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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졸한 제가 인터넷에 글을 쓰도록 깊은 부담을 갖게 한 글이며,
여기 올리는 글이 제가 인터넷상에 쓴 첫 글입니다.
두 글을 잘 비교하셔서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형, 대구교회와
방목하는 목회자 상으로서의 이현래 목사
1997년 컴퓨터 선교회 토론 후기
2013년 9월
한국 기독교는 1885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이래, 130년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간 역사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한국 토양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고, 또한 앞으로 나아갈 형태가 어떤 것인지 갈등하며 모색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단 논쟁은 무엇이 기독교의 본질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한편, 한국 교회사에 정죄와 인권침해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뜨거운 감자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도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이단 시비가 격하고 잦은 이유는 한국 교회의 비교적 짧은 역사 때문일 수도 있고,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의 특성상, 지나치게 교리에 집착하는 경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대구교회와 이현래 목사와 관련한 이단 시비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싶은, 깊은 마음의 부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선교단체를 통해 복음 전하는 삶을 배웠고, 잠시 교편을 잡다가 신학을 한 후 서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몇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시무했었습니다.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알게 된 대구교회와 이현래 목사는 내 인생에서 참으로 지향하고 싶은 교회의 이상과 목회자의 아름다운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후 캐나다에 있는 한인교회의 부름을 받아 이민을 가게 되었고, 현재까지 18년 동안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미주의 다양한 기독교 흐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종과 문화가 모자이크를 이루고 살아가는 북미에서 기독교가 이 시대에 얼마나 새로운 형태로 적응하며 존재할 수 있는지를 경험해 가고 있고, 뉴욕, L.A. 등 미국의 여러 대도시들을 자주 왕래하면서 한국 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양 기독교의 다양한 전통과 그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움직임들을 목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양성과 이단 정죄
기독교는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예수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열어 놓은 세계를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그를 하나님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말은 오늘날 매우 다양한 집단을 포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2만 개에 달하는 수많은 기독교 종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안에서 펼쳐진 스펙트럼은 어느 종교보다도 넓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만유를 포함하기 위해 열두 문이 되는 당신의 경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첫째,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고, 다음은 다양한 지역, 시대, 문화 속에서 다양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타내는 일일 것입니다.
다르다는 문제 때문에 교회사 속에서 오랜 이단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개신교만 해도 250개의 교파에 이르고, 따라서 이단 논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이단 시비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사이비 집단인 것처럼 오해 되어 무서운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당사자들에게는 변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매도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이상한 집단의 출현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지만, ‘사이비 집단’과 ‘이단’은 분명히 구분해야 될 개념입니다. ‘사이비 집단’이란 기독교라는 이름을 이용했을 뿐, 그 내용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반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단’ 이란 성서 해석상의 문제로 신학적 오류를 지녔다고 판단된 경우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리나 성서 해석상의 차이에 대해서 문제 삼을 경우에는 본질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아닌 이상,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그 열매를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요일2:22)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요일4:2)이 ‘거짓’이고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율법주의)”(빌3:18)을 보고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고백은 “육체로 오셔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자이며, 십자가의 도가 우리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단’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십자가의 도 안에서 행하는 길이라면, 조금 다른 것, 혹 무지해서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관용의 여지를 남겨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판단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며 또 막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행5:38,39참). 모든 이에게 깊은 분별이 있도록 성령께서 이끄시길 원합니다.
이현래 목사와 대구교회에 대하여
대구교회는 1977년 봄 대구 C.C.C.(대학생 선교회) 간사였던 이현래 목사와 이재승 간사, 그리고 25명의 학생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목사는 1975년 충주 C.C.C.에 있을 때 워치만 니 형제의 서적을 읽고 깊이 감동이 되어 그의 생애에 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역자로서 일생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는 것 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교회에 대한 사역은 고정된 관념이나 틀이 없습니다. 교회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고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다만 몸소 본을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큼 생명의 변화에 따라서 살게 합니다. 아이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구교회의 ‘다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은 겉으로 보면 다소 어수선하다고 할 만 합니다. 행사나 의식보다는 말씀과 삶의 경험을 나누는 간증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입니다.
내가 처음 본 대구교회는 그 모든 것이 무질서해 보이는 가운데 질서를 이루고 있고, 자유 안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화려하지 않지만, 표정이 밝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서로 간에 오랜 친구들 같고, 한집 식구들 같아 보였습니다. 이현래 목사와 교인들 사이도 가족처럼 편해 보였습니다. 부모 자식 같고 형님 동생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순수한 교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 사역자들에게 대구교회는 깊은 감동을 주고 있으며, 초대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현래 목사의 독특한 목회 철학은 목회자가 양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어떤 틀에 가두고 생명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보고 듣기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표현을 해서 제재를 하게 되면 그것이 자유로운 생명의 성장을 제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특별한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도 그가 스스로 교정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의 방법 아닌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인도자에게는 양들의 본이 되게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은 그 인도자만큼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언젠가는 본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본을 보여야지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방목’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따라다니면서 인도합니다. 목을 매어 끌고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우리에 가두어서 건초와 사료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푸른 초장에서 자기 몸의 필요를 따라 풀을 뜯는 생명의 목장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어떤 제도나 율법으로 양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목회관입니다.
문제가 된 일
1996년에 당시 대구교회에 들어온 김상도 형제가 개인적으로 PC 통신 하이텔 내에 '하표사(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들)' 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 대구교회가 인터넷상에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대구교회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이현래 목사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신의 삶에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 그가 컴퓨터 선교회(하이텔, 이하 ‘컴선’으로 표기) 사이트에 본인이 아직 다 소화하지 못한 대구교회 관련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로서는 너무 좋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를 다소 낯설고 과격한 주장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97년 2월 컴선 이영제 목사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컴선 사무실에서 공개토론을 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대구교회에서는 김상도 형제와 김치현 목사(본인)가, 반대 측에서는 당시 컴선에서 활동하던 강세창 목사와 이인규 권사가 참여했습니다.
이 공개토론은 대구교회와 이현래 목사의 말씀에 대한 컴선 측의 질의와 그에 대한 대구교회 측의 답변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질의는 고등학생 때 대구교회에 잠깐 출석했다 떠났던 한 사람의 증언과 이현래 목사의 말씀 녹취록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답변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목표로 살아가는 기독교의 본질 안에서, 대구교회가 전혀 다르지 않음을 밝히는 식이었습니다.
토론의 결과는 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강세창 목사와 이인규 권사는 "우리가 누구를 이단으로 정죄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음을 더 분명하게 밝히자는 뜻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했고, 본인은 "누구라도 말에 있어서 온전하다 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경험이 우리를 더 정결하고 온전하게 할 것이며, 두 분이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검증하는 필터와 같은 역할을 맡고 계신다”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토론이 있은 후에 대구교회 일부 교인들이 하표사 게시판에 무절제한 글을 올려 다시 의혹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본인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토론에 참석했던 두 분은 토론에서 한 얘기와 대구교회 내부의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내부와 외부의 입장이 다른 것이 아니라, 대구교회 교인들의 입장과 간증의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 것입니다.
이현래 목사의 목회는 방목의 형태입니다. 이 목사는 생명은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장성한 사람이 되면 합당한 말과 삶이 나올 것이라 믿고 말이나 행위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말과 간증이 옳거나 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자라면 변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대구교회 교인들의 입장과 그 반응은 매우 다양합니다. 본인은 이현래 목사와 대구교회에 귀중한 영적 가치들이 있음에도 일부 교인들의 지나친 표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뒤 토론에 참석했던 한 분이 자신의 의혹들을 기정사실화하여 인터넷에 글을 올렸고, 그 후 교계 일각에서 이 글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사실처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검증 없이 이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에 대해 그동안 이 목사와 대구교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구교회가 인터넷상의 몇몇 글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의 장벽으로 인해 얼마나 심한 피해를 받고 있으며, 참 귀한 것을 가지고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곡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멀리서나마 대구교회를 잘 아는 목회자로서 그 실상을 밝혀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나지 않고, 또 한편으로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진실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현래 목사 말씀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이현래 목사 말씀사역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는 누구인가?”이고 일생동안 강조해 온 것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는 “십자가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강조한 말씀을 요약한다면
첫째는,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 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1:26)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몸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듯,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는 일에 귀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창2:7) 하신 말씀은 인간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규정해 줍니다. 흙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농부를 만나 씨가 뿌려지면 무한한 생산이 가능해집니다. 사람은 흙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참된 경작자를 만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라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위치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참된 위치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아담 이후 잃어버렸던 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사람을 보여 주었고, 예수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현래 목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위대하거나 심오해서가 아니라 그가 진실이시기 때문이다(계19:11).” 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선악과의 길이 아닌 생명과의 길’ 에 관한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듯이, 행위는 그 생명의 결과입니다. 단지 행위만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려는 노력과도 같은 것입니다(마7:16).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를 개선하라는 요구보다 인간 문제의 근원을 밝혀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덴에 생명나무가 있어서 사람은 그 열매를 먹고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생명과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공급하고 자라게 하심으로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요한은 에덴의 생명과는 예수 자신이었다는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도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계20:12) 하였습니다. 즉 심판의 기준은 생명에 따른 것입니다.
에덴에 감추어졌던 생명나무는 지하수처럼 흘러나와 연약한 성질 속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 속에 은혜와 생명이 흐르는 공통된 성질은 흙처럼 연약한 것들입니다. 아담이 만든 바벨의 세상에서 무시 받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성질들이 생명의 통로가 되어 세상에 생명의 물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고 했는데, 물은 결코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물이 흐르는 통로는 바로 약한 것들과 미련한 것들과 천하고 멸시받는 것들의 총체적인 표현인 예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고전1;22~24참)
셋째, ‘십자가의 길’ 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사랑, 기쁨, 평화... ),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권세, 이 모든 것에 하나의 근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축복과 열매와 영광은 좋아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모릅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를 따르면서 그의 영광을 보았지만 그것이 나오는 근원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십자가 안으로 이끌고 가신 것입니다.
이현래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난 30여 년간 주님의 손에 이끌려 오면서 알아진 것은 그분의 손이 나를 십자가 안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고 해도 이 하나만은 확실하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어떤 것에도 요동치 않게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역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드려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안에 머물고자 한다.”(이현래 목사, “십자가의 사역” 서문에서)
대구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혹 ‘양태론을 주장한다’ 는 비판에 대해
기독교 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현래 목사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양태론 같은 특별한 입장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를 애써 설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삼위를 구분하려 하면 삼신론자가 되기 쉽고, 일체를 설명하려 하면 양태론자로 몰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성경공부 교재들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태양, 빛, 열이라든지, 물, 얼음, 수증기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양태론적 비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비유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비유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고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의 작은 정신세계에서 무한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작은 조개껍질에 바다를 담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 목사의 말을 정리해 보면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역사 속에서 누구도 이보다 하나님을 더 완전하게 나타낸 적이 없기에 우리는 예수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히1:1에 근거하여).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를 주님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으며 심지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을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말로 해석해 죽이려 하였다(요5:17~18). 예수는 "동등"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하나"라고 말했다(요10:30). 동등은 논리 안에 있는 개념이고, 하나는 생명 안에 있는 개념이다. 삼위일체는 동등이라는 개념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지식 안에서는 결코 삼위로 계시며 하나이신 분을 알 수 없고, 오직 생명 안에서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인합일인가, 그리스도와 연합인가?
“이현래 목사는 신인합일 사상을 주장한다”는 비판에 대하여
‘합일’ 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고 주로 동양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동양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신과 인간이 합일에 이르러 육신의 제한을 초월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필요인 인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현래 목사가 신인합일을 주장한다는 것은 지방교회의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 이라는 가르침 때문에 생겨난 오해입니다. 이 목사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러한 판단은 대구교회가 ‘자생적 지방교회’ 라는 가정 하에 기존 지방교회에 갖다 붙인 죄목을 그대로 적용해 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현래 목사 메시지의 중심은 항상 "사람의 길" 에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육신의 한계를 벗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연약함과 제한을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인생의 위치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경작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이자는 데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씨와 흙,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자주 비유합니다. 흙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씨를 받아 풍성한 생명을 산출하는 기이한 것이고, 여자는 연약하지만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소중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씨를 가지신 분에게 흙과 같은 존재이며, 남자 앞에 연약하지만 사랑받는 여자와 같아서, 약함과 제한을 가진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땅 위에 형상화하는 데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결코 ‘신인합일’ 이 아닙니다. 인생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없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소유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열매 맺을 수 있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씨를 위해 열매를 키우는 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은 절대적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어떤 경우,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나는 사람으로 지어진 것을 감사하고, 사람으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가장 귀한 축복으로 여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신일합일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현래 목사는 “모든 사람이 성육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우선 이 목사는 “예수를 따르는 길은 자신이 무엇이 되는 길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내가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것"(빌3:9), "예수 안에 포함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롬6:3~11) ‘내가 무엇이고 싶은 것은 아담이 하나님같이 되고 싶어 하는 본성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씀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말씀에서 이 표현을 쓰는 것은 ‘새 언약의 내용’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돌 판에 새겨진 외율로써 사람의 본성과 다르기에 지켜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내율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고후3장).
히브리서 기자는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들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라고 한 말씀을 예수 안에서 첫 열매로 성취된 약속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히10:16).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향기’, ‘편지’, ‘심비에 새겨진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고후2~3장).
또 예수께서 우리 앞에서 첫 열매가 되고(고전15:20), 맏아들이 되셨고(롬8:29, 히1:6), 우리는 그를 따라 많은 열매들, 많은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생명의 확산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예수와 그리스도인들, 맏아들과 많은 아들들의 관계입니다. 처음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과 그로 인해 결실된 수많은 밀알들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이듯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예수가 된다든지 그와 동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를 누가 동등하다고 합니까?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 예수님과 우리를 누가 동등하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이것은 예수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 어찌하든지 자신의 인생 속에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하며 살아내려는 갈망의 표현인 것입니다(빌3:9~10).
그러므로 성육신의 보편화는 우리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생명의 확산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생명과 본성이 모든 사람들 속에 체질이 되고 생명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의 향기며 편지이고 열매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말합니다.
대구교회의 성경관은 무엇인가?
‘성경보다 이현래 목사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기고 교회에 성경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는 비판에 대해
이현래 목사는 30여 년 동안 성경 본문을 떠나서 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설교를 하지 않고 성경 본문만 강해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로 주님을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해도 성경만큼 온전하고 아름다운 말이 없다. 이는‘하나님 말씀이 불로 일곱 번 단련한 정금처럼 순전하다’ 한 것같이 온전하다.” 라고 고백합니다.
축자영감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에 온전하고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를 두고 어떻게 성경을 경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온전해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됨 만큼에 달려 있습니다. 해석은 사람이 하기에 누가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항상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늘에 찔린 아픔’ 밖에 모르는 사람이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말을 아무리 연구해도 자기 경험 이상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망고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맛을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듣는 사람이 그 맛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해석해서 먹여 줄 사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일 하나도 그러한데 하물며 성경의 기록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마치 이와 같은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머리를 써서 성경을 연구하려 하지 않고 주님이 내게 보여주신 분량만큼만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성경 말씀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되고, 때를 따라 마시는 샘물이 되어 언제 봐도 목마르면 또 마실 샘물이 되었다. 그래서 일생 이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성경과 찬송을 들고 교회에 오는 것은 한국 교회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교회에서는 성경책이 교회에 비치되어 있고, 찬송은 프로젝트를 쓰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 찬송을 잘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대구교회에서는 형식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에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자연스럽게 갈망이 생겨서 많은 형제들이 성경 공부를 원하게 되고 지금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본질과 문화는 구분되어야 하고, 문화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구교회의 구원관은 무엇인가? 천당과 지옥을 부정한다는 얘기는?
기독교가 세상에 제시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구원이며, 그분 자신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천국 간다’는 말은 옳은 말이긴 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구원 얻고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이며 궁극적 목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among, within) 있다.”(눅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 자신이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 였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 땅 위에서 자신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구원의 현재적인 상태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이들의 간증이고 천국의 현재적인 맛봄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현재적인 선포를 통한 미래의 더 나은 약속이어야 합니다.
현재의 선포가 없는 미래의 약속은 사람들을 허무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어떤 시공간적인 개념보다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마치 ........과 같다” 고 하신 대로 천국은 공간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입니다(마13장 참조).
또 사후세계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사후세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은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그의 안에서 누리는 구원과 축복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기에 그날에도 예수 안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천당과 천국은 구별 되어야 합니다. 천당은 불교 용어로서 성불하지 못한 중생들이 돌고 도는 육도 윤회 중에서 제일 상위에 있는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불하려는 노력은 이 육도(천당을 포함)를 해탈하려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모두 이 저주의 윤회를 벗어나려고 소원하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한다면 어이없는 일이 아닙니까?
천국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의 최상의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재림 등의 개념이 기존 기독교의 개념과 다른가?
이현래 목사의 말씀이 기존 교리나 기독교적 관념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날 그리스도의 존재를 어떻게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좀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 경험 안에 있는 예수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서는 역사를 그냥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역사를 통해 소화하고 경험한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객관적으로 믿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체험이 빠지기 쉽습니다.
반면, 예수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그와 합하여 죽고 그와 합하여 다시 사는 거듭남의 체험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것을 강조하다 보면 역사적 사실에 무관심해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가는 일은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면서도 우리 삶 가운데서 어떻게 그를 경험할 것인지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열린 무덤을 보았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든지,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를 만졌다든지 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객관적 증언입니다. 반면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씀은 예수를 자기 인생에서 주관적으로 체험하려는 갈망입니다.
그런데 이 두 방면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역사성과 주관적인 경험은 나무의 뿌리와 가지처럼 함께 가져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현재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장차 더 밝히, 더 많은 사람에게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다(고전13:12).”
그러므로 현재적 경험을 풍성히 누리면서도 장차 온전한 것이 올 것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것이 재림에 대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의미에 대해.
대구교회에서는 목사를 주 또는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들 서로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가?
이 문제에 대해 이 목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불리기도 원치 않는다. 예수가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이고 나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은혜에 빚진 자일뿐이다.”
성경에서는 원래 주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쓰였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야곱이 형 에서에게 한 것처럼, 히브리 사람에게는 그 표현이 자기보다 큰 자 앞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말도 히브리어‘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로써, ‘기름부음 받는 자’라는 뜻의 경칭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2:36) 하신 것처럼, 기독교 안에서는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이 예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이현래 목사는 목회자로서 양 무리의 본이 되어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어떤 능력이 있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굴복되어 살아가는 그의 온유와 겸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구교회 형제들 중 더러 “존경한다.” 또는 “인도를 받겠다” 는 마음을 과도하게 표현하여 간혹 주님이라는 표현을 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목사의 독특한 목회 방식인 ‘방목’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어떤 표현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대로 말하고 간증해서 초기에 다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우리 아빠 최고”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성하고 성숙하면 표현도 달라집니다.
이런 표현은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구약에서처럼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이런 표현이 옳지 않으며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말하였고,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하는 사람으로, 예수 안에서 인생의 본래 위치를 회복한 사람으로, 한 연약한 인간으로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더욱 그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권위나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약하면서도 넉넉하게 위로와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기에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대구교회에서는 3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마치 부모와 자식, 형님과 아우같이 한 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가 대구교회 특성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누가 누구를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어느 한 구석에서도 그런 모습이나 사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분위기였더라면 정통 장로교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단 하루도 거기 있지 못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이현래 목사는 워치만 니를 통해 인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와 지방교회의 견해 차이는 무엇인가?
이현래 목사는 1974년 충주 C.C.C.에 있을 때 워치만 니의 서적을 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영향 받은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에 대한 계시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부름 받고 그의 손에 의해 다루심을 받은 영광스런 신부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엡5:26~27).
그래서 이현래 목사는 이 사람들의 교회가 궁금하여 세 번 정도 지방교회에 참석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그 때는 교회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곳에서 행하는 실행들이 너무 인위적이라 생각되어서 그 뒤 특별히 관계를 더 이어나가지는 못했습니다.
지방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기에 자유롭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되었고, 더욱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두 분에 의해 밝혀진 풍성한 계시들은 기독교의 소중한 영적 유산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구교회의 교회관은 무엇인가? 교회의 제도와 예배 형식의 다른 점은 무엇이며,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 배타적인가?
교회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흠 없는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하신 말씀처럼, 주의 몸인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주님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게 됩니다. 이 교회는 현재적으로는 주님의 몸이고,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두실 그의 형상으로서 인류의 최종적 소망입니다.
이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한 점을 찍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 주의 전을 건축하는 데 벽돌 한 장을 쌓을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주의 몸인 교회,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그 누구도, 어느 교파도 단독으로 건축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혼자서 하나님을 다 알았다 할 수가 없고, 어느 교파도 자신들만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집에는 여러 그릇들이 있다 하였고(딤전2:20~21), 하나님은 당신의 거처를 위하여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다” 하였습니다(시50:1).
우주적인 하나님의 집은 연합으로 지어집니다. 성막을 건축할 때 모든 사람들이 드린 각양의 예물들을 사용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 경작을 통해 다양하게 드려질 때 주님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자신의 몸을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을 나타내는 일에는 온 인류가 다 동원되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되기보다 오히려 지탄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현래 목사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고쳐서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반동으로 시작된 일은 온전할 수가 없고 또 다른 반동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흐린 물을 맑게 하자면 맑은 물을 끝없이 흐르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듯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을 끝없이 나누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을 가지고 조급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표면의 역사는 힘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교의 사상과 문화에 오염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하수처럼 항상 맑은 생명수가 흘러왔습니다. 지구상의 70억 인류 가운데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우리의 구원이라고 고백하는 무리는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그 각각은 우리가 다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체험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자들로서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이 어떻게 쓰일 것을 몰랐듯이,(요21:21~22)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하나님에게 각각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다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보여진 은혜를 증거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구교회의 조직이나 예배 형태는 순수하고 실제적인 교회를 지향해 오다 보니 불필요한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꼭 남을 것, 말씀 듣고 교통하는 일만 남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새롭고 신선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낯설고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고 시대와 형편에 따라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할 수 없지만, 형식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열린 예배가 대구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었습니다. 인위적인 틀이 없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흘러나오고, 예배가 열리고 닫히는 이런 모습은 오늘날 참 예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선한 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놀라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시대착오적인 옛 습성에 매여 낡은 것을 고수하다 보면,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질문에 대답을 주지 못하고 젊은 세대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를 아울러 축제가 될 수 있는 예배의 형태와 교회의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대구교회는 한국교회의 미래형으로서 한 샘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됨을 위하여
복음은 예수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사도들과 수많은 앞선 믿음의 사람들이 피 흘리며 지켜온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켜 놓은 고도의 신학적 주제들이나 교회사적인 논점들은 전문가들 외에는 정확하게 진술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이런 논쟁거리들을 놓고 교리논쟁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의 구원 안으로 이끌어 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 오는 길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들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서 더 큰 풍성으로 가지 못한다면 이 시대의 흐름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입니다. 지금 세계의 통신 시장은 스마트 폰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기능과 정보를 포용하고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도 본질적인 면을 공유하고 있다면 좀 다른 점들이 있다 할지라도 다양성으로 받아들여 소화해서 모든 사람이 알아듣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복음으로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의식이나 모양이나 생활의 차이 같은 것들로 서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보완적 관계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현래 목사의 간절한 열망은 양들을 푸른 초원에서 자유롭게 생초를 먹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우리 안에만 가두어 놓고 사료와 건초로만 기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한 날부터 이 목사의 간절한 열망이며 목회 철학이었습니다. 이런 독특한 목회 방식 때문에 그의 말씀을 함께 들은 사람들도 각자 자기대로 말을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비난도 받고 고초도 당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들은 자기 몸의 필요를 따라 양식을 취하기 때문에 건강합니다. 그러나 우리에 갇힌 양들은 넣어주는 사료와 건초만을 먹고 그 안에서만 살기 때문에 영양의 불균형으로 비정상적 인격으로 자라기 쉽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이라야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장하면서 교파간의 관계가 적대시 되고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인간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 된다면 누가 욕을 받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인위적인 담장의 한계를 넘어 주님의 이끄심에 맡겨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성도들이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광활한 생명의 목장에서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먹고 누리는 날이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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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핵심진리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이단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경계하고 또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이와 함께 그 이단의 기준점을 제공하던(또는 하고 있는) 이단 감별사들의 주장들도
이제는 철저한 검증을 거처야 할 때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1. 한 때 이단문제에 있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던 C 목사님의 경우
주님의 주권가운데 한기총은 물론 소속 교단으로부터도 삼신론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고,
2. 인터넷 상에 아마도 가장 많은 이단 정죄 자료를 제공해 왔던 이인규 님의 경우도
평신도이단 감별사의 문제점이 간간이 지적되어 오다가 급기야 소위 공교단의 이단정죄의
대상으로
불려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C목사님이나 이인규님이나 공통적으로 범한 오류는
1) 비판 당사자가 참으로 믿는 바가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것을 대상으로
2) 특정 교단 교리(거의 장로교단 교리)와 다르면 이단이라고 한 것입니다.
3) 더 큰 문제점은 이런 이단정죄가 당사자들에게는 단 한번의 소명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확정되고, 기독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기정사실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이인규님의 경우는 그래도 본인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기회라도 갖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이런 기회는 세상 법정에서는 당연히 갖는 국민적인 권리이지만,
소위 정통교회라는 분들은 예전에 그런 기본권 조차도
박탈한 채 영적 사형선고(이단정죄)를 내려왔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몇 십개 이단을 규정하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노라고 자랑아닌 자랑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이단이 되었구요.
같은 시대에 같은 사건을 경험하며 살아도
어떤 언론을 통해 정보를 접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사뭇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는 정보의 질을 선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거짓정보들로 골머리를 앓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푸는 방법은 1차 자료를 접하는 것입니다.
2차 3차 자료, 전해들은 것, 남에 대해 얘기한 것들은
이미 전하는 사람의 이해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고, 그 사람의 편견과 오해가 덫칠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의 진실을 알자면 1차 자료, 즉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본인을 불러 소명의 진술을 듣지 않고 선고하는 재판은 없습니다.
한번 이단으로 단죄되면 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알아보려 하지 않고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인터넷에 이단으로 오르내리기만 해도 누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마녀재판식 정죄가 되어버립니다.
그럼에도 이단정죄에서 당사자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고 정당한 절치를 거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개혁포럼 회둰들만이라도 무엇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과 자세인지 정말 분별의 눈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오해가 있고 왜곡되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안될 듯 합니다.
각자 위치를 대변할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이 들어난 이상 이번 기회를 통하여
그 위치가 선명해져서 모호함이나 의혹들이 불식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아닌지라 제스퍼님에게 단순 명료한 질문을 하오니 단순 명료한 답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스퍼님은 지방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꼭 답변 부탁드립니다.
누구보다 가까이 지방교회를 지켜봤을 듯 합니다.
그래서 제스퍼님의 의견이 귀할 겁니다.
닉네임을 쓰는 카페에서 본인의 이름까지 알 수 있도록 올리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숨길 것도 없다 생각하기에 문제 삼지 않습니다.
토마스님 말씀대로 이렇게 된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진정성 있는 답변을 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방교회 책을 별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건강문제가 있어서 피곤한 일을 피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제대로 읽은 것은 한 권 있습니다. 이현래 목사님을 만나고 몇 년 동안 워치만 니 얘기는 들었어도 지방교회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사에서 워치만 니 책을 찾다가 한국복음서원에서 워치만 니 책들이 나온 것을 보았고, 위트니스 리 책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권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책이 "종교대 그리스도"라는 책이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워치만 니 글에서 느꼈던 것보다 좀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현래 목사님에게 얘기를 좀 듣게 되었고, 이현래 목사님은 두 분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을 하시지만, 두 분 다 귀한 그리스도의 열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제 교회생활에 만족했고 건강상 다른 여력이 없었기에 지방교회를 별로 공부하지 않았고 평가할 만한 지식이 없습니다.
한가지 관심가지는 부분은 라이프스타디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이상이 실제 모습에서 얼마나 잘 나타나는지 하는 부분입니다. 이현래 목사님 경우, 자신은 처음 교회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관심이 없었고 그것만 말햇는데 교회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지방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상이 먼저 주어졌고 교회가 그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제 생각이니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중요한 차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단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단 정통 이렇게 구분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만은 제게 분명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지방교회를 잘 소화하면 귀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지방교회도 기존의 교회들과 많은 교통을 하면서 용어와 우려하는 부분과 이질감을 갖게 하는 부분들을 처리해 나간다면 한국 교회와 지방교회 모두에게 상생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런 교리논쟁은 기독교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에게 빛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식상케 하고 기독교를 떠나게 하는 일이라 생각되어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교통을 통해 서로에게 상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답변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와 지방교회가 서로 상생으로 가야한다는 말씀이고
그 상생의 본이 되는 교회가 대구교회다 라는 말씀이신거죠?
저는 대구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만족감이 매우 높은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 안에만 머무려는 경향이 역시나 있기에, 다양한 교통이 없으면 섬나라가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사실 전에 한번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는 글을 카페에 올렸는데 원래 대구교회 교인들 읽으라고 교회 원간지에 쓴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해당되는 얘기이기에 여기도 한번 올린 것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페이스풀님의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네요.
교인들의 갈라파고스 증후군안에
이현래목사님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되나요?
아니면 일부 교인들의 일탈행위인가요?
아니면 페이스풀님의 증언이 악의적인 거짓 증언인가요?
야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긴 글을 읽다니
이런 긴 글을 읽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운대요?
그나저나 짧게 간추리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래요?
ㅋㅋ
짧게 답변 요구했으니 기다려 보시면 될듯 하네요. ㅎㅎ
짧게 간추린 글을 올리겠습니다.
밤새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지방교회 소속이신 줄 몰랐습니다.
낫띵님이 난상토론 후에 탈퇴한 게 얼마 전인데.
우리 카페에서 활동이 지방교회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지, 단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관심없지 지났는데 상황이 이정도 되니 지방교회나 대구교회에 대해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괜찮으시면 저도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페스풀님글도 그렇지만 이 글도 장황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이해가 안되서요.
간단히 예스.노 로 답해주셔도 됩니다.
1. 예수님이 하나님인가?
2. 사람도(논란 중인 그 목사님으로 한정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님과 같아지면 주님인가?
지방교회, 대구교회, 재스퍼님 개인의 의견 중 어느 것이든 괜찮습니다.
@스콜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이현래 목사님이 40 년 어느 설교에서도 예수님과 같아지면 주님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이 신뢰하고 인도를 받겠다는 뜻으로, 머리로 여기고 따라가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현래 목사님도 그런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정리된 대구교회에 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