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25-32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도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에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기드온의 첫 번째 임무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임무를 맡깁니다.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는 우상을 깨부수고 그 조각들을 사용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 번제의 제물은 요아스의 7년 된 둘째 수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의 제단을 쌓고 아세라 우상을 나무로 만들어 섬기는 바알 숭배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미디안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이 그 어려운 경제 상황을 겪고 있는 중에도 소도 두 마리나 있고 종도 거느리는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타작할 곡식이 있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축과 곡식과 재물을 다 약탈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소도 있고 타작할 밀도 있고 종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부가 어디서 왔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번제를 명하시면서 요아스의 집안에 있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찍고 그 집안의 7년 된 수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을 보면, 소를 비롯한 요아스의 재산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던 우상 숭배의 결과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대변하는 요아스 집안의 우상숭배부터 바로 잡으십니다. 하구 많은 사람 중에 우상을 섬기면서 먹고 살아가고 있는 요아스 집안의 기드온을 불러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소망 없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 가족은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를 대변합니다. 그런 집안의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고 계시니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고 경륜이며 큰 은혜와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 임무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산성 꼭대기에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우상을 섬기고 얻었던 아버지의 수소를 제물로 잡고 우상의 조각들을 땔감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말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은 땔감에 불과하고 우상을 의지하면서 모았던 재물도 다 불태워 없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공개적인 장소에서 행해진 기드온의 번제를 통해 지금 자신들이 왜 미디안에게 이렇게 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자신들도 기드온처럼 바알 제단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했습니다.
겁이 많고 소심한 기드온은 낮에 이 일을 하면 아버지와 성읍 사람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행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비록 밤에 숨어서 했지만, 기드온의 입장에서는 밝혀지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이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일을 수행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성읍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파괴된 바알의 제단과 찍혀버린 아세라 목상을 발견하고 세워진 제단 위에 둘째 수소가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특별 수사팀을 꾸려서 조사하고 탐문하여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한 짓임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들은 요아스에게 기드온이 죽을 짓을 했으니 내어놓으라고 거세게 요구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우상 숭배하면 돌로 맞아 죽어야 한다고 율법을 통해 엄격하게 경고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자신들이 우상을 훼파하고 하나님께 바른 번제를 드린 기드온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저주받고 죽어야 할 이들이 살고, 복을 받아야 하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불법이 합법으로 둔갑하고, 불의가 정의처럼 활보하고, 거짓이 진리처럼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드온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던 그 부르짖음은 무엇입니까?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가 너무 힘들어서 뱉어낸 징징거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들을 구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드온을 불러서 그 일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늘 징징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참으로 놀라운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기드온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깨뜨릴 수 있는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기드온을 죽이려 하는 성읍 사람들을 요아스가 막아서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요아스가 누구입니까?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며, 그 결과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 혜택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깨부순 아들을 변론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1절입니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요아스는 바알이 신이라면 바알이 주민을 지키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 주민인 너희들이 바알을 지키려고 하냐고 묻습니다.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신이 무슨 신이겠냐고? 도대체 누가 누구를 구하고 누가 누구를 위하여 싸우려 하냐고 도전합니다. 만약 바알이 참 신이라면, 너희가 내 아들을 죽여서 바알을 지키고 바알을 위해 싸우지 않아도 바알이 내 아들을 죽이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고 바알이 신이 아니라면, 바알 편을 들어서 내 아들을 죽이려 하는 자는 기드온이 깨뜨린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처럼 내일 아침까지 그도 죽을 것이라고 담대한 제안을 합니다.
이는 그동안 앞장서서 바알을 섬기던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은혜 아래서 일어난 급작스러운 회심이 없었다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말입니다. 기드온의 작은 순종과 믿음의 결단이 우상 숭배자인 아버지 요아스가 회심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요아스가 기드온의 이름을 바꿔서 부르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확인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아들의 이름을 누가 바꿉니까? 함부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자기 아들에게 ‘바알 파이터’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줍니다. ‘바알이 그와 다툰다’ 혹은 ‘바알과 다투는 자’ 그런 뜻입니다. 그만큼 지금 요아스에게는 아들이 행한 일로 말미암는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간섭과 그로 인한 영적인 충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감히 바알과 맞장을 뜨고 있는 자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바알과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런 일이 있습니까? 비록 엘리야처럼 백주대낮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대결할 자신은 없지만, 기드온처럼 밤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 삶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고 부수는 그런 일 말입니다. 기드온은 지금까지 아버지고 어머니고 내 가족이니까 우상을 섬겨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우상 숭배 때문에 그나마 그렇게 어려운 중에도 소도 가지고 있었고, 밀도 타작할 수 있었고, 종도 거느릴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것부터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순종의 발걸음을 믿음으로 옮겼을 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 요아스의 회심이 일어나고, 자신은 바알과 다투는 바알 파이터라는 명예로운 별명과 아버지의 인정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여룹바알’, ‘바알 파이터’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맛볼 수 있는 첫 번째 믿음의 걸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 노릇 하면서 내 삶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바알의 제단은 무엇이고 아세라 목상은 무엇입니까? 그것 찍어내고 부수고 훼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군림하는 나의 바알과 아세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것들과 싸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누리고 살았던 수소,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가리게 했던 수소가 있다면 그것을 잡아 제물로 드리고 불태워 없애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고 놀라운 하나님의 간섭을 맛보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알이 준다고 믿었던 수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책임지심이 펼쳐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