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위 그림은 상고기 그리스 세계에 도입된 전술을 묘사하고 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중갑보병(hoplite)들은 왼손에 크고 둥근 방패를 들고 옆에 선 동료 병사의 오른쪽을 보호했다. 이들이 8열 종대를 이루어 어깨를 맞댄 대형을 일컬어 ( ㉠ )(이)라 한다. 기병이 될 정도의 재력을 지니지 못했으나 방패(hoplon)를 비롯한 무기를 자비로 구입할 경제력을 지닌 중농 이상의 농민, 부유한 상인, 수공업자 등이 중갑보병으로 충원되었다.
(나)
위 그림에 묘사된 선박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사용되었던 3단 노선(trireme)으로, 당시 함대의 노병(櫓兵)으로 충원된 ( ㉡ )은/는 아테네 최하층 시민 계급이다. 아테네가 해상강국의 위용을 떨쳤던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주의를 완성된 형태의 민주주의로 보기도 한다.
(다)
(여인들의 코러스)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 상황에 대한 내 충고를 무시하지 마세요. 나 역시 남자들로 세금을 냈답니다. 그 사이 당신들, 수염만 허연 바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사용하기 위한 기금을 축내고 우리 일상과 삶을 위협했죠. …(중략)…
행정관: 그래서 무슨 기여를 했다는 거요?
뤼시스트라테 : 멍청한 사람 같으니. 여자들은 전쟁에서 두 번 싸워요. 우리가 병사들을 낳았고, 그 아이들을 전쟁에 보냈지요.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 기원전 5세기 말~4세기 초 활동한 아테네의 희극 작가.
<작성 방법> ◦괄호 안의 ㉠과 ㉡에 들어갈 명칭을 순서대로 쓸 것. ◦밑줄 친 ㉢의 이유를 (나)에 의거하여 서술할 것. ◦밑줄 친 ㉢을 (다)에 의거하여 반박할 것. |
∙㉠팔랑크스(중장보병 밀집대형)
∙㉡테테스
∙㉢의 이유 : 추첨제와 수당제에 의한 테테스의 민회 참여 등 실질적 정치 참여 가능
∙㉢반박 :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음
[서양사개론 p57∼58]
평민세력의 대두에는 사회경제적 변화만이 아니라 전술의 변화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 기원전 8세기 말이나 늦어도 7세기 전반기에 중장보병의 밀집대(phalanx)가 종전의 귀족기사들을 대신하여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청동제의 헬멧과 흉갑 그리고 정강이받이를 입고, 원형방패와 장검을 들고 단검을 지닌 중장보병이 적어도 4열 이상의 두껍고 긴 밀집대를 이루어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이다. 매우 부유한 귀족은 아직도 말을 타고 출전하였으나, 싸움터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밀집대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무장의 비용은 각자의 부담이었기 때문에 유산시민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나, 귀족만이 전투의 주역으로서 폴리스를 지키던 시대는 지나가고,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 이상의 유산시민이 국방의 주력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전술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평민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양사개론 p66∼67]
살라미스해전의 승리는 수병이 속해있던 사회의 최하층 세력을 강화시켰으며, 전후에 있어서의 대함대 건조와 해상무역의 발전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공인의 경제적 지위나 발언권도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하여 기초가 마련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 후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다. 그 첫 시도로 기원전 462년에 급진적인 민주주의자였던 에피알테스는 귀족정치의 잔재인 아레오파구스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실질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다음 해에 원인 모르게 살해되고, 그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명문출신의 페리클레스시대(대략 457~429 B.C.)에 민주정치가 완성되었다.
페리클레스시대에 완성된 아테네 민주정치에 있어 먼저 주목되는 것은 시민권을 가진 성년남자 전원이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는 반면, 5백인회의 권한이 민회에 제출할 의안의 준비와 민회에서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교정책, 전쟁 또는 식량공급 등 중요한 국책은 민회의 결정을 거쳐야 하며, 민회는 자유로운 발언을 통하여 입법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오파구스 회의를 완전히 누르고 최고정무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내각에 해당한다고 하겠으며, 모든 내외정책의 수행이 그들의 수중에 집중되었으며, 그들의 정책이 성공하는 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서 재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밑에 아테네와 해외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이 있었는 바, 그들은 추첨에 의하여 임명되고 임기는 1년이었다.
[서강좌 증보판 p28]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델로스 동맹 결성과 아테네 해군의 성장은 하층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했다. 종전에는 하층민들이 생계때문에 정치 활동을 벌일 여력이 없었지만, 함대의 노병(櫓兵)으로 복무하게 되자 정치와 군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민주정을 더욱 발전시켰다. 에피알테스는 기원전 462-461년에 귀족들의 정치조직인 아레오파고스회의 대부분 권력을 박탈하고 그 권력을 민회와 500인 협의회, 시민법정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에피알테스는 곧 암살되고, 페리클레스가 그 뒤를 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추첨에 의한 관직 선출을 확대하고 행정관직과 배심원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여 하층민의 정치참여를 지원했다. 그는 렐로스 동맹을 기반으로 아테네의 권력을 강화하고 파르테논 신전 건립 등으로 아테네를 미화했다. 이로써 하층시민도 완전한 참정권을 행사하는 진전된 민주정이 등장했다.
[서양사개론 p67∼6]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직접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약 3만 명을 헤아리는 상공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재유외인과 20만 명에 달하는 노예, 그리고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고,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수는 약 4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사개론 p83∼84]
희극 역시 그 기원은 디오니소스 제전에 있으며, 비극에 뒤이어 나타났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희극작가는 아리스토파네스 한 사람뿐이며, 그의 작품으로서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11편이다. … 아리스토파네스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로서 그러한 입장에서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야유하고, 『개구리』에서는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를 대상으로 삼아 에우리피테스를 조롱하고, 『류시스트라타』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연합하여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코믹한 방법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종식시킨다는 전쟁반대론을 폈으며, 말년의 작품 중에는 아테네의 여성들이 민회를 점령하여 공산제, 특히 남성 공유를 실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취급하여 민중지배나 당시의 공산주의적인 과격한 사상을 풍자하고 야유한 『여자의 의회』 같은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