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문탐과정 9주차 제주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을 찾아 탐방하는 날이다.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명월진성을 향해 가는 길..
청명한 하늘 아래 구름 조각이 정겹게 흘러가고 가로수길 벚나무들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가을이 우리 곁에 깊숙이 와 있음을 느낀다.
길을 잘못 들어 살짝 늦게 답사장소에 도착해보니 이미 제주의 방어시설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ㅠㅠ
조선시대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이런 시설은 무엇보다도 왜구의 약탈에 대비한 방어시설이었다. 진성은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섬들이 있는 해안을 중심으로 9개의 진성을 구축하였는데 그 중 한립읍 명월리에 있는 명월 진성이 으뜸이라 전해진다.
오늘은 대표적으로 명월리에 있는 명월 진성과 상명리 느지리오름 정상에 있는 만조봉수, 금능리에 위치한 배령연대를 중심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1. 명월진성
조선시대 제주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 9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본래 진은 변방의 방어를 위해 북쪽 변방과 남부 해안 지대에 구축한 군사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주로 특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주로 남부 해안에 많이 설치하였다. 진은 달리 방호소라고도 불린다.
영조 40년(1764년)에 그 책임자가 ‘만호(萬戶)’로 승격되었던 ‘명월진’ 만이 ‘진’이며 나머지 8곳은 방호소로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방호소의 책임자는 종9품인 ‘조방장’이지만 명월진에는 종4품 격인 만호가 파견되었으므로 방호소와 진을 따로 구분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모두 포함하여 9진이라 부른다.
맨 먼저 축조된 성은 세종 21년(1439년) 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진 차귀진과 수산 진성이지만 규모면에서 가장 큰 진성은 기념물 제29호인 명월 진성이다.
비양도를 바라다보는 한림읍 명월리에 있으며 둘레가 1,36Km 가량 된다. 이는 둘레가 1,2Km인 대정현성과 정의 현성보다 크다. 일반 행정성보다도 크다는 얘기다.
조선 시대 명월진에는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으며,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와 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하였다.
<위치>
명월진성은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월림리가 있고, 서쪽은 금릉리, 북쪽은 한림리가 있다.
<건립경위>
명월진성은 중종5년(1510년) 장림목사가 축성한 것인데 같은 해에 삼포왜란이 있었다. 동래, 울산, 창원에서 교역하던 왜인들이 교역조건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일으킨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제주도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명월진성을 크게 축성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명월진성은 처음에는 목성(木城)이었다. 급박했던 정세 때문인지 그렇게 나무로 서둘러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목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석성(石城)으로 개축되는데 제주에서 부임했던 목사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제주에서 근무했던 이경록 목사가 그 일을 맡았다.
<형태와 규모>
성은 동쪽과 서쪽, 남쪽에 성문이 위치해 있었고, 성안에는 큰 샘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서 항상 물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동문과 서문·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성벽은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장축인 타원형으로, 성벽의 요소에 치성을 두어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소(供所: 2칸), 공수(公需: 2칸), 무기고(武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중화청(仲和廳: 2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창고 4동(각각 2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정조 때 제주를 다녀간 어사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에 “명월진은 서북쪽이 바다에 임하였고 진 앞에는 배를 정박할 만한 곳이 없으나 진의 서쪽 3리쯤에 독포가 있어서 어선이나 상선이 와서 정박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제주와 대정(大靜) 사이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9진 중 으뜸이다. 성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샘물과 창고도 있어서 충분히 자급할 수 있으므로 서남쪽 거진(巨鎭)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여 제주의 9진 중 명월진만이 구색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였다.
<조방장에서 만호로 승격>
1764년(영조 40)에는 어사 이수봉(李壽鳳)이 조정에 건의하여 진장(鎭長)을 조방장(助防將)에서 만호(萬戶)로 승격시키고 제주인으로 선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는 명월진의 높은 위상을 보여 준다.
<복원의 헛점.. 옹성, 여장, 해자, 치성>
옹성(甕城)은 성문 앞에 둥그렇게 다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곽 구조물 중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성문으로 몰려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성문 앞을 다시 두르며 쌓은 성벽이 옹성이다. 명월진성은 발굴된 남문 기단부 원형을 살려 복원됐다. 그러나 정의읍성의 남문 앞에 복원된 옹성은 그 길이가 너무 짧아 잘못 복원됐다.
여장(女墻)은 성 위에 있는 엄폐물이다. 우리말로 ‘성가퀴’라고도 하는데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한다. 그 담에는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작은 틈새나 구멍만 나 있다. 당연히 성벽 위에는 엄폐물 여장이 있어야 함에도 제주의 읍성, 진성에는 여장이 없다. 잘못 복원된 것이다. 사료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여장을 누락시켜 복원한 것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해자(垓字)는 성벽 바깥을 둘러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시설을 말한다. 제주는 화산재 토양이라 물을 해자에 채워넣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깊은 도랑을 파고 그곳에 물 대신 가시덤불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제주읍성(병문천과 산지천을 해자로 삼음)외에 제주의 다른 성에는 해자가 없다. 과연 해자가 없었을까?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져 실감나게 당시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치성(雉城)은 흔히 격대(擊坮)라고도 한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성벽 일 부구간을 앞으로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제주의 여러 성에 남아 있는 치성 간의 거리는 42m~180m이다.
2. 만조봉수 (晩早烽燧)
만조봉수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상명리 산 5에 위치한 봉수로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 해안가에서 남동쪽으로 4.8㎞ 떨어진 해발 225m의 느지오름(일명 망오름) 정상부 북쪽에 위치한 봉수였다.
조선 시대 명월진 소속의 봉수로 동북쪽의 도내봉수(직선 거리 7.5㎞)와 남서쪽의 당산봉수(직선 거리 10.7㎞)와 교신하였으며, 서쪽으로 배령연대와도 연락을 취하였다. 소속 별장 5명, 봉군 24명이 배치되었다.
만조봉수는 중심부에서 반경 15m 거리에 둑을 돌아가면서 이중으로 쌓았고, 그 사이에 0.9m 깊이의 고랑을 만들고, 한 단 높이에 반경 18m, 높이 1.9m의 둥근 봉우리 모양을 토축(土築)하였다.
이 봉수대의 동북쪽으로는 천이오름과 어도오름, 남서쪽으로는 당산봉이 있다. 북쪽으로는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름이 없어 낮고 평탄한 지대가 펼쳐져 명월진과 죽도연대, 그리고 마두연대와 배령연대가 한눈에 보인다.
<봉수>
봉수와 연대는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시 신속하게 중앙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즉, 군사통신 시설로서의 밤에는 봉화(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알렸으며, 날씨가 흐리거나 비등으로 인해 연락이 어려울시는 직접 달려가 알리게 하였다.
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 정비되었으며, 세종때에는 전국적인 봉수망이 정비되었다. 봉수제는 점차 시설의 미비, 요원배치의 불충분, 고독과 추위에 시달리는 봉수군에 대한 보급의 부족, 봉수군의 근무태만과 도망으로 인하여 을묘왜란과 같은 큰 변란에도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국방상의 위기때 신속히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봉수제도는 결국 그 효능을 보지 못하고 1894년 고종 31년에 폐지하게 되었다.
<봉수대와 오름의 관계>
제주지역은 지리적 특성상 오름이 봉수대의 요충으로 이용된다. 해안에 위치한 오름에는 대부분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사라봉수, 도두봉수, 수산봉수, 고내봉수, 어도봉수, 만수봉수(느지리), 당산봉수, 모슬봉수, 저별봉수(송악), 호산봉수(월라), 구산봉수, 삼매양봉수, 호촌봉수(예촌), 자배봉수, 토산봉수, 달산봉수, 남산봉수, 독자봉수, 대수산봉수, 일출봉수, 지미봉수, 왕가봉수, 입산봉수, 서우봉수, 원당봉수등(제주 사라봉수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부터 남쪽, 동쪽, 다시 제주시를 돌아 ) 25봉수대등 해안 주변에 위치한 오름들이다. 지미봉수와 입산봉수 사이 거리가 멀고 오름이 없는 관계로 다소 부적당하지만 낮은 언덕에 설치되었다. 이것이 왕가봉수이다(한동리에 왕가봉)
또한 해안가이지만 산방산에 봉수를 두지 않은 이유는 해발이 395m,비고가 345m로 매우 경사가 심하고 높기 때문에 구름이 자주겨 봉화난 연기를 올렸을 때 멀리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봉수대의 적지가 되지 않아 월라봉에 봉수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정의현성의 토산봉수-달산봉수-남산봉수-독자봉수등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정의현 현청이 성읍 중산간에 있는 관계로 성읍 바로 앞에서 있는 남산봉에 봉수를 두어 관리들이 쉽게 현청에서 봉수를 지켜볼 수 있고 날씨로 인해 봉군이 빨리 연락할 수 있는 중산간 오름을 택하여 봉수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봉수대와 연대의 구조 및 규모>
봉수는 오름 정상에서 위쪽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고, 그 위에서 불을 피웠고 밑에는 불의 번짐을 막기 위해 물을 채워 놓을수 있는 2중의 도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연대는 해안 감시가 쉽고 전투하기에 유리한 공간에 만들어 졌으며, 주로 네모지게 돌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를 각 10척으로 하였으나, 도내의 연대 규모는 다소 차이가 있다.
<봉수대와 연대의 전달방식>
봉수와 연대 모두 오거법을 따랐으며, 평소에는 1개, 이상한 배가 나타나면 2개, 우리 쪽으로 향해 오게 되면 3개를 올리며, 방어 본부에서는 병력 동원령을 내린다. 적이 상륙하면 4개를 올리며,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린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연기난 봉화가 잘 보이지 않을 시는 봉군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하였다. 봉수와 연대 주변 100보 거리 안에서는 일체 불을 피울 수 없었다 한다. 헷갈리게 만드는 연기가 올라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봉수대와 연대의 병력>
봉수대와 연대는 모두 별장 6명을 두었으며, 봉군은 봉수대는 12~36명을 장수에 따라 차등 배치 하여 연대는 모두 12명씩 배치하였다 별장 2명과 봉군 4명이 한조가 되어 3교대로 24시간 해안을 감시하였다. 별장과 봉군은 봉수대(연대) 부근에 거주하는 자로 선별하였으며, 다른 군역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봉수 보존현황>
25기 봉수는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단 1기도 없다. 그래서 문화재로 지정 받은 봉수가 전무한 실정이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해안선에 집중 배치된 연대와 봉수는 약 500여년간 제주땅을 지켜옴은 물론 당시 제주인들의 생활상이 반영돼 있어 뛰어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조봉수에는 전망대가, 당산봉수에는 레이더기지가, 수산봉수에는 경비대 시설 설치되면서 원형이 파괴돼 있다. 고내봉수는 오름탐방로로 인해 훼손된 상태이다.
봉수는 대부분 오름 정상부에 위치해 있어 잡목이나 풀로 인해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3. 배령연대(盃令煙臺)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 1603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에 있는 조선 시대 명월진 소속의 연대이다.
배령연대는 동쪽으로 만조봉수(4.3㎞)., 서쪽으로 대포연대(직선 거리 4.4㎞)와 교신했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배령연대는 옹포리에서 협재리까지 해안선이 일직선으로 오다가 금릉리에서 밖으로 돌출되는 곳에 위치 한다.
배령연대의 평면은 일반적인 방형(方形)의 평면을 한 연대들과는 다르게 원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처음 보면 방형의 연대가 허물어진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방형으로 배치된 지대석(地臺石)이 보이지 않고, 연대를 축조한 돌이 크기가 대체로 작은 것으로 보아 평면이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축조 방법은 잡석 쌓기이며, 그 크기는 하부 직경 4.9m, 상부 직경 1.6m, 높이 1.9m로 연대의 높이가 낮다. 연대 위는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된 화덕자리가 있으며 그 둘레는 5m 정도 된다. 2011년 조사 당시 방형으로 복원되었음을 확인하였고, 복원규모는 장축 7.84m, 단축 6.69m, 높이 3.76m이다.
배령연대 동쪽으로는 협재리와 멀리 수원리, 북동쪽으로는 비양도, 그리고 서쪽으로는 두모리가 있다. 제주도 기념물 제23-19호로 지정되었다.
<연대 보존 실태>
1970년대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돼 2000년대에 집중적인 복원이 이뤄진 연대는 원형에 대한 조사 없이 복원이 진행되다 보니 복원 전 도면 등 관련 기초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왜포연대의 경우 진입로가 사라져 있고, 지정문화재인 함덕연대의 경우 잡목이 우거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우지연대, 배령연대는 원형에서 위치가 이동해 있다.
또 연대의 특성상 해안에 인접해 있어 해안도로 개설로 인해 버젓이 노출돼 있음에도 별다른 보호시설조차 갖추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일부 연대는 보존과 관리의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 새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 38연대>
1)제주읍성: 수근연대, 조부연대, 별도연대, 함덕연대, 왜포연대, 조천연대, 입두연대, 좌가연대, 무주연대, 남두연대, 애월연대, 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18연대/서쪽 명월진 지금의 한림지역에서 동쪽 별방진 지금의 구좌지역까지)
2)대정현성: 당포연대, 산방연대, 별로천연대, 대포연대, 마희천연대, 변수연대, 서림연대, 우두연대,무수연대(9연대/차귀진 지금의 고산 지역에서 밑으로 지금의 안덕 지역 월라봉수)
3)정의현성: 벌포연대, 소마로연대, 천미연대, 말등포연대, 연동연대, 보목연대, 우미연대, 금로포연대,협자연대, 오소포연대, 종달연대(11연대/서귀진 삼매양에서 부터 동쪽으로 수산진 지금의 성산지역)
4. 군역 그리고 6고역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에의하면 조선시대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군역에 시달려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당시 제주인구가 22,990명(남9,530명, 여13,460명)인데 비해 군인의 수는 7,444명으로 나타나 있다. 남자인구 9,530명중 양반 등 군역을지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면 당시 제주의 모든 남성이 평생 동안 군역을 졌다는 말이 된다. 때문에 70~80세가 되어도 여전히 군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7~8세 어린이들까지도 군적에 올라갔다 한다. 뿐만아니라 본래 군역을 지지 않던 천민들과 일부 양반까지도 동원되었고 여성들까지도 군복무(여정)에 나서야 했다.
제주사람들은 군역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갖은 노역에 동원되었다.
(6고역): 진상을 위해 미역을 따던 잠녀, 전복을 잡던 포작, 말을 기르던 목자, 귤을 재배하던 과원, 이를 운반하던 뱃사람 곁군 그리고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이었다..
적지 않은 제주사람들이 이 6고역을 포함하여 1인당 평균 10개의 역을 졌다고 한다.
5. 명월대와 팽나무군락지
명월대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臺)다.
이곳에서 왼쪽길릉 따라 400여 미터 가면 길옆 하천가에 명월대가 나온다.
조선 말기에 이 지방의 유림(儒林)들이나 시인·묵객(墨客)들이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대는 마을을 끼고 있는 천변 중앙의 자연암벽 위에 8각형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으며, 최근에 와서 콘크리트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 옆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격은 너비 12㎝, 높이 75㎝이며, 앞면에는 ‘明月臺(명월대)’라 음각되어 있다. 또 명월대 주변에 1910년경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는데, 이는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석교(石橋)의 하나다.
명월대가 있는 천변(川邊)은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100여 그루의 수백년생 팽나무 60여 본과 푸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간간이 흐르는 물소리가 정결하기 그지 없다.
<국민가수 백난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제주가 낳은 가요계의 거목 고 백난아는 ‘찔레꽃’, ‘낭랑18세’, ‘망향초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60년~70년대를 풍미했던 국민의 가수였다.
특히 1942년 가수 백난아의 ‘찔레꽃’은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에게 망향의 노래이자, 민족의 노래로 불렸다.
민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백난아의 고향은 제주 한림읍은 명월리..
국민가수 백난아의 기념비는 옛 명월초등학교 입구에 있다.
탐방을 마치며...
오늘 제주도의 방어유적을 돌아보며 많은 상념에 잠겼던 시간이었다.
명월진성에서 바라보는 평화로운 비양도의 모습과 느지리 오름 정상 전망대(봉수대)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제주의 들녘의 풍광은 오늘 이 시대의 평화로움이 주는 선물이지 왜구나 적의 침입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봤을 당시의 봉군들이나 성을 지키던 병사들에게는 호사스러움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탐방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제주가 지정학적 위치상 왜구들이 침입 유난히 잦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이에 제주에서도 3성 9진 25봉수 38연대의 체계적인 방어시스템을 잘 구축하여 왜구나 적의 침입을 대비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 군역으로 온갖 갖은 노역에 동원되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을 우리 제주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도 사실이다. 성은 단지 돌로 쌓은 건축물, 성벽이 아니라 돌담 하나하나에는 이름 없고 힘없는 민초들, 백성의 눈물과 희생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성을 쌓는 과정에서 원망만 쌓인다하여 원축성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제주인들의 고통과 희생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한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우리 어른들의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고증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이제라도 우리 문화재에 그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게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성자: 고향 정은수(2021.11.4.)
<참고한 자료>
1. 문영택(2017).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 각.
2. 이영권(2004). 제주역사기행. 한겨레신문사.
3. 이영권(2005). 새로 쓰는 제주사. Humanist.
4. 최 열(2012). 옛 그림 따라 걷는 제주길. 서해문집.
첫댓글 멋진 후기 글!
잘, 복습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제주의 탱자나무는 위리안치의 울타리로, 진의 해자에서는 물대신 적의 침입을 늦추는 역할로 쓰임이 다양하네요ㆍ
명월진의 해자는 남문에서 동쪽과 서쪽 바깥쪽에 밭모양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디테일한 글입니다.
글을 읽으면 눈 앞에 그림이 펼쳐진 듯 선명히 떠 오릅니다.
조선 시대의 방어 유적과 군역,
그리고, 6고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아주 꼼꼼하고 상세하게
자료를 잘 정리해주셨군요.
하늘이며 구름도 멋진 사진으로
잘 표현해주시고
주제별로 현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느낌과 소회까지 ㅎㅎ
수고하셨습니다~^^
수업에 참석하지 못 해 아쉬움이
있었는데,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시대 제주도 방어체계 및 유적등에 대한 상세한 후기내용 잘 읽었습니다. 관련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