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 1: 16 하나님을 시인하나
딛 1: 16 하나님을 시인하나 -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본 절은 유대인 거짓 교사들의 내면적 더러움의 양태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헬라어 본문에는 '하나님을 시인하나'가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나'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 '알았다')는 '오이다'(*, '안다')의 과거 완료능동 부정사로서 '직관적 지식'이나 '체험한 지식'을 의미한다(Hendriksen, Lenski).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잘 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적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그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Scott).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문제를 저버리고 외면적인 면에만 치중(置重)하는 우를 범하였다.
2]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1) 가증한 자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델뤼크토이'(*)는 '혐오스럽고 위선이 가득찬 자'를 의미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과 행위가 다름을 암시한다.
(2)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죄를 정죄하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탄한 이야기에 빠져 외면적인 문제에만 착념하였다.
(3)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버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이'(*)는 문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 롬 1: 28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고전 9: 27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을 앞세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선행처럼 보이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행치 않고 악한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믿는 자인지 의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신앙은 선행으로 증거가 된다.
3] 할례당
초대 교회에서 말썽을 부린 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할례당 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가장 큰 원수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된 자들로 교회 안에 있는 할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바울을 가장 괴롭혔다.
(1) 할례당의 신앙
할례당은 교회 안에 있는 일종의 율법주의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접목시켜 하나의 기형적인 기독교를 형성하여 복음의 길을 막고 교인들에게 하나의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할례당의 기원은 복음 초기로부터 있었으며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이 세력이 만만치 않게 차지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면서 결사적으로 투쟁했다.
바울은 이들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자로 규정하고 다른 복음을 없다고 단언하였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다.
* 행 15: 5-11 –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바리새파 중에 믿는 자가 많았다. 그들이 주장한 바를 보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사도들 앞에서 강변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도처에 숨어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만 안식일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안식교도들이 그들이다.
안식일의 규례는 분명히 율법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말은 바울 당시 바울을 괴롭히고 교회를 어지럽히며 복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율법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에 대하여 바울은 10절에서 ‘복종치 아니한다’고 했다. 복음에 나타난 진리를 거역하며 복종치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바울은 헛된 말을 한다고 했다. 안식일, 음식 문제, 장로의 유전 등으로 헛된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속임수의 수법을 쓴다고 했다. 이런 비 복음적인 주장은 진리를 속이는 일이다.
14절을 보면 이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허탄하다는 말은 아무 쓸모 없는 이야기란 뜻이다.구원이나 믿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유익이 없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진리를 배반하는 자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며 이들을 영적으로 조종하는 자는 바로 사탄이다.
바울은 이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11절에서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친다’고 했다.
(2) 음식 문제
바울은 15절에서 음식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였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고 말씀한다.
바울의 이 말은 할례당이 비단 할례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는 음식 문제까지 율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말로 음식 문제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깨끗한 자란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목욕을 한자들을 말하며 이 사람은 중생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들은 깨끗해졌으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양심과 마음이 이미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모두 선하다. 율법에서 음식을 구별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성별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열에 들어왔으며 모두 깨끗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나오는 음식 문제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고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은 실인즉 믿지 않는 자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자들이다.
구원의 도리를 대적하는 자들로 이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할례당이 존재한다. 복음에 무엇인가 꼬리를 부치는 자들이 그들이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행위로는 불순종하는 자들이 이들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서서 복음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4] 교회는 순결해야 ( 딛 1: 10-16 ) : 박조준 목사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해서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행정적으로 잘 다스려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교회가 거짓된 진리로 오염되기 시작하면 교회가 부패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가 거짓 교리에 오염이 되면 사람들의 영혼이 병들게 되고 그 영혼을 죽음의 자리로 몰고 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로 믿으면 이 이상의 축복이 없고, 잘못 믿으면 오히려 안 믿는 것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믿음에 바로 서면 우리의 삶이 변하여 새로워지게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면 마치 마약을 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마약은 일시적인 마취제에 속합니다. 종교가 바른 종교라면 우리의 영혼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거짓 종교는 우리의 영혼을 마취시킵니다.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거짓 종교에 마취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잘못된 종교에 빠지면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혹평한 것도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요 또한 최대의 비극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교리를 따르게 되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더 이상 빛과 소금으로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없어 결국은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가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도들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에 위협을 느낀 세상의 세력이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도저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만 없어서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더 왕성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그 당시 교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그 당시의 교회나 교인들이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죽어 있는 모습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 비판적인 지성이 보기에는 그런 죽은 자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그와 같은 교회가 대표하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이미 죽어버린 하나님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을 때 길가에 내버려져 행인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순결은 곧 교회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순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는 바른 교훈을 확신하고 소극적으로는 거짓 교훈을 거절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교훈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미쁜 말씀’이란 믿을 만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이란 말은 건강한 교훈, 다시 말하면 병들지 않은 교훈이란 뜻입니다. 교회가 순결하려면 우선 그 교회가 건전한 교훈으로 다져지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건전한 교훈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훈만이 건강한 교인을 양성해서 결국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교훈, 건강한 교훈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우리가 정말 신뢰할만한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디도서에서 무엇이 바른 교훈이고 건강한 교훈인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이 편지를 받는 디도가 건강한 교리가 무엇인지 이미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디도서와 같은 부류에 속할 수 있는 소위 목회서신인 디모데전후서에서 이미 바른 교훈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듭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서신이란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요 영적인 후계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목회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3절을 보세요. “네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다른 교훈, 거짓 교훈, 진리가 아닌 교훈을 경계하라고 권면한 후에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다른 교훈과 바른 교훈을 대조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는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에 대해서 말했고 11절에는 “이 교훈 (바른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했습니다.
바른 교훈의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의로움과 죄사함과 새로운 생명의 기초가 되셨다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바른 교훈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순결한가를 말하려면 그 교회가 이러한 교회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른 교훈입니까?
1. 바른 교훈에는 계시성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라면 흔히 꿈에 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표현하기 쉬운데 그것은 사실 계시의 핵심이 아닙니다. 계시의 핵심은 그것이 어느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 생각이 아니라 참으로 진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한 생각이나 철학같아 보여도 그것이 그 사람의 주장이라면 그것이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계시성이란 과연 그 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1장 11, 12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주장이 아니고 그가 학문을 통해서 학습한 것도 아니고, 오직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강조합니다. 이 계시성이야말로 바울이 복음을 진리라고 주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우리도 그것이 바른 교훈인지 아닌지를 살필 때는 언제나 계시적인 성격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계시라는 말이 오용되면 안됩니다.
2. 바른 복음에는 역사성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서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1장 11, 12절에 “내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성만 가지고는 바른 교훈에 대하여 가려내기가 어렵습니다. 교훈의 역사성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는 이미 완성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지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비롯하여 역사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이 성경 안에 우리가 알 수 있을만큼 다 계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닫혀진 계시의 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기록할 계시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성경에 계시된 것이 아직 부족하다면 계시가 보충되어야 하고 지금도 계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창세에서부터 역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교훈이 성경에 기록되어 왔고, 우리가 구원받아 승리적인 삶을 살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성경 한 권에 충분히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계시의 충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성경 이상의 어떤 계시가 더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말씀을 더 깊이, 더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하신 성경 말씀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실 때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점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깨닫는 진리는 과거에 이미 주어진 계시와 절대로 충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을 소위 ‘계시의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 이해한 부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와 어긋난 왜곡된 주장들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가르치실 때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성경에도 없는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신 것을 받아가지고 왔다고 한다면 이것은 거짓 교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계시된 진리를 붙들었던 선배들의 역사적인 전통성이 없는 것입니다.
3. 바른 교훈에는 윤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교훈은 바른 삶을 낳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교훈은 바르지 못한 거짓된 삶으로 직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하셨습니다. 열매는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진리의 기초가 어디 있는가를 나타내줍니다. 오늘 우리는 바른 교훈과 함께 바른 생활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생활은 바른 교훈의 토대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에 뭐랬어요?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지 아니하면”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른 교훈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우리가 믿어야 할 바른 교훈의 핵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경건을 강조했습니다. 경건은 교훈에 기초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바른 교훈은 반드시 바른 삶을 가져옵니다. 교훈과 삶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어야 하고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바른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른 교훈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교회의 순결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숫자는 많아졌으나 세상을 향해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많은 사람이 교회에는 출석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몰라서 그럽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바른 교훈을 확신해야 하고, 소극적으로는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거절해야만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거짓 교훈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여기서는 특별히 유대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서는 교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하나가 할례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에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할례당이라 불렀습니다. 할례 자체가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한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강조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는 필요한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구원의 본질은 아닙니다. 거짓된 교훈의 특성은 언제나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을 본질적인 것과 바꾸어 놓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옮겨 본질적이 아닌 것에 치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 은사가 여러 가지 나타납니다. 그 중에 방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 이것은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은 구약시대처럼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음식물을 건강의 차원을 넘어서 교리적인 차원에서 주장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규제를 구원의 조건처럼 강조하게 되면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에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자라”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우리는 내적인 경건보다도 할례를 받고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은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 못 받은 사람으로 정죄했습니다. “할례도 받지 못한 백성들같으니라구. 저런 더러운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 틀림없어.”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표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은 건강에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본질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유대주의자들의 윤리성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복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질적으로 습관적으로 반항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요사이도 무엇이든 일단 걸고 넘어지고 반항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다시 말하면 반항이 체질화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서 그럽니다. 특별히 주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이단의 경우에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여러분, 반항이 체질화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허탄한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탄한 말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헛된 말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재미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재미는 재미로 끝나는 것입니다. 헛된 말은 우리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배반하는 일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진리와는 거리가 먼 속임수로 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신실하면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그리스도의 무기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첫째가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고 해도 그 말이 진실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속임수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이를 취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는 돈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단의 정체를 살펴보면 그 밑에는 돈 문제가 게재된 것을 보게 됩니다. 더러운 이를 취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을 했습니다. 11절에 보세요.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 치는도다” 오늘 이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이단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12절을 보세요.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했습니다. 그레데 출신 가운데는 사도 바울을 향해서 별별 말을 다하면서 거짓된 말로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공격할 때 만일 “당신들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쟁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레데 사람 전부를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궁지에 몰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바울은 그레데 사람이 하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12절에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하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그 말이 옳습니다. 당신들 중에 거짓말쟁이가 있습니다. 지금 진리가 아닌 거짓말을 가지고 교회를 흔들게 하는 그 자들이야말로 정말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레데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이 섬은 범죄자들을 유배시켰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여기에는 굉장히 부도덕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레데’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레티조’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의 뜻은 ‘거짓말하다’입니다. “정말 당신들은 역시 그레데 사람입니다.” 하면 그 말의 뜻은 “역시 듣던 대로 거짓말을 잘하는군요.” 하는 것으로 통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들의 치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짓 속에서 진리를 오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절과 13절에 나타난 두 가지 동사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1절에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했고 13절에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했습니다. 어떻게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르치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므로 헛된 교훈을 가지고 거짓말하는 사람에겐 설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타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진리를 바로 가르치므로 교회가 정말 진리를 강조하게 되면 거짓말하는 사람의 입을 자연히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고 했습니다.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과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은 다릅니다. 13, 14절을 보세요.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엄히’라는 말은 ‘칼로 베듯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상하면 교회의 모든 것이 상합니다. 다른 면에서는 사랑과 용서로 치료하지만 진리는 교회의 생명이기 때문에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이 시대의 빛의 사명이 있는 교회가 설 자리요, 주께로부터 받은 엄숙한 소명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순결은 그만큼 소중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올바른 진리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순결한 교회로서 진리를 전하고 그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악한 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며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친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하고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 믿는 자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하자.
둘째, 우리는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13절,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분별하고 확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해야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말을 조심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믿음을 온전케 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이런 악한 자들의 말을 좇지 말아야 한다.
이단들이 퍼지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경 진리의 지식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의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모든 헛되고 거짓된 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