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래시조》2018.가을호 계간평(2018.8.30.)
즐거운 곳에선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시조집 그 집 뿐이네
노창수(시인·문학평론가)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내 집, 즐거운 내 집 뿐이리.”
-존 하워드 페인 작시 「즐거운 나의 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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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1791~1852)은 4월 9일 알제리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31년이나 지났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가져온다. 그에겐 그리워할 고향도 안착한 집도 없었다. 그렇듯 평생을 유랑하며 살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란 노랫말을 쓴 사람이다. 이 노래는 1823년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Maid of Milan)에서 불리어진 뒤부터 더욱 유명해진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의 애창곡 순위 1번이다. 우리네 삶의 근본이 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한 때문이라 한다. 이 곡은 영국의 음악가 헨리 비숍(Henry Rowley Bishop,1786~1855)에 의해 작곡됐고, 남북전쟁 때에도 남군, 북군 할 것 없이 함께 불렀다. 1862년 오페라가수 아델리나 파티가 링컨 대통령의 요청으로 백악관에서 부르는 등 인기는 연이어졌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Home Sweet Home’이란 문구로 예비 신부들이 혼수감 용 자수(刺繡)를 하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양복 카버나 옷을 거는 횟대보의 장식문자로 쓰인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영화 속에서도 명성을 누린다. 1939년 『오즈의 마법사』, 1944년 『비소와 낡은 레이스』, 1982년 『아미티빌의 저주』, 그리고 일본에선 1988년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 에 삽입되기도 한다. 이렇듯 시대를 초월, 「즐거운 나의 집」은 고공 행진으로 지금도 애창 중이다.
그런 스토리의 의미로, 나는 「즐거운 나의 집」 대신 작은 시조집(‘集’과 ‘宅’의 重意)을 읽는 게 내 쉴 곳이며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담는 제목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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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금년 8월 4일~5일 문경새재 시인학교에 1박 2일로 다녀왔다. 거기, 시각장애인을 비롯 50여명이 예선을 통과한 후 현대시조 100편을 전혀 틀리지 않게 암송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토너먼트로 겨룬 암송대회에서 다시 가려진 입상자들은 우열의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상막하, 난형난제의 실력이었다. 대회 입상자들의 공통된 소감이 ‘시조 암송엔 재미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암송 100편 중 겨우 1~2군데 버벅대다 입상권에 들지 못한 애석한 출연자들 모두가 내년에 다시 도전할 거라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이들은 왜 시조를 재미있게 외울 수 있었는가. 그건 시조 자체의 리듬, 그리고 해학과 풍자가 담긴 내용 때문이라 했다(대부분 암송자들이 정용국의 「어금니」, 이종문의 「효자가 될라카머」 「아버지기 서계시네」, 조운의 「구룡폭포」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런 시조는 막힘없이 술술 외우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참가자들은 말했다. 『도전! 시조 암송 100편』(2013 알토란북스)이란 교재엔 그런 재밌고 좋은 시조로 선별·편집된 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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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털고 털어버리고, 8월의 맹서(猛暑)가 주춤해진 저녁시간에 자판을 두드린다. 도트락 탁! 핑거 보드와 모니터에 눈길이 어찌 멀어지려는 데, 애 뜯고 다가가 살펴본다. 이러라니! 신작 곳간에 웬걸 알곡이 가득 찼다. 수매(收買)를 위해 까짓 매짐(힘에 겹더라도 욕심껏 짊어지는 일)까지 했다. 이 무슨 배짱인가, 편집주간이 뭐라든, 원고량이 넘든 말든 상관없이 좋았다. 파장에, 별쩍스레 따라오던 조무래기들조차 가버렸는데, 욕심 많은 미련한 도둑처럼 시조 가마니들을 낡은 달구지에 가득 실었다. 주책이었다. 뭐 하는 수없이 다 읽었다.
(1)봄이 온 줄 알았구나
그 눈바람 치기 전엔
망가져 달린 목련
텅빈 속 드러낸 채
잡느라 꽉 잡은 것이
허공이라니,
바람 분다
-김정연 「봄, 계약직」 전문
‘춘투(春鬪)’라는 말이 있지만, 비정규직은 거기 포함도 시켜주지 않은 때도 있었다. 천지에 ‘봄은 왔건만 세상사 쓸쓸 하더라’는 잡가(雜歌)의 한 대목처럼 계약직이 서야 할 곳은 황량하기 짝이 없다. 만화방창(萬化方暢) 봄이 와도 계약직은 꽃을 피워낼 땅뙈기마저 없다. 꽃을 운위할 낭만도 사치일 뿐이니. 정처 없는 떠돌이로 ‘오늘도 걷는다마는’과 같은 신세. 해서, 기껏 막걸리 몇 잔의 힘을 빌린 취한 평화로 위장했지만 속은 불안하다. 이 시조는 계약직 심리를 잔인한 봄바람이 뭉기는 목련꽃으로 희화화(戱畵化)한다. 그래서 「봄, 계약직」으로 “봄”과 “계약직” 연결이 가능해진다. “망가”져 달린 “목련”의 모가지는 생을 극화해 보인다. 목련이란 여성(근로자)을 상처 내는 당사자 즉 눈, 비, 바람(사용자)이란 횡포로 연관되어 읽히기도 한다. 꽃은 부드러운 아름다움의 상징 때문인지 할퀸 생채기는 더 처참해 보인다. “그 눈바람 치기”는 기득권자의 권위를 지칭하리라. 꽃샘추위를 견디려고 “꽉 잡은 것”이 있었지만 기실 그게 “허공”이었으므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망연자실 믿고 의지할 곳 없는 게 계약직과 비정규직들이니, 그들에게 이 사회는 비극 상연의 극장으로만 보일 터이다. “계약직”은 직장은 고사하고 명색만 거기 공허하게 “달려”(소속되어만)있다. 앞의 초·중장은 평이하지만, 종장 끝에 “바람 분다”라는 도약적인 압축으로, 신분을 맞뚫을 위협적인 나사가 조여온다. 이러한 종결어미는 목련 모가지를 분지르는 바람의 폭력에 대해 맞설 힘을 배제해버리듯 화자는 자동기술법을 택한다. 결국 계약직을 놓아주는 듯하지만, 다른 쪽에선 낯선, 날선 바람에 다시 맞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생의 고통에 힘들어하는 계약직은 자기 눈물로 제 가슴마저 에이는 상처를 무릇 겹쳐 겪는다. 아니면, 그런 현실을 읽어내는 화자의 말을 빌린 시인의 상처일 법도 하다.
(2)몽유병 환자였네
쓰잘머리 없는
헛꿈만 차서
한 하늘
한 생이 온통,
청보랏빛 추상(抽象)이네
먹어도
배를 못 불린
서정과 현실 사이
-임성구 「관념」 전문
찌들고 힘든 현실을 잊어버리고 공허한 관념의 세상만 누비는 게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에로 도피가 무위자연(無爲自然) 같은 철학적 관념으로 말해진 건 노장사상(老莊思想)부터이니 실로 “관념”은 오래 되었을 터다. 이 시조는 ‘서정’ 즉 [자연이란 관념]과 ‘현실’ 즉 [고통이란 삶]을 떠도는 걸 “몽유병 환자”로 비유한 첫구부터 ‘낯설게 하기’로 총질한다. 떠도는 생을 함축한 아포리즘적 구절이다. 사실 이런 표현이란 창작해 온 이력이 길지 않으면 드러내기 어려운, 이른바 경험을 ‘징험(徵驗)’으로 변화시키는 데서야 가능한 일이다. ‘체험-경험-징험’의 차례에 의해 글 쓸 걸 주문한 생육신 신숙주(申叔舟)가 설파한 그것 말이다. 그는 말년에 ‘징험’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해 한탄했다. 무슨 곡절인 듯, 징험에 의하여 뱉어낸 화자의 “몽유병”이라는 시어는, 시인이 시조에 투자한 지난한 세월의 늪을 확인해 볼만한 대목이다. “서정”을 먹는다고 육체적 “현실”의 배는 불러오질 않는다. 화자의 지적대로 서정과 관념은 “쓰잘머리 없는 헛꿈만” 채우거나 “한 하늘 한 생”을 “온통 청보랏빛 추상(抽象)”으로만 물들였을 뿐 화자에게 실리적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추상은 “먹어도 배를 불릴 수는 없”는 일일 터이다. 그래 “서정”을 캐는 일(시조쓰기)을 그만 둘까 고민하며 “현실”(먹고 사는 일)에 이른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슬럼프를 향한 하나의 야유적(揶揄的)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시인이 긁어낸 고민처럼 현실 상처에 피딱지가 떨어지자 다시 또 피가 난다. 하여, 시인의 서정엔 늘 현실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덧나있음을 주목하여 읽게 하는 건, 나만의 독법(讀法)은 아닐 게다. 「관념」은 [고생(苦生)-인생(人生)-만생(晩生)]에 걸치는 종합정리판 같은 사유이다. 구체적 사실에서 떠나와 외곬 “관념”에 사로잡혀 헤매는 시인, 그게 불행한 과거였다는 의식에 “몽유병”이라는 처단을 먼저 드러냈음직도 하다. 이 시조가 지닌 장점은 치고 올라오는 맛에 있다. 해서 극적으로도 읽힌다. 인식 세계란 사이의 극점들을 무느는 과정이다. 헌데 그 세계로의 진입이 쉽지는 않다. 아니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기에, 화자는 “서정과 현실 사이”에 떠돈 자신을 반성의 차원 보다는 회한(悔恨)의 변환으로 스위치화 하는 것 같다. 무릇 사람들은 이 “사이” 간극을 좁히려 애쓰지만 사실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실제가 그랬지 아니한가. ‘이론과 실제’, ‘말과 행위’, ‘논리와 정서’, ‘표(表)와 리(裏)’, ‘이상과 현실’ 등 좁히려다 종말에 부닥친 경우가 많았다. 마찬가지 ‘서정과 현실’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 관념 의식과 더불어, 불우한 시대로 거슬러가 보니, 이상, 김수영, 김관식, 천상병, 김종삼, 전봉래, 김만옥 시인 등, 행복사회를 건너뛴 우울과 고독의 몸부림에 생의 끝을 묻었던 게 공통점이다. 그 시대엔 유행이 “관념”에 이르는 일이었다. 그게 후세엔 ‘낭만’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알기로, 〈임성구의 시조바라기〉란 카페는 근 8년 공들인 곳이다. 한 때 메일을 열면, 으레 소형 카메라를 든 두 손이 하늘을 향해 있는 사진과 함께 연이어 작품이 올라오고 짧은 감상문과 약력이 잠깐 스쳤다. 그걸 한 컷씩 인터넷에 띄우기 위해 준비하는 날은 얼마나 부지런해야 했을까를 나는 안다. 아마 그 세월로 수많은 시조를 읽고 있었기에 그의 작품이 일취월장하지 않았나 추측해 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한데 그 익숙한 카페를 청산했는지 지금은 〈성구의 들메토방〉 카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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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소재가 궁해질 땐 역사적 사실을 골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일은 [사실:느낌]의 대차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8:2나 7:3이면 사실에 치우쳐 시답지 않을 것이다. 6:4나 5:5로, 아니면 경우에 따라 4:6 정도도 괜찮을 듯은 싶다. 흔히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느낌만을 쓰는 데, 전자는 시다운 느낌이 적고, 후자는 유치한 감상(예, 원시적 감탄)이기 십상이다. 역사적 사실의 서술에 치우치는 시인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말하자면 독자가 이해해야 할 최소 자료는 소개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독자 불신감 심리가 작용하는 까닭이다. 어떤 시인은 지나친 사실의 상세화로 역사 공부 시간에나 설명될 법한 내용을 자수율만 맞춰 시조라고 내놓는다. 일부 시인들은 그도 부족한지 각주(脚註)를 심하게 달아 무슨 ‘고증자료철’ 같은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기행시조도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다. 헌데, 다음 시조를 보고 필이 왔다.
(3)바람의 동쪽에는 쇠 냄새 묻어왔다
자욱한 흙먼지 속 말발굽 솟구치는
아라국 철기병사들 실루엣이 떠돈다
바람의 북쪽에는 홍련이 날아왔다
칠백 년 자궁 속을 까마득히 기다리던
귀고리 영롱한 소녀 치맛자락 끌린다
죽간에 박혀있는 촘촘한 별의 내력
듬성듬성 이가 빠져 골다공증 앓고 있다
다 삭은 구름 한 조각 고분 위를 맴돈다
-김덕남 「말이산의 기억」 전문
첫수의 초장 “바람의 동쪽에는 쇠 냄새가 묻어왔다”라는 단언(斷言)과 둘째 수의 초장 “바람의 북쪽에는 홍련이 날아왔다”의 단언 사이의 대구(對句) [동쪽]과 [북쪽], [쇠냄새]와 [홍련], [묻어왔다]와 [날아왔다]를 배치한 것으로 보아 이 역사 시조가 사실만의 진술이 아닌, 시인의 재해석적 입장으로 다루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셋째 수의 초장과 중장 즉 “죽간에 박혀 있는 촘촘한 별의 내력”으로부터 “듬성듬성 이가 빠져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에 이르는 단계의 연유와 결과도 주목해 볼만하다. “촘촘한 별”과 “골다공증”의 이질적 대상에는 시각의 변화, 시대의 차연성(差延性)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말이산의 기억”에 아라가야는 “삭은 구름”이 맴도는 쇄잔한 “기억”속에서만 잔존한다는 사실이다. 시인이 주(註)에서 밝힌 바대로 ‘말이산’은 현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산으로 이 시대의 정치지배층들이 묻혀있는 걸로 추정되는 고분군이다. 현재 남아있는 무덤 위상으로 한때 초강대국이었다는 것에 착안, 고사(古史)의 주체화(主體化)를 시도한 작품이겠다. 이 시조가 갖는 매력이란, 사유를 다음과 같은 극한점에 놓고 화자의 여유를 독자에게 베푼다는 점에 있다. 즉 [시인의 사유→독자의 희망]의 연유 방식이겠다. 예컨대 “자욱한 흙먼지 속[침묵]→말발굽 솟구치[희망]”거나, “칠백년 자궁 속[침묵]→까마득히 기다리[희망]”는 것과 같은 구절을 통해 [침묵]하는 절망들에 대해, [희망]의 답사(踏査)를 시도하고 역동화(逆動化)한다. 하니, 김현자 평론가가 『현대시의 서정과 수사』에서 소월시에 적용한 바 있는, [극적 구성의 시학]인 셈이라면 어떨까 싶다.
이외에도 각 수의 종장, “아라국 철기병사들 실루엣이 떠돈다”(첫수), “귀고리 영롱한 소녀 치맛자락 끌린다”(둘째수), “다 삭은 구름 한 조각 고분 위를 맴돈다”(셋째수)에 활용된 동사 어미를 진행형 버전을 차용, 생동감을 작동시키기도 한다. 역사물 시조이기에 과거형으로 쓸 법한 상식 틀을 깬 것이다. ‘아라국’의 부흥기를 상징한 “철기병사”, “귀고리 영롱한 소녀”, “구름”을 환기시키는 데 있어서도 ‘재생’ 시스템을 시어별로 장착한다.
사라진 역사는 언젠가는 재현된다지만, 그 시대가 지닌 정서적 부활을 시도하는 건 시인의 영혼에 깃들인 의지로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지닌 의의를 짚을 수 있겠다.
(4)꼰대도 다 버리고 줏대도 발로 찼다
찢는 대로 자르는 대로 쏠리고 기울다가
예저기 기웃거리던 눈빛마저 지웠다
묽어지거나 흐려지거나 저를 녹여 저를 만드는,
건더기도 알갱이도 체에 거르듯 치대면서
쫀득한 묵의 이미지, 그 맛이면 좋겠다
-박희정 「묵이 되라」 전문
시와 시조계에서, ‘묵’에 대한 작품은 묵 만드는 고장에서 흔히 보이는 낌새이다. 장석남(「묵집에서」), 이종문(「묵값은 내가 낼게」, 「묵 한그릇 하러 오소」) 등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던 시절도 있지만, 어느새 그 ‘묵’ 품바에 강산의 세월도 지나갔다. 헌데, 이젠 박희정의 시대인가. 이 작품은 앞서 개척한 선배들의 ‘묵 시조’도 다루지 못한 경지까지 접근해, 유머와 풍자의 함지박을 깰 줄도 안다. “꼰대도 다 버리고 줏대도 발로 찼다”는 대구의 명승부를 보여주는 초장부터가 이런,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도발적이다. 묵을 만드는 과정이 장인다운 풍세인가 싶게 [숙달-능란-달변]으로 치닫는 바도 예사롭지가 않다. “찢는 대로 자르는 대로 쏠리고 기울다”라든가 “건더기도 알갱이도 체에 거르듯 치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할머니의 묵 솜씨처럼 소매를 걷는 양조차 다부지다. 누구에겐가 질세라 손놀림마저 척척이다. 다 되어가는 묵은 “묽어지거나 흐려지거나”를 살펴 결국은 “저를 녹여 저를 만드는” 조제 작업의 주체화를 거친다. 이후 “쫀득한 묵”으로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달고 “그 맛”이 결정되는 데, 결국 가서도 덤덤한 묵 맛이다. 혀에 감칠맛이 아닌, 소박하고 질박한 변환이 곧 묵임을, 그 화려한 생을 비꼬는 반역이 시조 저변에 묵사발처럼 담겼다. 칼 같이 예리한 촉감에다 불을 붙이는 듯한 현대식 현란한 요리 맛에도 ‘묵’은 반란의 무딘 혀를 놀린다. 그냥 꿈쩍 않고 묵묵히 네모에 갇힌 자세거나 조폭들이 조지고 가버린 바 묵사발 그대로다. 묵의 존재를 이렇듯 의뭉하게 드러내는 시인은 이제 ‘박희정표 묵’이라 불러도 될 듯은 싶다.
이 능청 떪과 더불어 생각나는 시인도 있다. 최근 풍자와 아이러니에 달인이 다 된 이남순 시인도 묵 시조 한편 써보라면 욕할까 ㅋ.
(5)골목길은 엎드려 순한 목을 늘이고
구부러진 등허리 잠자코 내어준다
여전히 돌담은 낮아 훤히 뵈는 툇마루
빈객이 하마 올까 기다림도 끊겼나
뒤축 닳은 털신 가득 무심코 담긴 신록
새들과 길고양이가 빈 마당을 다툴 뿐
낯선 고향 마을을 천천히 걸어본다
허물린 줄 모르게 경계를 지우는 곳
속사정 묵은 정 품고 골목길은 엎드려
-서연정 「골목길은 엎드려」 전문
이제 보니, 시인은 전통적 매재(媒材)에 관심이 많다. 즉 「일년」, 「돌의 미소」, 「풍등」, 「13월」 등 예의 전통매재는 얼마든지 있다.
이 시조에서 “골목길”에 대한 이미지는 “구부러진 등허리”, “뒤축 닳은 털신”, “새들과 길고양이” 등과 연몌되듯 그 길에 다기(多岐)한 감각들을 기술한다. “엎드려 순한 목”을 늘이고 있는 길은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던 시절, 또는 아이들이 골목대장노릇을 하던 때를 다 보내고, 이젠 할 일 없이 그냥 “엎드려” 있다. 사람이 사라진 곳에는, 지난 시간이 훑고 간 저간의 “속사정”과 한 때의 소리들이 고여 있는데, 그것을 듣는 이는 시인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정적의 골목에서 화자는 “속사정”과 “묵은 정”을 함께 연유해 내기도 한다. 그건 고향이 품었던 실루엣이자 정붙이들이다. 가령 “훤히 뵈는 툇마루”, “무심코 담긴 신록” 등. 그것은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지우는” 사정(묵은 정)이 되기도 한다. 서연정의 ‘골목’과 ‘길’표는 이미 등단작 「먼 길」(1988년 서울신문 신춘)에서 “상처가 피고 지는 골목 끝 그대 가슴에 가난하나 지극히 아름다운 약속으로 오늘은 저녁별 하나를 바친다, 눈물 같은” 이라고, 길에 이르는 서정적 징표로 서사가 내포되게 진술한 바 있지만, 이 골목길에선 “구부러진”, “닳은” 등으로 연결되는 낡아서 더 익숙해진 곡선의 이미지를 아끼는 듯 내놓고 있다. 그만큼 세월의 두께를 노정하는 원숙미에 이른 것이리라.
이제 그의 시조는 어느 새 짧은 시선을 피할 줄 안다. 그래서 “구부러진 등허리”, “뒤축 닳은 털신” 등 둥글어지는 묵은 정의 모습들을 조용히 끄집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여, 그의 눈길은 온화고 길어져 보인다. 시인은 그 동안 여러 달에 걸쳐 광주의 다양한 길과 골목을 답사한 경험을 가진 바, 이제 책상 앞에서 그를 ‘풀어내는가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일견, 골목의 의인화는 생태의 귀환을 환기하기도 한다. 즉 “구부러진 등허리 잠자코 내어준다”는 장면에서, 등허리를 내어주기 위해 구부러지는 한 골목의 배려를 본다. “빈객이 하마 올까 기다림도 끊겼나”에서, 빈객이나 오기를 기다리지만 그것도 끊겨 오지 않는 모습을, 그러면서도 “하마 올까”에 잡히듯 미련의 기대와 긴장감을 구동시킨다. 그리고 “허물린 줄 모르게 경계를 지우는 곳”에서 빈 마을에 담들이 허물어져 골목을 덮어버려 이제는 담과 길의 경계가 모호해진 모습을 보이지만, 폐허에서도 골목과 이웃이 소통하려는 내밀하고 소소한 장면을 유추해 낼 수도 있다. 실로 오랜 적막과 고요 속에서 꿈틀거리는 소통과 생을 읽어내는 ‘징험의 시학’일 법하다. 조태일 시인의 초기 평론집 『살아있는 시와 고여 있는 시』(1981 창비)에서 피력한 바, 고여있는 사유와 살아있는 시를 관통하는 게 언필칭 ‘미학적 맥락’이겠다.
이를 적용해 보건대 ‘고여 있는’(a) ‘사유’(b)와 ‘살아있는’(a') ‘시’(b')의 드러냄, 즉 [고임=생동](a=a'), [사유=시](b=b')라는 [한몸](a=b, 또는 a'=b')임을 의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으로서 ‘정서’와 ‘사유’ 그리고 ‘시’를 몸의 일체로 보려는 서연정식 시학(예컨대 「문」도 그런 이유가 된다)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를 읽는 독자에게, 대상과 사물이 가슴과 마음으로 연잇게 하고, 나아가 그런 생태적 호흡에 일치하는 독립체를 갖도록 하는 시조의 특징, 이게 그의 시학이라면 단정투가 될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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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식을 걷어내고, 우리의 주변을 긍정의 꽃밭으로 본다면 아마 의미 있는 걸 상당히 건져낼 듯도 싶다. 가령 출근 때 스쳐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맵시, 하루를 마감할 무렵 차창에 비낀 노을과 더불어 찍혀 오는 풍경, 때로 쇼 윈도우에 진열된 상품을 보는 놀라운 시선, 또는 ‘그저 그렇지’ 하고 지나치는 일상에 무심코 유혹하는 사물의 빛을 만나는 순간은 얼마나 값진가. 그때의 놀라움 또는 잔잔한 감흥은 사뭇 시적일 수 있다.
(6)해양대 방파제에 대자보로 붙여놓은
‘보름아, 사랑한다!’
붉은 저 사랑 고백
스무 살 막무가내에 봄바람도 설렌다.
-손증호 「직진」 전문
이 시조는 “해양대 방파제”를 지나다가 무심코 본 “대자보로 붙여놓은” 대담한 글을 보며 순간의 감흥을 전언한다. 시인은 채집하는 아이가 단번에 던지는 포충망처럼 펄럭이는 대자보(大字報)를 시선의 가위로 싹둑 잘라내 온다. 사실 “대자보”라면 게시판도 부족하여 대학건물 빈 곳이면 어디나 붙일 수 있던 80~90년대를 거슬러갈 필요도 없다. 무렵의 대자보엔 ‘연대투쟁’, ‘퇴진운동’, ‘출정식’ 등을 유도하는 당찬 문장으로 켄트지 전지에 굵은 매직으로 가득 메워 쓴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문장의 호흡이, 아니 문법이 나왔을까 하며 감탄 삼아 들여다 본 일도 있다. 그 시절의 대자보가 그랬듯 철망 속 게시판에 녹색 테이프로 가장자리가 고정되곤 했다. 채 한 달도 못가 테이프 자국이 덕지덕지하곤 했을 만큼 대자보는 많았다. 헌데, 이 시조는 그런 시대를 심각하게 지났던 기성세대의 무거운 대자보가 아니다. 억압을 비웃는 논리와 정의를 내세우는 원칙을 진술한 대자보로 만일 그런 소재를 빌렸다면 되레 망치는 시조로 알맞았을 것이다. 참 뜻밖에 “보름아, 사랑한다!”가 대자보로 붙어있다. 그야말로 돌발직구의 “직진”이다. 화자는 순간 상식적인 ‘대자보’를 거부하고 순간의 “대자보”를 접수한다. 화자가 전한대로 “스무살”이란 참 느닷없는 도발을 저지르는 “막무가내”(‘무조건 달려갈 거야’의 직진) 같다. 이 전차 같은 직행에 덩달아 “봄바람”도 “설레”게 하는 데 힘을 몰아준다. 뿐인가. “직진”이란 제목이 갖는 설득력 때문에 이 시조를 거슬러 읽는 힘도 얻게 만든다. 단시조의 특성과 장점을 한 큐에 잡은 시조이다. 소재의 특징과 위치의 각도를 촉발해내기 위해 분발하는 건, 초크로 손질한 큐의 끝을 기다리는 사각 코트 그 안을 누비는 빌리아드(billiards)의 그 당점(撞點)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시조라는 빌리아드 판 위에선 묘사나 표현의 당점이 더 정확해야 한다. 하면, 그건 물론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의 법칙이겠다.
(7)퇴고에 집중하자 톡방도 끊었는데
책꽂이 자판의 틈 먼지 내내 거슬리고
떼쓰는 물때쯤이야 참견말자 외면하다
내친 김에 커튼 교체, 화장실벽 대청소까지
유혹에 깜빡 넘어가 한나절을 훅! 털리고도
두 눈은 또 데룩데룩 핑계거리 찾고 있네
-이은주 「먼지의 유혹」 전문
원고를 쓰다가 우연히 보여지듯 “책꽂이”나 “자판의 틈”에 낀 “먼지”가 “거슬리”는 때가 있다. 그걸 닦아내다가 본연의 업무는 까마득히 잊고 싱크대 “물때”나 “화장실 벽”까지 닦다가, 어찌 내친 김에 생각지도 않은 “대청소까지” 하는 수가 있다. 계획이나 주제에 이탈하는 경우를 소재로 잡은 작품이다. 내 경우, 밀린 청탁이 있어 글을 쓰려고 서재에 들렀다가 글은 한 줄도 못쓰고, 한 주일 동안 우송해 온 책들이 책상에 쌓아둔 채여서 그 책들을 분류 정리하고 제자리에 꽂다가 하루를 보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사실 오늘도 그랬다. 그 일을 하다 문득 이 시조가 눈에 밟혔다. 나도 화자처럼 “내친 김에 커튼”을 “교체”하듯 무거운 임시 서가를 비우고 재배치하는 등 비오듯한 땀이 범벅될 만큼 큰 작업을 무슨 댐 공사처럼 시작한다. 그리고 쏟아진 먼지와 쓰레기 처리 등 이른바 “대청소” 작업에 돌입한다. 결국 청소와 작업에 “한나절을 훅! 털리고” 만다. 끝나고 나서도 “두 눈은 또” 어디 정리할 데가 없나하고 “데룩데룩 핑계거리 찾고” 있다. 친구들과 “톡방도 끊”고 글 쓰고 “퇴고에 집중하”려 했지만 결국 이도저도 못하고 먼지 터는 일과 공사까지 번지게 한 일을 담아 유머와 위트로 윤색해 냈다. 이 시조를 뒤바꾸어 읽어보면 글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피심리로 작동된 잠재의식이란 역설도 가져볼 수 있겠다. 화자가 의도한 퇴고 시간이 사라지는 「먼지의 유혹」이라는 제목에도 아이러니와 풍자로 여유가 풍긴다. 생활 속에서 시조가 건재하다면 비로 이 같은 노래가 아닐까. 심각한 주제의 시조보다는 이처럼 가볍고 재치 있는 시조가 더 읽히는 것을 필자는 오래 전부터 보아 왔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난 김에 한마디 덧붙인다. ‘나중에 하지’하면 또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과거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를 읽으라면 기피하는 수가 많다. 우선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나고 재미난 현대시조를 골라 읽힌다. 수업에 활력을 주어 좋다. 나이 먹은 시인들의 눈에만 명작으로 보일 작품은 아예 대상에 넣지 않고 있다. 어른의 잣대로 아이들의 눈높이를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필자는 교육청의 교육과정 일을 오랜 동안 보아왔고 교육부의 교과서 편찬에도 위촉을 받아 지칠 만큼도 일해 왔다. 한데, 위원 중에는 억지로라도 이런 작품을 읽게 하여 서정성을 길러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원로들이 의외로 많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런 학자나 원로가 있다. 그래서 우리 시조가 아이들로부터 소원해지는 결과는 아닐까 저어해 본다. ‘교과서 시조’라는 어른 이데올로기에 갇혀 아이들의 진정한 진취성을 막는 우를 범하는 건 아닌지 짚어볼 문제이다. 이에 반론하려는 분도, 아무튼 그렇다고 쳐주면 좋겠다(…)
(8)높은 담 앞에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발목이 저리고 그리움이 깊어져
너머에 네가 없는 것을
해 질 무렵에야 알았다.
숨 참으며 걸어갔을
너의 길 어디쯤
희멀건 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바람이 골목을 쓰는 내내
나는 떠 있다.
-임성규 「까치발」전문
높은 곳에 닿기 위하여 키를 키우려는 욕심은 특히 어린이에게서 강하다. 하여, 까치발은 동심을 유발하는 모티프로 자주 적용되어 왔다. 이 시조에선 그리운 사람을 행여 볼까하고 집 밖 “높은 담 앞에서 발뒤꿈치를 들”곤 하는 모습이 그릴 듯 잡혀온다. 결국 담장 “너머” 집 안엔 “네가 없는 것을 해질 무렵에 알”아 차리고 실망한다. 그 동안 너를 보고싶은 까치발놀음을 얼마나 했을까를 알게도 한다. 이 시조가 진경(進景)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계기로 한 심리적 전개가 탁월하다는 이유는 사유의 단순한 ‘마침’보다는 사유의 ‘연속성’을 다루고 있음에서이다. 그러니 ‘기미(機微)의 시학’이자 탐미주의의 한 반열에 놓여도 좋을 작품이다. 즉 “숨 참으며 걸어갔을 너의 길”엔 “바람이 골목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그렇게 “떠있는” 내가 확인되는 점, 그 “떠 있는”이라는, 공중부양 같은 지극성은 대상에 대한 관심 집중 표현으로 작품의 밀도를 더 해준다. 그래, 너를 기다리는 까치발짓, 거기엔 지금은 네(대상)가 없지만, 행여 또 나타날까 기다리는 그 애틋함이 나에게는 숨어 있다. “까치발”이라는 동적 소재를 기대적 차원으로 승화한다. 이 시조의 또다른 깊은 맛은 “발목이 저리고 그리움이 깊어져”라는 부분이다. 즉 원인에 대한 유추가 “너머에 네가 없는 것”(대상 부재)으로부터 나의 아픔이 확인(갈망의 전이)되는 것이다. 먼발치로나마 네가 보였다면 “발목이 저리고 그리움이” 이렇게까지는 “깊어”지지 않았을 것이니까. 결국 너의 부재가 그리움을 유발하고 지금도 동동거리는 발목 저린 까치발, 그게 화자가 말하려는 사랑의 전설일 게다.
6
시조를 보는 눈, 그리고 시조를 창작하는 자세가 바뀌어야 현대시조가 발전하는 길이라는 논지를, 필자는 월평, 계간평은 물론 논저, 평론서 등에서도 피력한 적이 있다. 과거 시인들은 서정성 깊은 게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건 시대적 환경과 관련한 언필칭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과거 서정시가 요즘 정서로는 맞지 않아 교사·학생이 서로 힘든 수업을 한다. 그런데 텍스트를 패러디하는 수업은 인기를 모은다. 재미없는 교재의 시조를 재미있게 풍자하여 학생이 다시 써서 발표하는 일이다. 아무튼 지금은 뭐든 재미가 있어야 접근하려는 판세로 세상이 바뀐 건 분명하다. 그게 2000년대 인문주의로부터 본격화되었으니 근 20년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자연풍월에 고전미다운 서정이 각광을 받던 시조가 이젠 시들해져 간다고 아쉬워들 한다. 이에 반격하건대 시조도 이젠 ‘재미’를 본질로 삼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실 그럴 자리가 없어 주저했다. 이 자리에서 까놓고 던진다. 왜 시조마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처럼 재미를 추구해야 하는가, 하고 부정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시대의 입들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다문다.
문학은 영원성을 추구면서도 유행하는 스타일은 분명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거나 재미가 없는 일이면 아예 하질 않으려 한다. 따라서 ‘서정성이 좋은 시조’에 못지않게, ‘시조도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진다. 아니 ‘시조도’가 아니라 ‘시조가 먼저’ 그 재미를 선수 쳐야 옳았다. 결국 시조시인에게로 귀결되는 책임전가식의 비평이 아니라, ‘재미있는 게 시조’라는 생각을 갖도록 학생을 비롯한 젊은 독자들을 유도해야 미래 지향적인 장르로서 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르면 마지못해도 수긍은 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 통사적으로 자연도태된 문학 장르가 모두 재미가 없다는 데 이른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그걸 깨닫고 쓰는 일 또한 시인의 한 책무일 법하다. 매 계절에 3,500여 편이나 떠도는 시조들 가운데 재미있는 걸 가려 뽑아 학생, 젊은 독자들에게 해설해 주는 게 필자가 추진하는 비평의 핵심이다. 이 계간평 자리에서 골라 뽑아 해설한 시조들은 학생들이나 창작반 사람들에게도 읽혀 나름 검증절차를 밟는다.
시조시인들이 몸소 독자 쪽 입장을 고려하여 창작함은 곧 수요자 중심의 사회를 의식하는 일이다. 헌데, 일부 시인들은 구태를 쉽게 벗겨내지 못하고 매양 관념적 서정만 쓰고 있다는 지적을, 지난 호에 나름대로 갈급한 바도 있다. 그래 문학 장르 중에 ‘가장 재밌게 읽히는 게 시조’라는 생각을 굳히게 할 수는 없을까, 이게 시조운동에 대한 필자의 질문이자 개선하고자 하는 주초(柱礎)이다. 혹 웃기는 일이라고 매도당할 듯도 하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래 어떻게 할 것인가. 하, 지금엔 ‘핸드폰에 함몰되는 것 이상의 재미가 아니고선 시조의 살 길은 없다’는 게, 극단적이지만 내 생각이다. 하여 핸드폰 앱에 재미있는 시조, 시조 게임, 퍼즐 시조, 시조 테트리스와 애니팡 같은 ‘앱(application)’을 우선 넣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발전하면 무협, RPG 등에 실을 수 있고, 재미있는 시조 낭독을 듣는 앱도 개발·운용해 볼만 하다. 시력 노화층을 위한 시도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이다. 타 장르보다 더 많이, 더 빨리 히트 칠 수가 있다. 가령, 〈팟빵〉의 젊은 시인들의 최근작을 읽어주는 ‘시를 읽어주는 여자’, 젊은 동시 모음을 소개하는 ‘동시 한바퀴’, 그리고 〈오디언〉에 소설을 극화하여 입체적으로 들려주는 ‘오디오 북’, 그리고 더 있다. 필자가 늘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세계 명작과 근대 및 최근 단편소설에 대한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이 외에도 문학관련 앱이 많지만, 예로 보인 바 시조만 빠져 있다. 이를 보충해 넣으려면 앞으로 시인들, 특히 시조 연구가들이 좀 바빠져야 할 것 같다.
7
이 글을 탈고하는 지점에 정확히 8월 18일 자정이 가까운 창틈으로 하, 가을바람이 숨을 고른다. 40도 가까운 불볕더위가 사라진 시점에 〈가을호〉 원고를 썼다는 게 신기하게도 일치점에 놓인다. 딴은 유난 떨 것도 없다. 7월 중순부터 시작된 폭염에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 왕의 아이디어에 의존해 위안을 삼았으니까.
내내 평을 썼다가 지운 작품 평들이 다섯 작품이나 된다. 아까웠지만 별 수 없었다. 넘쳐도 너무 넘치게 쓰면(계간평을 100매 이상 쓰는 일은 드문 일이다) 우선 지루하고, 잘난 체 한다 꼬집는 사람이 나타날까 싶어서다. 양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작들을 거명해 본다. 김광수 「천한(天寒)에 들다」, 김동관 「지하철 고수(鼓手)」, 김석이 「과녁」, 김문억 「오월」, 나순옥 「가소서」, 안주봉 「미스김라일락」, 우아지 「별」, 한분옥 「끈끈이주걱」, 정광영 「연적」, 박기섭 「폭포」, 권갑하 「독도를 떠나오며」 등이다.
8
자,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나 「타이타닉」의 전개 기법처럼, 다시 앞으로 스토리의 필름을 돌린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문학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희곡을 써 무대에 올릴까, 현대시를 써 문예지마다 이름을 뿌릴까,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고 돈을 벌까, 소설을 써 유명 문학상을 탈까….
다들 좋다고 날 오라 하지만 내가 머무를 곳은 오래된 시조의 집, 그 집뿐이다. 어떤가. 시조시인이여. 가장 작고 기초적인 즐거움이 가정의 행복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운율적인 문학 양식이 고유의 노래이다. 시조시인의 길로 우린 운명처럼 함께 들어왔다. 이제사 즐거운 딴 곳을 찾아 봤자이다. 문전 박대를 받다가 돌아온 탕아가 다시 시조한다고 엎어진 이를 여럿 보아왔다. 하니, 내가 머무를 곳은 오래된 시조의 집, 내가 가꾸고 살 집, 꽃을 피우고 새가 울게 할 집은 내 시조의 집[宅] 뿐이다. 떠돌이 삶을 멈추라. 작은 집에서 즐거움과 재미와 행복의 시조를 찾아 후대를 키우고 시조의 밭을 일궈 천년만년 살고지고 할 생각은 없는가. 시조는 여기(餘技)가 아니다. 고된 직업이다. 치열한 재미의 정신이 요구된다.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도 잊고, 어떨 땐 학교나 직장에 지각할 정도로 재미에 빠지는 시조놀이는 없겠는가. 그 공간을 우선 핸드폰에 만들 것을 제안한다. 장차는 AI, 로봇에도 집적할 일이다. 수학여행을 우주로 가는 아이들이 다투어 읊조리는 시조라는 공간과 집. 그건 우리가 궁구하고 굴려가며 살고지고 할 만한 희대의 둥근 보물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