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휘 보흠(甫欽)의 단종 복위사건과 종중(宗中)의 수난
가. 순흥부사 휘 보흠의 단종 복위사건(復位事件)
공은 남곡공의 손자로 영양군의 8세다.
세종 기유년(1429년)에 등과하여 세종,문종,단종 3조에 사사하였으며 경세제민하는 탁월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기관낙향 하였으나 1457년 순흥 도호부사로 부임한다. 이곳에는 왕위찬탈을 극력 반대
하던 금성대군
휘 유(유, 세종의 6자)가 이미 유배되어 있어 모복상왕(謨復上王)의 대계를 이룰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
은 상왕복위를 추진하던 중 일이 누설되어 동피극전(同被極典)하였는바 공은 평안도 박천으로 유배된 뒤 바로
교살(絞殺) 당한다. 이때부터 일족은 구명도생(求命圖生)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더러는 성을 숨기고 혹은 타성
으로 편입되는 등 장장 30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역적의 집안으로 살아간다.
나. 종중의 수난
(1) 남곡공파 일족의 수난
공이 대역죄로 처형되자 그 일족들은 갑자기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된다. 그 당시 영천은 영양군파, 울산군파,상
장군공파가 세거해 왔는바 영양군파의 대부분은 남곡공파였다. 사건이 일어난 1450년대는 남곡공의 손자(영양
군 8세), 증손(9세)들이 활동하던 시기며 현손(10세)들은 아직도 어릴 때였다.
촌수로 볼 때 모두가 종반, 당숙질, 재종간으로 족보를 보면 8세가 10명, 9세가 22명으로 호구는 30세대 이내로
추정되다. 주세거지는 영천으로 당시 경기도 용인의 남곡에는 제2자 직제학공의 아들과 손자들만 살고 있었다.
역적의 집안은 삼족을 멸한다는 것이 일반화 되었던 시대라 이들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않았다. 기록으로 볼 때
남곡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건 당시 휘 종검과 종겸은 은퇴하여 이곳에서 살았으며 그 후손들은 연산조
때가지 세거하면서 번창했기 때문이다.
제학공의 후손은 9세 휘 한석(漢石) 때 남곡을 떠났는데 이유는 알려진 바 없으나 사건과는 무관한 듯하다.
그러나 영천은 남곡과는 상황이 달랐다. 역적의 집안이며 또 공의 관향지라 멸문의 화를 당한다는 위험을 직접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공이 거사의 주 세력을 삼남(三南)의 의병으로 삼았으니 영천은 관에서 가장 주목하는 곳이 되었다.
사실 공의 탄생지 대전에서 살던 공의 두 생질 사성 정종소공,박사 손서륜공도 이 사건으로 영향을 받아서 잠적
하였으니 일족들은 과연 어떠했을 것인가?
영천에는 남곡공의 아들 삼형제(안유, 안실, 현실) 후손들이 서파와 대전 노전에서 살고 있었는데 8세가 7명(종
근, 종양, 맹상,증상. 종계, 보흠, 보관), 9세가 17명으로 모두 20호 내외가 되었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보흠공은 치명하고 아들 간인은 거창 오가산으로 또 아우 보관과 두 아들은 팔공산 속으로 잠
적했다. 서파공 집안의 경우, 장자 휘 종근은 영덕으로 차자 휘 종양은 두문 잠적했다. 9세가 되는 그 자제분들
은 일부는 부친을 수종하고 일부는 어딘가 숨어 살았을 것이다. 정랑공 집안의 경우 손자(9세) 휘 영근과 숙조
는 멀리 황해도 황주로 갔으며 휘 사근은 청송으로 이거하였으니 관향지에는 휘 중상(당대 무후)과 종계 형제
만이 남았다. 이를 보면 관향지의 남곡공파는 대부분 풍지박산이 되어 산지사방 흩어지고 결국은 이 사건으로
큰 화를 입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2) 남곡공파 이외의 일족들
당시 관향지에는 울산군파, 상장군공파, 영양군파의 소감공파, 감사공파, 생원공파들이 세거했으며 안동에는 소
윤공파, 군위에는 영동정공파가 살고 있었다. 기록을 보면 영양군의 직계인 소감공파, 감사공파는 화를 피해 영
천을 떠나 영남각처로 산거하였다. 상장군공파 일부도 이때 고향을 떠나 청하나 경주 쪽으로 피화한 기록이 있
다, 이들은 "역적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라는 생각 때문에 피화했을 것이나 사실상 다른 일족에게는 영
향을 주지 않았다. 특히 소윤공파, 영동정공파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 단종복위 사건의 영향
여러 기록을 보면 단종 복위사건은 직계 이외에는큰 영향이 없었는 듯하다. 우선 이 사건으로 직접 목숨을 잃은
분은 충장공 단 한 분이다. 그 직계인 독자 휘 간인은 거창 오가산 속으로 구명도생 하였으며 아우 휘 보관은 팔
공산 속으로 잠적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종반, 종질들도 남곡과 영천에 살았는데 남곡은 무사했고 영천은 비록 피화를 했으나 단 한
분도 관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어떤 변을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일족들은 환로진출에도 영향이 없었는 듯하다, 사건 후에 충장공파 이외의 가문은 관직에 몸을 담을 수 있었
으며 더구나 문과방목을 보면 충장공 사화 이후 60년이 지나긴 했으나 효우당공 후손들 6명이 등과하였으니 사
실상 지장을 받은 일은없는 듯하다. 다만 그 당시 관직에 있던 분은 벼슬을 버린 채 자정(自靖)하고 혹은 숨어살
았으며 혹은 성을 숨긴 채 유곡(幽谷)에 은거했다.
더러는 성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타 성씨에 편입되었는바 그사실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역적의 집안>
이라 친족들은 살기 위해 무조건 흩어졌으며 후손들은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을 것이다.이 사건은 오늘날 우
리 일족이 전국적으로 산거(散居)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충장공사건으로 영천이씨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
조선초기부터 영천이씨가 벌족임은 위양공, 성정공의 가계와 자손양대 5급제, 4제학의 명문인 남곡공 가계 때문
이다.
그러나 위양공 휘 순몽과 성정공 휘 승손의 높은 가문은 모두 후사단절로 그 성예(聲譽)가 사라졌는바 본 사건과
는 관련이 없다. 다만 조선초기에 영달한 남곡공파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극도로 쇠퇴하였기 때문에 "영천이씨
는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말이 생길 수도 있었다.
당시 관향지에는 긴박했던 정황을 짐작케하는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영양군 실묘사건(失墓事件)이다. 많지 않았
던 일족 중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고 남아 있는 일부는 숨어살아야 했으니 조상 산소에 제사조차 모실 수 없게 되
었다. 그것도 충장공이 복권 되기까지 장장 300년의 세월이라 후손들은 아예 조상의 산소 유무조차 모르게 되었
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은 타 성씨의 소유가 되고 영양군의 묘소조차 그 문중 선조 묘소로 둔갑하였다.
이렇듯 조상의 묘소마저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으니 당시의 정황은 어떠하였겠는가?