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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사계전서 제46권 / 부록(附錄)
거의록(擧義錄) 정묘년(1627, 인조5)
○ 만력(萬曆) 무오년 -광해군 10년(1618)- 에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켰다. 천조(天朝)에서 격문(檄文)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군사들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강홍립(姜弘立)을 발탁하여 원수(元帥)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강홍립은 마가채(馬家寨)에 도착하여 싸우지 않은 채 항복하였다. 천계(天啓) 갑자년 -인조대왕 2년(1624)- 에 역적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도망쳐 달아나 오랑캐에게로 가 강홍립을 만나서는 우리나라에서 강홍립의 집안을 몰살하였다는 내용으로 속여 강홍립의 역심(逆心)을 돋우었다. 정묘년 1월에 오랑캐들이 철기(鐵騎)들을 규합하여 의주(義州)로 돌진해 들어왔는데, 흉봉(兇鋒)이 이르는 곳마다 개나 닭까지 모조리 도륙당하였다. 평양(平壤)이나 황주(黃州) 등지가 잇달아 함락되어 이민(吏民)들이 모두 도망치고 조야(朝野)가 흉흉해하면서 두려움에 떨었으며,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파천해 들어가고 동궁(東宮)은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 천계 정묘년 -인조대왕 5년(1627)- 1월 정해일 -19일- 에 유지(有旨)를 내려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오랑캐들이 변경을 침범해 들어와 의주가 함락되었으며, 잇달아 선천(宣川)과 정주(定州)가 함락되었다. 만일 오랑캐들이 양서(兩西) 지방을 꿰뚫고 지나가 복심(腹心)이 되는 지역까지 깊이 쳐들어오게 된다면, 나라를 회복시킬 바탕이 오로지 남방(南方)에 있을 것이니, 환란을 대비하는 방도를 잘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경을 호소사(號召使)로 삼고 인신(印信)을 내려 보내니, 경은 의병(義兵)들을 규합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와서 근왕(勤王)하라.”
하였다.
○ 1월 경인일 -22일- 에 선생은 유지를 받들고 즉시 장계(狀啓) -제1권에 나온다.- 를 올린 다음 가까운 경내 -여산부(礪山府)의 황산(黃山)이다.- 로 나아가 머물러 있었다. 신묘일 -23일- 에 막부(幕府)를 세우고 양호(兩湖) 지방에 격문(檄文) -제5권에 나온다.- 을 보낸 다음 전 부사(府使) 송흥주(宋興周)를 뽑아 부사(副使)로 삼고, 전 지평(持平) 윤전(尹烇)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전 군수(郡守) 송이창(宋爾昌)과 전 박사(博士) 송국택(宋國澤), 처사(處士) 유즙(柳楫)을 참모(參謀)로 삼고, 전 별좌(別坐) 안방준(安邦俊), 전 현감 고순후(高循厚)를 의병장(義兵將)으로 삼았다. 또 전 현감 기정헌(奇廷獻)ㆍ박지효(朴之孝)ㆍ정민구(鄭敏求), 전 별제(別提) 신필(申滭), 진사(進士) 유평(柳玶)ㆍ박충렴(朴忠廉)ㆍ구영(具瑩), 유학(幼學) 고부민(高傅敏)ㆍ유술(柳述)ㆍ윤경(尹熲)ㆍ김해수(金海壽)ㆍ이복길(李復吉)ㆍ김준업(金峻業) 등을 유사(有司)로 삼아 군사와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2월에 세자(世子)를 공주(公州)에서 맞아 알현하자, 세자가 즉시 만나 보고는 아주 극진히 위로하고 유시하였다. 선생은 끌어 모은 군량과 병기를 가지고 행조(行朝)에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분조(分朝)를 호종하여 전주(全州)로 갔다. 어느 날 저녁에 오랑캐들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는 거짓 경보가 들려오자, 분조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 세자를 받들고 영남의 바닷가로 떠나가려는 탓에 인심이 무너져 토붕와해될 형세가 뚜렷했다. 이에 선생은 먼저 체찰사(體察使)를 만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역설하고, 또 면대를 청하여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그러자 세자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나의 뜻 역시 그렇다.” 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와언이 잠잠해졌다.
이어 청주(淸州)로 가서 여러 의병장들을 불러 모아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며, 잇달아 군사(軍事)에 관한 일로 호남백(湖南伯) 민성휘(閔聖徽)에게 편지 -제3권에 나온다.- 를 보내어 의논하였다. 2월 보름 이후로는 화의(和議)가 이루어져서, 인하여 모집한 군병을 출발시키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 3월 을해일 -8일- 에 선생은 드디어 문인(門人)들과 강도로 들어갔다. 경진일 -15일- 에 행궁에 들어가서 알현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경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지경을 당하여 나랏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게 여긴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망극합니다. 신은 늙고 병들었으며 재주도 엉성해서 직임을 감당할 바가 아닌 탓에 한갓 왔다 갔다만 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오랑캐들의 형세가 조금은 느슨해졌으니 직명(職名)을 풀어 주어 향리로 돌아가서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경내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로 직임을 맡은 채 돌아갔다가 혹시라도 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관할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 종시토록 온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선생은 이미 향리로 돌아온 뒤에 황산서원(黃山書院)으로 가서 머물면서 의병과 군량에 대해 처리하고 출납 장부를 정리하였다. 4월 무신일 -12일- 에 상소를 올려 호소사의 직임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고는 인신(印信)을 올려 보냈다.
송흥주(宋興周)
자(字)는 용아(用我)로, 진천인(鎭川人)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인 송영진(宋英震)이 전쟁터에서 죽자, 공은 남쪽 지방으로 유락(流落)하여 숙부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에게 의탁해 자랐으며, 뒤에 드디어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올렸다. 광해가 정사를 어지럽히자 공은 개연히 항거하는 상소를 올려 정온(鄭蘊)의 충성스러움과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에 대해 극언하였다가 금고(禁錮)되기까지 하였다. 계해반정(癸亥反正) 초에 교관(敎官)에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부사(副使)로 삼자, 공은 양호(兩湖) 지방 사람들을 격려하였는데, 군용(軍容)이 아주 엄숙하였다. 세자를 모시고서 통진(通津)에 갔으며, 그 뒤에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뒤에는 임천(林川)의 강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졸하였다.
윤전(尹烇)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후촌(後村)이다. 파평인(坡平人)으로 문정공(文正公)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동생이다.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학문에 힘쓰면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공은 엄성(嚴惺), 권확(權鑊)과 더불어 흉악한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이위경(李偉卿) 등의 과거(科擧)를 정지시켰으며, 이로부터 벼슬길에 있을 생각을 끊었다. 계해반정 뒤에는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정묘년 봄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정으로 달려가 문안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대가(大駕)가 이미 강도(江都)로 들어가고 세자가 분조(分朝)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선생이 공을 뽑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자 군읍(郡邑)을 돌아다니면서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았다. 오랑캐들이 물러가서 의병을 파한 뒤에는 선생을 따라서 입조하였다. 병자년에 필선(弼善)으로서 세자빈(世子嬪)을 모시고 강도로 들어갔다. 정축년에 성이 함락되자 오랑캐들을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강도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이성(尼城)에 살았다.-
송이창(宋爾昌)
자는 복여(福汝)이고 호는 청좌와(淸坐窩)이며, 은진인(恩津人)이다.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수업하였으며, 뒤에 율곡(栗谷)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제생(諸生)들과 함께 항소(抗疏)를 올려 율곡 선생이 무함을 당한 것을 변명하였다. 폐조(廢朝) 때 신녕 현감(新寧縣監)으로 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으며, 반정 초에 문의 현감(文義縣監)과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 정묘년에 오랑캐의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선생이 공을 뽑아 참모관(參謀官)으로 삼고는 글을 보내어 권면하자, 공은 여러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였다. 세자께서 분조(分朝)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때 달려가서 공산(公山)에서 문안하였으며, 호종하고서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다가 돌아갔다. 선생이 행장(行狀)을 찬하였다. -회덕(懷德)에 살았다.-
송국택(宋國澤)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며, 은진인(恩津人)이다. 어려서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니 선생이 애지중지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다. 정묘년에 난리가 나자 선생이 공을 뽑아 참모관으로 삼았다. 화친(和親)이 이루어지자 공은 선생을 따라 행조(行朝)에 달려가서 문안하였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등 여러 사람들과 독약을 앞에 놓고 죽기를 맹세하였는데, 마침 빈궁(嬪宮)의 명으로 인하여 원손(元孫)을 보호하여 돌아왔다. 이 공으로 특별히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동래 부윤(東萊府尹)이 되었다가 위호(僞號)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돌아갔다. 찬성(贊成)에 추증되었고,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文集)이 있으며, 회덕(懷德)의 정절사(靖節祠)에 향사되었다. -회덕에 살았다.-
유즙(柳楫)
자는 용여(用汝)이고 호는 백석(白石)이며, 문화인(文化人)으로 좌랑(佐郞) 유태형(柳泰亨)의 아들이다. 병진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배웠다.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므로 선생이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면서 ‘우리 당(黨)에 인재가 있다.’고 하였다. 계해년에 반정이 일어난 뒤에 선생의 천거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이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다. 병인년에 오랑캐의 사신이 나오자 공이 상소를 올려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참모관으로 삼자, 공은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등 여러 사람들과 계책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동생인 유도(柳棹) 및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과 마음을 함께하여 의병을 일으키고는 도내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여산(礪山)에서 만났다. 행군하다가 청주(淸州)에 도착하였을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으며, 그 뒤로는 세상을 피해 살기로 뜻을 정하였다. 양호(兩湖)의 사림들이 김제군(金堤郡)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김제에 살았다.-
안방준(安邦俊)
자는 사언(士彦)이고 호는 우산(牛山)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공은 열여섯 살 때 향거(鄕擧)에 나아갔다가 과거 시험장이 소란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과거 공부에 대한 뜻을 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힘을 쏟았다. 열아홉 살 때 우계 성 선생을 찾아가 뵙자, 선생은 공의 성실하고 독실한 면을 보고서 비로소 제자의 예를 갖추도록 허락하였다. 임진년의 난리 때, 같은 군에 사는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과 의병을 일으켜 체찰사(體察使) 송강(松江) 정 상공(鄭相公)을 찾아가 뵙고는 기무(機務)를 논하였다. 갑자년에 학행(學行)으로 인해 교관(敎官)과 별제(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공은 의병들을 규합하여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선생이 공을 뽑아 의병장으로 삼고는 또 글을 보내어 면려하였다. 얼마 있다가 오랑캐들이 물러갔으므로 향리로 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돌려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다가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파한 다음 향리로 돌아갔다. 경진년(1640, 인조18)에 상소를 올려서 화의(和議)의 그름에 대해 심하게 비난하였으며 화란을 불러오게 된 이유에 대해 깊이 따졌는데, 언사(言辭)가 통절하였고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 있다가 참의(參議)로 승진하였는데, 매번 상소를 올려 진달하고는 취임하지 않으면서 생도(生徒)들을 이끌어 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82세에 졸하였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저술로는 《기묘록(己卯錄)》, 《항의신편(抗義新編)》 등이 세상에 전해진다. 보성(寶城), 능주(綾州), 동복(同福) 등 여러 군(郡)에서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보성에 살았다.-
고순후(高循厚)
자는 도상(道常)이고 호는 정헌(靜軒)이며, 장흥인(長興人)으로 충렬공(忠烈公)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임진년과 계사년의 난리 때 공은 나이가 어려서 부형(父兄)들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피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하였다. 장성해서는 강개하여 큰 뜻을 품었으며, 문장과 덕행이 모두 당시 사람들에게 추중받아 사람들이 부형과 같은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23세 때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벼슬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하자, 공은 그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창의(倡義)하여 격문을 돌리고는 의병과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할 계획을 하였다. 그 뒤에 곧바로 역적들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의병을 파한 다음 모아 두었던 의곡(義穀)을 방백(方伯)에게 넘겨주어 군수(軍需)에 보태 쓰게 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정묘년의 난리가 일어나자 조카인 참봉(參奉) 고부립(高傅立) 및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하였다. 선생이 공을 뽑아 의병장으로 삼자 공은 장사들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끌어 모아 완산(完山)으로 달려왔는데, 화의가 이미 성립되었다. 그 당시에 동궁의 분조(分朝)가 완산부에 있었는데, 드디어 막부(幕府)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세자를 호종하고서 여산(礪山)에 이르렀다가 향리로 돌아갔다. -광주(光州)에 살았다.-
기정헌(奇廷獻)
자는 덕회(德晦)이고 행주인(幸州人)으로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손자이며, 현감 기효증(奇孝曾)의 아들이다. 기효증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으로서 영광(靈光)과 법성포(法聖浦)에서 양곡을 모아 용만(龍灣)에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바쳤다. 공은 가학(家學)을 잘 이어받아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현풍 현감(玄風縣監)을 지냈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삼자, 공은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아 전주(全州)로 달려왔다. 오랑캐와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병을 파하고서 향리로 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박지효(朴之孝)
자는 자경(子敬)이고 충주인(忠州人)이다.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는데, 고경명이 그의 어버이가 늙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 저지시켰다. 그 당시에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순(韓楯)이 군사를 거느리고 광산(光山)에 이르렀다가 왜적들에게 함락되자, 방백으로 있던 이시백(李時白)이 조정에 아뢰어 공으로 하여금 임시로 현감을 맡게 하니, 공은 외로운 성을 죽음으로써 지켰다. 난리가 끝난 뒤에는 조정에서 특별히 그 직임을 그대로 잉임(仍任)하게 하였으며, 관직이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募兵有司)로 삼자 공은 마침내 동지들과 힘을 합해 의병을 일으키고는 전주까지 왔다. 그 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향리로 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정민구(鄭敏求)
자는 경달(景達)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며, 서산인(瑞山人)이다. 공은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은거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포의(布衣)로서 의병을 모아 의주(義州)로 달려가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공(錄功)되었다. 병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겨졌다. 광해조 때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계해반정이 일어난 뒤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갑자년의 이괄의 반란 때에는 병으로 인해 난리가 난 곳에 달려가지 못하고 아들인 주부(主簿) 정지백(鄭之百)을 보내어 공주(公州)에서 어가(御駕)를 호위하게 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로 삼자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여산(礪山)에서 학가(鶴駕)를 떠나보냈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격문을 보고서 피눈물을 흘리며 창을 잡고 떨쳐 일어나 청주(淸州)에 도착하였다가 성하(城下)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으며, 그 뒤로는 두문불출한 채 세상을 사절하였다. -광주에 살았다.-
신필(申滭)
자가 자혼(子混)이고 호가 정우당(靜友堂)이며, 고령인(高靈人)으로 대사간(大司諫)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의 5대손이고, 교관(敎官) 신응하(申應河)의 아들이다. 신응하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세 아들과 과천(果川)에서 왜적들과 맞닥뜨리자 왜적들을 꾸짖고는 순절(殉節)하였다. 공은 집안의 원수와 나라의 치욕으로 인하여 자나 깨나 절치부심하였다. 이에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채 집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칭하며 초의목식(草衣木食)으로 지내면서, 종신토록 거상(居喪)하는 자처럼 지냈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모두들 효자라고 칭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로 삼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여산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향리로 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아서 청주로 달려갔다. 성하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돌아간 다음 집 안에서 지내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운암사(雲巖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유평(柳玶)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공은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하였다.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인묘(仁廟)가 반정을 일으킨 뒤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곡(義穀)을 끌어 모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자, 공은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동궁을 호위하였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을 거느리고 칼을 들고서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일을 사절한 채 산자락에 집을 짓고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여서 충분(忠憤)의 뜻을 붙였다. 조정에서 천거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경렬사(景烈祠)에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박충렴(朴忠廉)
자는 효원(孝源)이고 호는 경암(鏡巖)이며, 함양인(咸陽人)으로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외손이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로 삼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기 위하여 여산(礖山)까지 왔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왔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정축년(1637, 인조15)에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으로 천거되어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광주에 살았다.-
구영(具瑩)
자는 영연(瑩然)이고 호는 죽유(竹牖)이며, 능성인(綾城人)이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함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장성함에 미쳐서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올렸는데, 학문과 행실이 아주 독실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당시에 정사가 어지러워 흉악한 폐모론이 일어났는데, 유응원(柳應元)이란 자가 글을 지어서 이에 호응하였다. 그러자 공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현학(縣學)으로 들어가서는 그 글을 불태워 버리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정묘년의 난리 때에는 별좌 유태형(柳泰亨)과 묘당(廟堂)에 나아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상께서 한 번 해도(海島)로 들어가고 난 뒤에 오랑캐들이 팔도를 유린하면, 하나의 섬 외에는 모두가 우리나라의 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남쪽으로 호령(湖嶺) 지방으로 내려가 만전(萬全)을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하였다. 대가(大駕)가 김포(金浦)에 이르렀을 때 세자가 분조(分朝)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남쪽 사람 중에서 함께 계책을 의논할 만한 자를 데리고 함께 내려가게 하기를 계청하니, 공 등 몇 사람에게 명하여 분조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공은 뒤늦게 공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선생이 공을 뽑아 막하(幕下)로 나오게 하여 함께 군무(軍務)를 의논하였다. 일이 끝난 뒤에는 그 공로를 표창하라는 계사가 있었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영사 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녹공(錄功)되었고, 사도시 직장(司䆃寺直長)으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의병장 정홍명(鄭弘溟)의 막부(幕府)로 달려 나갔는데, 행조(行朝)에 대해서 애통한 생각에 ‘홀로 서서 소리 죽여 통곡하노라.[獨立呑聲哭]’라는 시구를 읊었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회인 현감(懷仁縣監)에 제수되었고 고산(高山)에 있는 백현사(柏峴祠)에 향사되었다. -고산에 살았다.-
고부민(高傅敏)
자는 무숙(務叔)이고 호는 탄음(灘陰)이며, 장흥인(長興人)으로 군수(郡守) 고성후(高成厚)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행주성(幸州城)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녹훈(錄勳)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빼어났으며, 장성함에 미쳐서는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문예(文藝)와 행의(行誼)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군기유사(軍器有司)로 삼자, 공은 동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아서 완산(完山)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파하여 되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 공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도착하였다가 성하(城下)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다. -광주에 살았다.-
유술(柳述)
자는 효숙(孝叔)이고 호는 애죽헌(愛竹軒)이며, 문화인(文化人)으로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외손이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군기유사로 삼자 공은 전주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파하고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윤경(尹熲)
자는 영중(瑩中)이고 호는 현주(玄洲)이며, 함안인(咸安人)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는데, 선생은 낭묘(廊廟)의 큰일을 해낼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문서유사(文書有司)로 삼자, 공은 의병들을 규합하여 전주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서석산(瑞石山) 속에 은거해 산수(山水)를 스스로 즐겼다. -광주에 살았다.-
김해수(金海壽)
자는 심원(深源)이고 광주인(光州人)이다. 공이 아주 어린 나이였을 적에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가 기이하게 여겨 ‘이 아이는 가르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더욱더 드러났다. 드디어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자, 선생이 몹시 애지중지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지들을 거느리고 선생을 따라가 대가(大駕)를 맞이하여 절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유사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온 힘과 정성을 다 기울여 수고를 다하였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신독재(愼獨齋) 문경공(文敬公)이 장차 군사를 모아 근왕(勤王)하려고 하여 공과 함께 일을 추진하였는데, 어사(御史)가 공을 임시 연산 현감(連山縣監)으로 차임하였다. 그 당시에 오랑캐들의 형세가 더욱 급박해져서 도로가 꽉 막히는 바람에 모두 달려가지 못하였다. 이에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는 여러 날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당시에 호우(湖右) 지방이 병란을 아주 심하게 입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청렴하고 어진 수령을 뽑아 보내고자 하여 공을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삼았다. -보령(保寧)에 살았다.-
이복길(李復吉)
자는 형언(亨彦)이고 전의인(全義人)이다. 종형(從兄)인 이항길(李恒吉) 및 이함길(李咸吉)과 더불어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니, 세상 사람들이 주문(朱門)의 이등(二滕)으로 칭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에게 군흥(軍興)에 관한 일을 떠맡겼다. 공은 사람됨이 독실하여 일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모두 제대로 거행하였으므로 선생께서 일찍이 재간과 국량이 있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과연 그 일을 잘 처리하였다. 또 집안의 재물을 내어 군흥에 보태었다. 난리가 끝난 뒤에 선생이 사실에 의거하여 계문함에 따라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승진하였다. -연산(連山)에 살았다.-
김준업(金峻業)
자는 여수(汝修)이고 호는 동계(東溪)이며, 의성인(義城人)이다. 어려서부터 효우(孝友)의 행실이 뛰어났으며, 장성함에 미쳐서는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학문을 강마하면서 서로 어려운 부분을 물으니, 세상 사람들이 삼현(三賢)이라고 칭하였다.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책을 싸 짊어지고 와서 종학(從學)하니, 선생이 몹시 칭찬하며 탄복하였다. 광해조 때 공은 항소(抗疏)를 올리고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폐하였으며, 동계(東溪) 가에서 숨어 살았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뒤에는 다시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유사로 삼았는데, 화의가 성립되자 선생을 따라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갔다가 향리로 돌아갔다. -전주(全州)에 살았다.-
이상 20인은 이름이 연보(年譜)에 실려 있는 사람들이다.
이덕양(李德養)
자는 중윤(仲潤)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전주인(全州人)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8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박학(博學)하여 유림(儒林)에서 명망이 중하였다. 일찌감치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모의도유사(募義都有司)가 되었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募兵有司)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동지들과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아 전주로 왔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학가(鶴駕)를 호위하여 여산(礪山)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징병(徵兵)하라는 전교를 보고는 마침내 군사를 모집해 나아가다가 수치스러운 성하(城下)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그 뒤에 두문불출한 채 지내다가 졸하였다. -광주에 살았다.-
이성춘(李成春)
자는 백영(伯榮)이고 성산인(星山人)이다. 문학(文學)의 재주를 일찌감치 이루었고, 효행이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나이 17세 때 정유재란을 만나 할머니와 부모 및 형제들이 모두 해를 당하였다. 이에 공은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 구하다가 왜적들에게 잡혀갔다. 그 뒤에 도망쳐 되돌아와서는 뒤늦게 삼년의 상복을 입었으며, 화란을 만나 죽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지극한 통한으로 삼으면서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취를 숨긴 채 살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募兵有司)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기 위하여 전주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기의헌(奇義獻)
자는 사직(士直)이고 호는 기은(棄隱)이며, 행주인(幸州人)이다. 자신의 재능을 숨긴 채 살려는 뜻을 품었으며, 명리(名利)를 사절한 채 지내면서 경학(經學)에 침잠하였는데, 역리(易理)에 특히 정통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았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고부립(高傅立)
자는 군회(君晦)이고 장흥인(長興人)으로, 효열공(孝烈公) 준봉(隼峯) 고종후(高從厚)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할아버지가 금산(錦山)에서 순국(殉國)하고 아버지가 진강(晉江)에서 전몰(戰歿)하였다는 이유로 평인(平人)으로 자처하지 않으면서 항상 폐양자(蔽陽子)를 쓴 채 누추한 집에서 거처하였다. 문장(文章)에 능하였으나 종신토록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세상에서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고 칭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로 삼자, 공은 전주까지 달려 나왔다가 난이 끝난 뒤에 향리로 되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기 위하여 청주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고부필(高傅弼)
자는 군석(君錫)이고 장흥인(長興人)으로, 진사(進士) 고의후(高依厚)의 아들이다. 문장과 행의(行誼)에 있어서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군기유사(軍器有司)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종형인 고부민(高傅敏)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의병과 군량을 끌어 모아서 완산에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파하고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박종(朴琮)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단구자(丹邱子)이며, 죽산인(竹山人)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수찬(修撰)을 지낸 박린(朴嶙)의 손자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혼조(昏朝) 때 과거 공부를 폐하고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행하였다. 갑자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병을 모집하고 양곡을 끌어 모았으며, 역적이 평정된 뒤에는 이를 순영(巡營)으로 실어 보냈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문서유사(文書有司)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전주까지 달려 나와서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 수고하였는데, 제공들이 공을 중하게 여겼다. 그 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병자년의 난리 때 공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달려왔다가 성하(城下)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방명달(房明達)
자는 달부(達夫)이고 남양인(南陽人)으로, 직제학(直提學) 방사량(房士良)의 8세손이며,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방복령(房復齡)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종사하여 원종훈(原從勳)에 참여되었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모병유사(募兵有司)로 삼았다. 그러자 근왕하기 위하여 전주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광주에 살았다.-
이도(李䆃)
자는 의실(懿實)이고 호는 방재(方齋)이며, 적성인(磧城人)이다. 아버지인 이수익(李守益)은 임진왜란 때 조카 이비(李秠)와 더불어 동생 이수함(李守咸)의 임소(任所)인 금교역(金郊驛)에 있다가 한꺼번에 순절(殉節)하였다. 공은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폐하고는 선생의 문하에 와서 제자의 예를 올렸다. 선생이 졸한 뒤에는 또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혼조 때 폐모(廢母)하는 일이 발생함에 미쳐서는 마침내 무등산(無等山)에 있는 선산(先山) 아래로 들어가 토실(土室)을 짓고 살았는데, 사람들이 토굴처사(土窟處士)라고 불렀다.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의 직에 천거되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문서유사(文書有司)로 삼았다. 병자년의 난리 뒤에는 종신토록 청나라의 책력(冊曆)을 보지 않았다. 항상 태고관(太古冠)을 착용하고서 천석(泉石) 사이를 소요하였으며, 신주(神主)에 직명(職名)을 쓰지 말고 처사(處士)라고 쓰라고 유언하였다. -광주에 살았다.-
이정태(李鼎泰)
자는 공보(公寶)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며, 영천인(永川人)이다. 어려서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기암이 큰일 할 인물로 여겨 몹시 중시하면서 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문서유사로 삼았다. 공은 전주에 도착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이해 가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으며,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동지들과 마음을 합하여 의병을 규합하고는 곧바로 청주에 이르렀다가 수치스러운 성하(城下)의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그 뒤에 두문불출한 채 지내다가 졸하였다. 사림에서는 사우(祠宇)를 세워서 향사하였다. -광주에 살았다.-
이용빈(李用賓)
자는 임관(任觀)이고 호는 매곡(梅谷)이며, 흥양인(興陽人)이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열읍(列邑)에 격문을 보내어 문인(門人)이나 친구들 가운데 충의로우면서 재간을 지닌 자들을 일일이 거론하고는 그들과 함께 일을 하였다. 그때 공의 종형(從兄)인 처사(處士) 이정빈(李廷賓)이 경명행수(經明行秀)로 뽑혀 문서유사가 되었는데, 마침 병이 심하게 들어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공에게 말하기를, ‘나는 병으로 인하여 난리에 달려 나갈 수가 없다. 네가 비록 아직 관례(冠禮)를 올리지는 않았으나, 나 대신 가라.’ 하였다. 그러자 공은 어린 나이이면서도 강개한 뜻을 품고 동지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끌어 모으되, 부락별로 나누어 배정하고 기율을 엄명하게 하였다. 그 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이씨삼현사(李氏三賢祠)에 나란히 향사되었다. -광주에 살았다.-
이상 10인은 의병장(義兵將)의 보첩(報牒) 가운데 실려 있는 사람들이다.
김성하(金聲夏)
자는 대숙(大叔)이고 호는 수우(守愚)이며, 광산인(光山人)으로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의 아들이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에게 일을 맡겼는데, 일을 잘 주선하였으므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나 공은 겸양하여 물러나면서 잘난 체하는 기색을 띠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훌륭하게 여겼다. -전주에 살았다.-
김해(金垓)
자는 여후(汝厚)이고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며, 부안인(扶安人)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옹천(甕泉) 김석홍(金錫弘)의 증손이다.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바른 것으로 사도시 직장에 제수되었고,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한 공으로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으며, 갑자년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는 공주(公州)로 대가(大駕)를 호위한 공으로 장악원 주부에 특진되었다. 정묘년의 난리 때에는 선생이 보낸 격문으로 인하여 의기를 떨쳐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자, 원근 사람들이 평소에 그의 충의에 감복하고 있었으므로 따르는 자가 아주 많았다. 행군하여 김제군(金堤郡)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럽게 병이 위독해져서 달려 나가지 못하게 되자, 아들인 김이겸(金以謙)에게 명하여 대신 군사를 거느리고 가 선생의 막하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 뒤 화의가 성립되자 의병을 파하고서 되돌아갔다.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향사되었다. -부안에 살았다.-
김관(金灌)
자는 옥이(沃而)이고 호는 명천(鳴川)이며, 강진인(康津人)으로 별제(別提) 김대립(金大立)의 아들이다. 광해조 을묘년(1615, 광해군7)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는데,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이름을 듣고는 재삼 편지를 보내어 불렀으나, 공은 답조차 않은 채 그날로 바로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의 격문에 응하여 창의(倡義)하여 달려 나왔다. 선생은 그와 더불어 담론해 보고서 유자(儒者)라고 칭찬하였으며, 인하여 군량을 모집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자 온 정성을 다하여 군량을 모았으며, 많은 경략(經略)을 하니, 선생이 더욱더 칭찬하면서 장려하였다.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향사되었다. -태인에 살았다.-
[주-D001] 건주(建州)의 오랑캐 :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를 가리킨다. 누루하치는 건주 일대를 통일한 다음 차츰 세력을 넓혀 1616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10년(1618)에 명나라에 대하여 7대한(大恨)을 선포하고 공격하여 무순(撫順), 청하(淸河) 등의 보(堡)를 침입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의 구원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을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는데, 광해군 11년(1619)에 명나라의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사와 합류하여 적을 협격하였으나 부차(富車)의 싸움에서 대패한 뒤 강홍립이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주-D002] 폐모론(廢母論) :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키자는 의논을 말한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왕세자에서 폐위시키려 했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 등이 득세하였다. 이에 광해군 5년(1613)에 대북의 흉계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은 피살되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주-D003] 위호(僞號) : 거짓 연호로, 여기서는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인 숭덕(崇德)을 말한다. 이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써서 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이고자 하였다.[주-D004] 학가(鶴駕) : 왕세자(王世子)를 말한다.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이르기를,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인데, 일찍이 흰 학을 타고 가서 후씨산(緱氏山)에 머물렀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후대에는 태자의 거가(車駕)를 학가라고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인조의 세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주-D005] 주문(朱門)의 이등(二滕) : 주자(朱子) 문하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고 칭해졌던 등씨(滕氏) 형제로, 형인 등린(滕璘)과 동생인 등공(滕珙)을 가리킨다. 등린은 자가 덕수(德粹)이고 호가 계재(溪齋)이며, 저서로는 《계재유고(溪齋遺稿)》가 있다. 등공은 자가 덕장(德章)이고 호가 몽재(蒙齋)이며, 저서로는 《경제문형(經濟文衡)》이 있다. 《宋元學案 卷69》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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