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마가복음 8:22-9:1
제 목 :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1. 밝히 보는지라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8장 후반부를 살펴보게 되는데, 8장 전반부까지 기록된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구제 사역이 기록되어 있고, 둘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당시 권력층들을 깨우쳐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셋째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역의 방향은 비록 세 가지이지만 목적은 한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 사역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사람들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실패 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권력층도 실패했고, 일반 백성들도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에, 모두가 죄에 사로 잡혀 있기에, 모두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 죽어있는 존재였기에 하늘로부터 온 표적, 하늘로부터 온 빛, 하늘로부터 온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8장까지 기록된 내용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의 사역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너무나 죄로부터 강하게 결박되어 있기에 마가복음 8장 전반부까지 행한 예수님의 치유, 구제, 가르침만으로는 결코 사람이 죄에서 놓임을 받고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읽으신 대로 십자가 사건이 예고되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해야만 사람이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온전해질 수 있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예고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8장 후반부는 마가복음에서 큰 전환점이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전환됩니다. 십자가 사역의 의미,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변화 될 사람의 모습, 그리고 변화된 사람이 살아갈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제시되고 있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 앞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내용이 [마가복음 8:22-26],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지난주 본문과도 연결성이 전혀 없고, 오늘 본문과도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소 생뚱맞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5절 밖에 안 되는 이 내용이 오늘 본문과 앞으로 행해질 예수님 사역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8:22-26] 내용을 보시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길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을 인도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자 맹인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해주셨는데 부작용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인에게 나타난 부작용은 누구 탓일까요? 예수님 탓일까요? 아닙니다. 맹인에게 나타난 부작용은 예수님 탓이 아니라 맹인 스스로의 탓입니다. 치유 사역은 완벽히 행해졌습니다. 그 증거가 맹인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맹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무엇인가 보이기는 하는데,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할 뿐입니다. 즉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는 부작용은 오로지 맹인 탓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맹인을 결코 책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고,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 뜬 맹인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처음 보는 것이고, 나무도 처음 보는 것이기에 온전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실수인양 모든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오명과 누명을 덮어써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다시 안수하여 주십니다. 그러자 그 맹인이 완전해져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으로도 사람들은 죄에서 돌아서지를 못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오류인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탓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탓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죄 때문인 줄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 탓이 아니라 죄의 탓인 것을 아시기에, 사람의 모든 문제가 죄로부터 인한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에, 사람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결코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맹인에게 다시 안수하여 결국 밝히 보게 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십자가 사역의 예고,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8:22-26]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2.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런데 이 내용은 십자가 사역의 예고일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과도 아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면 보다 재미가 더해지리라 믿습니다. [마가복음 8:27],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어보셨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지 정말로 궁금해 하셨거나, 혹은 제자들로부터 정답을 들을 것으로 기대하시고 물으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표현은 질문 형식을 취한 설명문입니다. 즉 말씀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고 있지만 ‘지금부터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주겠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들께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께 ‘예수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 보면 여러분들은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세례 요한이라고, 엘리야라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할 분은 한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그 사람들이 분명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특정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이미지만을 떠올린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라고, 엘리야라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은 비록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라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와 아주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종교인이었다. 기독교의 창시자였고, 명상가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선포하던 인물이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 속에서 사람들이 한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바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오늘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적과 기적을 많이 행한 신비한 인물이었다.’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사람들이 한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바로 ‘예수님은 엘리야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리야는 신비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국한된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사람일 뿐이다. 이스라엘을 위해 태어났고, 이스라엘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오직 이스라엘과 관련된 일만을 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사람들이 한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바로 ‘예수님은 선지자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 [마가복음 8: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회개를 강조하는 종교인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신비한 인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개혁할 사회개혁가로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옳은 생각일까요, 그른 생각일까요? 물론 그릇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이라는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눈을 뜨게 해주었으나 사람과 나무도 분별하지 못하는 맹인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릇된 생각이라는 증거가 예수님의 침묵과 연이어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시다가,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제자들에게 제자들의 생각을 따로 물어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 대답에 대해 ‘옳다.’라고 선언하시고 부연 설명만 해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는, 엘리야라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른 것이기에,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는 대답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따로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3.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멋있는 대답입니다. 정말로 흠잡을 데 없는 대답입니다. 베드로가 대답은 하였지만 베드로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제자들도 속으로 똑같은 대답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대답을 하면서 베드로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을 듣는 제자들은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베드로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다른 제자들은 모두 ‘빙고’라고 속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그렇지. 골든벨이네.’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틀림없이 정답일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가 정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정답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정답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왜 정답이라고 확신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와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스토스’이고, 헬라어 ‘크리스토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 받은 자, 즉 제사장들이나 이스라엘 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 받은 자,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 말기에 와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 단순히 제사장이나 왕이 아니라 더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즉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의로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은 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 즉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곧 이스라엘 땅에 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이 말은 과연 맞는 답일까요? 베드로가 정답을 확신하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고, 제자들 역시 ‘빙고’로 맞장구 쳐주었던 이 말은 과연 맞는 말일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정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맞지만 베드로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마가복음 8:30-31],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질문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을 띤 설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께 닥칠 일, 즉 십자가 사건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의 내용이 베드로나 제자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그리스도와는 너무나 딴판입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두 번째 증거가 [마가복음 8:32-3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항변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항변하였을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의미와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무식하거나 감정적인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순순히 따라 나선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구원하고 의로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할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펼쳐 나갈 자신만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예수님의 일이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자신이 이루어 낼 일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는지 다 예상을 하고 있고, 나름대로 구상이 되어 있고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 속에, 그 계획 속에, 그 구상 속에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일, 즉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면 모든 자신의 예상, 구상, 계획이 다 틀어지는 것이기에,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항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항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 항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획보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치밀하고, 훨씬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명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엉뚱한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눈을 뜨게 해주었으나 사람과 나무도 분별하지 못하는 맹인과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하였습니다.
4.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의 이러한 항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입니다. ‘꾸짖어 이르시되’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아’라고 부르시니까 정말로 예수님께서 아주 신랄하고 단호하고 엄격하게 베드로를 꾸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말씀은 결코 꾸짖음이 아닙니다. 비난과 책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정말로 사탄으로 생각을 하셨다면 어떻게 말씀을 하셔야 합니까? ‘사탄아 썩 물러가라. 나를 떠나라’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탄과 대면하신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그 사탄을 향해 하신 말씀이 바로 ‘사탄아 물러가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탄아 물러가라’가 아닙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즉 지금 예수님은 사탄 대하듯이 베드로를 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할지도 다 알고 계시고,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항변하는 것에 대해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라고 책망을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 전반부에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으나 사람과 나무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맹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꾸짖지도 않았고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맹인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여 그가 온전히 볼 수 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상황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십자가 사건에 대해 항변한 이유, 베드로의 탓이 아닙니다. 모두 죄의 탓입니다. 그 죄로 인해 베드로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죄인의 한계를 다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베드로야. 사탄을 피해 내 뒤로 숨거라.’와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아’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결코 베드로를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로서 자격 없음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시고, 다 끌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 하신 이후에, 계속해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제자라는 사람이 뭐 그래!’라고 나무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책망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최선을 다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 그가 가지고 있는 경험,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서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이고, 그것의 결과가 예수님께 항변한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베드로가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능력을 총동원해도 하나님의 일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 베드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역량을 총동원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결코 생각해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베드로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인인 베드로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한계를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 즉 하나님의 일이 있는 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 꾸짖는다고, 책망한다고, 비난한다고 그 사람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내용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마가복음 8:34-8:37] 말씀인 것입니다.
5.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8:37] 말씀을 우리 모두 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합독해 보겠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읽고 나시니까 느낌이 어떻습니까?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드십니까? 거룩한 사명감이 용솟음치십니까? 그런 마음이 생기신다면 이 본문을 잘못 읽으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본문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베드로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에 오로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이런 것이야.’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할 일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부담감,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안도감을 느껴야 합니다.
먼저 [마가복음 8:36-37]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목숨입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자기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예.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 천하를 줄 터이니 너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 할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한사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마가복음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인정해 놓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정녕 말이 되는 요구일까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럼 그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뜻은 ‘그럴 사람이 없다.’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입니다. 즉 ‘사람은 자기를 스스로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질 수 없고, 예수님을 스스로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 스스로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해 주는 표현이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스스로 살고자 여러 방식을 찾아 나서지만 사는 방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끝입니다. 방식이 없으면 끝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나 예수가 하겠다.’라고 선언하시는 말씀, 그 말씀이 바로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고, 복음을 모릅니다. 자기 목숨도 내놓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조건을 제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는 일임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나 예수가 해주겠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십자가를 지겠다.’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구원해 주겠다.’라고 다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8:34-35]은 ‘누구든지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가야하는데 너희들에게는 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결코 없어. 너희들 스스로 아무리 찾으려고 수고하고 애를 써도 다 헛된 일이야. 죽음의 길로 이를 뿐이야. 그래서 나 예수가 왔고, 나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부활해서 너희들을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할 것이야.’ 예. 하나님께서 하실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역으로 임할 결과가 [마가복음 8:38-9:1]입니다.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믿지 않는 자를 정말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나 예수와 나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꼭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 9장1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죄에서 놓임을 받아 그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있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으로 변화되었고, 의인의 삶, 성도의 삶,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