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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당시의 EPISODE
이 훈 종 (개교당시 초임교사)
송정학교가 문을 연 1938년 봄.
교육계에는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 조선사람이 다니는 학교는 초등이 보통학교(普通學校), 중등과정이 고등(高等)보통학교였는데, 일본인이나 들어가는 소학교와 중학교로 이름이 통일된 것이다.
거기가 거기라 이 고장에서는 당시까지의 송정(松亭)보통학교를 북평(北坪)소학교라 하고, 송정리 바닷가에 새로이 송정소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송정초등학교의 시작이다.
나는 그해 봄 경성사범학교를 갓 나와 북평소학교 훈도로 발령받아 왔는데, 모두가 이상해 했다. 인사이동이 끝났는데 웬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 뒤 얼마 안가서 이황(李愰)선생이 부임해오고 다시 사이또오씨가 들이닥치자, 다급해진 후지무라 교장은 당황해서 도청에 전화로 문의하였다.
그제서야 하는 소리가, 송정소학교가 설립되는데, 아직 인가절차가 남았기에 임시로 당신 학교로 발령냈으니, 개교사무를 맡기라고 그러는 것이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기로서니 그런 곰같은 처사가 통하였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제사 송정학교 설립 기성회로 연락하고, 함께 손잡아 개교 사무를 보기로 했는데, 훤한 벌판에 교사만 한채 덩그러니 섰을 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송정으로 옮겨가기까지의 며칠 동안에 나는 역사에 남을 일을 한가지 하였다. 어쩌다 내가 미술에 약간의 재간이 있는 것을 알고, 두 학교의 휘장(徽章)을 고안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 학교가 한 지역 안에 있는 형제 학교니 형 도안을 기본으로 하여 꽃잎 다섯을 돌려 붙여서 북평학교 것을 먼저 도안하였다. 이것을 뒷날 광복된 후에, 사꾸라 냄새가 나는 부분의 꽃잎을 동그랗게 무궁화 꽃잎으로 바꾸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여학생 휘장은 기본형 그대로 하였더니, 너무 기교(技巧)가 없다고 하더니만, 오래 안 가서 청초(淸楚)하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다음이 송정학교 문양인데 형을 기본으로 한 다음 동해의 떠오르는 햇살을 그려 얹고, 아랫불 양옆으로는 돋아나는 소나무 순을 그려 넣었더니, 사이또오교장이 욕심을 내서는 그 위에다 파도처럼 물방울이 튀는 그림을 더해놓았다. 남·녀 모두 이 도안으로 휘장을 주문했었다.
교사도 있고 운동장도 있는데, 운동장은 해변 모래 바닥 그대로였고, 교실에는 칠판은 걸렸는데, 책상과 걸상이 없었다.
다행히 내 행리 속에는 소학교 책·걸상의 기준을 적은 책이 있어서, 이것을 바탕으로 도면을 그려, 업자를 불러 주문을 하고, 그것을 들여 놓기까지는 맨바닥에 앉아서 읽고 엎드려서 쓰며 수업을 했다.
교실에서 바깥이 내다보이는 것은 좋으나, 복도와의 사이까지 온통 투명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데, 바꿔 끼울 재간이 없어서 흰빛 페인트를 칠하고, 솜방망이로 두들겨서 솔질한 자욱을 없앴다.
큰 길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통로를 내는데, 운동장 둘레로 보기 좋게 늘어선 소나무 숲을 끊으려 하기에 나는 말렸다. 그리고는 교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말뚝을 박고 그것을 중심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2중으로 원을 그려서 차가 돌아 나갈 만큼만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닦았다.
그랬더니 안팎에서 숲은 죽 이어진 것으로 보이고, 드나드는 이는 솔숲 속을 돌아서 드나드는 멋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숲을 등지고 남향하여 교문 기둥을 세우는데, 4각형 기둥의 1면을 1m씩으로 쌓으라 했더니, 그렇게 굵고 수퉁한 교문이 어디 있느냐고들 한다.
나는 웃었다. 나무 기둥에다 꼭 문패나 덜렁 매달아 놓은 교문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인생은 끝이 있어도 학교는 영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두가 미터법으로 통일하게 되겠는데, 날마다 드나드는 학생들이 팔을 벌려 안아보고, ‘1학년 때는 왼쪽 손끝에서 여기까지 오더니, 지금은 오른쪽 아래까지 온다’며 자신들의 성장한 것을 서로 자랑하게 돼야 할 것이 아닌가!라며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아, 드물게 보이는 우람한 교문이 탄생되었다.
학교 편성을 1학년서 3학년까지 한 학급, 진급하는 대로 늘려서 6학급을 완성하여 성장하였는데, 교원은 교장이 하나, 훈도가 둘, 단 셋이서 소꼽장난 같은 살림을 하였고 이 지역 강습소에서 수업한 학생들을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수용했는데, 학급마다 빠듯하게 80명씩을 채웠다.
학부형을 동원해 밭의 흙을 져다가 운동장을 덮었는데, 세게 밟으면 바닥이 깨지며 모래가 나오고, 정작 수업보다는 시설을 갖추기에 날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을 하며 보니까 건장한 체격의 중년 신사 하나가 큰 길을 거쳐 교문을 통해 들어오기에 영접하며 들어보니 흥남(興南)서 아이 둘을 데리고 이사 왔는데, 전입학을 받아줄 수 없느냐는 얘기라 연락할 장소를 물어서 메모해 놓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교장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묻는 것이다.
“지금 다녀간 사람이 누구요? 뭐 그런 사연이라고요? 저런 사람은 으례히 기마에(활달하다는 일본말)가 좋을 법이야. 우리 그사람 놓치지 맙시다”
그 시간 수업을 마치고, 전직원이라야 모두 합해 셋이지만, 함께 모여서 의논하였다. 정원 밖이지만 받아 놓고 보자.
기부를 받아내야겠는데 무엇이 좋을까? 옳지 오르갠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고는 야마하(그 당시 그상표 회사밖엔 없었다)에서 보내온 카달로그를 펴 놓고 150원짜리를 점찍었다. 그러나 먼저 좀 비싼 것으로 불러 봤다가, 양보하는 척하고 이 선에서 결정을 보자고 했다.
그래서 280원짜리 고급품으로 우선 부딪혀 보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날 저녁, 가끔 놀러가는 금도상회(金島商會)로 찾아갔더니 바로 불러다 대면을 시켜 주기에, 학교측의 의향을 전달하고는, 한잔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튿날 낮에 상회 주인인 최수희(崔琇熙)씨랑 아이들 남매를 데리고 찾아 왔는데,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씩씩하게 잘 생겨서 마음에 들었다.
교장이랑 이황선생과 초면인사를 나누고, 서류를 받아 입학 절차를 밟은 뒤, 천천히 오르갠 카달로그를 꺼내 펼치며 얘기를 꺼냈더니 선선하게 대답한다.
“예! 알았습니다. 응분의 성의야 표해얍지요. 어떤 것을 점찍으셨는지요?”
“이거요?”
“예, 알았습니다. 내일 오전중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쪽이다. 줄다리기를 하다가 상대가 갑자기 힘을 늦춰서 휘청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차 아이들에 의해서 현관 문짝 뒤에서 정종 한병과 오징어 한축이 들여져 근무시간중이건만 다섯 주객은 차 마시는 컵에 한잔씩을 채워서 들고 한숨에 들이마셨다.
교장이 전자에 광산지대 학교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개발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기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얘기는 그 다음이 재미난다. 어느 하루 상회에 들러, 홍사장의 거쳐를 물어 찾아봤더니만 이 양반이 좌판을 깔고 앉아 때묻은 헝겁 조각으로 무릎을 덮고 헌 구두의 창갈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장!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일을 손수 하시다니.....”
“차차 얘기 할테니 우선 가게로 나가십시다”
가게방에서 술잔을 나누며 그가 들려 주는 얘기는 이렇다.
자기의 고향은 개성(開城)이며, 거기서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 를 나왔는데 그 학교 방침이 특별해서 4학년까지 반 규정대로 가르치고, 5학년에 오르면 진학반과 실무반으로 나누어 진학반은 대학 입시준비에 전력을 쏟고, 실무반에서는 오전중 반 정규수업을 하고 오후부터는 실사회에 나가 당장 벌어먹을 기술의 실무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가장 비근한 것으로 이발(理髮)서부터, 양복(洋服)기술, 목수(木手), 미장(美粧- 토역(土役)), 도배(塗褙-표구(表具))등등 학생이 원하는대로 편의를 봐 주는데, “나는 양화(洋靴)기술을 익혔어요. 지금이라도 자금만 돌면 전방을 차리고 지망자를 뽑아 직공으로 양성하며 훌륭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로니 학교에 그런 거액을 덜컥 내놓으면서 이렇게까지야.....”
“내 자식을 맡기면서 어떻게 흥정해서 깎습니까? 나 홍○○ 그런 놈 아니외다. 홑으로 보셔선 안돼요. 이 짓을 해서라도 처자식 안 굶기는데 뭐 잘못된 거 있수까? 양심껏 살면 되는 거지요. 자 자 어서 이 잔 받으시고.....”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얘기다.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또 하나 얘기가 있다. 필자가 임시로 북평소학교에 적을 두고 있을 때, 교장 재량으로 이 역시 임시로 한 학급을 담임했는데, 학년초에 으례히 하는 일로 출석부(出席簿), 학급일지(學級日誌) 평소 성적 기록부 등 장부를 만들어, 백표지를 대서 묶어 가지고는 앞에다가 붓글씨로 장부 이름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앞서부터 근무해온 선생들을 보니, 새 장부를 들고 수석(首席) 교사에게 갖고 가 ‘표지 좀 써 주십시오’하면 물론 반 장난으로 하시는 말씀이지만 “ 먹 갈아, 갈았어? 담배 붙여 올려”하면 자신의 담배를 꺼내 사무실 복판에 놓인 화롯불에 붙여서 두대 모금 빨아 불을 살려 가지고 공손히 바쳐 드리면 그것을 받아 입에 물고, 돋보기를 코에 걸고는 촛점을 맞춰 쓱쓱쓱 써 주시는데,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고 또한번 허리를 굽혀 고마운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도 선배들 하는대로 그렇게 했는데, 신(辛)씨던가 하는 그 수석선생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어놓고, 정중히 써서 내어 주시는 거라,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날 밤 숙소에서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고 앉았는데 갑자기 뭉클하게 가슴을 치미는 것이 있었다.
분하다! 내가 한팔없는 병신이어서 생활능력 없으니 “한푼 줍쇼”하는 거나, “내 남 못다니는 좋은 학교를 나왔건만 글씨 쓸 줄 몰라 대신 써 주십쇼”하는 것이 병신이나 뭐가 다르더란 말인가?
하기야, 당시 내가 글씨를 아주 못쓴것도 아니고, 내 책상에는 아무런 문방구도 준비가 없으니, 혼자 생각이지만 핑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낮의 일이 자꾸만 분하였다. 그래 속으로 결심했다. 이제부터 글씨 공부를 힘써 하리라. 그렇다고 국어 시간을 정하여 법첩(法帖)을 놓고 유난을 떨며 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학교라는 직장이 글 쓸 기회가 좀 많을까?
수업하노라 칠판에 쓰는 글씨, 사무처리 하느라 쓰는 글씨, 고향의 부모님께 올리는 문안 편지 등등, 모두를 나의 글씨 공부할 기회로 알고 반듯하게 쓰자. 그러노라면 글씨 실력이야 어련히 늘랴?
그러기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데, 교단생활 60년에 내가 칠판에 글씨 흘려쓰는 것을 본 학생은 아직것 없다. 그러자니 직장에서의 신역(身役)은 무던히도 고되었다.
학교 외부로 나가는 글씨는 도맡아 써야 하고, 도표(圖表)를 그리랴, 입학 시험문제의 프린트 원판을 쓰랴, 환경 정리를 할 때면 대신 써 달라는 동료가 줄로 섰다. 그럴 때 담배 피워 올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이제 60년, 날더러 글씨를 아주 못쓴다고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송정학교는 내가 교단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교단 동기생이요, 따라서 동갑(同甲)이기에 감개가 새로와, 서투르나마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을 한벌 써서 보냈다.
금년은 1919년 기미년(己未年) 독립을 선언한지 8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한 때문이다.
내고향 송정과 나의 초임학교
최 갑 순 (송정초등학교 17대 교장)
하늘 높이 솟은 동해의 영봉 두타산에서 발원한 전천의 물줄기가 용추 폭포를 이루면서 무릉계곡의 넓다란 반석 위를 굽이돌아 유유히 흘러 뒷들(松亭)넓은 들을 옆에 끼고 할미바위(흔들바위)가 내려다보이는 갯목을 지나 검푸른 동해로 들어간다. 흔들바위에서 용정 포구까지 북으로 이어지는 백사장과 송림이 장장 십리에 뻗쳐, 붉고 푸른 해당화가 해변을 수 놓아 절경을 이룬다. 이곳이 해수와 담수가 합치는 동해안 제일의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지금은 산업화의 제물(祭物)이 되어 동해항이 개설 되면서 바다 속으로 잠겨 그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뒷들 양지쪽에 위치한 송정 마을은 우리 선조께서 정성으로 가꾸어온 나의 뿌리이며, 삶의 터전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기름진 들판은 영동 제일의 문전옥답이요 농업을 주업으로하는 대다수 주민들은 순박 온후하고 근면 성실하며 단위 부락으로는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호구와 인구수를 보유하였으며 의리를 존중하고, 합심협력하는 단결력과 향토애는 이 고장에 면면히 이어 온 아름다운 전통이다.
1937년 일제(日帝)는 송정 동민 소유의 부동산을 강제로 회수 하려하자 동민의 복지증진과 효율적인 재산 관리를 위하여 동민 주(株)를 발행하여 동선물산주식회사(東鮮物産株式會社)를 설립하고 300여명의 동민이 참여하는 결집력을 발휘하여 세를 과시하였다.
1918년에 설립된 송정공립보통학교(현 북평초등학교)가 북평동으로 이전하고 북평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이 개정되자 송정 동민들은 우리 마을에도 학교를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동민의 재력(財力)과 노력(勞力)으로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국가에 헌납하고 학교 설립 인가를 승인받아 송정공립심상소학교가 탄생 되었다.
천혜의 송림과 넓은 잔듸밭이 있는 해변에 세워진 웅장하고 위용있는 초 현대식 2층 건물은 당시 강원도내에서 교육환경 조건이 가장 좋은 신설 학교로 평가 되었다.
1938년 4월 29일 1·2·3학년 3개 학급의 학생을 시험 선발로 모집하여 개교한 송정초등학교는 학교와 지역사회가 힘을 몰아 신설학교 정비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개교 초창기 입학생(제1회~제3회 졸업생)들은 학교 주변의 환경조성을 위하여 솔밭을 개간하고 실습지를 만드는 등. 일 하면서 배우는 학교 생활이 밤 낮없이 계속되었다.
산듯한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손에는 언제나 책 보자기(책가방)와 농기구가 들려져 있었으며 해가 서산에 넘어가야 하교했다. 그래서 당시의 송정 학교를 농업초등학교라고 까지 했을 정도다.
학교 교문 입구에는 원형의 동산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동상(二官尊德)을 설치하고 학교 교육의 지표로 설정하였다. 동산은 어린 소년이 나무짐을 지고 걸어가면서 책을 읽는 형상으로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근로 면학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개간한 실습지에서 다양한 고급 채소류를 재배하는 한편 영농 기술을 습득시켜서 지역(地域) 농가에 보급하여 소득 증대에 기여하였으며 학교에서 생산한 농산품은 시중에 매각하여 그 판매 이익금은 학급과 개인의 예금통장에 입금시켜 학급경비와 개인 학자금으로 충당하였다. 또한 작은 동상(二官尊德)의 저금통을 학교 자체에서 제작하여 각종 교내행사 시상용 상품으로 수여하여 아껴서 저축하는 근검 절약을 생활화하고 실천토록 하였다.
1940년 침략자 일제(日帝)는 한민족의 일본화에 혈안이 되어 창씨 제도를 강행하였고 심상소학교의 학교명칭을 공립국민학교로 개정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여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43년에는 징병징용제가 실시되어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탄광으로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 가면서 학교 교육은 완전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1944년 송정학교는 개교한지 6년 비록 역사는 짧지만 도 내에서 앞서가는 우수학교로 인정받아서 강원도 지정 생산교육 시범 연구학교로 선정되고, 학교교정을 파헤쳐 호박밭을 만들어 부족한 식량을 해결한다고 법석이었다.
1944년 4월 1일 나는 내 고향 송정 초등학교(당시 송정공립 국민학교)에 강원도지사로부터 임지를 지정 받았다. 부임 당시 너무나 큰 곤욕(困辱)을 겪어야만했다.
부임 길 양양 정류소에서 보따리와 함께 발령장을 분실(도난당함)하였다.
지금도 가끔 양양을 지날때면 그 악몽의 초부임길이 생생하게 떠오르곤한다. 양양 경찰서에 가서 분실 신고를 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발령장 없이 부임 신고차 학교에 갔다. 고향 학교라는 믿음이 나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당시 교두(敎頭, 현교감)는 안경모(安景模)선생이셨다.
다행히 지면(知面)이 있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학교장(일본인 藤本)에게 부임신고 주선을 부탁하였다. 수석훈도(교무주임) 정병조(鄭柄粗)선생께서도 조언(助言)해주셨다. 송정이 고향이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토박임을 설명하고 앞으로 고향 학교를 위해 많은 공헌이 기대된다고 대변해 주어서 별 다른 질책없이 부임 신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임 1개월이된 어느날 교두선생께서 나에게 신상문제를 은밀히 귀뜸해 주셨다. 발령장 때문에 군 주재시학(郡駐在視學)이 사상적(思想的)으로 요 주의 교사로 지목하고 있으니 언행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그후 열과 성을 다하여 학생을 가르쳤고 학급경영도 충실히 하였다. 그러던중 양양 경찰서에서 분실한 발령장을 군 주재시학을 경유하여 학교로 보내왔다. 발령장 분실이 사실로 밝혀져서 신상문제도 다소 회복되었다.
교사(校舍) 동편에 있는 푸른 잔디밭은 각종 행사와 체육 활동을 하는 제2운동장이다. 나즈막한 해송이 병풍처럼 운동장 주위를 둘러싸서 해풍을 막아주고 송림사이로 백사장이 펼쳐진 동쪽 끝에는 흰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동해 바다가 보인다. 씨름, 달리기, 체조, 수영, 꾸미기, 축구등 다양한 기능을 마음껏 수련한 자연의 도장(道場)에 누워서 높은 하늘을 가끔 쳐다본다.
공개 보고회 준비를 위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어느덧 부임 반년이 되었다. 생산교육 시범 연구학교 공개 보고회가 9월에 개최 되었다. 강원도내 1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보고회가 우수한 평가를 받고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나는 일반교과 저학년 연구수업을 하여 찬사를 받았다. 격려와 따뜻한 위로를 받고 기쁨과 보람을 부임후 처음 느끼면서 더욱 교육에 전념할 것을 다짐했다.
미(美)공군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유럽에서는 그 유명한 노르망디 공격으로 연합군의 세계 제2차 대전 승전보가 뉴스로 전파되던 1944년이 저물고 1945년이 되었다. 일본의 패전 전황이 날로 더하여 학교에서는 공습에 대비한 방공훈련이 매일 실시됐다.
1945년 7월 14일 토요일 이날은 나의 교직생활을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된다.
3교시 수업이 종료될 무렵 요란한 비행기의 프로펠라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하였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공군 함재기 편대가 학교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처음보는 우리는 어느나라 비행기인지 조차 식별 못 했다. 제2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저공으로 날으는 비행기가 신기하여 좋아라고 쫓아 다녔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학교 상공을 지난 비행편대는 북삼화학공장(현 동부건설(동해/북평)공장)과 나안동에 있는 제철공장(是川製鐵)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굉음이 온 세상을 뒤흔든다
적기내습.....공습경보발령.....뒤늦게야 사태를 감지하고 훈련이 아닌 실제의 대피령이 하달되어 학생들을 방공 대피호로 인솔하였다. 학교 운동장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600개의 솔밭에 개인용 방공호(壺塹壕)를 파서 평상시 대피 훈련을 했던 곳으로 전교생이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 질러서 정신없이 뛰어갔다. 모두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저학년은 가까운 곳에 고학년은 먼곳으로 이동시키면서 차례로 한 항아리에 2, 3명씩들어 가도록 유도 하였다. 질서가 엉망이다. 삼척 상공을 선회한 비행편대는 또다시 학교 상공에 모습을 나타낸다. 워낙 저공으로 비행하기때문에 학생들이 대피소로(松林) 이동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어 마음이 조마 조마하다. 꼭 솔밭에 사격을 가할것만 같았다.
1번기가 지나가고 2번기, 3번기도 학교 상공을 그냥 날아간다. 이 무렵 학생들의 대피 행렬은 운동장을 거의 지나 송림 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다. 4번기가 텅빈 학교 건물을 향해 기총 사격을 가하였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꽃이 튀고 연기가 자욱하며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난생 처음 듣는 기관포 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넘어지고 엎드려서 꼼짝을 않는다. 뛰어가는 아이들은 가까운 방공호에 마구 뛰어든다. 2, 3명이 들어갈 방공호에 순식간에 8, 9명이 겹으로 쌓인다. 밑에 있는 아이들은 숨이 막혀 죽겠다고 울며불며 아우성이다.
위에 있는 아이들을 다른 방공호로 이동 시키려했지만 허사다. 꼼짝을 하지않은 아이들은 선생님! 소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고 울어댄다. 정신없이 솔밭을 이리뛰고 저리뛰며 돌아다니다보니 오랜 시간이 지났다.....공습이 끝났다.
학교건물 여러곳에 기관포탄 구멍이 마치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700여명의 전교생은 단 한명도 다치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 공군 조종사에게 감사했다. 얼마던지 인명을 살상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텅 빈 학교 건물에만 위협 사격을 했을뿐이다.
그후 한달! 일본이 패망 할 때까지 단 한차례도 공습은 없었다.
공습의 공포로부터 헤어나지 못한채 1945년 8월 15일을 맞았다.
이날 은 수요일이다. 3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장이하 전직원이 일본 대본영 중대발표 방송을 청취하기 위하여 시내에 있는 금강 시계점에 갔다. 송정동리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라디오가 있어서다.
12시 정오 일본 천황의 떨리는 음성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 나온다.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짐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전쟁의 종식…
일본인 교장의 겁에 질린 모습이 측은 하기만하다 조국이 해방되었다.
교두 안경모선생께서 기반 구축에 노력하였다. 특히 동민에게 한글 교육을 시킨것은 너무나 벅찬일로 기억된다. 안경모 교장 후임으로 김정경(金鼎卿)교장께서 부임 하셨다.
“하늘 높이 솟아, 장엄한 두타산”
김정경작사 최갑순(崔甲洵)작곡의 송정학교 교가가 제정 되었다. 개교 10년의 역사를 바탕으로 학교와 지역사회가 합심하여 날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나의 4년간의 교사생활은 1948년 3월 15일 마감 하였다.
고향 송정학교에 두번째로 근무 한것은 교장 재직 시절이다. 3년 6개월동안 너무나 많은 성원과 협조를 얻어서 학교경영에 큰 성과를 올려 보람을 느꼈다. 여기에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여 고마운 분 들에게 대한 감사의 인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정부의 산업화 정책으로 동해항(港) 개설이 결정됨에따라 40년의 역사와 함께 훌륭한 인재를 길러온 천혜의 자연 경관이 수려한 육영의 요람 송정 학교 부지가 항만 개설 용지로 매수되어 바다 속으로 잠기게 되었다.
1977년 1월 동리에서 2km 떨어진 봉오동 당지산 밑에 9,000여평의 부지를 조성하고 3층 콘크리트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내가 17대 교장으로 부임한 것은 1981년 9월 1일이다. 33학급 1,800여명의 학생과 40여명의 교직원이 함께 생활하는 대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착하고 슬기롭고 아름답고 튼튼한 어린이를 기르는 교육지표를 설정하고 내실있는 교육계획을 수립하여 알차게 추진하였다. 학교를 이전한지 일천하여 정비해야 할 학교환경과 시설이 많았다. 그 하나는 높은 곳에 위치할 교사(校舍)와 운동장 사이의 계단 경사가 극심하여 쉬는 시간마다 오르내리는데 매우 불편하고 위험하다. 또한 4,600여평의 넓은 운동장은 바위가 돌출하여 넘어져서 다치는 어린이가 많았고 비가 오면 온통 진흙 죽이 됐다.
교사 전면 경사를 스탠드로 구축하고 계단을 완만하게 설치하는 2,500만원의 대 공사를 교육청에서 지원해주었고 운동장에는 마사토 380대 분량을 트럭으로 반입하였다. 트럭 운임비용은 교육청의 보조와 송정동 재산 관리위원회(회장 洪渟永)에서 100만원의 거액을 지원받아 충당하였다. 반입된 마사토를 펴고 정지하는 작업은 해군(동해 해역 사령부 사령관 제6회 졸업 金鎭甲장군)에서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1주일간 해주었다. 30㎝의 두께로 마사토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서 힘차게 달리고 뛰놀던 어린이들은 수업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시보를 들으며 완만하게 설치된 계단을 가벼운 걸음으로 교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다. 그후 아쉽게도 송정학교는 다시 이전하였고 현재 이곳은 동해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다음은 체육교육 분야를 소개하여 본다.
도 지정 체육과 시범학교 보고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그 운영 사례를 교장 연수회에서 발표하고 체육교육의 일반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교1운동 육성종목인 야구부가 도 대표로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강원 야구사상 최초로 전국 8강에 오른 쾌거로 강원 야구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일은 송정학교의 큰 자랑이었다. 학교 체육진흥회(회장 제7회 졸업 金靖久) 임원들의 헌신적인 협조와 거액의 재정 지원으로 야구 배망을 비롯하여 체육기구를 시설하였다.
동창회에서도 후배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였다. 총동문회(회장 제4회 졸업 鄭然淑)에서는 50인조 뺀드부 조직에 소요되는 기금 500만원을 1회에서 25회까지 회기별로 20만원씩 모금하여 기탁해 주었다. 조직된 뺀드부는 학교행사는 물론 시(市)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우수한 연주로 갈채를 받았다.
재임중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것은 1984년 12월 학교 경영 최우수학교로 선정되어 학교와 교직원 전원이 영예의 교육감 표창을 수상한 일이다.
1985년 3월 1일 인사규정에 따라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다시한번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과 재임 당시의 학교어머니회, 학교체육진흥회, 총동문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개교 60돌을 맞는 송정초등학교의 무궁한 발전과 총동문회의 영원한 영광이 이어지기를 기원 하면서 회고담을 맺는다.
상전벽해(桑田碧海)
김 학 용 (재직교사/현 동해교육청 학무과장)
‘상전벽해’하면 송정초등학교가 떠오른다.
어린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어디였는지 가늠할 길조차 없이 푸른 물만 출렁이는 곳.
배움의 터전을 바다에 내어 주고 외딴 산꼭대기로 이사를 갔다가 10여년만에 또 옮겨야 했으니 적지 않은 시련을 겪은 셈이다. 그러는 사이에 30여학급이던 규모가 10학급 남짓해진 오늘, 번창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감회는 아쉬움이 앞선다.
그러나 학교 이름 따라 송정벌에 다시 터를 잡았으니 이제 그 명성과 발전이 영원무궁하리라. ‘송정’이란 이름은 아름답고 멋스럽다. 전국에 같은 이름의 마을과 학교가 꽤 여러 군데 있지만 내가 몸 담았던 옛 송정만한 곳은 없는 줄로 안다.
확 트인 동해 바다를 낀 울창한 송림 사이에 드문드문 정자들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전천강’이 이루는 갈대 숲 호수에 낚싯줄을 드리운 태공들, 아마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여유와 멋이 서려 있는 그 곳에 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자연 환경은 정말 자랑거리였다.
온갖 풍상을 이겨 낸 듯 비스듬히 서서 우릴 반기던 교정의 노송들이 지금도 눈에 서언 하다. 그리고 스쳐 가는 솔바람 소리와 잔잔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가 생각만 해도 귓전에서 맴도는 것 같다. 송정초등학교는 나에게 남다른 추억이 담겨 있다. 그것은 내 인생과 교직생활에서의 뜻깊은 흔적이다.
총각 딱지를 떼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한 곳이 송정초등학교에서였다. 나의 반려자는 송정 토박이며 물론 송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곳에서 만난 인연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나는 송정을 좋아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전에는 송정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었다.
그렇던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어 근무를 했던 곳이 바로 송정초등학교이다. 그 동안 교감선생님이 다섯 분이나 바뀌었으니 기록적인 일이다. 거의 해마다 새로운 분을 맞이한 셈인데 모두 영전을 하여 떠났다.
내가 송정초등학교로 발령 받은 것은 1968년 3월 1일이었다. 만 6년을 근무하고 1974년 3월 1일자로 옮겼다. 5년이 만기인데 1년을 덤으로 근무했다.
송정초등학교로 갈 때도 연구학교라는 과제가 나에게 행운이었고 떠날야 할때도 새로운 연구학교 운영 마무리를 하느라 1년을 주저앉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부임하여 입학식을 치른 1학년 어린이들이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을 할 때 나도 정들었던 교문을 나섰다. 헤어진지 이제 23년이나 지났으니 그 모습을 알 수야 없지만, 지금은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 가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더러는 그 때의 자신과 같은 모습의 자녀를 두고 모교를 찾아가는 학부모가 되어 있을 것도 같다.
나는 6년동안 주로 저학년만 담임을 했었다. 사무분장에서 비교적 일거리가 많은 것이 내 차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나누며 내 곁에서 맴돌던 귀염둥이들이 꽤 많이 있었지만 이제 돌아보니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때문일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지금 송정 거리에서 장년층을 만난다면 십중팔구는 그 때의 어린이들이겠지만 아마도 서로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저 오가며 스치고 지나간 사람처럼 된 것은 더 많은 정을 담아 주지 못한 나의 탓이라고 후회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만남이었으니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려니 자위해 본다. 어떻든 허전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의 송정 생활은 즐거웠었다. 친구들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드센 기질이면서도 은근한 정이 있었다. 그 때의 일화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전임교인 삼척읍내 진주초등학교에서 5년 만기가 되어 송정초등학교를 희망했다. 두 학교 모두 경합이 심한 A급지 학교여서 수평 이동이 어려웠는데 연구학교에 대한 특례조항이 있어 발령되었다.
부임에 앞서 나에게 송정 지역사회에 대한 몇 가지 오리엔테이션을 해준 동료가 있었다. 일본 말로 ‘쇼떼이 곤죠’라는게 있으니 유념하라는 얘기였다.
평소에 스쳐 가는 얘기로도 송정은 텃세가 심하다는 귀동냥은 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땅의 보통사람 사는 곳에 교육하러 가는데.....하는 생각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상황은 귀띔 해 준 대로였다. 벼르고 있었던 듯 부임하고 며칠 안되어 몇몇 송정출신 동료들이 학교 뒤 솔숲에서 조용히 좀 만나자는 것이다.
흡사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 결투 신청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 갔더니 다짜고짜 여기가 어딘줄 아느냐, 누구 빽으로 왔느냐, 너 교장한테 간첩 노릇 하러 온 것 아니냐는 등 사뭇 위압적인 분위기로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여기가 좋아서 희망했고 운 좋게 발령이 나서 당신들 모교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는데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열심히 잘 해 달라는 부탁은 못할 망정 이런 치사스러운 시비가 있을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리고 당신들은 평생 나무처럼 여기서만 살 것이냐라고 반문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별 일은 없었다. 그로부터 우린 허물없는 욕친구가 되었고 서로 신뢰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내가 맡은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해 주는 원군이 되어 원만한 교무운영도 할 수 있었다.
훗날 그 때의 시비 연유를 들어보고 웃음과 함께 고개가 끄덕여 졌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강원도 전역에서도 이름 석자만 대면 모두가 아는 유명한 원로였다. 강원도립사범을 나오셨는데 별명이 ‘낮도깨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훈련소장’으로 더 알려졌다. 송정에서도 예의 훈련소장의 위용을 떨치셨으니 교사들은 늘 긴장 속에서 근무를 하며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런 교장 선생님과 나는 연고지가 같은 강릉이고 일찍이 잘 아는 터에다, 이미 다른 학교에서 두 번이나 모신바 있어 송정에서 세 번째가 되었다. 평소 나에게 상당히 신임을 주시던 분이시라 공교롭게도 내가 부임하기 전에 직원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셨던 게 동료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화근이 되었다. 교장이 미운데 새로 오는 친구마저 교장의 측근(?)쯤으로 생각되니 나를 곱게 보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 거기에다 앞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학교장에게 흘러 들어가는 통로 구실을 할 것으로 믿어지니 사전 경고의 뜻에서 결행된 송정 텃세였다고 하면서 옛날 같았으면 일 났을 거라 했다. 오래 전에 새로 오는 사람에겐 한 차례 통과의례처럼 본때(?)를 보이는 전통이 있기도 했다니 아무래도 송정은 예사로운 곳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 후 함께 지내면서 송정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화끈한 기질은 하나의 개성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들 자신도 송정 기질을 ‘개떡’같다고 했다. 고집스럽고 타협을 마다하는 성깔의 경우를 적절히 표현한 것인데 은연중 웃음이 나오는 유머가 담겨 있다.
어느 해 가을운동회를 마치고 직원들이 소금강으로 1박 여행을 갔었다. 교감선생님은 연수 중이었고 교장선생님은 당신이 끼이면 직원들이 불편스러워 재미가 없을 거라면서 불참하여 내가 인솔했었다. 소금강엔 여관이 없어 민박을 했는데 전기 마저 없던 때여서 남포 불을 밝혀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주당들이 밖에서 거나하게 취한 기분으로 들어와서는 재미있게 노는걸 훼방 놓은 게 발단이 되어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져 왁자해졌었다. 그 와중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남포등이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고 석유 불이 방에 번져 하마터면 화재를 낼뻔 했었다. 그 상황을 지켜 본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말은 ‘해부가(해변가) 사람은 선생도 별 수 없다’였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순전히 술 탓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참으로 민망스럽고 부끄러웠다. ‘사자가 없는 골엔 토끼가 왕’이라 했는데 말려도 듣지 않고 소란을 점점 더 피울 땐 정말 개떡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 다시는 송정에서 직원 여행을 안 하리라 했는데 그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러움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작심3일이라고 그 다음 해에도 우린 또 직원 여행을 함께 했었다.
이처럼 지나고 나면 즐거움으로 남는 추억 가운데 즐거움 아닌 세상을 등지고 순직할 뻔했던 일도 있었다. 지금도 학교운영계획서를 대하노라면 송정초등학교 숙직실에서의 사태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컴퓨터와 복사기가 등장한 학교 행정 장비의 현대화는 교무실의 구차했던 풍경을 바꿔 놓았다. 선생님들의 업무 처리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지난날이 참으로 힘들었던 만큼 열심히 살기는 살았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하찮은 서류 하나 만들려 해도 묵지로 복사를 하거나 등사를 했으니 말이다. 그 때 만해도 웬 시험은 그리 자주 쳐야 했는지..... 퇴근하면 밤늦게 까지 시험문제를 필경 하는 작업을 거의 일과처럼 하노라니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 살이 박혔었다. 그나마 등사라는 게 몇 장만하고 나면 원지가 밀리거나 찢어져서 엉망이 되곤 했으니 늘 손이랑 옷에는 등사잉크 자국이 떠날 날이 없던 세월을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 특히 글맵시 있는 최종석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교사는 전담 필경사처럼 그런 일을 도맡아 했었다.
학년말이면 새학년도 운영계획서를 만드는데 70~80쪽이나 되는 걸 원지에 필경을 하여 등사물로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여 만들어도 쓰임새보다는 구색 갖추는데 그치는 격이었지만 그래도 해마다 더 잘 만들려고 노력했다. 지금 같으면 디스켓에 저장을 했다가 수정 작업으로 얼마든지 새롭게 꾸밀 수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교무를 맡은 나하고 최선생님은 매년 그 무렵에는 몇 몇일을 숙직실에서 지내며 운영계획서를 만들었다. 정확치는 않지만 1970년도로 기억되는 해에 우리는 염라대왕 앞으로 가다가 되돌아 왔다. 연일 숙직실에서 2시가 넘도록 작업을 하다가 눈을 붙였는데 연탄가스에 중독 되었던 것이다. 침구에 소변을 보고 구토를 하여 범벅이 된 가운데 우리 둘은 한데 엉킨 채 혼수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그런 상황을 관사에 거주하시던 교감선생님이 아침 식사하자고 이르러 오셨다가 보시고는 소동이 났다. 병원에 업혀 가서 링게르를 맞는다 동치미 국물을 마신다 법석을 쳤던 일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그날 이후 기억력이 뚝 떨어졌다면 그건 엄살일까? 아니면 나이 탓인 자연현상일까?
이제 송정초등학교도 인생 회갑인 셈이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이 되었다. 공자는 ‘60세가 되어서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들으면 이해가 된다’하고 ‘이순’을 말했다.
개교 60년이면 송정초등학교도 인생처럼 원숙한 때를 맞았다. 그 속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 큰 꿈 키우는 배움의 요람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난날의 영광과 함께 더욱 빛나기를 바라면서 무궁한 발전을 빈다.
송정동에서 봉오동으로 학교이전시
근무를 회상하며
동문회, 학부모, 교직원이 함께하는 송정교육
이 연 수 (현 북평초교 교사)
나는 77년 3월 1일자로 북평국민학교에서 송정국민학교에 부임했다. 1970년 후반 국토개발종합계획에 의하여 동해(북평)항 건설이 착공되어 송정국민학교는 부득불 봉오동 산 구릉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북평읍민들 간에는 찬·반과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동해안 제일의 무역항과 군항이 들어서게 되면 부산, 인천과 같은 대도시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자긍심이 부풀어 있는가 하면, 전국적 명소로 이름난 송정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한 관광 수입과 채소와 같은 농산물 생산에 따른 수입은 지방 서민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여 반대하는 사람 또한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국토건설과 경제 부흥이라는 국가적 대과업에 의해 해안가 송림속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던 본교는 77년 1월8일 봉오동 현 동해초등학교 자리에 이전하게 되었다.
파괴와 건설의 교차로!
당시 송정국민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붉은 야산 언덕에 백색 현대식 3층 슬라브 건물이 덩그렇게 솟아 있고 주위는 온통 적토 더미로 살벌하기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교직원 조직은 이 학교 출신인 장문기 교장선생님이하 여러명이 있었으며 묵호·북평지구에 거주하는 지방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부임 이튿날부터 수업이 끝나면 전 교직원은 물론, 동문회 임원 및 학부모 대표들과 함께 어울려 송정 구 학교 교정에서 트럭으로 정원수를 옮겨 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구 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어느 서부 영화에 나오는 폐허의 도시 같았다. 불도저와 포크레인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으며, 교정 곳곳에 파 놓은 향나무를 위시한 정원수와 각종 체육기구들이 이리저리 뒹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수목과 체육기구들을 옮겨 심고 세울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지금까지 송림 속의 아담한 이 학교는 전국적인 명소로 여름철 각 학교의 야영 수련지로도 이용 되었거니와 시범·연구 지정학교와 강원도 교원연수장소로도 활용되었던 곳이다. 그동안 이 학교에 공들여 쌓아 놓았던 피땀어린 정성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허무감 마져 느꼈다. 그러나 한편 ‘파괴는 건설이다!’라는 구호를 일깨워 주는 듯 항만 건설 현장의 산업 역군들의 불철주야 일하는 힘찬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가질 수 있었다.
누군가 해야 한다!
3월 한달은 우선 수목이전 식재, 4월은 운동장 모래 깔기 및 체육기구 설치, 5월은 화단 가꾸기 조성, 6월은 교사 주변 보도 포장 및 보도블럭 깔기, 7~8월은 각종 동상 및 동물상 건립등 기본계획을 세워 1학기중 외부 조경사업은 일차 끝내기로 하고 하나하나 추진하여 나갔다.
- 3월 초순, 그해 따라 웬 진갈 눈비가 많이 내리던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교직원이 나무심기 총 돌격!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꽂는 거야
20여년이 지난 지금, 울창하게 살아 우거진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 그지없고, 하느님께선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실감했다.
- 4월의 체육기구 설치
운동장 곳곳에 웬놈의 돌과 암반이 그렇게 많던지
파면돌, 파면 바위, 파면 암반.....
깨고, 부수고, 헤치고. 뚫고
운동장 가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체육 시설들을 보면
억척스럽기 그지없었고, 그때 그시절이….
- 학교 주위 보도 포장과 보도블럭 깔기
노가다가 따로 없다. 오전엔 훈장, 오후엔 노가다
학교장은 노가다 십장, 교감은 부십장
쏟고, 비비고, 퍼 넣고, 쑤시고, 다지고.....
여선생님들 보도블럭 갖고 바둑두나 모자이크 하나?
한사발의 막걸리와 음담패설이 피로 회복엔 최고!
- 이런걸 이심전심이라 하나?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교원만의 특별 보너스인 연수·연가 다 팽개치고
이순신 장군상 모시랴, 독서상, 사자상, 기린상 세우랴
양어장 파랴, 분수대 세우랴.....
미쳤다 미쳤어, 삼복더위 뙤약별 아래서
그래도 분수대 오줌싸게상의 고추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거든.
교원의 사명은 교육에 있다!
당시 신설 학교의 기틀을 하루빨리 자리 잡고자 교직원은 물론, 총동문회원과 학부모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새학교 건설에 매진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 학력 관리에는 철저를 기하였다. 매월 학업성취도검사를 실시하여 학습목표 도달도를 점검하고, 학력수준을 파악하여 부진아 일소에 선생님들이 전력투구하셨다.
또한 교수 - 학습 기술의 연마를 위하여 연수·연찬은 물론 연구수업 발표도 빼놓지 않고 추진한 결과 삼척군(당시) 관내에서 학력만은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당시 재학 및 졸업생들이 훗날 명문고교와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것을 보면서 다시한번 교직의 보람을 느끼곤 한다.
또한 본인이 근무할 시절 2년차에 걸쳐 삼척군 교육청 지정 학습환경개선 연구 학교를 추진하였고 이것을 기초로 ’91~’92년 강원도 체육과 시범·연구학교로 지정 운영 발표하였으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 금년(’97년도)에도 강원도 교육청 지정 영어과 연구학교 공개발표로 도내에서도 선진학교의 명성과 칭송을 주위로 부터 들었을때 명실상부한 동해시 인재 양성의 요람이 아닌가 생각 된다.
나라는 바뀌어도 모교는 영원하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이북의 오산학교 동문들이 매년 이남에서 동문 모임을 갖는 것을 보았으며, 우리나라 소학교 출신의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 모교를 찾고 스승을 뵙는다는 이야기를 주위로부터 들으면서 역시 모교는 영원한 요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1970년대 후반 송정국민학교 이전때에 근무한 관계로 본인에게 원고 청탁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비록 졸필이나마 20여년전 송정국민학교 근무 시절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을 다시한번 회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신 총동문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당시 총동문회 장재진, 최종한, 정연숙 회장님과 홍순영 부회장님 이하 여러분, 박동철, 임기훈 통일주체대의원이셨던 학부모 대표님 그리고 송정교의 조경을 위하여 자택 정원수까지 기증하여 주신 저의 학부형이신 이광엽 송천장학재단 이사장님과 임재한 어머니를 위시한 여러 학부모님들의 노고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개교 60주년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지역교육의 중추적 역할로 국가 사회의 동냥을 길러 낼 수 있도록 항시 모교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동문제위 분들의 정성을 흠모해 마지 않으며 좥 송정초등학교 동문회 좦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다만, 미비한 소인이 두서없는 소명을 갖고 함께 동고 동락하였던 선후배 선생님과 동료들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자 소개드려 본다.
·교 장: 장문기 선생님(퇴임) 교감:권오찬 선생님(현, 송정초등학교장)
·주임교사: 홍승현, 정광교, 홍순원, 김윤수, 최용주, 함상호, 박경승, 남경식, 김원용, 김윤하
·교 사: 김복녀, 강봉순, 최난숙, 김길자, 김웅기, 최태규, 구정자, 홍정숙, 최금옥, 정의원, 김춘옥,
이경순, 김수정, 최범식, 황현동, 박은영, 김옥자, 남효일, 장세연, 최태영, 김진배, 김송자,
김순애, 이종이, 전하택, 심영호, 홍일표, 이근옥, 최돈모, 김영숙, 전찬영
·서 무 과: 김형만, 박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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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정초등학교를 졸업하여도 역사를 모르고 있었는데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