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목회 계획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내게 <믿음>이라는 주제를 주시고 계신다. 이 <믿음>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목회계획을 세워가야 할지 계속 묻고 나가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5) 한 해를 돌아보며 주님의 기쁨이 되길 원한다고 그렇게 입술로는 찬양하고 기도하며 살았지만 정작 내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된다.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믿고 있다. 하지만 난 스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믿음으로 간구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내게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주실 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 때문에 믿음으로 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찾기 보다는‘내가 믿음으로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믿음 없는 생각으로 인해서 두려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믿음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나의 상황과 나의 생각을 깨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능력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이 내게 필요하다. 주님께서 내게도 그런 믿음을 주시길 소망한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하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지만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그 뜻은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를 향하여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는 것이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여로보암의 죄라고 한다면 남유다의 멸망은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로서 12살에 즉위해서 남,북 왕 가운데 가장 오래 통치했던 왕이었다. 므낫세는 바알, 아세라, 일월성신등을 우상숭배를 하는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의 제단까지 쌓았던 왕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그동안 다윗을 생각해서 지켜주셨던 예루살렘 성까지 앗수르에게 공격을 당하게 하셨고 그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앞으로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 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서야 므낫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회복시켜 주신다. 므낫세가 포로에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우상을 제거하고 남은 인생을 여호와만 섬기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오늘 그의 죄로 인해서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가끔 무지한 사람들이 “평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죽을 때 그 때 예수를 믿고 죽으면 천국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죽을 때 그 때가서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을 삶은 생각하지 못할까? 왜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고 천국을 누리는 삶은 생각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마음을 격노케 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생각보다는 혹 이렇게 내가 믿었는데.. 이 만큼 내가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믿음 없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런 믿음 없는 내 자신은 바라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믿음이 없을까? 라고 한탄하고 있었으니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내게 마지막 기회가 아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시고 있다. 묵은해를 보내게 하시고 새해를 준비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요시야는 참으로 허무하게 죽는다.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갈 때 요시야 와 싸울 의사가 없었던 바로느고와 맞서 싸우다가 므깃도에서 그만 전사하게 된다. 바로 느고는 앗수르 왕을 치려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있는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과 싸우고자 급히 올라가고 했다. 만약 앗수르가 밀리면 바벨론은 애굽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시야 입장에서는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요. 유다를 고통스럽게 한 적국이었기 때문에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느고는 요시야에게 길을 비켜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하자 할 수 없이 요시야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 백성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슬픔이었다. <대하35:24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하나님은 유다의 마지막 선왕을 왜 이리 안타까운 죽음으로 데리고 가셨을까? 하나님은 훌다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하22: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요시야가 죽은 이후 유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은 그가 살아서 모든 재앙을 보며 가슴아파하는 것 보다 그를 데리고 가심으로 재앙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나를 주님은 다시 <믿음>이란 주제를 주시고 믿음으로 나가길 원하신다. 다시 한 번 주님은 주 안에 있는 것이 은혜요 기쁨이요 행복임을 알게 하신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랑의 주님! 믿음이 없어서 주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저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믿음의 결과가 내 뜻과 다를 것 같아서 두려워했던 믿음 없는 저를 용서해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의 자세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충실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도 저에게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그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남은 시간 동안에도 주님의 은혜아래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