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자 총재 말씀선집 4 - 4. 참어머니 생애 개관 4
한학자총재말씀선집4 문선명선생님이 보는 한학자총재
제4부 여성시대 개막과 세계순회
참어머님의 생애개관 4
참부모님께서는 해방(1945년) 후 40년 광야노정을 승리적으로 끝맺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해야 하는 새 시대를 맞이하여 총동원령을 내리셨다. 즉 참아버님께서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가나안 복지에 정착하기 위한 기간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참부모님의 말씀과 명령, 행동을 절대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1989년 8월 31일 장자권을 복귀한 팔정식과 그 다음날인 9월 1일 천부주의를 선포하신 기대 위에 1990년 3월 27일 미국에서 거행된 제31회 참부모의날 기념예배 중 참아버님께서 '여성전체해방권'을 발표하시고 참어머님께서 통일교회의 제2교주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이제는 선생님이 없고 어머니만 있더라도 뜻에 아무 지장 없다'면서 지금까지는 여자가 하늘땅을 대표한 섭리의 대표자로 설 수 없었는데 비로소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적 이상을 중심삼고 어머니 중심삼은 여성전체 해방권이 지상 위에 선포되었다.'고 강조하셨다.
참어머님의 위상변화
참부모님께서는 여성전체해방권 선포와 제2교주 선포 열흘 뒤인 1990년 4월 7일 모스크바로 출발하셨다. 참아버님께서 크렘린 궁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만나 소련이 모든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셔야 된다고 역설하셨다. 또한 소련이 살길은 레닌의 동상을 철거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종교적 가치를 국민에게 교육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셨다. 이후 원리를 교육받은 소련과 독립국가연합의 지도자들은 공산당 쿠데타를 막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여 소연방의 해체와 냉전을 종식하는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렇듯 세계 공산진영의 총본산인 모스크바를 찾아가시는 급박한 상황에서 참어머님을 제2교주로 선포하신 데 이어 1991년 6월 15일 일본 여성지도자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캐나다 클리어스톤 사슴농장에서 고명성 선서 선포식을 거행하셨다. 참아버님께서 안 계시더라도 식구들이 참어머님을, 참아버님처럼 모시고 뜻을 완성해야 한다는 요지의 선포이다. 특히 일본이 참어머님과 하나되어 세계를 품고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91년 7월 1일 오전 7시 서울 한남동공관에서 '하나님 축복 영원 선포식'(칠일절)을 거행하셨다. 이날을 기점으로 섭리는 장자권 복귀시대에서 부모권 복귀시대로 전환됐으며 참아버님의 뒷자리에서 걸어오신 참어머님께서 참아버님의 옆자리에 오르시는 기대을 완성하게 됐다.
참어머님께서는 1991년 9월 17일 일본 도쿄 베이NK홀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평화여성연합대회에서 '아시아와 세계를 구원하는 참사랑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생애 첫 강연을 하셨다. 이어서 1991년 10월 31일 한국지부가 창설된 후 11월 20일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1만 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아시아평화여성연합 전국대회가 개최됐다.
그리고 1992년 4월 10일 개최된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대회는 진정한 어머니가 에바의 실패를 종합하여 탕감복귀하시고 에바국가인 일본여성을 대표하여 탕감을 극복하는 선포의 장이었다.이처럼 진정한 아버지는 진정한 어머니가 세우신 성공적 기반 위에 여성 해방과 여성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셨다.
세계순회에 나선 참어머님
1992년 4월 10일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참아버님 옆자리에 서시고, '참부모 선포'를 통해 인류의 참어머니로 공표되신 후 참어머님께서는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기념 세계순회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총 600회 이상 순회 강연에 나섰다. 참어머님의 세계순회노정은 인류의 어머니이신 참어머님께서 참아버님의 대신자로서 전 인류를 교육하시는 기간이었다. 대회 전후에 전현직 국가수반과의 회담을 통해 평화 기반을 닦으시고 식구들을 격려하며 선교 기반을 확충하셨다.
참어머님께서는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 이후 9월 24일부터 12월 23일까지 일본, 미국, 유럽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중국까지 세계 11개국 31개 도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기념 세계대회에서 '이상세계의 주역이 될 여성'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셨다. 이러한 토대 위에 참아버님께서는 2차대전 직후 통일적 세계의 기준을 다시 찾는 역사적 해방권을 선포하셨다.
1993년 4월 10일 '참부모와 성약시대'가 선포된 후 참어머님께서는 1년여 동안 미국 53개 도시, 일본 62개 도시 순회강연과 한국 40개 대학 순회강연, 세계 40개국 순회강연을 포함한 총 161개 도시 순회강연에 이어 미국 100대 대학 순회강연을 통해 '참부모와 성약시대'를 선포하셨다. 특히 한국 대학 순회강연에서 운동권과 기독교계 학생들의 집요한 반대에 따라 신변의 받는 등 큰 어려움 속에 참어머님께서는 강행군을 하셨다.
그리고 참어머님께서는 1993년 7월 28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연방의회에서 초청강연을 하셨다. 참어머님의 강연에 감동을 받은 연방 상하의원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부모의날' 제정을 의결하였고, 1994년 3월 11일 클린턴 대통령의 서명으로 법안이 발효되어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부모의날'로 기념하고 있다. 참어머님께서는 1997년 9월 7일 유엔의 문을 여셨다. 이후 수차례 유엔본부 강연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 브라질 등 7개국의 국회에서 강연을 하시면서 각국의 정상들을 만나셨다.
이후에도 거의 하루 한 나라씩 이어지는 참어머님의 강연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참어머님께서는 해발 4000m 되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산소호흡기를 무대 옆에 대기시켜둔 채로 강연을 하시기도 하고, 주변이 모두 전쟁 중이던 크로아티아에서는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영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숙소에 찾아왔다는 것을 느끼시고 기도와 정성을 들이시며 홀로 영육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 아프리카 순회 당시에는 말라리아를 앓으셨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신 채로 매일 나라를 옮겨가며 말씀을 전파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이러한 참어머님의 뒤에서 언제나 정성으로 함께하셨다. 참아버님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은 참어머님께 가장 큰 힘이자 원동력이었다. 참어머님의 강연을 누구보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시면서 전화중계와 화상 중계를 통해 참어머님과 함께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시면서 함께 기뻐하시는 아버님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