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려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춤 추는 모습을 그다지 보지 못 한 것 같다. 잘 해야 명절 때 달빛 아래 강강수월래를 추어 본 정도이다. 이 때는 합법적으로 총각이 처녀 손을 순수하게 잡아 볼 수 있는 기회라 할 수 있겠다. 아니면 봄에 아가씨들이 냉이 캐러 들에 나왔을 때나 동네 총각들이 동네 아가씨들 분 바른 모습을 보았을 듯 싶다.
나는 민속 대명절인 추석보다 설날을 더 좋아 하는 편이었다. 설날에는 세배를 구실 삼아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러 이웃을 들리면 새로 빚은 동동주나 밀주 쌀막걸리를 거져 얻어 마실 수 있었으며 더불어 동네 여자 친구들 얼굴도 쉽사리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교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시골에 내려 가면 거의 귀족 자제 수준의 대접을 받았었다.
우리 고향 시골집은 충남 천안으서로 개그맨 김학래(실제 나이 1953년생)의 집과 한 울타리의 담을 공유하고 살았다. 김 학래 위로 두 누이가 있는데 그의 큰 누나와 나는 동네 친구이다. 김 학래는 어려서 내가 쓰는 서울 말을 배우겠다고 집에서 많이 내 서울 말씨를 흉내 내었다는 후문이다.
나는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때나 시골 고향 집에 내려 가곤 하였었는데, 한 해는 시골 동네 콩쿨대회가 열렸었다. 나는 서울 사람이라고 공정한 심사관 대열에 앉혀졌었고 고교 2년생이던 학래는 당시 내 앞에서 열심히 트위스트를 경연하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그가 수상을 했었는지는 나에게는 기억이 전혀 없다.
예전에는 서울 고궁 등에서 노랫가락 같은 민요에 맞춰 덩실덩실 추는 춤만 보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 후 닐리 맘보를 위시해 디스코. 고고 등이 유행을 뒤따랐었다. 전문적인 춤으로서 사교 댄스 강습장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춤 사위도 유행 따라 변하기에 너무배우기 어려워서 우리 같은 직장인은 막춤이 대세였었다.
약 25년전 대기업에 다닐 때 부서장으로서 3개 과(課)를 맡았었는데 휘하 여직원도 약 50여명이나 되었다. 부서장에게는 부서 운영비가 매달 나오는데 부서에 지출 기준을 대충 직급 당 얼마씩을 지불하여 준다. 나는 부서 운영비의 반 정도를 각 과로 지불하여 주고 나머지는 모아 두었다가 연말 부서 회식비로 사용했다.
이렇게 모여진 돈이 일년에 약 150여 만 원 이상이 저축되어 있었다. 연말에 적정 일을 택하여 한 식당을 예약한 후 저녁 식사와 더불어 술로 회식을 하고 나서 주로 2차는나이트 클럽으로 가게 된다. 클럽에 가기 전에 여직원들은 나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유혹(?)하여 나를 술에 취하게 만들곤 하였다. 20대 초반의 예쁜 여직원들 팔장에 끼여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으로 나가서 클럽에 이끌려 가곤 하였다.
나이트 클럽에 들어 가게 되면 술을 깨야 한다는 명목 아래 남자직원과 여자직원이 술의 힘을 빌려 몸을 부딪쳐 가며 끌어 안고 춤을 추는게 다반사이다. 이들에게는 회사를 벗어나 합법적 포옹을 즐기며 연회인 셈이다. 이 때는 나도 딸 같은 여직원들의 팔에 이끌려 많은 호강을 누리기도 한다. 왜냐 하면 상사의 고과(考課) 점수에 따라 직원의 임금 상승은 물론 보너스 수준에도 차등을 받기 때문이다.
갑오년 설날 이틀전에 탁구 치는 사람끼리 모여서 모 재래시장 식당에 들려 저녁 식사와 술 잔치를 벌였다.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몇 푼씩을 걷워 술값을 마련 했음에도, 한 부부팀이 모두 회식비를 부담하겠단다. 그녀의 남편이 탁구 회원이 아니었던지라 면을 세우려 했던 것 같다. 공교롭게 남녀 각기 4명씩으로 총 8명이었는데 식당에서 1차로 술과 밥값으로 5만 원이 넘겨 나왔다.
이후 노래방에 가자고 하여, 택시를 타고 체육관 근처로 옮겨 그 곳에서 예의 막춤과 노래가 범벅이 되었는데 산사춘 등의 술과 안주로 15만 원이 넘게 나왔단다. 이 비용을 모두 이 부부가 모두 지불하였다.
노래방에 가면 흥에 겨워 남녀의 적당한 몸 부딪침과 스킨십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즐기고자 가는 지도 모르겠다. 일단 노래방에 가서 몸을 사리고 있으면 왕따(bully) 당하기 쉽다. 한 곡조 뽑으라고 재촉하는데도 그저 체면만 차리고자 하면 썰렁한 사람(wet blanket) 취급을 받는다. 노는 자리에서는 방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icebreaker)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노래방 갈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치루면서도 정주영씨가 대선에 뛰여 드는 바람에 현대 맨으로서 동네 아줌마 표를 의식하여 매일 밤 대선 캠프 아줌마들과 노래방에 가서 그녀들의 기쁨조 노릇을 했었다.
내 노래 레퍼토리가 바닥 날 것을 우려하여, 당시 기본적으로 중국 가요 4곡 정도는 항시 준비하여 놓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노래방 기기는 모두 '금영'과 '태진'회사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금영과 태진에 내가 아는 중국가요 4곡의 번호를 내 휴대폰에 수록해 놓고 있다.
금영음향기기에서는, 11917(月亮代表我的心), 12607(甛蜜蜜), 14985(小城故事), 15020(夜來香)이다.
태진음향기는, 70834(甛蜜蜜), 71612(小城故事), 71945(夜來香), 72572(月亮代表我的心)이다.
특히 '月亮代表我的心'를 상해 큰 무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 봤었는데 당시 85점이 나왔었다.
설 이틀전 노래방에서 태진음향기기로, 중국노래 두 곳을 불렀더니 어느 탁구 동료가 옆 동료에게 귓속말로 '저 친구(우주공) 중국 간자체를 알고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모르리라. 내가 대만인에게 중국어를 3년 이상 배웠고 중국 상해 지사장으로도 근무했다는 사실을.
노래방에 가면 단지 나는 춤을 못 추어 몸치에 해당하기에 막춤으로 땜방을 한다. 선곡 시에도 중국 노래로서 서너 곡이면 충분히 땜방 구실을 하게 된다. 모처럼 노래방에서 남녀 각 4쌍이 모여서 세모에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오니 밤 12시 20분이었다. 다시 힘차게 다가 온 갑오년 청마의 해를 맞아 기운찬 말 등에 안착을 기원해 본다.
첫댓글 설맞이 노래방 부럽습니다^^
저는 우주공 선생님보다 연배가 낮은데도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노래방을 가면
이젠 예전 같지않게 힘이 부치던걸요. ㅎㅎ
춤도 아예 젬병이지만~
새해에도 운동, 글쓰기에 더욱 화이팅 하시고
복되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재도 안 남길 정도로 인생의 황혼을 밝혀야 된다고 봅니다.ㅎ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