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시편 23편을 한 절씩 강해하면서 그동안 시편 23편을 잘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편23편은 1절이 가장 중요한 줄 알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도 너무나 귀하고 대단한 고백입니다. 이 한 절만 알면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까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믿음 하나 분명히 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절 한 절 강해하면서 1절보다 2절이, 2절보다 3절을 통해 점점 더 깊은 은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절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정도인데, 5절에서는 흘러넘칩니다. 훨씬 더 충만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고백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성도가 누리게 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자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이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그 은혜에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상을 차려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잔치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기름을 머리에 부으셨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풍습인데,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주인이 입구에 서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정중하게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가셨을 때 그 동네에서 손가락질받던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속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던 시몬에게 예수님은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다”(눅 7:46)라고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하기는 했지만 손님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표현은 주인이 손님의 잔에 포도주를 넘치도록 따라준다는 말인데, 아쉬움이 없는 풍성한 접대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은 그분께서 나를 극진히 대접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의 목전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합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장을 사로잡았습니다. 적국의 왕을 포로로 잡아 고국에 돌아와 무릎을 꿇리고 그 앞에서 승전 잔치를 벌입니다. 그림이 대략 그려집니까?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놀라운 복을 부어주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26장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광야까지 쫓아온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굴속에 숨어 있었는데, 사울 왕이 하필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은 굴속으로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지금이 기회라고 사울을 죽이자고 했을 때 다윗은 사울이 비록 악한 왕이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었으니 죽일 수 없다며 옷자락만 벱니다. 사울이 그 사실을 모르고 나가자 다윗이 큰 소리로 "내 주 왕이여"라고 사울왕을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삼상 24:11)
그때 사울 왕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확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설 것을 아노니 (삼상 24:17-20)
사울 왕이 다윗에게 "네가 나보다 낫다. 너는 반드시 왕이 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일이 26장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얼마나 통쾌한 순간입니까? 다윗의 원수 사울 왕을 죽인 것보다 사울 왕의 입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훨씬 놀라운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5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 것 아닙니까? 그때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잔치가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 천국잔치를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고백과 같은 잔치를 다 경험하게 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내 잔이 넘치는 황홀한 천국잔치를 다 약속받았습니다. 다윗도 이 고백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누릴 천국 잔치를 생각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영생에 눈이 뜨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다윗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잘 사는 것을 더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을 죽여서 왕이 된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조금 일찍 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다윗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살려주어서 왕이 되지 못한다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았고,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누릴 천국 잔치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하기 싫었습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보다 천국에서 잘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비교가 안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뜻대로만 하고 싶었습니다.
천국 잔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나라에서 천국 잔치를 받을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마음대로 안 삽니다. 영생의 축복을 믿는 사람은 세상사는 동안 죄짓고 살 이유가 없고, 욕심 부리고 살 이유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죽어라고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만 가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보다 의의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천국잔치를 정말 믿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서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며 삽니다.
에녹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들려 올라갔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죽지 않고 바로 하나님나라에 간 것만 다르지, 에녹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처럼 살다가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사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천국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여러분이 지금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고백이 안 된다면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마음이 좋았다 힘들었다 한다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영향받을 곳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내 잔이 넘친다"는 고백이 나와야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기쁨
예수님은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이 기쁨 충만한 삶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저는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화를 발견한 농부와 같이 기쁜 것은 몰랐습니다. 제가 가진 소망은 소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된 은혜가 보화처럼 느껴져야 진짜 소망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비로소 천국 소망 때문에 기쁨이 충만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기쁜 삶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천국 잔치가 기다린다는 것을 정말 믿고 산다면 인생 전체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금욕생활이 아닙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 은혜의 생수가 흘러넘치는 삶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고 목말라 하며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만난 놀라운 감격을 사람들에게 소리쳐 전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자였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고 마음에 독기만 남아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했습니다. 더는 상처 가득하고 독기를 품은 말이 아니라 기쁨의 소리를 외칩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한 사람의 외침이 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외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인생에 잔이 넘치는 은혜는 형편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살아 계신 주님으로 만나고 그분이 나의 목자가 되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고 나면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천국을 소유하셨습니까? 천국에 갈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고백이 나오십니까? 천국에 가는 것은 믿는데 내 잔은 너무 비어 있고, 넘치기는커녕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입니다. 천국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든지, 아니면 잔이 넘치는데도 본인이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 잔치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 못한 자는 천국이 있음을 알게 되면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워집니다. 천국 잔치를 누리며 살려면 예수님이 목자이심을 믿고 죽어라 예수님만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나의 목자라는 분명한 고백만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다윗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양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내 때문에 편히 자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옆에 있으니까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에서 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자가 없다면 아무리 초장이 푸르고 잔잔한 시냇가여도 양은 죽음의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성공과 부유함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예수님을 죽어라고 붙잡고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나의 목자이신 주님이 함께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님의 딸이 선교지에서 선교 훈련 중에 위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님이 급히 선교지로 갔는데 손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장 고국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 상태로 20여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그곳에 두고 오면 치료도 못 받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하고 떠나는 날 아침, 아버지로서 너무 두려웠다고 합니다. 만약 잘못된 결정이면 딸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갑자기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아빠 손잡고 떠나는 여행
위험하지만 행복한 여행
주님과 함께 가는 여행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행
딸의 손을 잡고 딸에게 이 고백을 들려주었고, 아버지이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족함, 위험한 여행이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자라면 어디든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의 길을 가도 두렵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선교사님의 딸은 한국에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사망의 길을 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푸른 초장이 아니고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 그 분입니다. 여러분이 이 신앙만 분명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목자이신데도 실제로는 목자 없는 양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 동안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았습니다. 예수님만 죽어라고 붙잡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습니다. 마음의 소원은 오직 잘 사는 것, 돈 벌고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목자 없는 양들은 즐겁게 돌아다닙니다. 십일조는 생각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돈 벌어 쓰다보니 살만합니다.
그런데 수시로 마음에 공허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교인은 목자만 따라 사는 것이 귀찮고 싫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큰 시험이고 두려운 일입니다. 마귀는 교인들의 귀에 이렇게 속삭입니다. "목자가 있으니까 불편하지? 매여 사는 것 같지? 목자를 떠나서 자유롭게 살아봐. 인생은 재미있는 거야.“
정말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와도 선악과를 먹어보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고, 가룟 유다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얼마나 무섭습니까?
저는 목사가 되고도 한동안 성공을 위해 살았습니다. 목회를 열심히 했습니다. 제 마음의 동기는 성공이었습니다. 목사에게도 성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이 100명 모이면 300명을 바라보고, 300명이 넘으면 1,000명을 바라보고 목회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뭔가 이룬 것 같아도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매사가 스트레스였습니다. 더 큰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위해 살면 목사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난 다음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으로 살게 되고,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천국이라는 보화를 찾았고, 내가 이미 그것을 소유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잔을 이미 받은 은혜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한 여성이 첫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개는 리스트의 제자입니다"라고 광고를 붙였습니다. 리스트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사람을 모으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독주회가 열리기 전날 리스트가 그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리스트가 마을에 온 것을 알고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처지에 피아노를 공부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주회를 열어 주목받고 싶어서 선생님의 귀한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는 여인에게 리스트가 대답했습니다.
“큰 죄를 지었군요.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그렇게 울지만 말고 이쪽으로 와서 한 곡 연주해보세요." 그 여인이 한 곡을 연주했습니다. 리스트가 듣고는 “이 부분은 이렇게 연주하면 좋겠네요”라고 하며 몇 가지를 지적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당신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 제자라고 말해도 됩니다. 제가 당신을 가르쳤으니까요. 그러니 내일 당당하게 연주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세요. ‘마지막 곡은 제 스승 되시는 리스트 선생께서 해주시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곡 연주하겠습니다.“
이 여인은 연주회 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망신을 당해도 모자란 순간에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뭐 그 정도면 내 잔이 넘친다고 할 만하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대신 죽으셨습니다. 성령님은 내 마음에 오셨습니다. 지옥 갈 자가 천국 가게 되었습니다.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여인보다 우리야말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만하지 않습니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다
정연희 작가의 실명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신아출판사)에 맹의순 전도사가 겪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6·25 전쟁 때 신학교를 다니던 맹의순 전도사가 피난 중에 북한군 간첩으로 의심을 받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정말 기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어렵사리 구명운동을 벌인 지 2년 만에 맹의순 전도사의 누명이 풀리고 석방 통보를 받았는데, 스스로 석방을 거절하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를 이곳에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건 결코 희생이 아닐세.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나같은 부족한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수용소에 억울하게 붙잡혀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인민군, 중공군 포로들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명지로 보내셨기에 그들을 자신이 돌봐야 할 양들로 여기며 그곳에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용소에 남아 중공군 환자들을 돌보다가 2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다음은 그의 장례예배에서 한 중공군 포로가 읽은 추모사입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사랑의 주인이었던 맹의순 선생이 가시다니.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고루 살피고 주물러주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통증이 가라앉고 목이 타서 잠 못 이루던 육체가 편히 잠들곤 했습니다. 겨울이면 따뜻한 물로, 여름이면 시원한 물로 우리의 얼굴을 씻어주고 손을 닦아주고 때로는 발도 씻겨주었습니다.
선생이 쓰러지던 그 밤, 환자들을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 봉독하신 후 높은 곳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따라 외웠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과 함께 마지막 환자를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시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우리는 통곡했습니다. 염치없는 우리가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우리는 지금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 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 일동”
참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 내 잔이 넘칩니다." 이 고백은 여건이 좋고 부족함이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상황이라면 언제든, 어떤 형편에서도 나옵니다.
주님, 제 잔이 넘칩니다!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한 전도사님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가족 전도는 먼저 믿은 성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기뻐하면, 믿지 않는 가족들이 그 기쁨에 들어오고 절로 전도가 된다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에게 마음 따뜻한 가족이 있지만, 가족 전도가 완전히 되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날 말씀을 들으며 내 아픔에 울었고, 가족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성도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또 울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보석을 준 나에게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 제목이라고 여기던 형제들로 인해 제가 더 많이 기도하고 주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기도 제목이 생길 때면 보석을 선물 받는 기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여러 가정에 전화 심방을 했는데 가정마다 기도제목이 많았습니다. 성도의 기도 제목이 집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보석을 받는 것과 같은 감사함이 더 컸습니다. 저는 보잘것없지만 기도제목을 나눠주는 성도가 있어 감사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보석을 받은 저에게 주님은 참으로 부유한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고백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미 우리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모든 은혜를 다 받고 있습니다. 모든 사랑을 다 받고 있습니다. 천국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보십시오. 천국 잔치가 믿어지면 지금 있는 형편에서 "주님, 충분합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 그렇게 살게 됩니다. 정말 죽어라고 예수님만 붙잡으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까? 죽어라고 예수님만 붙잡으세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고백을 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정말 충분합니다", "주님, 제 잔이 넘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출처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신가? 유기성, 규장, 2022, 215-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