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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 창간35주년 특집
원불교 언론의 선구자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소태산 사상의 해설가로 교단 비전 제시
연 보
1909년 진안 마령 평지리 출생
1922(13세) 변산에서 소태산 대종사 알현
1924 불법연구회 창립발기인 모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서 임시서기로 선임, 음광이란 법명 받음
1925 익산본관 사가 지음, 정기훈련 선방 제공, 상조부 임시관리
1926 상조부 서기, 수위단 대리단원, 17세 부친제사 시 첫 신정의례 제사의 예 시행
1928 교무부 서기
1929(20세) 월말통신 회설반 기자로 매월, 논설 전담 집필
1931 교과서 편찬 업무 전념, 통치조단규약 발간
1932 육대요령 발간 연구부장 겸 총무, 월말통신 주간 35호부터 등사본으로 발행 5월 월보로 개제
1933 6월 무허가 출판물이라는 이유로 월보 폐간, 8월 회보로 개제 발간, 발행인 전세권(음광)으로 등록
1934 <3대요령 발간>
1935 교무부장 선임 <불교혁신론><예전>발간, 수위단회 정식 대리인 승인
1936 수첩용 <회원수지> 발간
1937 <불법연구회 약보>펴냄
1938 종법실 법무로 선임
1939 정수위단 보결 및 대리인 선정식, 법호 받음, <근행법> 발간
1940 서정원장 대리, 회보 65호를 최종호로 폐간
1941 서정원장
1942 서무부장 겸 공익부장
1943(34세) 공익부장 겸 산업부장
1945 공직 놓고 자연인으로 삶
1960(51세) 열반.
전음광 [全飮光, 1909~1960]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본명은 전세권(全世權)이고, 법호는 혜산(惠山)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1923년 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어머니 전삼삼(田三三)의 인도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박중빈과 은부자(恩父子) 결의를 맺고 초기 원불교 교단의 문화활동과 박중빈의 보필에 헌신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원불교 초기의 교서인 《불법연구회규약(佛法硏究會規約)》《삼대요령(三大要領)》《예전(禮典)》《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 등의 발행에 공헌하였으며, 《월말통신(月末通信)》《회보》 등의 편집·발행인으로서 많은 글을 남겼다. 일제의 원불교 탄압 때 방패역할을 하였다. 대봉도(大奉道) 법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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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부산 회원 박허주와 함께 한 전음광 대봉도(사진 앞줄 오른쪽).
기관지 발행 외쳐
“기관지는 단체나 사회의 호흡이다. 기관지는 사람의 정신을 끄는 기관차이다. 중인이 한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고 한가지 힘을 쓰기로 하면 반드시 기관의 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본회의 공부와 사업 양 방면이 날로날로 뿌리가 뻗고 지엽이 왕성하려는 이즈음에 기관지 발행은 이미 문제 삼을 시기가 아니다”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이하 혜산)대봉도는 원기14년(1929) 월말통신 17호에 ‘기관잡지 발행 제안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기관지 발행을 외쳤다. 원기13년 5월 창간된 <월말통신>은 미농지 다섯장 사이에 묵지를 끼우고 골필로 눌러쓰는 묵사본 방식이었다. 발행 부수는 겨우 5부에 불과해 이 회설이 나온 것이다.
월말통신 회설 주장에 앞서 혜산은 “우리 회원의 지견 발달과 상식 보급을 도(圖)키 위하여 월말통신보다 갱일층 구체적인 기관잡지를 발행하여 공부 사업 양방면에 통일적 지도를 베풀자”며 “실독자 100여 인에게 10전씩 받으면 기관지를 간행할 수 있다”고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의견안에 대해 갑을 정하여 영원부로 채용할 것을 결의하나 독자를 모집한 후 정식 결정하기로 했다.
이 때 혜산의 나이 20세였다. 20세의 청년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글은 논리와 설득력이 있다.
묵사본 <월말통신>회설반 기자
혜산은 원기14년 <월말통신>회설반 기자로 교단 언론에 첫 발을 내딛었다. 월말통신 11호 회설 ‘송구영신을 제하여 우리가 가질 주장과 주의’라는 제목으로 회설 전담 집필을 맡은 것. 그는 원기25년 회보가 폐간될 까지 실린 회설 95편 가운데 83편을 혜산이 썼을 만큼 시대감각과 교단의 비전을 갖춘 선구자였다.
그러나 혜산의 삶은 약관 15세에 참여한 이미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당시 임시 서기로 선임되면서 결정됐는지도 모른다. 이후 교무부 서기를 하며 발표한 ‘원기13년, 14년 교무부 사업보고서’에서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월말통신>은 대종사 법설, 회설, 교단소식, 공지사항, 총부와 교당의 법회록, 교도들의 감각감상, 교리해설, 인사동정, 문예작품 등을 싣고 있어 미약하나마 언론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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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교단 정기간행물. 왼쪽부터 <월말통신> <월보> <회보>. 모두 전음광 대봉도의 손을 거쳤다.
등사판 <월보>주간
월말통신이 경제사정 등 제반사정으로 휴간되자 혜산은 교과서 편찬 업무에 전념했다. 잇따라 발간한 <통치조단규약><육대요령>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원기17년 연구부장 겸 총무로 승진하고 월말통신 주간을 맡았다. 15개월만에 <월말통신>35호를 등사판으로 발행하고 다음호부터 <월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혜산이 월보 주간을 맡으면서 교단 언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등사판으로 바뀌면서 부수도 대폭 늘어났다. <월보>발행 부수는 적을 때는 20부, 많을 때는 60-70부를 발행했다. 내용은 월말통신과 비슷하다. 혜산은 월보 44호에 그의 유명한 회설인 ‘빛은 동방에서’라는 글을 발표했다.
<월보>는 원기28년 5월호 47호까지 발행하다가 48호를 총독부 인가를 받지 않았다 하여 일경에 압수`폐간 당했다.
<회보>의 명 논설가
혜산은 <월보>가 폐간되자 그해(원기18년) 9월 총독부의 정식 허가를 얻어 <회보>를 창간한다. 발행인은 전세권(음광)으로 등록했다. 12호까지는 등사판으로 발행했으나 혜산은 인쇄간행에 남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기14년 기관잡지 발행 제안을 한지 4년 후인 원기 18년 회보 5호에서 다시 ‘회보를 인쇄할 필요에 대하여’라는 회설을 발표했다.
“회보를 인쇄하여 우리의 이상과 포부를 널리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한한 유감인 동시에 본회 사업 발전상 일대 결함이다.정식 인쇄를 하여 전반 회원이 공부와 사업에 동일한 보조로 진행하게 된다면 오죽이나 재미스러운 일이며 반가운 일입니까”라고 호소하고 “종사님이 제정하신 모든 법이나 여러 분이 제출하신 모든 의견은 힘줄과 피와 같다. 그 힘줄과 피를 잘 순환하도록 하는 것이 기관지이다”고 다시 주장했다.
혜산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듬해인 13호(원기19년)부터 이공주 종사의 특지에 힘입어 활자판으로 인쇄, 간행됐다. 혜산은 13호 회설 ‘회보를 인쇄함에 제하여’라는 회설에서 회보의 편집방향을 밝혔다.
“難文(난문) 難字(난자)보다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간이 평범한 문구를 환영한다. 종사님의 법설과 회원의 감각감상, 의견처리, 문목 등을 정선해 발표하겠고 회원의 논문, 시, 소설이나 교리해설, 각종 예문 및 규약 등으로 회보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이 회보를 일개 잡지로 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개의 보경으로서 신중히 취급하여 숙독하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회보 인쇄하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교단의 교세로 볼 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정책적인 투자였다.
이에따라 13호부터 국판 50쪽 내외의 활자본으로 200부 정도 발행됐다. 정기독자도 생기고 80쪽으로 늘기도 했다. 본문은 종서 14행, 4호의 국한문 혼용으로 한자 옆에 한글로 작은 활자 루비 붙임을 하였다.
내용은 월말통신 월보와 비슷하나 고경 소개, 불해탐주, 육조대사 전기, 선시, 교도 증가사항 등이 추가됐다. <회보>는 초기교서 못지않게 널리 읽혀 교서 역할도 하게 된다.
혜산은 회보의 명논설가로 65편의 회설 가운데 56편 집필했다. 전체적으로는 95편 가운데 83편을 저술, 불법연구회 시대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혜산의 수필법문을 보면 현 <정전>과 <대종경>의 원형이 그대로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혜산이 초기교서의 편찬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쓴 글들은 모두 교리를 해설하고 대중을 독려하며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혜산은 가히 소태산 사상의 해설가라 불릴만 하다. 갑자년 이후 대종사 열반까지 19년간 대종사를 보필하며 타고난 총명함으로 대종사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월말통신><월보><회보>등에 회설 제안 법설 수필, 교서편찬 등의 방법으로 소태산 사상을 해석하여 대중에게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혜산의 관심은 소태산 사상의 거의 전 분야에 미쳤다. 교단관에서는 대종사를 주세성자로 모시고 교단의 양양한 비전을 제시했으며, 불교관에서는 불교 개혁을 주장했다. 신앙심 고취와 공부심 고양과 전문입선을 강조한 공부인이었으며 도학과 과학의 병진과 인존사상을 강조했고, 서중안, 노덕송옥, 김기천, 김광선 선진 등 동지의 열반을 추모한 휴머니스트였다.
문화활동가
혜산은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진자료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했다. 대내외적으로 전혀 이해가 없는 풍토에서 사재를 털어 강습을 받고 암실을 만들어 많은 사진을 남겼다. 교단 최초의 카메라맨으로 대종사와 초기교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많이 남긴 문화활동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대종사의 다양한 성안과 초기교단의 귀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인가.
혜산은 송도성, 조갑종과 더불어 교단 3총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물이다. 특히 언론을 통해 그가 이룩한 업적은 원불교 역사와 함께 길이 남게 될 것이다. 그는 원기25년 회보 65호 폐간을 마지막으로 필을 놓았다. 원기30년 공직을 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1960년 51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원기71년 뒤늦게 혜산의 글을 모아 I빛은 동방에서 J라는 책자가 발행됐다. 참고문헌 박용덕 저 초기교단사 5권 I천하농판 J, 손정윤 저 I원불교80년사의 맥박 J, 김홍철 등 공저 원불교 인물과 사상 J(1), 원불교신보 52, 53, 54, 56호. 관련법문 <대종경> 수행품 11장과 <정산종사법어> 근실편 21장.
문향허기자 moon@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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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광 선진의 가계에 대하여(교무 김제원의 토요정례법회 중의 설법에서 부분 발췌)
최도화 선진님과 대종사님의 만남이 전삼삼 선진님을 인도하고 전삼삼 선진님은 아들 전음광 선진님을 인도하고 그 부인이 권동화 선진님이시고, 동생이 권대호 선진님이시다. 전음광 권동화 선진님 사이에서 난 분이 전팔근 전팔로 선진님이시다. 조선팔도의 뿌리가 되어라. 조선팔도를 흔들어버려라. 작년 6.1 대재에 영상으로 나왔더 분이 전팔로 선진님이시다. 법조계에서 활약하셨고, 전팔근 선생님은 출가하셔서 원불교 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영문과를 다시 나와서 영어 교전을 번역하시고, 교황이 왔을 때 처음으로 여자의 몸으로 영어 통역도 하셨다.
전삼삼 선진님은 정사. 항마위시다. 혜산 전음광 선진님은 대봉도. 권동화 선진님은 출가위시고, 종사이시다. 대봉도이시다. 전팔근 전팔로 선진도 대봉도, 권대호 선진은 정남으로 교당장을 지내시고 돌아가시고나서 5일 후에 대종사님과 은부자의 결의를 하셨습니다. 그런 집안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 원불교 입교하기도 쉽지 않고 입교해도 법호 얻기도 쉽지 않고 항마위 올라가기도 쉽지 않은데, 이 집안 하나에 대봉도에 출가위에 다 있습니다. 원불교 역사에 남을 가계도입니다.
그리고 특히 혜산 전음광 선진님. 대종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진이 거의 남아 있는 것은 이 분과 구타원님 아드님이신 박창기 선진님이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다 찍으셨어요. 권대호 선진님도 일찍 돌아가셨는데 사진이 다 있다. 대종사님 돌아가실 때도 사진 찍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슬픈데 사진 찍고 다닌다고 맞으면서도 찍으셨대요. 대종사님 열반 후에 대종사님 가족 모두 데리고 슬픈 표정의 사진도 찍으셨어요. 대종사님이 당대에도 컨셉 사진이 많이 있잖아요? 하여간 앞으로 미래 사회가 디지털 사회가 될테니 자료가 있어야 믿을 것이란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제가 놀랬어요. 대종경에 나오는 초기 선진들의 사진이 거의 다 있어요. 이 분들은 일제 시대인데.. 저도 어릴 때 사진이 별로 없거든요. 저보다 4~50년 앞서있는데도 사진이 다 있다. 그만큼 역사 의식이 있었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혜산님의 문집 "빛은 동방에서"가 있습니다.
교당에 한권씩 기증하였으니 비치도서로 있을겁니다. 참고히ㅡ십시요.
저희 원남교당에는 없네요.책을 꽤 많이 개인 소장하신,
교무님도 찾아보니 없다네요.
다른 교당이나 기관에 있으면
누가 연락 좀 주세요
참고자료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교무님 감사합니다.
누가 들고 갔네요. 필요해서 가져갔다면 다행한 일이지요.
오래된 다른 교당에 가면 보일 겁니다. 찾는 이도 없으니 "교무님 이거 보고 주께요" 하고 빌려오세요. 왜 안 돌려주느냐고 탓할 사람도 없어요. [불법연구회 회설집]과 [대종사 법설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감히 예언합니다만, 앞으로 혜산문집 <빛은 동방에>를 가지고 장차 박사논문, 석사논문이 쏟아질 거예요.
내가 대학에 근무할 때 아타원 부총장을 설득해서 만든 그분 아버님의 문집이지요. 팔릴 리가 없으니까 교당과 기관에 무료 배부하였습니다. 사람들 특성이 공짜로 받은 책은 절대 보지 않더군요. 또 불법연구회 시대에 대해 관심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