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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 하권
16. 보살행을 하는 까닭, 어둠과 밝음의 비유
또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증득하게 되는 법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성품도 없으며 실제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제일의의 몸이 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두 몸을 원만하게 성취하였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중득한 법을 버리고 일 등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곧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일에 머물러 둔 채로 보시를 행한다면 그러하다”라고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하였다.
여기에서 어둡고 밝음의 두 가지 비유는 유주(有住)와 무주(無住)의 과실(過失)과 공덕(功德)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사람이 깜깜한 가운데에서 평탄한 길을 버리고 길이 아닌 곳으로 가다가 험한 곳에 엎어지고 떨어져서 갖가지 고난을 받는 것과 같다. 즐거운 곳이 가까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들이 일에 머물러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얻을 수 없는 성품인 평탄하고도 빠른 도는 버리고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험난한 길을 행하는 것이어서, 나고 죽음이 있는 가운데에서 갖가지 곤경과 액운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의 경지를 어느 때에야 이를 수 있겠는가?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을 증득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밤이 이미 다 지났다’라는 것은 과보에 대한 애착을 버린 것을 말한다.
‘햇빛이 밝게 비춘다’는 것은 모든 법에 성품이 없음을 결정코 깨달아 아는 것이며,
‘갖가지 색깔을 본다’는 것은 모든 법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끊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아니어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 등을 깨달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하므로 속히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큰 열반을 증득한다.
이 일체법을 수행하는 가운데에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자신을 이익 되게 하는 데에는 다시 교수행(敎修行)과 의수행(義修行)이 있으니,
교수행이란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는 것이고
의수행이란 설법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남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것은 중생들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에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거나 닦고 익히며 남을 위해 연설하면, 여래는 이런 사람을 다 알고 이런 사람을 다 보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한량없는 복덕의 덩어리가 생겨서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취하게 하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받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작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지닌다’는 것은 돌이켜 기억하고 잊지 않기 때문이며,
‘읽고 외운다’는 것은 그 글을 펴놓고 독송하기 때문이며,
‘닦고 익힌다’는 것은 법문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량없는 복의 덩어리’라고 했는데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첫 아침[初日分]에 항하강 모래알과 같이 많은 몸을 보시하고”에서부터
“이 법문에 대하여 믿는 마음을 내고 비방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등의 보시한 복덕은 앞의 것보다 더 우세하니 그것은 일과 시간, 이 두 가지가 크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이 크다’는 것은 경에서
“항하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몸을 보시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시간이 크다’는 것은 경에서 “백천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임운과(任運果)를 수행한다고 말했는데 어떤 것을 임운과라고 말하는가?
‘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처음 발심했을 때부터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니, 이 생(生)과 다른 생에서 모든 공덕을 획득해 간다. 본래 기대하였던 것이 불과(佛果)이기 때문이다.
공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마(魔)와 이교의 도[異道]가 저해하거나 교란할 수 없는 것이며 공덕이 크기 때문에 수승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는 것이며, 복의 과보가 굳고 단단한 것이며, 최상의 법기(法器)이며, 원만한 자량(資糧)이며, 이기기 어려운 것을 능히 감당하는 것이며, 복의 원인이 된다는 이치를 깊고 크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며, 모든 죄를 뽑아버리고 속히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마와 이교의 도가 저해하거나 교란하지 못한다’는 것은 경전에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이다.
그 뜻이 어떤 것인가?
법의 위력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복과 지혜는 모든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니, 그런 까닭에 삿된 무리들이 저해하거나 교란할 수 없다.
‘공덕이 크기 때문에 수승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경전에서
“칭량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한량없이 많은 법을 받아 지녔기 때문에 그 공덕과 위력이 다른 어떤 것도 이와 동등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사람은 가장 수승하게 된다.
‘복의 과보가 굳고 단단하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과보(果報)가 한량없기 때문에 삿된 것이 저해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공덕이 광대(廣大)하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 가운데서 받은 모든 뛰어난 복이 그것을 핍박하여 빼앗거나 받지 못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상의 법기(法器)’라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 법문은 여래께서 대승을 발심한 사람을 위하여 설명하며, 최상승(最上乘)을 발심한 이를 위하여 설명한다”고 한 것이 그것인데,
법을 어떻게 헛되이 수행하는 자에게 주어서 그릇을 만들겠는가?
‘원만한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닦아 익히고 남을 위해 연설하면“이라는 등의 이와 같은 말을 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기 때문에 복덕이 증장하며, 법을 듣고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지혜가 증장한다.
어떻게 증장함을 보였는가?
경에서
“모두가 불가사의하고 칭량할 수 없으며, 가없고 한량없는 공덕의 덩어리를 성취한다”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한량없다’고 한 것은 이 공덕은 일체의 마음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니, 그런 까닭에 생각으론 알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으며 가없는 그러한 공덕을 얻는다고 말하였다.
‘이기기 어려운 것을 능히 감당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만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부처님께서 생각하기 어려운 미묘한 법을 성취하고 널리 수많은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여 조금도 남김이 없는 것처럼 경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기 때문이다.
‘넓고 크게 매우 깊이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소승법(小乘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곧 이 경전에 대하여 능히 받아 지니거나 독송하지 못한다”라고 한 이 말과 같다.
이 가운데 ‘넓고 크게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소승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매우 깊게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나라는 등의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복의 원인이 되는 곳’이라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어느 곳에 있거나 만약 이 경을 말하면”이라고 한 이 말과 같다.
복을 쌓고 죄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지제(支提)라 말하니 사람들이 법을 연설하면 그 공이 탑이 있는 땅과 동등하여 비록 생각하거나 지니거나 남을 위해 설법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체의 죄업에서 구제받는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멸시 당하거나 천대를 받으면”이라는 이 말을 한 것과 같다.
이 경전을 받아 지니면 마침내 부처가 된다고 하였는데 도리어 멸시 당하고 천대를 받는다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경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과거 세상에 지은 죄업 때문에 마땅히 악한 세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금세(今世)의 사람들이 경멸하고 천대하기 때문에 과거 세상의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래품(如來品)」에 말하기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면, 이 사람은 현세(現世)에 혹 악한 꿈을 꾸거나 혹 중한 질병을 만나거나 혹 핍박을 당하거나 억지로 남에게 부림을 당하고 멀리 떠나게 되거나 꾸지람을 당하고 욕을 먹거나 매를 맞아서 나아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이미 지었던 모든 악업이 다 소멸하며 없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게송을 말하리라.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업을 지었으나
짓고 나서 무서움과 두려움이 생겨
스스로 뉘우치고 만약 사람들에게 향한다면
영원히 그 악업의 근본을 없앨 수 있다.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허물을 뉘우치더라도 오히려 악의 근본이 제거되는데, 더구나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다른 가르침과 서로 다른 점이 아니겠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업장은 비록 백겁을 지난다 해도
끝내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아
갖가지 인연 만날 때마다
반드시 과보가 생겨나게 된다.
서로 어김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또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악취(惡趣)의 업은, 바른 법을 지니거나 과거의 죄를 뉘우침으로 인하여 비록 악취의 과업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현재의 몸에 여러 가지 괴로움의 과보로 받게 된다. 현재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는다고 해서 어찌 다 없어지거나 무너질 수 있겠는가? 악한 세계에 나지 않는다 해도 그 뿌리까지 다 뽑힌 것은 아니다.
만약 무간(無間)지옥에서 업을 받도록 결정된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엔 결정코 그곳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마땅히 겁(劫) 동안 머물면서 죄를 받다가 잠시 나오기 때문이며,
아사왕(阿闍王) 등과 같게 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김없다고 한 것이다.
[아사왕(阿闍王): 아사세왕(阿闍世王)을 말한다. 범명 Ajātaśatru, 팔리명 Ajātasattu의 간략한 음역이다. 중인도 마가다국의 빈바사라왕의 아들로, 모친이었던 위제희(韋提希) 부인이 회태했을 때, 점을 보니 장차 부왕을 살해할 아이라 했기에 아자타샤트루, 즉 미생원(未生怨)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미생원이란 태어나기 전에 원한을 가졌다는 뜻이다. 훗날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보호자로서 널리 교법을 폈다.]
‘속히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기겁으로부터 만약 또 어떤 사람이 나중의 말법 세계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설법하면 내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는 이것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 이런 말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공양한 복으로는 진실을 증득하지 못하지만 이 법문을 지니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경을 받아 지닌 공덕의 위력은, 가령 100으로 나누었을 때 저 앞에서 얻은 복의 덩어리가 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천으로 나누거나 백천으로 나누거나 몇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니, 취류(取類)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數)’라는 것은 60위(位)를 말한다.
이것을 벗어난 이왕(已往)의 수로는 가라(歌羅)에도 미칠 수 없고 비교하고 따져서도[校計] 미칠 수 없다.
[가라(歌羅)는 범어 kalā의 음역이다. 지극히 작은 수량을 말한다. 혹은 달의 직경의 16분의 1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가라분(歌羅分)ㆍ가라분(哥羅分)ㆍ가라분(伽羅分), 가라분(迦羅分)이라고도 표기한다. 수절(豎折)ㆍ계분(計分)ㆍ역승(力勝)ㆍ분칙(分則)ㆍ교량분(校量分) 등으로 의역한다.]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가라의 미세한 뜻에 의거해서 설명한 것이니, 경을 받아 지닌 복이 아주 미세한 성품이어서 그 공덕이 이미 많으므로 앞에서 얻은 공덕은 미칠 바가 못 된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교하고 따지기에 이르러도 끝내 이와 같을 수는 없으니, 미세한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일체(一切)이겠는가?
‘우파니사(優波尼沙)’라는 것은 인(因)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이 작은 부분의 복은 가장 뛰어난 과보에 대하여 인성(因性)이 되지만 앞의 복덩어리의 전체는 또한 원인이 되지 못하니, 그것은 진실한 과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치지 못한다고 비유한 것은 마치 어떤 어린 소녀[童女]를 달덩이 같은 얼굴[月面]이라고 말할 때 어린 소녀의 얼굴만 가지고 어떻게 전체의 달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깨끗한 빛깔 일부분만이 서로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앞의 복덩어리는 이와 같지 않아서 조금도 서로 비슷한 것으로 비유할 수 없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다만 문자를 받아 지닌 복을 말하는 것이니, 앞의 복은 이것과 서로 비슷한 성품이 없다.
그러니 박복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 문자를 듣고 받을 수 있기에 경에서
“만약 내가 갖추어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미혹하여서 멸시하고 천대할 마음이 생겨나리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이러한 공덕과 위력에 대하여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믿음을 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경에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도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생각하기 어렵고, 그 위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무슨 까닭에 또 보살승(菩薩乘)을 언급하며 마음을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느냐고 말했는가?
원인이 청정한 모습을 갖추어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갖추지 못한 것이며 어떤 것을 갖추어 나타냈다고 하는가?
닦은바 원인은 단지 세 가지 일의 모습과 생각을 버림으로 그 이름이 청정하게 되는 것뿐이 아니고, 내가 머문다, 나는 수행한다, 나는 마음을 항복받았다는 생각까지도 마땅히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이 비로소 청정해져야 하기 때문에 경에서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하며 진실로 어떤 법도 없는 것을 보살승의 마음을 낸 사람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제일의에는 중생이 반열반을 증득하는 경우도 없으며 또한 어떤 법을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경우도 없다.
발심(發心)ㆍ주과(住果)ㆍ수행(修行)ㆍ항복(降伏),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인데 이런 가운데에서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뒤바뀐 행으로써 청정한 원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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