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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와 世界歷史, 人物史 스크랩 태극기는 고종의 도안 지시로 1882년 8월 9일 수신사 박영효 만듦
sooaram 추천 0 조회 123 11.10.16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태극기

FIAV 111110.svg 태극기
FIAV 000001.svg 해군 선수기(船首旗)(선미기(船尾旗)는 태극기 사용)

태극기(太極旗)는 대한민국의 국기로 흰 바탕의 기 위에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이자 수신사박영효가 옥색 바탕에 파란 원을 집어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목차

[편집] 유래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船上)에서 고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왔다.[1]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도 쓰였다. 게다가 이미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2]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마건충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3]

 

고종이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게 하여 군민일체를 나타내려 하였으나[2]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이후, 1883년 3월 6일 (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에 당시 ‘조선국기’라 불린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되었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우리나라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의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정식 채택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져 태극기의 제작, 게양[4],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2007년 1월, ‘대한민국 국기법’이 제정되어 국기의 게양·관리법이 나왔고, 2007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편집] 도안과 상징

태극기는 《주역》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2]

 

원이 나타나는 태극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편집] 사괘

구분 이름(卦名) 자연(卦象) 계절(季節) 방위(方位) 사덕(四德) 가정(家庭) 오행(五行) 의미
Palgwae Geon.svg 건(乾) 천(天, 하늘) 춘(春, 봄) 동(東) 인(仁) 부(父) 목(木) 정의
Palgwae Ri.svg 리(離) 일(日, 해) 추(秋, 가을) 남(南) 의(義) 중남[子] 금(金) 결실
Palgwae Gam.svg 감(坎) 월(月, 달) 동(冬, 겨울) 북(北) 지(智) 중녀[女] 수(水) 지혜
Palgwae Gon.svg 곤(坤) 지(地, 땅) 하(夏, 여름) 서(西) 예(禮) 모(母) 화(火) 생명력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

 

[편집] 제작 방법

Flag of South Korea (construction sheet).svg

[편집] 올리는 날[5]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4]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편집] 국기 게양과 내림 시간

국기는 24 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국기를 낮에만 게양하는 경우, 다음 시간에 따른다.

기 간 게양 시각 강하 시각
3월 - 10월 07:00 18:00
11월 - 다음해 2월 07:00 17:00

[편집] 주석과 인용

  1. 글로벌세계대백과》, 〈개화파의 개혁운동〉, 태극기의 사용.
  2.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7쪽, 243-247쪽, 248-260쪽. ISBN 89-7626-546-7 04910 “(7쪽) 1882-1883년 사이에 있었던 국기(태극기) 제정과정에서 고종이 자신이 계승하고자 애쓰고 있는 정조대왕(재위; 1776~1800)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정치사상을 그 도안에 담기 위해 이 과제를 주도한 사실 / (245쪽 6-10줄) 4개월여 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시에 사용했다는 … 규장각도서 중의 '어기'가 바로 그것이다.”
  3.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의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 착안하여 동쪽을 의미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적은 용의 발의 수를 제시함으로써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4. 게양(揭揚)은 명사로 기(旗) 따위를 높이 매달아 놓는 것을 의미한다. 닮, 올림으로 순화해 칭하기도 한다.
  5. 대한민국전자정부 - 국기의 게양

[편집]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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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박영효: 야마자키<山崎永泳春> -철종의 부마

 

1861(철종 12) 경기 수원~ 1939. 9. 21.

한말의 정치가· 급진개화사상가. 갑신정변, 친일파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갑신정변 및 갑오개혁의 주체로 참여했다. 그의 사상은 북학파 실학의 바탕 위에 선 것이었지만,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제의 통치에 협력했다.

개화사상의 형성

본관은 반남.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現居士).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원양(元陽)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872년(고종 9) 4월 수원유수 신석희(申錫禧)의 천거와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부마가 되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1870년대 중반에 형 영교(泳敎)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가인 오경석·유대치·이동인 등을 만났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화지략 瀛環志略〉 등 청나라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

 

1878년 오위도총부도총관, 1879년 혜민서제조, 1880년에는 의금부판의금을 지냈다. 1882년(고종 19) 발생한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 비공식사절인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갔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안에서 태극팔괘(太極八卦)의 도안을 기초로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 체류기간 동안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세계대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兵事)·재무(財務)·흥산(興産) 등의 개화상황을 시찰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김옥균·서광범 등과 의논한 후에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신학문을 배우게 해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교섭을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11월 다른 동지들은 남겨두고 홀로 귀국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12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부에 치도(治道)·경순(警巡)·박문(博文)의 3국을 신설하고 도로의 확장과 정비,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 몇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 등 수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었고, 그는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그해 12월 다시 유수직마저 사임했다. 한편 박영효가 후쿠자와의 지원으로 발행할 것을 계획했던 신문 〈한성순보〉는 10월 1일자로 창간되었다.

갑신정변과 1차망명

당시 개화파는 대청(對淸) 문제와 개화의 방략을 둘러싸고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어 있었다.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권에서 소외되면서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마저 민씨정권에 접수당하게 되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국가재정난의 타개 방식을 둘러싼 민씨정권과의 대립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당오전 등의 악화 주조를 반대하고 울릉도와 제주도의 어채권을 담보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한 이들의 시도가 일본의 거부로 좌절되어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이에 박영효 등은 정변을 통한 정권장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원칙하에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해 민씨정권과 청군을 타도할 방침을 세웠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공사를 통해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청·프 전쟁의 여파로 일부 철수한 상태였다.

 

1884년(고종 21) 12월 4일 박영효 등은 우정국 낙성식에서 개화파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 후 박영효는 새 내각의 전후영사(前後營使) 겸 우포장(右捕將)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본군의 무기력과 배신행위,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군에 의해 삼일천하로 끝나자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생활중 이름을 야마자키[山崎永泳春]로 고쳤으며, 1888년 메이지[明治]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고종 25) 초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다.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권동수(勸東壽)·권재수(勸在壽) 등이 자객으로 파견되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3년 후쿠자와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을 목표로 도쿄에 신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했다.

갑오개혁과 2차망명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텐진 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청군과 함께 조선에 들러와 농민군을 진압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의 세력을 축출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일제의 도움으로 귀국한 박영효는 12월에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되고, 1895년 7월 왕비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를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반대파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그의 정계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마저 해산시켰다.

 

1900년(광무 7) 7월에 고베[紳戶]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등을 불러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義和君) 강(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한규설과 윤석준(尹錫準)에게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했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복귀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6월 7일에 서울로 올라가 궁내부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하고 6월 13일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받았다.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다.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1년가 유배되었다. 유배 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합병을 맞았다.

일제시기의 활동

1910년 일제의 회유책에 의해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에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를 역임했다.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1년 중추원고문, 1926년 중추원부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9월 21일 후작·중추원부의장직에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使和記略〉이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정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에 이전 복원하였다

 

 

 

▲ 박영효(젊은 시절 모습).

<고종 양위 반대>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가 경무청에 갇힌 말을 들은즉, 재작야에 일본 황태자가 한국 황태자께 대리(代理) 되신 치하를 신(新)황제 되신 양으로 전보하였는지라,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신황제 되신 자격으로 답(答)전보하자 하고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는 가로되,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리하실 뿐이요, 위(位)는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황제로 답전보하리오. 만만불가하다' 하되, 이완용씨가 기어이 고집하고 듣지 아니하여 일장 힐난하다가 박영효씨가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퇴궐하여 집으로 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 7. 23.)

얼마 안 되어 박영효(1861~1939)는 고종 양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본 순사들에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 사실만 보면 박영효는 고종에 매우 충성스런 신하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종 재위 기간 3차례 역모를 도모했고, 2차례에 걸쳐 22년간 해외에서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 박영효(일가족 모습.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박영효)
박영효(젊은 시절 모습)는 12세 때 철종의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와 혼인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지만 '철종의 부마'라는 신분에 평생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1870년대 중반부터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익혔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한국과의 외교분쟁을 우려해 자신들을 박대하자 그는 서광범·서재필 등과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서광범과 서재필은 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철종의 부마' 박영효는 "양반이 아무리 하더라도 노동을 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내가 양반인 것을 알아줌으로 설마 천역(賤役)을 아니 하게 될 것이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며 7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박영효는 1894년 친일내각이 조직되자 10년 만에 복권되고 내무대신에 임명돼 갑오개혁을 주도한다
. 그러나 이듬해 7월 자신의 측근을 무리하게 요직에 기용하려다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 전복을 획책한다'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0년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의친왕)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돼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07년 6월, 12년 만에 복권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된 그가 이완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현지 주민들에게 감귤 농사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몇차례 개혁시도가 좌절된 뒤 박영효(일가족 모습.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박영효)는 철저히 일본에 협력한다
. 강제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 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광수와 인터뷰에서 박영효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의 전도(前途)에 대해 비관하지 않소. 왜 그런고 하면 앞으로 더 망(亡)할 나위는 없으니까. 조금씩이라도 낫게 될 것밖에는 없으니까."('동광' 193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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