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김씨 조형물.전면/중구청 제공 | ||
작품명 : 대지(大地)
부안김씨 조형물.후면/중구청 제공 |
<뿌리공원에 새겨진 부안김씨 유래>
부안(부령)김씨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공을 시조로 모시는 600여 본관 1천여 신라김씨의 종가(宗家)이다. 대보공의 7세손인 미추왕(未鄒王)이 김씨로는 처음 신라 13대왕에 즉위하신 후 신라역사 56왕 992년중 38왕 586년 동안을 다스리다 서기 935년 경순왕(敬順王)9년에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니 태자(太子)이신 일(鎰)님께서 양국을 반대하시고 어머님 죽방왕후(竹房王后)를 모시고 처자와 충신의사들을 거느리고 설악산 근처 인제군 상남면 일대에서 신라소국을 세우고 광복(光復)을 도모 항려(伉儷)투쟁을 벌이시다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끝내 세상을 떠나시니 이 분이 곧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부안(부령)김씨의 시조(始祖)이시다. 태자공(太子公)의 큰아드님 기로(箕輅)님께서는 그후 심산유곡(深山幽谷)인 전북 부안의 변산 개암사 뒤 울금바위의 굴 부사의방(不思義房)에서 역시 신라광복을 기원하시다 더 깊은 변산 월명암에 은거하셨다. 그 후예(後裔) 경수(景修)님께서 처음으로 고려왕조에 등과 이부상서(吏部尙書) 우복야(右僕射) 벼슬에 오르시고 그 아들 춘(春)님께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우시니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져 부령을 관향으로 부령김씨라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16년에 부령현과 보안현을 합병하여 부안군으로 개명한 이후부터 부안김씨(扶安金氏)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부안(부령)김씨 대종회 『扶安(扶寧)金氏 大宗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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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 집성촌>
부안김씨는 중부권에는 충남 논산시.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두산리.출포리
충북 충주시.음성군.진천군 등에 많이 살고있으며,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와 전북 남원시 산동면 목동리.남원시 이백면 강기리.
전북 정읍시 소성면.산내면 부안읍 일대가 집성촌이다.
부안김씨(扶安金氏) 현대인물
김형수-( 전 체신부 차관.중앙대교수)
김종철-( 서울대 영문학 교수)
김채옥 -(한양대교수)
김형래-(11.12 대 국회의원,민추협운영위원)
김영배.김훈철.김종협
김원술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전주 대사습놀이 보존회 이사장
김창원 -부안김씨 대종회 회장.김영웅-부안김씨 대전광역시 회장
김창오-서울.경기 지역회장
김영철-전주시 회장.김병정-부안김씨 충청북도 회장
(이하 명단 입수되는대로 수록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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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扶安金氏)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후예 제주 돌문화 은인 김구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는 마의태자(김 일 金 鎰)이다.
마의태자는 신라 경순왕의 첫째 아들로 서기 935년(경순왕 9년)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부왕(父王)인 경순왕은 천년사직 신라를 고려에 양국하려 하자 신하들의 찬반양론이 분분 한 가운데 태자(太子) 김 일은
"국가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뜻인데 당연히 충신.의사들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고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연후에 의존함이 옳은데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사람에게 줄 수있습니까"하고 고려에의 양국에 극력 반대하였다.
서기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더이상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 회의를 열고 고려에 손국할 것을 논의하여,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전달되었다.
이에 태자인 김 일(金鎰)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머니 죽방왕후 박씨(竹房王后 朴氏) 태자비 김씨(太子妃 金氏), 그리고 두 아들과 충신(忠臣),의사(義士),유민(遺民) 등 수만명을 거느리고 설악산 근처 인제군 상남면 금부리(金富里) 부근에 신라소국(新羅小國)을 세워 조국광복을 도모하는 항려(抗麗)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태자(太子) 김 일(金鎰)은 신라 망국을 조상하는 뜻으로 평생을 마의(麻衣)로 지냈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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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망 후 고려조에서는 태자공(太子公)의 항려운동을 은폐 축소하고 특히 일제강점기에 태자공의 조국광복정신을 은폐하기 위해 금강산에 단신으로 입산하여 마의 초식으로 일생을 지낸것으로 왜곡하였으나, 최근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와 갑둔리 일대의 유적들은 태자공(太子公) 김일의 천년사직 신라 부흥을 위한 항려투쟁을 웅변 해주고있다.
그의 5세손 김경수가 고려 선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벼슬.장관)를 거쳐 우복야(右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에 올라 유명하였고,
김경수의 아들 김 춘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부령은 부안의 예전지명)에 책봉(冊封)되어 부령을 식읍(食邑:나라에 공이많은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곳)으로 하사 받았기에 본관을 부령으로 하였다.
후손들은 김 일(金鎰)을 시조, 김경수를 1세조로 받들고 본관을 부안(扶安,부령)으로 삼아 계세(系世)해 오고 있다.
조선조 서기 1416(태종 16)에 부령현(扶寧縣)과 보안현(保安縣)을 합쳐 부안군(扶安郡)으로 되자 부안김씨(扶安金氏)로 부르게 되었으며 부령김씨(扶寧金氏)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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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종중 고문서> 이 고문서 해옹집은 부안에서 세거한 부안김씨 문중에 보관되어 온 것으로 15세기 중엽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400년동안의 문서 80점이 포함된다. 내용은 교지, 호적, 분재기, 토지문서, 소지, 시권, 간찰 등으로서, 당시 사회경제사, 법제사, 국어학 분야의 중요한 자료이다. 문서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49.58m²)을 1987년 12월에 건립하였으며, 1986년 11월 29일에 보물 900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부안김씨의 중흥시조인 김 구(金垢,1211~1278,호는 지포,시호는 문정)는 고려 고종때인 1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판관(判官:고려때 6부관청.도호부.지방관청의 5품벼슬) 등을 지냈으며 고려 원종때는 예부시랑(禮部侍郞:정4품 벼슬.차관)으로 문서를 맡아 보았고 서장관(書狀官:사신과 함께 따라가 기록을 하던 임시벼슬)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북정록>을 집필하였다.
그는 40여년간 학자.정치가.외교관으로 국정에 참여 했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고려사(高麗史)와 동문선(東文選:신라에서 조선 숙종까지 시문을 모아 엮은 선집.성종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정편 130권과 중종 때 신용개,숙종 때 송상기 등이 편찬한 속편 21권이 있음,154권45책)에 그의 글이 실려 있어 뚜렸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시(詩) 중 홍원 땅에서 지형의 궁벽함과 수목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홍원 읍관
골이 깊으니 아지랑이도 창연하네
언덕 아래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네
서울을 언제나 갈 것인가
머리를 돌려 보니 맑기도 하여라.
문정공 김구는 수많은 시와 글을 남겨 지포집(止浦集)외에 많은 문집을 발간하였으며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되었다. 그가 제주판관(判官:5품 벼슬)으로 있는 동안 돌문화(文化)를 개척 제주도민의 생활 문화 향상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1991년 6월에 제주 자연박물관에 <돌문화의 은인>공적비가 세워졌다.
지포는 돌을 이용한 생활 도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 무렵을 전후하여 돌그릇이나 돌의 연모도 정제되기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제주 풍물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는 정주먹도 이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돌문화의 은인 문정공 공적비 | ||
지포 김구는 고려 조정에서 내려간 최초의 제주 판관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이후 한림원으로 전임되었고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등의 정2품 벼슬로 부총리급)에 이르렀다.
뛰어난 외교관.문장가.대학자인 그는 부안출신의 역사적인 최고(最高)의 인물로 소개되어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역대 부안의 군지(郡誌) 등에는 그의 행적이 항상 인물조 첫머리에 상세히 소개될 정도이다.
1211년(희종7) 어지러운 때인 고려 무신정권기에 출생, 원의 간섭기 초기인 1278년(충렬왕 4)까지 활동하였고 부안에서 성장한 신흥사류로서 중서시랑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급)에 올랐던 인물이다.
문정공 지포 김구의 묘(전북 부안군 운산리 소재)
서기 1278년(충렬왕 4) 6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조정에서는 시호를 문정(文貞)을 내리고 도동서원에 배향하였다.그의 위민과 창의적인 돌 문화의 내력은 제주도민의 삶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한편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서기1534년(중종 29)에 세워져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경상북도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 1542년, 중종 37)보다 8년 먼저 세워진 최초의 서원으로 발원적 의미를 지닌 유학의 중심지라고 한다.<부령.부안김씨 대종회.향토지.참고>
문정공의 네 아들중 큰 아들 충선공(忠宣公) 김여맹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인 상서공(尙書公:상서는 정3품 장관)과 둘째 아들인 좌승지와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를 지낸 김 식(金軾)이다. 김 식은 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로 분파되었다.
앞의 상서공(尙書公)의 손자(文貞公의 현손) 대제학공(大提學公:김용수)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중랑장(中朗將:정5품 무관) 김인정이고 다음이 시승공(侍承公) 김신정(金信鼎)이다. 시승공은 시승공파(侍承公派)로 분파되어 전주와 충남일대에 세거 하였다.
대제학공의 큰 아들 중랑장공(中朗將公) 김인정(金仁鼎)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봉정대부(奉正大夫)로 한성소윤(漢城少尹)을 지낸 김세영(金世英)으로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분파하여 그 후예들이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장사랑공파(將仕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승의랑공파 등 4파(四派)로 분파되었다.
둘째의 후손들은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김광서 金光敍)는 군사공파(郡事公派)로 분파하여 그 후예들이 시직공파(侍直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지평공파(持平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직장공파(直長公派) 등 5파로 분파되었다.
셋째 아들은 전의소감(典儀少監)을 지낸 김광신(金光信)으로 소감공파(少監公派)로 분파되었고, 넷째 아들로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지낸 김광구(金光矩)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분파되었다. 부안김씨(扶安金氏)는 현재 13대파(大派)와 53소파(小派)로 나누어져 전국 각지(各地)에 정착세거하고 있다.
중시조 김구의 묘는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으며 후손들은 부안군 연곡동 도동산 기슭에 도동서원을 지어 추모하고 있다.
<부안김씨 족보>
부령(부안)김씨의 족보는 서기 1278년(고려 충렬왕 4년) 문정공 김 구(金坵)의 국장(國葬)때
세운 묘비명에 가첩(家牒)이 있다고 조각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조선 중종 때인 (1530년 경)에 이조정랑(正郞:정5품 벼슬.전랑이라 함) 석필공이 종중 각 가정의 가첩을 수합하여 편집한 보첩을 토대로 1584년(선조 17년)에 창락도 찰방을 지낸 광공(光公)이 보완하여 갑신보를
출간하여 취성재에 보존하다가 유실되었는데 그것이 부안김씨 최초의 족보라고 한다.
그후 6.25 동란 후 1957년 소윤공파에서는 종사랑공파, 장사랑공파, 진사공파,
숭의랑공파 등이 주동이 되어 4파 합보인 정유보(丁酉譜)를 만들었다. 1984년에는
소윤공파가 갑자보(甲子譜)를 만들었고, 1999년에 다시 국한문 혼용으로 4파합보,
즉 기묘보를 보완하여 편찬하였다.
부령(부안)김씨의 전체를 망라한 대동보(大同譜)는 계파간의 의견차이로 편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부안김씨 대종회 자료 참고>
부안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 및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00여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18명,역과(譯科:중국어.여진어.몽고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해 보던 과거)에 4명 등 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부안김씨(扶安金氏)는
1985년에는 총11,263 가구에 인구는 총 47,696명이었으며
지난 2005년에는 17,391 가구에 인구는 56,318 명으로 조사되었다.
<인물탐구>
마의태자 김 일(金 鎰,금부대왕)
마의태자(김일 金鎰,금부대왕,자는 겸용 兼用)는 신라 마지막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朴氏) 사이에서 3남1녀중 첫째 왕자로 서기 910년에 출생하였다.
경순왕이 신라 제 56대 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마의태자 김 일(金鎰)의 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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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35년(경순왕 9)10월에 이르러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의 왕건의 세력에 눌려 국력이 크게 쇠퇴해졌다. 경순왕은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기려는 뜻을 밝히자, 신하들이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태자 김일은 부왕에게 "마땅히 충신의사(忠信義士)들과 같이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이를 의논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어찌하여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고려에의 손국을 극력반대하자,
부왕(父王) 경순왕은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로워서는 더 보존될 수 없노라."하면서, "고려와 싸워서 죄 없는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하고 태자와 여러 대신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양국하였다.
태자는 모후 죽방왕후 박씨와 태자비(太子妃,김영란), 동생인 김 굉(金鍠,나주김씨 시조), 김명종(金鳴鐘,경주김씨 영분공파 파조) 및 덕주공주와 아들인 김기로(金簊輅), 김 교(金較)와 여러 충신열사, 유민들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 월성(경주)을 떠나 문경새재의 관음리와 거쳐 충북 중원군 상모면 월악산(月嶽山)에 당도하여 미륵리에 미륵불(덕주공의의 상 像)과 5층 석탑을 조성했으며(보물 95,96호),
덕주공주를 월악산 덕주골에 머물게 하면서 덕주사(德周寺)와 미륵불(태자공의 상)을 조성 봉안하였고 이곳에 덕주산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9,900m라고 한다.
태자는 덕주사 미륵불에 구국(救國)을 발원하고 월악산 국사봉을 거쳐 보덕암(普德庵)에 들려 영천약수(靈泉藥水)를 들며 천년 구국한의 대원(大願)을 도솔천 하느님께 빌고 말하기를 "월악산이 물에 비치고 저 아래 항구동에 배가 닿을 때 구국한의 고향(신라)에 가리라, 예언하고(지금 충주호가 생겨서 월악산이 물에 비치고 항구동(港口洞)이 단양, 충주로 가는 부두가 되어 배가 오고가는 항구가 되었다)
태자는 월악산을 떠나 남한강의 서북방으로 향하니 다다른 곳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사(龍門寺)다.
구국을 철천지 한으로 간직한 태자와 신라 광복군들은 독립자존의 정신을 스스로 굳게 하고 또, 후세에 알리기 위해 절의 경내에 천년을 넘게 산다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이때 심은 은행나무는 10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용문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되어 현재도 무성하다.
그 후 금부대왕은 홍천을 지나 한계령에 도착 망군대와 한계산성을 쌓고, 충신열사와 신라 유민들과 조국 광복을 위해 고려와 항전했다.
금부대왕은 다시 인제군 김부리로 거점을 옮겼으며 죽방 왕후 박씨(朴氏)는 금강산 장안동 장안사의 돈도암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고, 태자비(김영란)도 두 아들을 데리고 스님이 되었다.
금부대왕은 조국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신라 유민들은 금부대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대왕각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5월 5일, 음력 9월9일에 제사를 모셨다.
태자 김일의 김기로(金簊輅), 김 교(金較) 두 아들 중 맏아들 김기로는 이후 부령김씨(扶寧金氏,부안김씨)로 하였고 그 후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둘째 아들 김 교는 뒷날 강원도 통천(通川)으로 이거하여 통천김씨(通川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금부대왕이 고려와 항쟁하다 일생을 보낸 강원도 인제의 금부리 일대에는 많은 유물과 사적이 있어 대왕으로서 승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대왕각은 금부리(金富里) 일대에 3곳이 있었는데,
매년 음력 5월5일(단오)과 음력 9월9일(중량절)에 동리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는 행사를 천년이나 이어오고 있으며, 1983년부터는 <부안김씨>와 <통천김> 문중에서 음력 9월9일에 금부대왕의 대제를 올리고 있다. <부안(부령)김씨 종친회>.한국인의 역사-참고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자리한 경순왕릉(敬順王陵ㆍ사적 제244호)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년(935년) 국세가 쇠잔함으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워 경순왕은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니 태자(太子)인 일(鎰)은 양국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어 어머니 죽방왕후 박씨(竹房王后 朴氏)와 태자비 김씨(太子妃 金氏), 그리고 두 아들과 충신ㆍ의사(義士)ㆍ유민(遺民) 등 수만 명을 거느리고 설악산 근처 인제군 상남면 금부리(金富里) 부근에 신라소국(新羅小國)을 세워 조국광복을 도모하고자, 항려 투쟁을 벌이다가 형세가 불리하자 마의(麻衣ㆍ베옷)를 입고 개골산(皆骨山ㆍ금강산)에 들어가 초식을 하며 은거했으니, 이 분이 곧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시조(始祖)라고 한다.
그의 5세손 경수(景修)가 고려 문종(文宗ㆍ1067~108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ㆍ부령은 부안의 옛 지명)에 봉해져 부령(扶寧)을 식읍으로 하사받았기에 후손들은 경수(景修)를 1세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부령(扶寧)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조선조 태종 16년(1416년)에 부령현(扶寧縣)과 보안현(保安縣)을 합쳐 부안군(扶安郡)이 되자 부안 김씨(扶安金氏)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수(景修)의 6세손으로 중시조인 구(坵ㆍ1211~1278)는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12세에 조사시에 합격하였고, 고종 19년(1232년) 22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ㆍ제주판관(濟州判官)ㆍ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원종조(元宗祖)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원나라에 대한 외교문서를 맡았으며, 이어 원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왔는데 그때에 ‘북정록(北征錄)’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원종 4년(1263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ㆍ종3품)에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등을 역임하고 정당문학(正堂文學)ㆍ이부상(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충렬왕 원년(1274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통문관(通文館ㆍ역어를 맡아보던 벼슬) 설치를 건의하여 궁내의 연소자(年少者)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게 했다. 1263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인질과 병정, 처녀를 징발하라고 하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원나라 세조가 오히려 양 5백 마리를 보내 포상했다.
원종(元宗) 때 이장용(李藏用)ㆍ유경 등과 함께 신종(神宗)ㆍ희종(熙宗)ㆍ강종(康宗) 3대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시문(時文)에 능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나이가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부안으로 돌아와 부안읍 선은동에 살며 지금의 부안군 변산면 지지포(현 지서리)에 별장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
구(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 때 원(元)나라에 4년 간 볼모로 가 있을 때 이를 호종한 공(功)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壽昌宮) 녹사(綠事)를 거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西都判官),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恪)과 식(軾)도 평장사(平章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계(啓ㆍ1528~1574)가 유명하다. 자는 회숙(晦叔), 호는 운강(雲江)으로 명종 7년(155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평안도사로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기 때문에 1558년 한학교수가 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선조 4년(157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동래부사를 지내다 1573년 병조참지가 되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발탁되었다.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강관으로서 이황(李滉)ㆍ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하였고, 문무를 겸비하였다.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
지포(止浦) 김구(金坵)를 주벽으로 아들 김여우(金汝盂) 등을 배향하기 위해 1534년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은 1865년 훼철되고 부안읍 도동리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ㆍ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 석홍(錫弘)의 아들 해(垓)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올라 문명(文名)을 떨친 호(灝)와 공조참판(工曹參判) 한익(漢益)이 유명했으며, 익(瀷)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로 일생동안 학문 연구에 전력하여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하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되었으며, 익(瀷)의 아들로 ‘서호별곡(西湖別曲)’을 지은 상성(相誠)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전북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 창동서원(滄東書院)과 시문집인 후창집(後滄集) 및 묘.
조선 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일컬어지는 택술(澤述ㆍ1884~1954)은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으로 7세에 여숙(閭塾)에서 수학을 시작하여, 15세경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900년 전우(田愚)를 사사하여 학문의 대도를 배웠는데, 이때 후창(後滄)이라는 호를 받고 창동처사(滄東處士)라 하였다. 32세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죽었을 때, 3년간 시묘(侍墓)하여 포로고행(圃老高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하였고, 또 장자를 왜교(倭校)에 입학시키라고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수차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경 늑삭령(勒削令)과 창씨령(創氏令)에 불응하여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출생지인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