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에서 찾아 본 불교의 모습>
윤리교육과
201026002
김지현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을 구별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음식의 경우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의 쾌락에서처럼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도 있으며 또한 사치나 인기처럼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그는 그것들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기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쾌락이 곧 목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방탕한 자의 쾌락도 아니며 무지하거나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는 성의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연일 음주와 연희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또 정욕의 충족, 평안한 생활을 하는, 즉 생선을 즐기고 호화로운 식탁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사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취할 것을 취하고 금할 것을 금하는 동기를 탐구하거나, 정신이 매우 혼란할 때 생기는 잘못된 의견을 떨쳐 버리는 건전한 사유이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의 쾌락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쾌락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행과 고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밝히고자 한 것뿐이었다. 어떤 육체적인 쾌락은 결코 완전하게 만족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쾌락에 계속 빠지게 된다면 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불만족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항상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더욱 많은 돈이나 대중의 인기, 혹은 고급진 음식이나 고관직을 원하게 된다면 그는 항상 현재의 상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늘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그의 본성을 최소로 억제할 수 있고, 쉽고 빠르게 필요한 만큼 만족시킬 수 있다. 적절한 욕구가 만족될 때 인간의 본성은 균형을 이룬다.
식도락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과식할 때보다는 현명한 사람이 적절한 빵과 물을 먹을 때 행복을 더 쉽게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현명한 사람은 음식을 조금만 먹도록 익혔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쾌락은 마음의 평정이다.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육체적인 고통이 없고 정신의 평온한 안정 상태라고 말한다. 평정의 느낌을 얻으려 한다면 욕망을 점차 줄여 가며 불필요한 근심을 극복하고 가장 온전하게 지속되는 정신의 쾌락에 의지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정신의 쾌락은 육체적인 일에 깊게 빠지는 일과 그것에 수반하는 고통을 방지해 주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육체적인 쾌락과 다름없는 것이기도 하다고 그는 믿었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인이 원하는 만큼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행복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은 원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물질적 쾌락의 추구는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고 더 많은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쾌락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쾌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데, 이런 생각을 ‘쾌락주의적 역설’이라고 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에피쿠로스와 불교의 사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세속에서 얻는 고통을 극복하고 보다 근본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 바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심이란 일시적인, 즉 물질적인 욕망을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을 바라는 마음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렸던 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불안에 떨고 외로워하며 미래를 두려워한다. 욕망은 채워질수록 점점 더 크고 강해지며 우리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 넣는다 . 에피쿠로스는 이런 삶을 사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깨우침을 준다. “행복이란 쾌락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쾌락으로 삶을 끌고 갈 때 생긴다.” 이처럼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될 쾌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과연 진정한 행복인지를 되묻는 건전한 쾌락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