 병력으로 이겨야 서로 만나다는 것은 오(五)가 이(二)와 정응(正應)인데, 두 양(陽)이 도리가 아닌 방법으로 막고 빼앗으니, 반드시 큰 병력을 동원하여 이겨야 비로소 서로 만남을 얻는 것이다. ‘큰 병력(大師)’이라 말하고 ‘이긴다(克)’이라고 말한 것은 두 양(陽)이 강함을 나타낸 것이다. 구오(九五)는 군주의 자리인데, 효(爻)에서 인군(人君)이 님과 함께 하는 뜻을 취하지 않은 것은 오(五)가 오로지 사사로이 친함으로 이(二)에 응하여 중정(中正)의 덕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군(人君)은 마땅히 천하와 대동(大同)을 하여야 하는데, 홀로 한 사람과 사사로이 함은 군주의 도리가 아니며, 또 먼저 막혔을 때에는 울부짖다가 뒤에 만나면 웃는 것은 사사로이 친함의 정(情)이요 대동(大同)의 체(體)가 아니다. 이(二)는 아래에 있는데도 오히려 종당(宗黨)과 함께한다 하여 부끄러움이 되었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에게서랴. 오(五)는 이미 군주의 도리에 취할 것이 없으므로 다시 군주의 도리를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여 간격할 수 없는 뜻만을 밝혔으니,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도(道)가 혹 진출하고 혹 은둔하고 혹 침묵하고 혹 말하는데,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면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른다.” 하였다. 이는 마음속의 정성이 함께하는 것에는 출처(出處 ; 진출과 은둔)와 어묵(語默)이 같지 않음이 없으니, 나누면 바로 둘인 것이다. 일(一)은 금석(金石)을 뚫고 수화(水火)를 무릅써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므로 ‘그 예리함이 쇠도 자른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이치가 지극히 은미하므로 성인(聖人)이 칭찬하기를 “마음을 함께 하는 말은 그 향취(香臭)가 난초와 같다.” 하셨으니, 이 말이 의미심장함을 이른 것이다.
[本義] 五剛中正이어늘 二以柔中正으로 相應於下하여 同心者也로되 而爲三四所隔하여 不得其同이라 然義理所同에 物不得而間之라 故有此象이라 然六二柔弱而三四剛强이라 故必用大師以勝之然後에 得相遇也라
[朱熹의 본 뜻] 오(五)는 강중정(剛中正 ; 양효이고 상괘의 중간이며 다섯째 양수 자리에 양효)으로 서로 아래에서 응하여 마음을 함께하는 자이나, 삼효(三爻)와 사효(四爻)에게 막힌 바가 되어서 그 함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의리가 같음에 남이 이간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상(象)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이(六二)가 유약(柔弱)하고 삼(三)과 사(四)가 강강(剛强)하므로 반드시 큰 병력을 사용하여 이긴 뒤에야 서로 만남을 얻는 것이다.
象曰 同人之先은 以中直也요 大師相遇는 言相克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동인(同人)이 먼저 울부짖음은 중심(中心)이 곧기 때문이요, 큰 병력으로 이겨야 서로 만남은 서로 이김을 말한 것이다.”
[傳] 先所以號咷者는 以中誠理直故不勝其忿切而然也라 雖其敵剛强하여 至用大師나 然義直理勝하여 終能克之라 故言能相克也라 相克은 謂能勝이니 見(현)二陽之强也라
[程頤의 설명] 먼저 울부짖은 까닭은 마음이 정성스럽고 이치가 곧으므로 분함과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비록 상대가 강강(剛强)하여 큰 병력을 동원함에 이르나, 의리가 곧고 이치가 우세하여 끝내는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이긴다고 말한 것이다. 상극(相克)은 능히 이김을 이르니, 두 양(陽)이 강함을 나타낸 것이다.
[本義] 直은 謂理直이라
[朱熹의 본 뜻] 직(直)은 이치가 곧음을 이른다.
上九는 同人于郊니 无悔니라
상구(上九)는 남과 함께하되 교외(郊外)에서 하니, 뉘우침이 없다.
[本義] 同人于郊나 无悔니라
[朱熹의 본 뜻] 남과 함께 하기를 교외(郊外)에서 하나 위우침이 없다.
[傳] 郊는 在外而遠之地라 求同者는 必相親相與어늘 上九居外而无應하여 終无與同者也라 始有同이면 則至終에 或有睽悔어니와 處遠而无與라 故雖无同이나 亦无悔요 雖欲同之志不遂나 而其終에 无所悔也라
[程頤의 설명] 교(郊)는 밖에 있고 먼 지역이다. 함께 하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서로 친하고 서로 더부는데, 상구(上九)는 밖에 거하고 응(應)이 없어서 끝내 더불어 함께하는 자가 없다. 처음에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종말에 혹 괴리되어 뉘우침이 있을 것인데, 먼 곳에 처하고 더부는 자가 없으므로 비록 함께 하는 이가 없으나 또한 뉘우침이 없고 비록 함께 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나 종말에 뉘우치는 바가 없는 것이다.
[本義] 居外无應하여 物莫與同이나 然亦可以无悔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郊는 在野之內하니 未至於曠遠이요 但荒僻하여 无與同耳라
[朱熹의 본 뜻] 밖에 거하고 응(應)이 없어서 남이 함께하는 이가 없으나, 또한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교(郊)는 야(野)의 안에 있으니, 광원(曠遠)함에는 이르지 않고, 다만 황폐하고 궁벽하여 더불어 함께 하는 이가 없을 뿐이다.
象曰 同人于郊는 志未得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남과 함께 하되 교외(郊外)에서 함은 뜻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傳] 居遠莫同이라 故終无所悔라 然而在同人之道하여는 求同之志를 不得遂하니 雖无悔나 非善處也라
[程頤의 설명] 먼 곳에 거하여 함께 하는 이가 없으므로 끝내 뉘우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인(同人)의 도(道)에 있어서는 함께 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록 뉘우침은 있으나 잘 대처하는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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