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며칠 앞두고 지족동에 있는 요양원을 찾았다. 신축건물에 걸린 요양원들의 간판을 보니 씁쓸함과 서글픔이 밀려 온다. 잦은 가출로 요양원에 모시게 된 향순이의 노모를 뵈러 온 것이다. 향순이에게 엄마한테 가자고 졸라보았으나 극구 싫단다. 그 고집을 누가 말리랴...
향순이 엄마는 혈색 없는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셨다. 요 며칠동안 기운이 없노라고 하신다. 반갑게 포옹으로 인사를 나눈 후,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그럼! 그런데 이름은 생각이 안나네..."하며 미안해하신다. 준비해 온 찐 고구마를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당신의 아픈 손가락 향순이가 가장 걱정되시는나 보다. 계모에게 구박받을 향순이 때문에 노심초사 하신다. 당신의 계모는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가셨건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평안하고 건강하게 잘 계세요!"하자 "피곤할텐데 우리 집에서 자고 가" 하신다
내가 두 모녀를 처음 만난 건 3년하고도 6개월 전 여름이다. 찜통더위가 막바지로 치닫던 2013년 7월 말, 나를 소개한 요양보호센터 직원과 함께 10평 남짓한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는 두모녀를 만나러 갔다. 흰색 반팔 티셔츠와 노란색과 파란색 꽃무늬가 프린트 된 바지 차림의 노인이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먹한 표정으로 우릴 맞아 주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주로 입는 통 좁은 바지를 입어서인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단아한 느낌의 노인이었다. 그때 연세가 79세였으나 나이를 물으니 100살이라고 한다. 방 한쪽에 딸인 듯한 여자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무릎을 꿇은 채, 텔레비전 보기에만 여념이 없다. 노인의 지적 장애인 딸 향순이. 그때 나이 51세, 노인의 아픈손가락 첫째 딸이다.
베란다의 먼지 쌓인 빈 병, 휴지들, 씽크대 위 냄비 속에 들어 있는 상한 음식들은 두 모녀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모녀는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부둥켜 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 며칠동안은 경계하는 눈빛만이 나를 따라다녔지만 점점 마음을 열고는 당신이 어릴 때 계모에게 학대 받던 이야기며 자녀들 키운 이야기등을 구수하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얼마나 부드러운 톤으로 자분자분 이야기 하는지 마음에 평화를 느끼곤 했다.
향순이 엄마는 혼자 몸으로 4남매를 키웠다. 꽃다운 나이에 훤칠하게 잘 생긴 남자와 결혼은 했다. 남편은 자상했으며 5일장을 다니며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잡화 장사를 했는데 말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아낙네들의 지갑이 금방 열리곤 했다며 행복한 음성으로 그 때를 회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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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살 되던 해, 남편을 병으로 여의고 4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안해본거 없이 다 해보았다고 한다. 풀빵장사, 채소장사,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어렵게 아이들을 키웠다. 큰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나와 청와대에 다니는데 너무 바빠서 자주 오지 못한다며 힘주어서 변명을 했다. 그렇게 믿으시므로 모질었던 당신의 세월과 수고를 보상 받고 싶었나보다. 세명의 자녀들을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자리를 잡고 다 잘 살고 있다. 당신의 마지막 인생길에서 당신의 가장 아픈 손가락인 부족한 딸의 효도를 받으셨다.
향순이 엄마는 수십년도 더된 어린 시절. 계모에게 학대 받은 이야기들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하는지 나는 그 기억력에 감탄하곤 했다. 또 당신이 유성 다리 밑에서 유전 줄기를 발견하여 택시들이 줄을 서서 기름을 넣을 정도로 장사가 잘돼서 돈이 자루에 가득 차곤 했다며 얼마나 세밀하게 상황 설명을 하는지 진짜로 믿어질 정도였다. 나중에 둘째딸에게 들어 알게 됐는데 사위가 정유회사에 다닌단다. 조금 더 늦게 이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시나리오작가로 이름을 알리지 않았을까 싶다. 향순이도 고물장사한테 시집을 보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자 학대를 받았고 추운 방에 방치해서 새파랗게 얼은 걸 3년만에 데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억도 잊고 빨리 커서 시집 보내야 한다며 걱정이다.
치매도 예쁜 치매도 있다던가... 그동안 치매라고 하면 욕을 해대고, 자신의 물건을 훔쳐갔다고 의심하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상상만 했는데 향순이 엄마는 본인의 망상 속에서 살 뿐 남을 괴롭힐줄은 몰랐다. 오히려 항상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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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에서 꽃미남 청년들이 나올때면 나도 저런 사람하고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며 여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서글퍼 했다. 우리는 자주 손 잡고 아파트 담장 옆으로 난 길을 산책하곤 했는데 족히 열살은 연하인 듯한 노인을 가리키며 "저 남자는 어때요?"하자 너무 늙어서 싫다고 한다. 얼마나 웃었는지... 향순이와 엄마는 가끔씩 투닥거렸다. 세수해라, 추우니 옷을 더 입어라, 방다닥이 차니 요를 깔고 자거라등등 향순이는 아예 반응하지 않거나 혼잣말로 투덜대곤 했는데 그럴때면 "아이구! 내가 어쩌다 저런걸 낳아가지구.."하면서 부족한 딸을 낳아서 키운 서러움을 토해냈다. 밥상 앞에서 맛있게 먹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에서 부족한 자식에 대한 엄마의 애잔하고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망상 증세는 점점 심해져 일꾼들 밥해 준다며 자고있는 딸 이불에 불을 지르기도 했고, 가끔씩 집을 나가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노인주간보호센터에 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내가 아이 유치원 보내듯이 끼니 챙기고 씻기고 옷단장하여 유치원에 가자며 바쁘게 봉고차에 태워드렸다. 점점 이른새벽이나 늦은 저녁에 가출하는 일이 많아졌고 가출시간도 길어져 자식들의 애를 태우곤 했다. 경찰차를 타고 돌아온 후에는 나름 가출한 이유는 다 있었다. 놀러 나간 어린 아들을 찾으러, 논에 볓단 널러, 채소장사 준비하려고...등등 그렇게지나온 과거를 살고 있었다.
나는 가끔 향순이를 데리고 요양원으로 향순이 엄마를 만나러 간다. 항상 향순이가 눈에 밟힌다며 행복한 눈으로 당신의 아픈 손가락을 바라본다.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향순이는 계모에게 구박 받지 않고 사랑 받으며 아무 평안하게 지내고 있으니까요"
첫댓글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음을 알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서구평생학습원과의 인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