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락궁의 피 바람
구성이 죽고 장거 장순의 난리가 가라앉은 뒤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소요는 끊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손과 발 또는 가지와 잎의 우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곪으면 반드시 터진다던가,
마침내는 배와 가슴의 우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난리가
다름 아닌 제도 낙양성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으니,
뒷날 이름한 바 십상시의 난리였다.
☆☆☆
중평 6년 초여름 4월. 노환으로 누워 있던 영제는
스스로 명이 다했음을 알고 급히 대장군 하진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구실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황후의 오라버니인 하진을 불러 후사를 부탁한 다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사실 거기에는 좋지 못한 내막이 있었다.
하진은 원래 소와 돼지를 잡아 파는 도가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출신은 천하지만 아리따운 누이가 있어 그녀가 궁녀로 들어가면서부터
운이 열리기 시작했다.
누이가 궁녀에서 황제의 눈에 들어 귀인에 오르고
다시 황자 변을 낳자 황후 송씨를 몰아 내고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니,
하진도 제실의 외척으로 따라서 지위가 올라
마침내는 대장군으로 나라의 대권을 쥐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하황후의 길이 결코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하황후에게 빠져 전황후인 송씨를 죄 없이 폐위시켰을 만큼
정신을 못 차리던 영제였으나
오래잖아 역시 후궁에게로 총애를 옮겼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바로 그런 경로를 거쳐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하황후로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왕 미인이 다시 자신처럼 황자 협을 낳자
참을 수 없게 된 하황후는 끝내 왕 미인을 독살하고 말았다.
일찍 어미를 잃은 황자 협을 기른 것은
다름 아닌 영제의 모후 동태후였다.
원래는 해독정후 유장의 아내였으나
아들이 환제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잇게 되자 궁중으로 모시어져
태후에 오르게 된 여인이었다.
그래도 양가의 출신인 동태후에게
천한 백정의 누이인 며느리가 마음에 찰 리 없었다.
거기다가 거두어 기르는 사이에
황자 협이 남달리 영특한 것을 보자 흠뻑 정을 쏟게 되었다.
매양 하황후 소생인 변보다 영특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협을 태자로 봉하도록 영제에게 권했고 영제의 마음도 차차 협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런 영제의 마음을 더욱 굳혀 준 것은 환관들이었다.
번번이 싸워 이기기는 했지만 환관들 쪽으로 보면 역시 가장 힘겨운 적은
외척들이었다.
하진의 사람됨이 그리 똑똑치 못해 아직까지는 커다란 부담되지 않았지만.
하황후 소생인 변이 제위를 잇게 되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사실상 정사를 휘어잡을 태후의 오라버니로서
언제 환관들에게 칼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그날 영제에게 하진을 궁안으로 불러들이도록 한 것도
실은 그런 환관들의 꾀였다.
황제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자
중상시 건석이 가장 충성스러운 듯한 얼굴로 병상 곁에서 아뢰었다.
"폐하. 만일 왕자 협으로 뒤를 잇게 하시려면
반드시 대장군 하진을 먼저 주살하셔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근심거리가 남게 되오니
그를 홀로 불러들여 베어 버리십시오."
비록 혼미한 가운데서 지만
이미 협을 태자로 세울 뜻을 굳히고 있던 영제는 선선히 거기에 동의했다.
병권을 거의 반을 잡고 있다 해도 좋은 대장군 하진을
손쉽게 제거하는 길은 그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막을 알리 없는 하진은
영제의 부름을 받자 별 생각 없이 궁으로 향했다.
그의 둔한 머리로는 제위를 잇게 될 생질 변을
잘 돌봐 주라는 고명이라도 내리려는 것으로 지레짐작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궁문에 이르러 막 안으로 들려 할 때였다.
사마 반은이 가만히 다가와 일러주었다.
"들어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건석이 공을 해하려고 폐하를 충동해 부르게 한 것입니다."
제 나름으로는 무슨 속셈이 있었던지 하진은
가까운 사람을 궁안 여기 저기 박아 두었는데 반은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은의 말에 크게 놀란 하진은 급히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노복들과 식객, 가인들을 모조리 무장시킨 뒤 사람을 보내 대신들을 자기 집으로 청해 들였다.
황후의 오라버니요, 어쩌면 황제의 외숙부가 될지도 모르는 대장군 하진의 부름이라
전갈을 받은 이는 거의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쥐 같은 환관의 무리가
우리 4백년 한조의 동량을 쓸어 사직을 위태롭게 한지 이미 오래되었소.
그 죄로 보면 아래로 땅 끝을 덮고 위로 하늘에 사무치는 바가 있으나
성상의 뜻이 지엄하여 함부로 손대지 못했소이다.
그런데 이제 그 무리는 성상의 환후를 틈타
감히 한 나라의 대장군을 모살 하고 보위를 넘보는 흉계를 꾸미고 있소.
이에 하늘을 대신하여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 하거니와 그들의 의향은 어떠시오?"
비록 미천한 출신이나
벌써 10여 년 높은 벼슬만을 골라 지내는 사이에 제법 위엄이 서린 어조였다.
☆☆☆
좌중의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하진의 말을 받았다.
"환관들의 세력은 충제, 질제 시절부터 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라고 뻗은 지가 오랩니다.
이제 줄기는 무성하고 뿌리는 곧게 퍼졌으니 어찌 한꺼번에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일을 꾸밈에 치밀하지 못해 도리어 저들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간다면
멸문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장군께서는
반드시 밝고 세밀하게 살펴 거행하도록 하십시오."
하진이 말하는 사람을 보니 전군교위로 있는 조조였다.
평소에는 그 재주를 아껴 가까이 거두었으나,
그가 바로 환관의 자식이라는 걸 떠올리자 노기부터 치솟았다.
한 소리 크게 질러 조조를 꾸짖었다.
"큰일을 도모하는 데 멸문의 화를 먼저 걱정하니,
너 같은 소인배가 어찌 조정의 대사를 알겠느냐?"
환관의 자식놈이라고 내뱉지 않은 것만도 많이 참은 셈이었다.
조조를 아끼는 사람들도
조조의 말이 환관들을 두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의심스런 눈길로 조조를 보았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자 조조도 더는 입을 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제 하진의 어리석음이 큰 화를 부르겠구나..."
조조를 꾸짖어 그 입을 다물게는 하였으나
하진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조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특히 그의 누이인 하황후가 미천한 집안의 딸로 그토록 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장양을 위시한 몇몇 환관들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더욱 환관들의 무서운 힘을 잘 알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신 때문에 조조의 말을 의심했지만, 돌이켜 보면 아무래도 무시해 버릴 수 없는 말이었다.
순제 때의 외척 염현, 환제 때의 양기,
그리고 영제 때의 두무, 한결같이 환관들을 향해 먼저 칼을 빼든 것은 그들이었으나
번번이 환관들에게 도리어 당하고 말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니 쉽게 의논이 정해질 수가 없었다.
☆☆☆
서로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늦게까지 궁성에 남아 형세를 살피던 반은이 뛰어들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성상께서는 이미 붕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건석등 십상시들은 의논을 맞추어 발상을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먼저 거짓 조서로 대장군을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뒷 탈을 없이한 뒤에
황자 협을 받들어 제위를 잇게 하려는 술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칙사가 당도하여
다시 하진에게 급히 궁으로 들라는 제명을 전했다.
☆☆☆
조칙이 거짓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하진은
사신을 잡아 두게 하고 의논을 계속했다.
일이 급박한 것을 본 조조가 참지 못하고 다시 나섰다.
"오늘 취할 마땅한 계책은 먼저 천자의 자리를 바로 정한 뒤에
수염 없는 도적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 말만은 하진도 옳게 여겼다.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건 맹덕의 말이 맞다. 누가 나를 도와 대위를 바로잡고 역적들을 뿌리 뽑겠는가?"
하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람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바라건대 제게 정병 5천만 주십시오.
궁궐 문을 깨뜨리고 들어 가새로운 천자를 모신 뒤에 환관 놈들을 모조리 쓸어,
가깝게는 조정을 깨끗이 하고 멀게는 천하를 평안케 하겠습니다."
하진이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니 사예교위로 있는 원소였다.
굳이 벼슬길을 마다하는 그를 중군교위로 처음 조정에 불러들인 것이 바로 자신이라
하진은 더욱 마음이 기뻤다.
"역시 원본초뿐이로구나. 자네가 나서 준다면 두려울 게 무어 있겠나."
하며 원소에게 어림군 5천을 점고하여 맡겼다.
☆☆☆
원소는 온몸을 갑주로 감싼 채 5천 어림군을 이끌고 궁문을 깨뜨려 길을 열고,
하진은 하옹, 순유, 정태 등 대신 서른 몇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잔꾀에는 밝은 환관들이지만 막상 큰 일을 당하고 보니 계책이 없었다.
황망하여 제 몸 하나 보전할 궁리들만 하고 있는 사이에 하진은
태자 변을 부축하여 제위로 나아가게 했다.
뒤따라 문무백관이 만세를 불러
새 황제의 등극을 기뻐하니 이가 곧 후한의 소제였다.
이때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건석은
궁궐의 화원 꽃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가히 내시들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서원팔교위의 우두머리로서,
원소의 5천 군이 들이닥칠 당시만 해도 그의 손안에는
그 못지 않은 금군이 있었다.
거기다가 원소의 원래 벼슬인 중군교위 또한
그의 지휘 아래 있는 서원팔교위의 하나였으나,
한번 대항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아나
숨은 곳이 기껏 한 길도 안 되는 궁궐의 꽃밭이었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뭉친 무리의 약점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역시 중상시 가운데 하나에 곽승이란 자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진을 불러 해하려던 일은 대개 건석이 주동된 일이라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워 죽이면 자신은 살길도 있을 것 같았다.
슬그머니 칼을 빼들고 다가가 건석을 찔러 버렸다.
그리고 아직 건석의 영을 받들고 있는 금군들을 달래
대장군 하진에게 투항해 버렸다.
생각 밖으로 손쉽게 소제를 즉위케 하고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고 있던 하진은
곽승의 그 같은 투항에 크게 기뻤다.
곧 그 죄를 없이하고 금군들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
원소가 그걸 보고 하진을 일깨웠다.
"환관들은 떼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대장군의 목숨까지 해하려 한 못된 무리들입니다.
오늘 이 기세를 타 저것들을 모조리 주살 해야 합니다.
부디 이 기회를 놓쳐 후환을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하진이란 자의 사람됨이 또한 그리 밝지 못하였다.
그날의 형세를 모조리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고 있는데
다 옛날 미천했던 시절에 자기들 오누이를 도와준 환관들의 은공에 얽매여
얼른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였다.
그 사이 숨어서 일이 돌아가는 형편만 살피고 있던 나머지
환관들은 하진과 원소의 그 같은 대화를 전해 듣자 곧장 하태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전날 하태후를 한낱 궁녀에서 황후로까지 올리는 데
가장 공이 큰 장양을 앞세워 애걸했다.
"처음부터 대장군을 해하려고 일을 꾸민 자는 건석 한 사람뿐이었고
저희들은 전혀 간여한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장군께서 원소의 말만 듣고 저희 모두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태후마마.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부디 생명이나 보존케 해주십시오."
☆☆☆
하태후는 오히려 그 사람됨이 오라비 하진에 조차 미치지 못했다.
한때의 은인이기도 한 장양이 허연 머리를 굽히고 눈물로 빌자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 마땅히 너희를 지켜 주리라."
그리고 하진을 불러들여 말했다.
"오라버니. 우리는 원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올라왔습니다.
만약 그때 저 장양등이 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부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건석이 흉측한 뜻을 품어 우리를 해하고자 하였다 하나
이미 그자는 주살을 당했고 나머지는 죄가 없다 합니다.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어찌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환관들을 모조리 도륙하려 하십니까?"
그 말을 듣자 원소의 거듭된 권유로
간신히 다잡아먹었던 하진의 마음은 다시 돌아섰다.
태후의 전을 나오기 무섭게 뭇 관원들에게 일렀다.
"건석은 나를 해치고자 했으니 마땅히 일족을 멸해 본보기로 삼을 것이로되,
그 나머지는 쓸데없이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그 말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원소였다.
결연하게 소리쳤다.
"만약 잡초를 베고도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밭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거듭 살펴 처결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돌아선 하진은
오히려 나무라듯 원소의 말을 받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진 바다. 원본초는 여러 소리 마라."
이에 다른 관원들도 더 입을 열지 못하고 한결같이 속으로만 탄식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싸늘한 결의의 칼날을
착잡한 표정 아래 숨기며 궁문을 나서는 이가 있었다.
출신 때문에 그날의 일에서는 어
쩔 수 없이 한 곁으로 밀려나야만 했던 전군교위 조조였다.
"한의 날은 이제 다했다. 남은 것은 다만 떠날 구실을 찾는 일뿐"
조조는 홀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조가 그렇게 단언하게 된 것은
하진이 원소의 권유를 뿌리치고 십상시의 무리를 살려 준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조조에게는
환관들이야 죽건 살아남건 그리 중요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한의 몰락을 단언하고,
그때 것 애써 지녀온 충성의 서약을 철회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결국 개악으로 끝나 버린 그날의 작은 정변자체였다.
먼저 조조를 실망시킨 것은 새로운 천자 소제였다.
듣기에는 열 일곱이라 했지만 막상 보위에 앉은 모습을 보니
그저 그 한바탕의 소란에 겁먹고 질린 허약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죽은 영제도 결코 영특하거나 빼어난 군주는 못되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른 것은 성년이 된 뒤였고, 또 충신인 진번과 두무등이 추대한 사람이었다.
비록 환관들의 농간에 넘어가 정사를 그르치긴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위엄과 내외정을 가리지 않고 끝내 지켜 나갔다.
그런데도 어리고 허약한 새 황제에게는 그나마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조조의 우려를 깊게 한 것은 그런 소제를 지켜줄 막료장치였다.
일단은 외정의 대신들을 등에 업은 하진에게 국권이 돌아갔으나 그 뒤의 혼란은 불 보듯이 뻔했다.
대장군 하진을 정점으로 하는 외척세력이 권세를 잡았다고 해서
기울어진 한의 제 실이 회복될 가망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그 변화는 탐욕스런 환관들 대신에
어리석고 미천한 한 떼의 외척들이 다시 국권을 농하게 되리라는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기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만만찮을 환관들의 반격도 한실의 앞길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일 수 있었다.
대장군 양기나 대장군 두무처럼 하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략을 갖추었던 외척의 우두머리들도 환관들의 반격 앞에서는 그토록 힘없이 허물어지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는 환관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좋은 기회를 놓친 하진을
애석해하는 대신들에게도 이유는 있는 셈이었다.
그 밖에 조조가 보고 있는 또 하나 한실에 대한 위협은
세상이 어지러운 그 10여 년 동안 거의 도성의 군사력을 넘어설 만큼 강대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
지방의 군벌들이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모두 황제의 부월과 인수를 받아 떠난 장군들이었지만
대개 변새의 오랑캐들을 막기 위한 배치라 상대할 오랑캐들을 잘 아는 이들을 보낸 만큼
어느 정도 호화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또한 대개는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랑캐들의 습속만을 보고 듣고 하는 사이에 더욱 호화 된 그들에게는 충성의 기반이 약했다.
거느린 장졸들도 오랫동안 오랑캐들과 이웃하여 사는 동안 그들에게 동화되거나
바로 그 오랑캐들에게서 병사를 뽑아 호화가 심했고,
더욱이 멀리 있는 천자의 명보다는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위해 싸울 만큼 그 군벌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주로 서량 쪽에서 주로 강족을 토벌하여 기반을 굳힌 동탁과 유주 동북에서
선비, 오환을 상대로 세력을 기른 공손찬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 외에도 거의 조정의 명이 도달하지 않는 상태의 군벌은 여럿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가 외척과 환관들의 싸움을 틈타
도성으로 군사를 몰아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환관들의 발호나 외척의 전횡과는 비교도 안 될,
바로 한의 목 줄기에 비수를 들이대는 일이나 다름없는 위협이 될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조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타기 시작하는 야망의 불길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곧 힘이 모든 것인 시절이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충성이고 힘이 대의 명분인 시절이..."
그러자 문득 급히 해야 할 일이 떠올라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
원래 조조 일가의 근거지는 패국 초 땅이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도 그 아비 조등의 위세에 힘입어 높고 낮은 벼슬자리를 거쳤지만
항상 근거를 초현에 남겨 두었고, 조조 또한 그 점에서는 아버지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태 전 조숭이
1억만 전으로 3공의 하나인 태위 자리를 사게 되면서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태위가 무거운 경직이니 만큼 살림집을 도성 안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조숭은
3공에 어울리는 큰 저택을 마련하고 가솔들을 모두 낙양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 무렵 동군태수의 자리에 있던 조조도 일시 관직을 사퇴하고
아버지가 비운 향리를 대신 지켰으나 역시 이듬해 다시 전군교위로 낙양에 돌아오게 되자
조조 일가는 온전히 낙양으로 옮긴 셈이 되고 말았다.
조조가 동군태수 자리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보낸 1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부친 조숭이 전 1억만을 들여 태위 직을 산 때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일과 어떤 연관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관작을 사고 파는 것이 이미 흔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3공의 한 사람으로는
잘 어울리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던 조조로서는
바로 그 아버지가 환관으로 긁어모은 양부의 재물로
3공의 자리를 샀다는 일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짐작이 되는 것은, 그 일이 그 무렵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던 조조의 한제국에 대한
충성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으리 라는 점이다.
그러나 단순히 거기에 대한 실망만으로 태수 자리까지 내던졌다고 보는 것은
뒷날로 미루어 조조를 너무 감상적이고 나약히 게만 해석하게 될 것 같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일을 통해 자기가 나중 걷게 될 길을 예감하고,
자신의 세력기반을 다시 한번 점검해 두었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하후연, 하후돈을 비롯한 생가 쪽의 피붙이들, 조홍 조인을 비롯한 양가 쪽의 피붙이들,
그리고 이전과 악진을 비롯한 유협시절의 패거리들, 그들은 모두 조조의 권유를 충실히 따랐다.
각기 황건 토벌의 의군을 일으켰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잔당들을 핑계로 약간의 무력기반을 연 예 일대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몇 년 조조가 마지막이기에
더욱 뜨거운 충성으로 벼슬살이에 골몰해 있는 동안 서로간의 연결이 끊기다시피 해 있었는데,
초땅에서 보낸 1년이 다시 조조와 그들을 굳게 묶어 두게 한 것이었다.
조조가 다시 전군교위직을 받아들여
낙양으로 돌아온 것은 그들과의 연결이 예전처럼 회복된 뒤였다.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초에 머물러 있다가 대세의 흐름을 바로 읽지 못해
시기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조조의 마음에는 한실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영제의 죽음과 그에 따른 한 차례의 혼란은 그 한 가닥 미련마저 끊어 버리고 만 셈이었다.
"아버님, 즉시 가솔들과 함께 초현으로 내려갈 채비를 갖추십시오."
☆☆☆
조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숭을 찾아보고 그렇게 입을 열었다.
평소 아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어 주는 조숭이었지만 그 말은 좀 뜻밖인 모양이었다.
아침나절 궁궐에 변란이 일었다는 소문이 돌더니
다시 변란이 가라앉고 태자 변이 무사히 제위에 올랐다는 말이 들려 마음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이 어두운 얼굴로 낙향 준비를 하라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궁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우리가 그토록 급히 낙양을 떠나야 한단 말이냐?"
그 같은 조숭의 물음에 조조는
간략히 그날 있을 일을 말한 뒤 한결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록 오늘 일은 건석 하나만의 죽음으로 끝났으나,
외정 대신들의 미움과 백성들의 원망이 그대로 남아있고.
하진 또한 귀가 없어 남의 말을 잘 듣는 자입니다.
언제 황문에 피 바람이 몰아칠지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는 마침 태위에서 물러나신 지도 여러 달되니,
이만 가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버려 둔 옛집과 전답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마음속과는 달리 헤아리는 바가 있었지만 말한다고 해야
조숭이 잘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함부로 입밖에 낼 말도 못되는 일이라,
조조는 낙향의 이유를 그렇게 둘러댔다.
겁만은 조숭의 아들의 그 말만으로도 안색까지 변했다.
오갈 데 없는 환관의 자식인 만큼 환관들의 일족을 멸한다면
자기 목숨도 남아날리 없겠기 때문이었다.
조숭(조조 부친)은 그 자리에서 가복들을 불러 초로 내려갈 채비를 서두르라고 일렀다.
그리고 조조까지도 함께 내려가기를 권했다.
"소자는 따로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있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한 몸 빼내기는 어렵잖은 일이니 소자의 일은 너무 심려 마십시오."
조조는 그렇게 조숭을 안심시킨 뒤 첩 변씨의 방으로 건너갔다.
변씨는 마침 자신에게는 맏아들이 되는 세살 난 비를 재우고 있었다.
초현에 은거해 있을 때 얻었는데 태어날 때 수레뚜껑 같은 둥그런 푸른 기운이
아이를 감싸고 있어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는 아이였다.
반색하는 변씨의 인사말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한동안 잠든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제 자신이 가려고 마음먹는 길이
그 어린것의 앞날에 어떤 삶을 가져다줄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깥의 수런거림을 이상히 여긴 변씨가
몇 번이고 거듭 까닭을 물은 뒤에야 조용히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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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맨 먼저 황궁을 뒤흔든 회오리는
조조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만큼 엉뚱한 곳에서 일었다.
자신의 소생인 소게가 대위에 오른 다음날 하태후는
오라비 하진을 높여 참록상서로 삼고 나머지 공 있는 자들에게도 골고루 벼슬을 내렸다.
아직 나이 값을 못하는 황제를 대신한 섭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영제의 생모요, 명분으로는 제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되는 동태후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몰래 장양을 비롯한 몇몇 중상시를 불러 의논했다.
"하진의 누이는 원래 미천한 집 여식이었으나
내가 그를 궁으로 불러 들였고 마침내는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식 이 대위를 잇게 되자
방자함과 참람 됨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그러함에도 내외정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저것들 남매에 빌붙어 그릇됨을 바로잡으려 들지 않고.
저것들의 위의와 권세 또한 크고 무거우니 나는 장차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잖아도 하룻밤 새 천하를 앗겨 버린 듯 허탈함에 빠져 있던 환관들은
동태후의 그 같은 물옴을 받자 가시덤불 속에서 길을 찾은 듯이나 기뻤다.
장양이 곧 한 꾀를 내어 일러주었다.
"태후께서 우리 한실의 가장 큰 어른이십니다.
아직 성상께서 연소하시니 당연히 발을 드리우고 정사에 간여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내일로 그 영을 내리신 뒤에 먼저 황자 협을 왕에 봉하시고
또 국구 동중 그분께도 대관의 자리를 내리시어 병권을 잡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저희들을 무겁게 써 주신다면
큰 일을 꾀해 안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동태후 또한 크게 기뻐하며 그 꾀를 따랐다.
태황태후임을 앞세워 다음날로 수렴청정의 전지를 내린 뒤.
황자 협을 진류왕에 봉하여 은근한 견제세리로 삼고,
동중은 표기장군으로 불러들여 하진이 오르지 못하고 있는 병권의 일부를 빼앗게 했다.
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장양의 무리도
다시 중상시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케 했다.
명분으로는 어머니뻘인 동태후가 나서서 하는 일이라
하태후도 한동안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곧 한 꾀를 짜냈다.
잔치를 벌이고 동태후를 청해 공손한 말로 달래 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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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궁중에 술자리를 차리고 동태후를 청한 하태후는
때를 보아 술 한잔을 받들어 올린 뒤 두 번 절하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께 한 말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어리석다 물리치지 마시옵고 들어주옵소서."
"무엇이오?"
하태후가 전에 없이 자신을 낮추고
숙여 오는 까닭이 석연치 않던 동태후가 의심스런 눈길로 물었다.
"태후마마와 이 몸은 비록 높임을 받는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한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닌 줄로 여겨집니다.
지난날 여후께서 나라의 중한 권세를 잡으셨다가
끝내는 족중 천여 명이 도륙을 당하신 참변도 있지 않사옵니까?
어리석은 소견이나. 마마와 소비는 아울러 구중 깊은 곳으로 돌아가고.
나라의 큰 일은 대신과 원로들이 의논케 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사옵니다.
부디 가볍게 듣지 마시옵소서."
말투며 몸가짐은 한껏 공손해도 그 뜻에는 자못 위협까지 섞인 달램이었다.
이미 자신의 세상이 된 줄로 잘못 알고 있는 동태후가 그걸 참고 들어 넘기려 들 리 없었다.
대뜸 소리 높여 하태후를 꾸짖었다.
"너는 전에 투기로 왕 미인을 독살하더니, 이제는 감히 내게까지 어지러운 말을 하는구나.
네 아들이 대위에 오른 것과 네 오라비 하진의 위세를 믿는 모양이다만,
나야말로 표기장군에게 조칙만 내리면 네 오라비의 잘린 목을 얻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걸 어찌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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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자 하태후도 참지 못했다.
"나는 좋은 말로 권한 것인데 마마께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그리 화를 내십니까?"
"뭣이라고?
소 돼지나 잡아 팔고 지내던 하찮은 것들이 무얼 안다고 함부로 입을 여느냐?"
동태후는 더욱 화를 내서 소리쳤다.
하태후도 이미 좋게 끝나기는 틀렸다 싶은지 거침없이 대들었다.
그대로 두면 정말로 볼썽 사나운 일이 라도 벌어질 것 같은 기세들이었다.
그러자 숨어서 보고 있던 환관들이 동태후를 말려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직 제대로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하태후를 자극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은 말로 해결되기는 글렀다고 단정한 하태후는 그날 밤으로 오라비를 불렀다.
"동가 성 쓰는 그 늙은 것이 권하는 술은 마다하고
기어이 벌주를 마시겠다는 구려. 급히 손을 써야겠소."
하태후는 하진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 뒤 동씨 일족을 제거하도록 시켰다.
하진도 그 일에서만은 자못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오는 길로 3공을 불러 대강 의논을 맞춘 뒤 이튿날 일찍 조회를 열었다.
그리고 동태후가 원래 번왕의 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황궁 안에 기거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상주케 했다.
영제인 유굉이 해독정후의 아들로 환제의 뒤를 이었으므로
그 생모인 동태후가 정궁이 아닌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황제가 어머니와 외숙부의 편을 들어 허락하니
동태후는 그날로 궁궐에서 쫓겨나 하간 땅으로 옮겨졌다.
그 다음은 동중의 차례였다.
앞서 동태후 덕분에 표기장군이 되고 약간의 병마까지 거느린 동중이라 가볍게 다룰 수 없었다.
먼저 금군을 점고하여
동중의 부택을 겹겹이 둘러싼 뒤 표기장군의 인수부터 빼앗게 했다.
그러나 동중은
이미 일이 위급함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군사들은 흩어진 뒤였다.
본래의 품성이 그러한지 정치적인 훈련 덕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권력의 단맛과 아울러 그 두려움도 안다.
그러나 여자는 한번 권력의 단맛을 보면 그 두려움은 곧 잊어버린다.
그것이 어쩌다 권력 핵심에 접근하게 된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더욱 쉽게
걷잡을 수 없는 도취에 젖고 종종 처참한 파멸로까지 가게 되는 까닭일 것이다.
하태후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기로 하고 본다면 동태후의 경우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수렴청정으로 대권을 잡게 된 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음에도 한번 권력의 단맛을 본 후라
동태후는 그 두려움을 깨끗이 잊어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앞뒤를 헤아리지 않은 그 도취로 가만히 두었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친정 집을 하루아침에 폐허로 만들고
그녀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진이 보낸 사람에 의해 하간땅 으슥한 곳에서
독살된 동태후의 시체는 두 달 뒤 낙양으로 옮겨와,
남의 눈을 꺼린 하진에 의해 후한 장례로 문릉에 들게 되지만,
그 어떤 것이 강요된 죽음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