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 문 / 마태복음 5장 10∼12절
주 제 /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박해가 찾아오나, 이 박해는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다.
작성일 / 2024년 4월 28일. (№ 24-17)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0∼12)
Ⅰ 예수님의 네 번째 법과 여덟 번째 법 (마 5:6, 10)
2024년 신앙생활의 목표를 외치자! “예수의 법으로 살자!”(롬 8:1∼2)
오늘은 ‘예수님의 여덟 번째 법’, 즉 ‘팔복의 마지막 복’을 배우는 날이다. 예수님의 ‘여덟 번째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네 번째 법’을 되짚어보자. 마태복음 5장 6절을 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디카이오쉬네)에 대한 정의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시대와 지역과 사람을 관통하는 ‘절대 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했다.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절대 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네 번째 법’은 ‘하나님의 사랑’에 배고픈 사람이 그 사랑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배고픈 사람이 ‘생명’과 ‘구원’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네 번째 법이다.
이제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5장 10절을 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생명을 존중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했다. 그러니 “생명을 존중하는 자리에서 박해 받는 사람, 구원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박해 받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여덟 번째 법이다.
Ⅱ 의를 위하는 사람이 박해를 받는 이유 (요 3:20)
‘생명과 구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사는 사람이 왜 박해를 받을까? 요한복음 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는 찬송가 350장의 가사처럼 ‘강철 갑옷’과 ‘강철 검’으로 무장한 사람들, ‘파괴’와 ‘살상’과 ‘승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즉 ‘마귀의 군사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군사들’, 즉 ‘빛’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해왔는데, ‘하나님의 군사들’이 나타나 ‘파괴’ 아닌 ‘세움’이, ‘살상’ 아닌 ‘생명’이, ‘승리’ 아닌 ‘화평’이 훨씬 값진 것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사들’을 즉 ‘빛’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마귀의 군사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니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당부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루다아’를 전도하고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사역을 하던 때의 일이다(행 16:11∼40). 하루는 루디아의 집을 나와 기도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점치는 귀신에 붙잡힌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르며 소리를 쳤다. “…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행 16:17). 바울과 그 일행은 하나님의 종이고,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라고 소리친 것이다. 귀신에 붙잡힌 사람조차 복음에 협조하는 긍정적인 현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다. 여러분은 사기꾼인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좋은 투자처가 있다고 소개하다면 투자하겠는가? 행실이 불량한 목사의 설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귀신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귀신의 사상’과 ‘하나님의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수작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종을 붙들고 있던 귀신을 쫓아냈다. 여종은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영혼의 자유를 얻었다. 감사하고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여종의 주인에게는 손실이 발생한 일이다. 귀신이 여종을 붙들고 있어야 점을 쳐서 돈을 벌 것인데, 귀신이 쫓겨남으로써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으니 큰 손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과 그 일행을 관청에 고발하였고, 바울과 그 일행은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봉변을 당하게 된다. 여종의 주인이 여종의 구원과 자유를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억울하다 생각하고 보복을 한 원인은 무엇일까? ‘마귀의 군사’였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자유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종에게 생명과 자유를 준 전도자들을 박해한 것이다. 의를 위하는 사람이 박해 받는 이유이다.
Ⅲ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 (마 5:10∼12)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면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의를 위한 박해가 왜 복인지도 말씀하신다.
첫째, 천국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과 질적으로 같은 사람, 예수님과 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써 배우고, 정성을 다해 실천하는 사람이 또한 천국의 주인이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늘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마 5:12a)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2a). 여기서 ‘크다’(폴뤼스)란 말은 ‘사이즈가 크다’란 뜻이 아니라, ‘감격이 크다’란 뜻이다.
‘100만원’이란 돈이 있다. 연봉이 5억쯤 되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돈이 아니다. 누군가 준다면 고맙게 받겠지만 눈물 날만큼 고마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알바로 살아가는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아주 큰돈이다. 적어도 한 달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눈물겹게 고마운 돈이다. 같은 100만원이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
성실하게 예수 믿고, 크게 나쁜 일 하지 않고 살다가 무난하게 천국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한 선교의 현장에서 피와 땀으로 사역하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아합’과 같은 불의한 권력을 책망하다가 죽임을 당해서 천국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천국에서 누가 크게 감격할까? 천국에서 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상이 크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사이즈가 크다는 말이 아니라, 감격이 크다는 말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벅찬 감격으로 천국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선지자의 반열에 서기 때문이다. (마 5:12b)
“…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b). 선지자들이라 함은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다. ‘엘리야’는 불의한 권력자 ‘아합’에게 쫓겨 이방 땅으로 망명을 떠나야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다가 톱에 켜서 죽었다. 그 밖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수모를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일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다. 누가 봐도 천국의 주인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누가 봐도 선지자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다.
Ⅳ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마 7:13∼14)
사람들은 넓은 길을 선호한다. 기왕이면 잘 포장된 넓은 길을 좋아한다. 목적지까지 평안하게 빨리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좁고 험한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넓고 평탄한 길을 가는 사람과 좁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 중 누가 행복할까? 길을 걷는 동안에는 넓고 평탄한 길을 가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지만 길의 끝에서는 좁고 험한 길을 걸은 사람이 행복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넓고 평탄한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었고, 좁고 험한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영광교회 성도들, ‘생명을 존중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다가 예수와 함께 천국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