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시인 시상 10편을 감상해 보기
시는 끝없는 창작의 길입니다
문학상이나 신춘문예 도전은 시간적 함축과
비유. 은유. 산문이 중요합니다. 서정시로 상을 타서
언론에 보도되면 평생 따라 다니기 때문에
큰 상을 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1 가을 강물 소리는 / 이향아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 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고여서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 그림자 갈대 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 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2 내 아들이 건너는 세상 / 이향아
잘난 남자들이 남자를 벗어던지고 시시한 여자가 되려고 한다
여자보다 작은 계집애가 되려고 한다
계집애가 되어 입술연지 붉게 칠하면 그 몸으로 편히 살 수 있다고
여자가 되면 세상물정 몰라도 쉽다고 누가 가르치나보다
제 집에선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건지려던 옛날의 영웅
태평하게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나 내던 한심한 선비
그들은 오래 전에 죽고 없다
먼 바다 파도와 싸워 태산 같은 물고기를 잡아
앙상한 뼈만 싣고 돌아온 남자
그 우렁찬 남자도 요즘 소설에는 없다
가늘고 길게 비겁해도 좋아, 오래 살아남으려고 한다
살아남는 일 중요하지 아암, 죽지는 말아야지
세상이 갈수록 잘난 남자들의 기를 죽여서
나는 내 잘난 아들에게, 내 아들의 잘난 아들과 그 아들의 잘난 아들에게
키 큰 쑥대밭길 숨어 걷는 법이나 가르치란 말인가
내 아들이 건너야 할 걱정스러운 세상
내 아들의 청춘이 걱정스러운 세상
3 바람만 불어도 / 이향아
나는 아무래도 메말랐나보다
바람만 불어도 버스럭거린다
버스럭거리다가 혼자 찢어지고
찢어지다가 혼자 가라앉는
나는 그래도 축축한 편인가보다
바람만 불어도 눈앞 보얗게 막히고
남들 따라 흐느끼기 목이 아프다
바람만 불어도 이렇게 사무치는
바람만 불어도 가슴 미어지는
버스럭거리든지
가라앉든지
날마다 무슨 바람이든 불지 않는 날 없고
무슨 핑계로든 울지 않는 날이 없다
4 버릇된 가난 / 이향아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었나 보다
요즘은 남의 외투를 걸친 듯 더러 서툰 일이 생기고
뒤꿈치가 벗겨질 듯 미끄러운 신발
거리는 타관처럼 낯선 얼굴로 넘친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가
마음 편하기로는 가난만한 것이 없는데
거기 질이 나서 모자람 없이 살았거늘
이제 새삼 무얼 바꾸랴
아무리 일러줘도 부자들은 모르는
아랫목 이불 깔린 구들장 같은
발뻗고 기대기 은근하고 수더분한
그러다가 금세 눈앞이 젖어드는
그보다 좋은 세상 어디 있으랴만
나도 모르게 가난을 벗으려고 했나 보다
5 벚꽃 잎이 / 이향아
벚꽃 잎이 머얼리서 하늘하늘 떨리었다
떨다가 하필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 눈길이 내 앞을 운명처럼 막았다
가슴이 막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흐느끼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벚꽃 잎은 계속 지고 있었다
6 별들은 강으로 갔다 / 이향아
유성이 금을 긋고 지나간 다음이면
궁창이 양쪽으로 나뉜다는 말
홍해가 갈라지고 물 가운데 길이 나듯
오래 맺힌 소원도 풀린다는 말
허구한 날 뒤채기며 울부짖어도
손톱하나 끄떡없는 사파이어의 하늘
희고 맑은 가슴이나 비추며 살까
흐르던 별들은 강으로 갔다
강둑에는 서걱대며 흐느끼는 갈대
오지랖엔 사방천지 여울이며 실개천
쫓기면서 반짝이기 몇 광년인가
별들은 다시 흘러 먼 강으로 갔다
7 비운 항아리처럼 / 이향아
기적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퍼낸 물만큼 물은 다시 고이고
달려온 그만큼 앞길이 트여
멀고 먼 지축의 끝간데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동이 튼다면
날마다 다시 사는 연습입니다
연습하여도 연습하여도
새로 밀리는 어둠이 있어
나는 여전히 낯선 가두에
길을 묻는 미아처럼 서 있곤 했습니다
눈을 감고 살기를 복습하여서
꿈을 위해 비워둔 항아리처럼
꿈도 비워 깊어진 항아리처럼
기적보다 눈부시게 돌아오기를
옷깃 여며여며 기다리겠습니다.
8 서늘한 세상 / 이향아
갑자기 아무도 없다
한 끼니 같이 먹자고 불러낼 사람이 없다
차 한 잔 마시자고 부를 사람이 없다
나 잘 있노라고 통정할 사람이 없다
갑자기 아무도 없다
검은 땅 겨우 딛고 나 혼자 섰다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되나 보다
나는 너무 헤프게 그리움을 풀어서
너무 가볍게 나불거렸나 보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하늘 아래 지평선에 혼자 던져진
얼음처럼 비치는
서늘한 세상
9 안부만 묻습니다 / 이향아
안부만 묻습니다
나는 그냥 그렇습니다
가신 뒤엔 자주자주 안개 밀리고
풀벌레 자욱하게 잠기기도 하면서
귀먹고 눈멀어 여기 잘 있습니다
나는 왜 목울음을 꽈리라도 불어서
풀리든지 맺히든지 말을 못하나
흐르는 것은 그냥 흐르게 두고
나 그냥 여기 있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날짜는 가고 드릴 말씀 재처럼 삭아
모두 없어지기 전에 편지라도 씁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날짜는 가고
그날이 언젠지 만나질까요
그때도 여전히
안녕히 계십시오
10 죄인을 벗고 싶다 / 이향아
고백하자면 그 모자를 훔친 사람은 나다
그 열쇠를 훔친 사람은 나다
그 침묵을 훔친 사람도 나다
훔친 모자를 명예처럼 쓰고서
훔친 열쇠를 비결처럼 품고서
훔친 침묵을 인격처럼 붙들고서
아무 탈없이 나는 튼튼하다
터놓고 말하자면 네 시력을 훔친 사람은 나다
네 분망을 훔친 사람은 나다
네 자유를 훔친 사람도 나다
훔친 시력으로 세상을 보고
훔친 분으로 거리를 달려
아, 훔친 자유로 휘날리는 깃발
어지럽고 두려운 도둑질의 세상이다
부탁하노니, 누가 내 모자를 다시 훔쳐가 다오
제발 날 위해 희생해 다오
나도 그를 용서하여 죄인을 벗고 싶다
이향아시인 프로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여 전북 군산에서 성장하였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문학]지를 통하여 <가을은>, <설경>, <찻잔> 등의 작품이 추천됨으로 문단등단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살아 있는 날들의 이별> , <당신의 피리를 삼으소서>, <오래된 슬픔 하나> 등 13권, 시선집 4권이 있으며 수필집 <하얀 장미의 아침>, <쓸쓸함을 위하여> 등 11권, 수필선집 4권이 있다.
이밖에 문학이론서로 <문학의 이론>, <창작의 아름다움>, <한국시, 한국시인>, <현대시와 삶의 인식>, <시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고, 논문으로 <새를 표제로 한 현대시의 이미지 연구>,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삶의 인식 방법 연구> 등 수십 편이 있다.
1985년에 경희문학상
1987년에 시문학상
1995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광주문학상
1998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현재 호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비평가협회 이사. 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원탁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