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박 연 숙
1인칭 나는 쇼파에 붙어 치즈처럼 녹아내리고
쇼파에 앉아 있어도 끝없이 리필되는 허기
소논문 궁리하느라 컴퓨터 앞에서
거대한 크레바스 속에서 허덕이는 나
커튼을 걷으면 문득 거기 또 다른 내가 서 있듯이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듯
나와 내 안의 너는 다르다
어느새 나는 없고 허울만 머뭇거리다
더 이상 내 것이 될 수 없는 욕망들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나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나를 껴안는다
의미를 벗어난 그 의미처럼
난 나를 품고 넌 너를 버리고
은유를 흉내 내는
울금빛 시 한 줄의 이미지 속에
그냥 자물쇠를 걸어두고 싶다
천국이 걸어온다
박 연 숙
현대시장사거리
여수어물, 생물수산, 할인마트와 만국기
농협, 기분 좋은 약국 건너 김밥 천국
청년들과 여고생이 고개 숙이며
경건하게 김밥을 먹는다
오고가는 사람들과 택시
5524, 6512 버스와 오토바이 붕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부부
다정히 손잡고 걸어간다
마늘 까는 할아버지,
돌돌 말은 내년 달력 손에 든 아주머니
천국김밥 앞에 서 있는 나도 엑스트라
나뭇잎이 하롱하롱 배경화면으로
송이송이 왕관 쓰고 나온 구절초 향기 같은
낯설지 않은 드라마 세트장이다
만국기는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꽃으로 매달려 있다
구름도 블루머와 머리띠도 뒤따라간다
저학년 청백계주 끝나고 오재미로 바구니 터트리면
‘즐거운 점심시간’ 하얀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김밥, 삶은 밤과 오징어, 사이다가 기다린다
찬란한 내년을 펼칠 달력과
만국기에서 그때의 뜨거운 함성이
햇살에 빤닥빤닥 피어난다
분장 없는 구절초 꽃망울도
대관식을 준비한다
고통이 안락에게
박 연 숙
안락한테 고통을 주겠다
좌판 위에 마늘, 도라지, 파 까놓고
휠체어에 앉아서 바라보는 할머니
덤 달라고 손 벌린 너에게 고통을 주어
안락과 고통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에게
몹시 아픈 고통을 주겠다
먹을 것이 없어 점점 시들어 가는 어린이
수술 받을 돈이 없어 헐떡이며 숨죽인 채
꿈을 껴입은 아이들
너의 무관심,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고통을 어루만져 줄 너의 손길에게
고통과 안락이 평등하다는 것을
밤의 뒤편
박 연 숙
화가라면서
새벽에 간 길을 또 걸어가고
밤 12시를 알리는 무쇠 냄새나는 벽시계 아래
접힌 하루는 감청색 우울증에 시달려
‘하이 눈’으로 오해하고
헝클어진 에스키스 덩어리를 훅 내 던진다
스멀스멀 사라지는 것들에게
라이터를 아무리 켜대도 경이로운 이미지는 피어나지 않는다
약 력
박 연 숙
2017 창작수필 등단
2018년 계간문예 시 신인상 등단
시집 〈흐르는 물은 시간의 게스트하우스다〉
2022 신춘문예 샘문학 본상 특별창작상
2019 강감찬 온라인 시 백일장 최우수상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