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6월 4일(화)
장소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융릉(隆陵) : 추존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합장릉)
건릉(健陵):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합장릉)
찾아가는길 : 양재역 중앙버스정류장 1551,1551B 버스 탑승하여 융건릉입구 하차
재실
▷ 융릉(隆陵) 이야기
융릉은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능이다. 융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1762년(영조 38)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묘를 조성하였고, 이후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라 불렀다. 1776년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는 장헌세자가 왕세자의 신분도 있었지만, 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무덤의 이름을 원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정조는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1789년(정조 13) 수원 화산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15년(순조 15) 헌경황후(혜경궁)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륭원에 합장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원을 능으로 높여 융릉이라 하였다.
융릉은 원으로 조성되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예를 갖추어 화려하게 조성하여 다른 조선시대 왕세자 무덤의 형식과 다르다. 봉분은 병풍석만 둘렀고 난간석은 생략하였는데 병풍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예에 따라 모란과 연꽃무늬로 새겼고, 병풍석의 인석(引石)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무석인을 추가로 설치하였고, 문석인은 금관조복을 입은 형태이며 석마, 석양, 석호는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정조 대에 세운 ‘사도장헌세자 현륭원’ 표석이고, 2비는 조선시대 ‘헌경혜빈’ 표석을 대한제국 때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로 바꾼 표석이다. 홍살문 앞에는 동그란 모양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는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 장조(莊祖) 이야기
장조(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영조의 기대가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자(대리청정), 왕세자를 경계하는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고 영조와도 불화가 자주 생겼다. 특히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왕세자의 비행을 고변하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결국 영조는 왕세자를 폐위한 후 창경궁 휘령전(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신주를 모신 곳, 현 문정전) 앞에 있던 뒤주에 가두었고, 왕세자는 8일 만에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폐위하였던 왕세자의 신분을 회복한 후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후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호칭을 올렸으며,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의 자격(고조부)으로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되었다가 곧바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 헌경황후(獻敬皇后) 이야기
헌경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월 18일 ~ 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년(영조 11)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62년(영조 38)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헌경황후는 본인의 삶을 비롯하여 친정 가문, 그리고 남편 장조의 참변에 관한 이야기를 자전적 수필로 쓴 『한중록』을 남겼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815년(순조 15)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고, 곧바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되었다.
*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개비자나무는 개비자나무과의 늘푸른 바늘잎 작은키나무로 보통 높이 3m 이내로 자란다. 융릉 재실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개비자나무는 높이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르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되어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보존 상태가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여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커 200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건릉(健陵) 이야기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건릉은 1800년(정조 24)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장조의 융릉(당시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21년(순조 21)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건릉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능 자리는 융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정하고 정조를 먼저 모신 다음에 효의황후를 합장하였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봉분 주변의 석물은 융릉과 달리 왕릉의 형식에 맞게 세웠다. 문석인은 융릉의 예에 따라 금관조복을 입은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원래 ‘정종대왕과 효의왕후’의 표석이었으나, 대한제국 선포 후 정조로 추존되면서 기존 표석을 갈아서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로 다시 새겼다.
▷ 정조(正祖) 이야기
정조(재세 :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 재위 : 1776년 음력 3월 10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는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정하였다. 정조는 1775년(영조 51)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고(대리청정), 다음 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고,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과 학문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학문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을 실시하였으며 활자를 새로 만들어 많은 책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흉년으로 어린이들의 구호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만들었고,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수원 화성(華城)을 건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 서울 배봉산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6년(정조 20)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인 과천, 안양, 사근참, 시흥, 안산, 화성에 행궁(行宮, 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을 설치하였다. 특히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옮긴 이후 재위 후반까지 12차례에 걸려 원행(園行)을 하였고, 이때마다 화성행궁에서 크고 작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정조가 지향했던 왕권 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1800년(정조 24)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정종(正宗)이라 하였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 효의황후(孝懿皇后) 이야기
효의황후 김씨(재세 : 1753년 음력 12월 13일 ~ 1821년 음력 3월 9일)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이 되었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와 헌경황후를 잘 모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800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정조)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시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라고 하며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또 1820년(순조 20)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 장수를 축하는 잔치)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이후 1821년(순조 21)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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