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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에 따른 전국적 피해 상황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정식 조인되던 그날 밤 10시에 전투가 그쳤다. 무려 3년 33일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유엔군이 희생되었고, 공산군측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 수십만 채의 가옥 파괴와 많은 전쟁 미망인과 전쟁 고아를 발생시켰고, 전쟁 비용은 수십억 달러가 소진되었으며,67) 한국 강토는 도시와 농촌을 비롯한 모든 산야가 처참한 파괴의 상흔(傷痕)으로 얼룩져 민족의 마음을 에이게 한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은 남북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한국 교회에 막심한 타격과 피해를 안겨 주었고,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종교는 아편’이라고 비난하던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마땅히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seomoon.or.kr%2F2012%2Fimg%2Finc%2FA0000%2Fhistory%2F1945%2Fimg_13.gif) 한국동란으로 파괴된 교회와 주변모습 | |
따라서 그들은 교회를 격렬히 증오하면서 포악하고도 잔인하게 적대 행위를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6·25 환난 중에 감당하기 어려운 수난을 무수히 겪어야만 했다. 6·25 전쟁 중 기독교계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그 조사는 한 기관에서 일관성 있게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종합하여 대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68) |
1) 교회 건물(예배당)의 피해 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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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 634곳 |
감리교 250곳 |
성결교 104곳 |
구세군 4곳 |
기타 2곳 |
2)순교 납치된 수효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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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 177명 |
감리교 44명 |
성결교 11명 | | |
이상의 수치는 빙산의 일각일 뿐 실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더 큰 상처는 육신적인 것보다도 정신적 피해로서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하였다. |
3) 납치된 많은 인사 중 기독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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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혁 목사(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 |
김유순 목사(대한감리회 감독) |
양주삼 목사(대한적십자가 총재,감리회 감독 |
송창근 목사(한국신학대학장) |
김영주 목사(서울남대문교회 목사) |
박현명 복사(성결교회 대표적 목사) | | |
이외에도 희생당하고 순교한 그리스도인이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그 중 몇 분의 순교 상황을 소개한다.71) |
① 손양원(孫良源) 목사 1948년 10월 좌익들이 일으킨 여·순반란 사건으로 두 아들(동인과 동신)을 잃은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일제 때 신사참배 강요의 유혹과 고문에서도 이겼는데 6·25전쟁 중에도 굴하거나 피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나는 기왕 감옥에서 죽었을 사람입니다. 8·15 해방 이전에 죽지 않고 더 산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내 눈을 빼고 내 코를 베고 내 입이 찢기고 내 손이 잘리고 내 발이 떨어지고 내 목이 끊기어 석 되밖에 안 되는 피가 다 쏟아지고 내 뼈가 가루가 되어도 내 주의 사랑을 다 갚을 길이 없는데 내 어찌 피신하겠소.”라고 하고, 또 “내 양떼를 버리고 나 하나 피해 산들 무엇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결국 인민군에게 끌려가 9월 28일 오후 11시 돌작밭 형장에서 총살형으로 거룩한 순교자의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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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전남 여천) | ② 김예진(金禮鎭) 목사 수색장로교회 담임목사로서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그들에게 체포되어 총살형을 집행하려고 자신을 끌고 가는 자들을 위해 스데반과 같이 기도하다가 총살당해 순교하였다.
③ 김응락(金應洛) 장로 서울 영락교회 장로로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당시 교우들의 안부를 살피며 피신하도록 연락하다가 체포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예배당에서 기도드리겠다고 하고 기도하고 나오는 중 예배당 계단에서 총살당하여 순교하였다. |
(2) 전북지방의 박해 상황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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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호남지방의 교회는 모두가 다소간의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 전북지방 교회가 받은 박해는 다음과 같다. |
① 원당교회, 신관교회, 해성교회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원당리(元堂里)에는 원당교회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신관교회와 해성교회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6·25 중에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결이 극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6·25 중에는 공산당들이 예배당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삼고 교인들을 붙잡아다가 구타와 고문 등 갖은 박해를 하였다. 전쟁중인 9월 26일을 제1차 숙청 처결의 날로 정하고 교인들을 숙청 대상으로 선정하여 부역 동원의 명목으로 밤에 집결시켜 산으로 끌고 가서 새.끼줄로 서로를 결박한 후 죽창으로 찔러 죽인 다음 그곳의 방공호 속에 집어넣고 입구를 봉쇄하였다. 원당교회 영수 홍산식 등 전 교인 31명이 무참히 희생되었다. 신관교회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학살하였는데 그 중 한 여집사만이 흙무덤을 밀치고 살아나왔다. 해성교회에서는 다행히 교인 전체에 대한 희생은 없었으나 교회 설립자 정연행 전도사 등 5명이 대표적으로 순교했다.
② 만경교회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 있는 만경교회는 교인들의 순교 사실과 기독 청년 중심의 반공혁명단 사건이 유명하다. 공산군의 삼엄한 감시와 핍박이 한창일 때 만경교회 청년 회원 송진구·최정렬 등은 교회 내의 청년들과 마을의 청년 수명이 함께 반공혁명단을 지하 조직하고 인민위원회 내무서 폭파를 계획하였으나 거사 전날 밤 단원 중 밀고자가 있어 발각되었다.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인민군 후퇴 직전 일제히 총살되어 무참히 희생되었다. 한편 반공혁명단 사건으로 주목받은 만경교회는 계속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공산당은 김종한 목사와 강성진 영수 등을 우물에 던져 익사시켰고 이정순 집사 등 10여 명을 반공호 속에 몰아넣고 집단 사살하는 등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③ 덕암교회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리에 있는 덕암교회 역시 많은 희생자를 낸 교회 중 하나이다. 6·25전쟁 중 담임하고 있던 이광년 전도사는 공산당원들에게서 돌로 무참하게 쳐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스데반처럼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이 전도사가 순교한 후 무안 평교교회의 오병길 전도사가 고향 덕암리로 와서 집사인 두 아들과 아우 오병석과 조카들과 더불어 비밀리에 땅굴에 숨어 지내며 수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공산당의 수색에 발각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9월 9일과 10일 양일에 오병길 전도사 3부자는 죽창으로 처형당하였다. 덕암교회의 두 전도사와 두 집사를 처형한 공산당 무리는 혈안이 되어 미처 피신하지 못한 교인들을 악착같이 찾아내어 김영해 집사의 가족을 비롯하여 무려 22명을 처형하였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이다.
④ 제내리교회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교회는 전라노회 시대에 김성식 목사가 세운 교회로서, 인민군이 이곳을 점령한 후 같은 마을의 우익진영 모든 사람들에게 미제국주의자에게 아부한 죄과의 자백서를 제출할 것을 강요하며 핍박을 하는 중 인민군은 9월 중순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긴급 철퇴를 계획하고 우익진영 인사들 약 50명을 내무서로 긴급 소환하여 소방서 창고에 감금하였다. 이들 중에는 김상천(金相天)·김현경(金顯慶)·황해주(黃海周) 세 장로와 김은석·김현주·소금영·김수배·김흥섭·이봉고 집사들이 있었다. 인민군은 퇴각 시간이 박두하자 창고 문을 열고 닥치는 대로 총격을 난사하였다. 이때 창고 안에서는 큰 비명 소리와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는 울부짖음의 기도 소리가 터져나왔다. 총격을 받은 50여 명 중 29명이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대부분이 교회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김상천·김현경 두 장로는 이때 순교하였다.
⑤ 죽동교회 인민군이 9월 27일과 28일경 갑자기 후퇴할 무렵, 김제군 죽산면 죽동교회에서는 청년 집사 이은락(李殷洛)·김준영(金俊永)과 청년 회원 최윤식(崔潤植)·김은규(金殷圭) 등은 국군이 군산에 상륙하였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들은 교회 뒷산에 모여 만세를 크게 외치면 사기가 떨어진 인민군이 도주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대창교회의 청년들과 명량교회 청년들에게 합세할 것을 종용하였다. 죽동교회 청년들은 예정대로 만세를 부른 후 3일간 들판에 노숙하면서 국군의 진주를 고대하였다.죽동교회 김일식 여집사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김제군 청년단장 최주일의 부인으로 교회 집사였다. 공산당은 이 여인을 ‘이승만 괴뢰 정부 앞잡이요. 선량한 농민의 피를 빨아먹은 최학삼(崔鶴三) 목사의 자부요 교회의 집사’라는 것으로 왜곡하여 죄목삼고, 여집사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삭발시켜 마을로 끌고다니며 죄목을 외치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여기저기 교회와 마을에서 군중이 일어나고 동시에 예상 외로 국군이 빨리 진주하자 그 여집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⑥ 대송리교회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교회에서도 후퇴하는 인민군의 총탄에 정기봉(鄭奇奉) 장로를 비롯하여 교인 김형배·하치호·김성두·권태술 씨 등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김제군 금산면 금산교회 교사인 김윤철도 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정읍군 앵성교회 이마태 전도사 역시 복음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순교했다. |
개인적으로 환난을 당한 예도 있다. |
① 신태인 김병구(金炳球) 목사는 신태인제일교회 목사로서 시무중 6·25를 당하여 일단 김제 연정리에 피난 나가 있다가 아직 미수복 상태인 신태인교회와 가정을 살피려고 1950년 10월 10일 다시 돌아와서 새벽기도를 드리려고 예배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그곳을 점거하고 있는 빨치산에게 12발의 총격을 받고 무참히 절명하였다
② 삼례 후정리교회를 담임한 김주현(金周鉉) 목사는 원래 함경도 북청 출생인데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마친 후 목사가 되어 원산 석우동교회, 함흥 북주동교회에서 목회하다가 8·15해방 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여 전북 삼례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6·25 중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전주 내무서에까지 끌려와서 월남한 목사라는 이유로 불문곡직하고 총살당하였다.
③ 김성원(金誠源) 목사는 1873년 전북 출생으로 일찍이 교역에 헌신하여 전도사 생활을 하는 중 1917년 평양신학교를 제10회에 졸업하고 목사에 임직되어 무주 안성 이목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주로 전북노회 완주지방에서 활동하다가 완주군 봉동읍 봉상교회 시무 중 7순이 넘어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교회로 옮겨서 노년교역을 마감하려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들에게 기독교 목사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곤욕을 당하다가 큰 돌로 압사당하여 77세에 순교하였다.
④ 안덕윤(安德潤) 목사는 전남 광양 출신으로 193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34회 졸업생으로 순천노회에서 목사가 되어 광양 중앙교회, 곡성교회, 김제군 죽산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49년에는 죽산면 대창리교회에 부임하여 6·25를 만났다. 가족들이 부산으로 피난가라고 권면하여도 “목사가 나만 살겠다고 피난을 가면 양들과 교회는 누가 지킬 것이오?”라고 하며 완강히 거절하고 매일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고 결국 인민위원회로부터 매일 심한 고통을 받았다. 7월 말부터는 아예 교회 행사를 일체 하지 못하게 하고 교회 간판을 떼어버리고 인민위원회 간판을 붙였으며, 강대상 뒤에 붉은 기를 걸게 하였다. 음력 8월 보름에 후퇴하던 인민군은 대창리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인민위원회(원 대창리교회당)에 모아 놓고 “앞으로 일단 변동이 일어나면 죽창을 가지고 인민의 대적과 싸우라.”고 하였고, 교인들 약 40명을 따로 남게 한 후 두 사람씩 손목을 결박하여 창고에 가두었다. 음력 8월 17일에는 안 목사를 끌어내어 “이놈은 우리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놈이니 죽이자!”라고 하고 날카로운 창으로 앞가슴을 찌르고 인민군 장총 개머리로 안 목사의 머리와 목을 쳐서 쓰러뜨린 후양쪽 팔과 다리에 마구 창을 꽂았다. 이에 피를 많이 흘린 안 목사는 결국 순교했다. 그리고 그들은 부안 변산 방면으로 황급히 도주하였다. 안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고문을 받은 바 있었고, 주님의 복음을 진실하게 전하다가 순교한 분이다.
⑤ 이덕봉(李德奉) 장로는 13년간 마로덕 선교사와 함께 전도사로서 금산(錦山) 지방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순교하기 얼마 전에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에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그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을 받고 계속 교회를 인도하는 중 후퇴하던 인민군의 총에 숨졌다. 그는 전주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교회일을 보면서 12년만에 졸업을 한 끈기 있는 사역자로 신사참배 문제가 노회에서 통과될 때 비통한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교회일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바른 신앙을 간직하고 이 민족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담당하려고 계속 금산군 산골을 누비며 교회들을 돌보며 지내다가 해방 후에는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6·25의 참변을 맞게 되었다. 1950년 8월 22일 금산인민위원회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9월 22일 금산군 상가리 금성교회의 김재준(金在俊) 장로와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교회의 김희식(金熺植) 장로가 순교할 무렵에 순교하였다.
⑥ 6·25 당시 군산노회 황등교회를 담임한 이재규 목사와 변영수 장로, 안인호 집사도 인민군에게 희생되었고 전주중앙교회 김두병(金斗柄) 장로는 순박하고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는데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교회 장로라 하여 인민재판 형식으로 처단하여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중앙교회의 김용준(金容俊) 집사는 산간 쪽으로 피신하다가 검문에 걸려 역시 예수 믿는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였다.
⑦ 전북 익산군 왕궁면 봉용리 태생인 송병덕(宋炳德) 집사는 6·25 당시 봉동읍 서두교회 안수집사와 성가대장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소방창고에 구금되었는데 인민군이 황급히 후퇴하면서 인민재판을 할 겨를도 없이 소방창고 문을 열면서 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구금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같은 교인 김은중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때 같이 구금되었던 이장봉 목사(신흥학교 교목, 구암교회 목사)는 빗발치는 총알 밑에서 살아나기도 하였다.
⑧ 6·25전쟁 중 전주형무소에 갇혔던 여러 그리스도인과 우익진영 인사들 중에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예들이 허다하다. 인민군이 전주에서 최종적으로 후퇴하기 직전 지령 전달 착오로 형무소 문을 일시적으로 잠깐 열고 석방시켰는데 이때 풀려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봉동 오기영·임희대 장로는 제4감방과 제5감방이 열려 출감되었다. 그러나 지령 전달의 착오였음을 알고 다시 감방 문을 닫게 되자 제6감방과 7감방의 수감자는 그대로 남았다가 총탄을 맞아 떼죽음을 당하였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받은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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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6·25전란을 겪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으로서 많은 장병들이 전투에서 희생당할 때 믿음과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 1950년 12월 21일 특령(대비지 제29호)으로 대한민국 국군 안에 군목(軍牧)제도를 실시하도록 했다. 1951년 2월 7일 군목을 모집하고 각 부대에 군목을 배치하여 진중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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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28수복과 교회의 복구 |
6·25전쟁의 전세(戰勢)는 낙동강 도하 작전에서 연합군이 반격하여 승기를 잡고 남해안 도서들을 탈환하는 한편,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으로 9월 15일 유엔군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반전되었다.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서울 환도는 1950년 10월 27일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도 서울을 이양하면서 이뤄졌다. 기념식을 거행할 때 맥아더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위대한 희망과 열망하는 믿음의 밑받침으로 이제 유엔군은 이 오래된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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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홀에서 거행된 서울 탈환 축하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뒷줄에 맥아더 원수. 무쵸 주한 미대사가 앉아 있다. 1950. 9. 29(자료제공:병학사, 한국전쟁) |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고 기도하고 이양하는 뜻으로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다. 이 대통령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어눌한 음성으로 “나와 한국 국민은 끝없는 감사를 여러분께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사하였다. 지금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이 위험하고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인물을 세우셔서 도와 주시는 사례가 역사 곳곳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이남의 한반도 각 지역이 탈환될 때, 이 고장 전주도 9월 28일 완전 수복되었다. 철퇴하는 과정에서 도주의 길이 막힌 인민군 잔당은 산간지대로 숨어들어가 빨치산이 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완전 수복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지역도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와 평야지대는 거의 같은 날에 수복되었다. 전주가 수복될 때 모든 교회들도 자유와 평화를 되찾았다. 그 동안 두어 달 남짓 피난갔거나 숨어 있었던 교인들이 기뻐하면서 교회로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예배당 내외를 자진하여 청소하였다. 건물에는 유탄이 스쳐간 상처가 있었으나 다행히도 폭격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없었다. 예배당 이웃의 큰 간장공장은 포탄이 터져 파괴되었으나 서문밖교회의 건물은 온전하였다. 교인들 중 총탄으로 희생된 사람이 없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모든 장로와 주요 제직원들도 속속 모여들었고 그 동안 인민군 감시 속에 예배당을 수직하며 가슴 졸였던 오춘옥 전도사의 가족과 오종옥 집사 가족들의 무언의 수고를 서로 위로하고 치하하였다. 예배당의 종이 집회 시간에 맞추어 다시 울렸다. 이 종소리를 들은 모든 교우들은 자유와 평화의 종소리로 가슴 벅차게 받아들이며 용기를 내었다. 담임 목사가 이미 떠나 공석중이므로 여러 장로73)들이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였다. 장로들은 매주일 당번이 되어 예배 때 설교할 분을 외부에서 초빙하는 일도 맡았다. 교회의 당면한 교정도 모든 장로들이 합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6·25전쟁의 상황은 유엔군과 국군이 승승장구하여 10월에는 38선을 돌파하였고, 계속 북진하여 원산과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한만(韓滿)의 국경인 신의주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였다. 이 일에 놀란 공산군은 11월 하순에 중공군 60만 병력을 한국 전선에 투입하고 다시금 인민군과 중공군이 연합하여 인해전술로 남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남한 전역에 초비상경계령이 선포되고,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니 12월에는 서울 시민의 40%가 피난에 나섰고, 1951년 1월 4일(소위 1·4후퇴)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서울의 유수한 교회들도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남쪽에 있는 전북지방에서는 아직 대비만 할 뿐 피난갈 움직임은 없었다. 이곳에서는 매일 전세의 추이를 지켜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전라북도 당국에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도민들의 피난 대책(피난처, 수송 계획, 식량 준비, 월동 준비 등)을 수립하고 전쟁 상황의 소식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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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대동강 철교. 1950년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수많은 피난민들이 폭격으로 부서진 철교의 아치를 따라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고 있다. | | | 교회에서도 중공군의 내침 관계로 집회가 위축되고 있었으며, 자율적인 새벽기도회에서는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계속되었다. 다행히도 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며, 3월에는 서울로 다시 북상하여 38선을 돌파하였다. 중국 만주를 내침한 중공군의 배후를 차단하려고 중국 본토인 만주를 공격할 것을 시사한 맥아더 장군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었고, 이어서 후임으로 리치웨이 중장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미8군 사령관에 밴프리트 중장이 임명되었다. 리치웨이 장군은 독실한 크리스천 장군이라 하여 모든 교인들이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열심히 기도의 응원을 보냈다. 더욱 안심하게 된 것은 4월 26일에는 참전 유엔 14개국이 만일 공산군이 한반도에 비행기로 내습할 때는 일제히 만주를 폭격할 것을 합의하고 이를 대외에 선포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힘을 얻은 국군은 생명을 걸고, 38선 이북 지역인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를 탈환하였고 안정 요새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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